지난 3월에 상장기업의 정기 주총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주총은 기업지배구조의 정점에 위치하며, 회사의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최고 회의다. 예를 들면 주주들은 주총에 모여 지난해 경영실적을 보고받고 재무제표를 승인하고 회사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며, 경영진을 감독할 이사와 감사를 선임한다.주총은 상법상 최상위 의사결정기관이지만 주주의 권리 측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우리나라 상장회사는 약 2000개에 이른다. 그리고 대부분이 3월 한 달 내에 주총을 개최한다. 분산 투자 목적으로 여러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주주로서는 한꺼번에 여러 회사에서 쏟아지는 주총 안건을 제대로 따져볼 수 없는 구조다. 더구나 회사 주총 일이 겹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열의가 넘치는 주주라 해도 투자한 회사의 주총에 모두 참석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올해만 해도 특정 3일(3월 22·23·28일)에 주총이 몰리는 주총 집중도가 60.3%에 달했다.주총이 해마다 3월의 특정일에 몰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외부감사를 받아야 하는 주식회사의 90% 이상이 결산 기준일을 12월 말로 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나라 자본시장법은 결산일 이후 90일 이내에 사업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상장회사는 늦어도 3월 말까지 주총을 마쳐야 한다. 여기에 회사들의 ‘묻어가기(herd behavior)’ 전략도 한몫했다. 지배주주와 경영자로서는 총회꾼 같은 주주의 참석을 막고 주총을 일사천리로 원만하게 끝내고 싶은 속내가 있다. 회사 측이 마련한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는 정족수를 채울 수 있다면 성가신 외부 주주는 참석하지 않는 게 오히려 나을 것이다. 이런 동기로 다른 회사들 할 때 나도 하는 방식으로 특정일에 주총을 집중시켰던 측면이 없지 않았다.그나마 올해는 특정 3일에 집중되는 주총 집중도가 지난해의 70.6%에서 60.3%로 낮아졌다. 만족할 수준은 아닐지라도 주주권 행사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변화이다. 이 변화는 추세적 감소의 조짐, 아니면 올해의 일시적 현상일까?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외부 주주 대상으로 주주친화 경영 노력을 계속해갈 수밖에 없는 제도·환경의 변화를 감안할 때 내년에는 집중도가 더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주주친화 경영 자체는 전혀 새삼스럽지 않은 진부한 표현이다. 주식회사의 잔여 청구권은 주주에게 귀속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거에도 많은 경영자가 틈만 나면 주주친화 경영을 립 서비스 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론 또는 웅변이 아니라 주주친화 경영을 형식과 내용에 실천적으로 반영해야 하는 시기라는 점에서 과거와는 다르다.최근 기업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환경을 보면 전반적으로 주주친화 경영을 압박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양상이다. 섀도 보팅(shadow voting)의 폐지가 그런 경우이다. 섀도 보팅은 주총에 참여하지 않은 주주의 주식을 주총에 참여한 주식 수의 찬반 비율에 따라서 중립적으로 의결권을 배분하는 제도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상장회사는 외부 주주가 주총에 많이 참여하지 않아도 섀도 보팅 덕분에 결의 요건을 채우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상황이 바뀌었다. 1991년에 시작된 이 제도가 3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올해 폐지됐기 때문이다. 이제는 외부 주주의 참여가 충분하지 않으면 의사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주총이 무산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그저 기우(杞憂)만은 아니다. 이 제도가 폐지된 이후 영진약품·와이디온라인 등 몇몇 상장회사의 주총이 무산된 사례가 실제로 발생한 바 있다.주총이 무산될 위험은 기우가 아니라 실재하는 위협이다. 그만큼 주총 성립과 안건 통과에 외부 주주의 참여와 협조가 중요해졌다는 의미이다. 섀도 보팅의 폐지와 대안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섀도 보팅만 놓고 보면 실질 주주권 침해 여지가 있기 때문에 폐지하는 게 맞다. 이로 인해 주총이 무산될 위험에 노출된 회사들은 사전에 시뮬레이션 분석을 해보고 위임장 권유, 전자투표제 도입, 주총 분산 등 외부 주주의 주총 참여를 유인하는 자구책으로 대응해야 한다. 한편 섀도 보팅 폐지와 다른 나라에 없는 규제 때문에 주총이 성립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상법에서는 감사(위원)를 선임할 때 최대주주의 의결권을 3% 한도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섀도 보팅의 도움을 받았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감사(위원)를 선임하지 못해 주총이 무산되는 경우가 추가적으로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섀도 보팅의 빈자리를 우호적인 외부 주주가 대신하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기업지배구조 리스크와 관련해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요인은 기관투자자의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도입이다. 코드의 효과에 대해서는 순기능 기대론과 역기능 우려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찬반 논란과 무관하게 기관투자자 사이에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은 갈수록 확대될 전망이다. 무엇보다도 국민연금공단이 코드를 도입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연기금과 기관투자자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 주주 제안, 임원 후보 추천, 위임장 대결 등의 방법으로 회사경영에 적극 관여하고 주총에서 충돌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그에 비례해서 일반 주주의 중요성은 커질 것이다.이 밖에도 기업지배구조 리스크를 가중시키는 요인은 주변에 산재해 있다. 이들 대부분은 지배주주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경영권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 가장 최근에 개정된 2015년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업지배구조 지침에서는 경영권 안정과 견제의 조화를 강조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견제 일변도의 논의가 주류인 점이 특징적이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업지배구조가 다른 나라보다 한참 낙후돼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국제비교지표도 많다. 대표적 사례가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다. 2017년 WEF 보고서에서 우리 기업의 이사회 유효성은 평가대상 137개국 중 109위다. 그리고 소수주주 이익 보호는 99위, 기업윤리 행태는 90위다.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속하고, WEF 국가경쟁력 종합순위가 26위인 점과 견주어 볼 때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평가는 참혹한 수준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사회와 감사위원회를 사외이사 중심으로 구성하도록 강제하는 한편, 이사에 대해서는 자기거래 금지와 회사기회 유용 금지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정부가 강하게 규제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사회 유효성이 세계 109위로 꼴찌 평가를 받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더 놀라운 사실은 WEF 평가는 회사 임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기초했다는 점이다. 기업지배구조에 비판적인 투자자 또는 시민단체가 그렇게 평가한 게 아니라 회사 임원이 평가한 결과인 것이다. WEF 평가결과의 진실은 무엇인가? 설문조사에 참여한 회사 임원들이 문제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응답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응답자의 높은 기대치를 현실이 따르지 못해서 생긴 편차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이것이 우리 기업지배구조의 적나라한 현주소인가?제도·환경 변화에 대응해 상장회사들이 주주친화 경영의 실천에 나서겠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이 질문의 답부터 찾는 게 순서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