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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재건에 나선 김정은의 선택은] 북한판 ‘도이머이’ 정책 막 오르나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북한에 베트남식 모델 제안하며 중국 견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양강도 삼지연군의 건설현장을 시찰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7월 10일 보도했다. 사진은 건설현장을 둘러보는 김정은 위원장. / 사진:연합뉴스
미국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7월 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베트남의 기적과 같은 경제 번영을 이루라”라고 촉구하면서 베트남식 경제모델에 관심이 쏠린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이날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현지 기업인 모임에 참석해 과거 미국의 적국이었던 베트남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경제 성장을 이룬 상황을 예로 들며 이같이 말했다. 폼페이오는 “미국과 베트남이 과거 상상할 수 없던 번영의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의 나라가 이 길을 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당신이 이 기회를 잡으면 기적이 당신의 것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과 베트남은 1975년 베트남전이 끝난 지 20년이 지난 1995년 수교했다.

폼페이오는 “미국과 베트남 간 교역량은 지난 20년 동안 8000%로 늘었고, 미국 기업들은 수십억 달러를 (베트남에) 투자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과 베트남이 싸우지 않고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 국가가 미국과 함께 더 밝은 미래를 만들기로 결심하면 미국이 약속을 지킨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면 경제 성장을 돕고 체제 보장을 지원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약속을 강조한 셈이다. 폼페이오는 7월 6~7일 비핵화 후속 협상을 위해 북한을 방문했으나 사실상 성과가 없었던 것은 물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만나지 못하고 귀국했다.

동남아시아 경제개발 모범국

사실 베트남 경제는 발군의 성적을 자랑한다. 동남아시아의 경제개발 모범국이다. 이는 경제지표가 잘 말해준다. 국제통화기금(IMF) 2018년 전망치에 따르면 베트남의 국내총생산(GDP)은 명목금액 기준 2407억 달러로 세계 47위다. 구매력기준(PPP)으로는 7057억 달러로 세계 35위에 해당한다. 1인당 GDP는 2018년 전망치가 명목금액 기준으로 2546달러지만 물가 등을 감안한 PPP로는 7463달러에 이른다.

경제성장률도 대단하다. 2018년 1분기에 7.38%를 이뤘으며 2017년에는 6.91%를 이뤘다. 실업률은 2018년 1분기에 2.2%로 완전고용 상태다. 같은 기간 노동인구는 5510만 명으로 집계됐다.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제 성장을 이어갈 동력을 유지하고 있다. 평균 월급여는 2017년 기준으로 650만동(약 300달러)에 이른다. 베트남 무역통계를 보면 이 나라 경제가 얼마나 대외개방형인지를 알 수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팩트북 2017년 통계에 따르면 수출은 2140억 달러에 이른다. 휴대전화·의류·전자·기계·신발 등이 주요 수출품이다; 수출 대상국과 수출 비중은 미국 19.4%, 중국 16.6%, 일본 7.9%, 한국 6.9% 순이다. 수입은 2100억 달러로 기계류·휴대전화(부품) ·석유제품·의류 및 신발 재료·전자제품 등이다. 수입 대상과 비율은 중국 27.6%, 한국 22.1%, 일본 7.9%, 대만 6%, 태국 5%, 미국 4.4% 순이다.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을 향해 경제개발 모델로 권유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북한은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IMF 등은 2015년 기준으로 GDP 약 250억 달러, 1인당 GDP 약 1000달러로 추정한다.

베트남, 소련·동유럽보다 먼저 부분 개혁 추진


베트남은 사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소련이나 동유럽보다 먼저 부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앞서 1975년 북베트남(베트남 민주공화국)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비엣콩 또는 베트콩)과 연합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 호치민)을 점령하면서 무력으로 공산화 통일을 이뤘다. 1941년 호치민(胡志明, 1890~1969년)의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베트남 민족주의 정당의 통일전선으로 설립된 베트남 독립동맹회(베엣민 또는 베트민)가 1945년 9월 동남아시아 최초의 공산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지 30년 만이자 1960년 사이공 인근에서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비엣콩이 설립한 지 15년 만이다. 남베트남 정권은 항복했으며 미군은 철수했다. 베트남 공산당은 1976년 통일 국가인 베트남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현재의 베트남이다.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이름대로 소련식의 고전적 사회주의 체제를 받아들여 일당독재와 고전적 사회주의 경제체제인 중앙통제 계획경제를 운영했다. 중앙정부가 생산과 소비, 가격, 국내 유통, 대외 무역을 손에 쥐고 경제를 통제했다. 당연히 기업을 비롯한 모든 생산 수단은 정부가 소유하거나 생산자가 공유했다. 이 체제 아래에서 베트남 경제는 동유럽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공산화 통일의 결과는 여전한 가난이었다.

여기에는 경제체제의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수요와 공급의 매커니즘을 기본으로 인간의 욕망을 경제활동에 최대한 활용하는 시장경제와 중앙통제식 계획경제의 극명한 차이다. 소련 영향권이던 옛 동유럽에서는 두 가지 이형적인 체제가 등장했다. 하나는 유고슬라비아식 ‘자주관리형 기업체계’였다. 기업의 소유만 국유나 공유로 하고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독립채산제를 바탕으로 운영을 자율에 맡겨 효율을 높이는 방식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계획경제를 통한 중앙정부의 일방통행식 경제통제를 가급적 줄기고 행정 규제를 통해 최소한도로 관리하면서 시장경제적 요소를 일부 도입한 헝가리식 ‘굴라시 경제제체’였다.

헝가리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소련의 군사 개입으로 좌절된 이후 독특한 경제·정치 체제를 유지했다. 정치적으로는 소련의 요구에 따랐다. 공산당의 일당독재와 사회통제, 그리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통한 공산권 군사연대 체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1960년대 이후 나름의 독자 노선을 걸었다. 경제 자원을 생산재 중심의 중공업에 집중적으로 쏟아 부었던 소련과 달리 소비자의 요구를 더욱 많이 충족하기 위해 다양한 소비재 생산에 더 큰 힘을 기울였다. 형식적으로는 계획경제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소규모 가족기업을 비롯한 민영기업을 허용하는 등 시장경제적 요소도 상당히 가미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제한적이지만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해 사회주의적 중앙통제 계획경제 체제와 공존시키려고 했다. 이를 헝가리를 대표하는 요리 이름을 따서 ‘굴라시 경제, 또는 이를 도입하고 운영했던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 카다르 야노스(1912~1989년, 재임 1956~1988년)의 성을 따서 ‘카다르 경제’로 부른다. 이런 굴라시 경제체제 덕분에 헝가리는 1960~1980년대 다른 사회주의권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렸다. 그래서 당시 헝가리는 ‘공산권이라는 캠프에서 그나마 사정이 좋은 막사’로 불렸다. 그래서 주변 사회주의 국가의 주민들은 부족한 생필품을 구입하려고 헝가리로 몰려갔다. 시장경제를 운용하는 인근 자본주의 국가로 가는 여행 허가를 받기보다 헝가리로 가는 편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시 수많은 동독 주민이 체코를 거쳐 헝가리로 여행하는 일이 잦았는데, 1989년 헝가리에 갔던 수많은 동독 주민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대거 망명하면서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체제는 극심한 비효율에 시달렸으며 간부들의 부정부패도 심했다. 1980년대에 이르자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의 내재된 모순이 극이 달했다. ‘혁명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한 사람들은 소련의 상징과도 같았던 붉은 광장에서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의 긴 줄을 목격하며 혀를 찼다. 이에 따라 세계 사회주의 국가들은 개혁에 나섰다. 공산당이 정권을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해선 개혁을 해야만 했다. 우선 중국이 나섰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극좌적인 사회·문화적인 소란인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줄여서 문혁)’까지 겪으면서 경제적으로 피폐되고 궁핍했던 중국은 1978년 12월 덩샤오핑(鄧小平)의 주도로 개혁·개방 정책에 뛰어들었다.

소련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개혁에 뛰어들었다. 글라스노스트(개방)·페레스트로이카(개혁)이라는 이름이었다. 개방으로 번역되는 글라스노스트는 정보의 자유와 공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귄위주의 체제에서 탈피하겠다는 내용이다. 개혁을 가리키는 페레스트로이카는 정치와 경제의 대대적인 변혁을 의미한다. 부패한 공산주의 관료조직을 타파하고 경제체제를 중앙통제 계획경제에서 점진적으로 시장경제로 체제전환을 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과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로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보수파의 불발 쿠데타 등으로 나라가 시끄러운 와중에 소련은 1991년 12월 해체됐고 고르바초프는 권좌에서 퇴장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기술과 산업이 그리 발달하지 못했던 베트남은 공산화 이후 동유럽보다 먼저 경제에 적신호가 왔다. 1979년 국경분쟁으로 중국과 전쟁을 치러 승리한 베트남 정권은 마침내 경제개혁에 나섰다. 신경제정책을 채택해 부분적으로 경제체질 개선을 추진했다. 결과가 신통치 않자 1985년 6월 제8차 당 중앙위원회에서 배급제 일부 폐지, 기업 독립채산제 도입 등을 담은 ‘임금·물가·통화 개혁’안을 결의했다. 사회주의 경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제한적 개혁으로 중앙통제·배급제의 전시체제를 가격체계를 활용한 평시체제로 이행하려 시도했다. 국가 보조금에 의존하던 식량·연료 배급을 폐지하고 임금을 인상해 국민이 필요한 물품을 자유시장에서 구입하도록 했다. 9월엔 통화개혁도 뒤따랐다. 당시로선 과감함 경제 개혁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특징인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따른 물가 급등과 통화개혁 실패로 매점매석이 성행하고 시장 혼란이 지속됐다. 통화개혁 책임자인 찬 퐁 부총리가 1986년 1월 말 해임되고 공산당 기관지 난단이 3월 1일자에 이례적으로 자아비판 사설을 싣고 당의 지도가 서툴렀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1986년 도이머이 정책 결의

베트남 공산당은 새로운 처방을 내놨다. 개혁이 실패했다고 개혁을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대대적인 혁신안을 들고 나왔다. 1986년 12월 제6차 베트남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190만 당원을 대표한 129명의 대의원은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결의했다. 도이머이 정책에는 배급제 폐지, 가격 자유화, 국유기업 민영화, 시장 개방과 외국인 투자 유치, 농업개혁 등이 포함됐다. 이후 협동농장·집단농장 폐지를 비롯한 농업 구조개혁과 수출가공지구 설립, 노동집약적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 육성책이 뒤를 이었다. 그 뒤 외국인 투자법을 만들고 여러 차례 개정하면서 본격적인 외자 유치에 들어갔다. 이 외자는 경제 발전을 위한 자본을 달리 확보하기 어려웠던 베트남에 소중한 자산이 됐다.

베트남 공산당과 정부의 경제 개혁 정책인 도이머이의 목적은 ‘사회주의 경향의 시장경제’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베트남의 도이머이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공존한다. 공통점으로는 정치적으로 공산당 일당독재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경제만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획기적으로 개혁하고 대외적으로 개방한 점은 동일하다. 차이점은 해외 자본 투자 방식과 규모, 대미 관계 개선 분야에서 특히 뚜렷하다. 중국은 국내 기업을 활성화한 후 외자 유치에 나섰다. 우선 경제특구를 지정해 싱가포르 등 화교 자본을 끌어들여 개발에 나섰다. 화교 자본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한몫했다. 정치적으론 일당우위체제, 사회적으론 권위주의를 유지하면서도 대외개방 경제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싱가포르라는 벤치마킹 대상도 있었다.

하지만 해외에 대대적인 교민이나 교민 자본, 지원하고 지도해줄 벤치마킹 국가가 없었던 베트남의 선택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은 초기부터 외국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중국은 대미 수교(1979년) 이후 개혁·개방에 나선 반면 베트남은 도이머이(1986년)를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대미 수교(1995년)를 했다는 점도 다르다. 베트남 공산당 정권으로서는 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간 총부리를 겨눴던 미국과의 관계 복원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과 중국은 해외 자본과 기술 유치 방식도 달랐다. 중국은 공산당과 중앙정부가 지역을 지정하고 그 안에서 외국 자본의 자유로운 투자를 허용했다. 외국 기업에 땅을 임차하고 기업이 직접 투자하도록 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중앙정부가 직접 외국인 투자자를 선정한 후 투자와 활동을 허용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베트남이 ‘과거를 닫고 미래를 열자‘며 베트남전쟁 당시 총부리를 겨눴던 한국·미국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은 이미 1982년 미국과 접촉해 실종미군과 전쟁포로 문제를 협의했다. 승전국인 베트남이 과거의 적국을 만나고 협상하고 교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인식이었다. 베트남이 1992년 한국과 수교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외자와 외국 기업 유치의 물꼬가 본격적으로 터졌다. 베트남 정부는 그 해 외국인 투자법을 대대적으로 고쳤다. 자본 유치를 위해 정부가 발 벗고 나선 셈이다. 이어 1995년 미국과 수교하고 아세안(아시아경제개발협력기구)에도 가입해 대외 개방과 글로벌 경제 네트워크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해외 자본과 기술 유치 방식도 중국과 달라

베트남은 미국과 관계 증진에 힘썼다. 세계 최대의 경제를 가진 미국과 손을 잡아야 투자도 받고 산업도 일으키며 시장도 확보할 수 있다는 인식이 바탕이 됐다. 1998년 베트남의 응우옌마캄 베트남 부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으며 그 후 미국 대통령의 방문이 이어졌다. 2001년에는 빌 클린턴, 2006년에는 조지 W 부시, 2015년에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각각 베트남을 찾았다. 2001년 이후 역대 미국 대통령은 임기 중 반드시 한 번은 베트남을 찾은 셈이다. 2004년에는 미국의 유나이티드 항공이 베트남에 취항했다. 그러면서 베트남의 글로벌 경제 편입은 가속화했다. 베트남은 2007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으며 2010년에는 미국 등과 환태평양경제협력체(TPP) 가입을 논의했다. 베트남은 성공적으로 글로벌 경제 편입을 이뤘다. 여기에는 대우와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도 큰 역할을 했다. 북한이 이런 기회를 얻어 경제적인 안정을 얻고 정상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1443호 (201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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