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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7) | 김덕상 OCR Inc. 대표] 다시 일어난다면 ‘인생의 실패자’란 없다 

 

이필재
“패자 부활전에서 우승하면 기쁨이 두 배”...황혼기에는 암과도 화해해야

그는 보험맨이다. 대학 졸업 후 현대그룹에 입사, 미포조선소에서 보험 업무를 담당했다. 보험 전문가가 되고 싶어 삼성화재로 직장을 옮겼다. 외국의 선진화된 보험 중개사 제도를 처음 접했다. 그 후 영국 최대의 보험 중개업체 세즈윅에 몸담았다. 그에게 국내 첫 프로페셔널 보험 브로커라는 수식어가 붙는 배경이다. 김덕상 OCR Inc. 대표 이야기다.

골프가 수준급인 그는 골프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골프에 관한 책을 네 권 냈고 골프칼럼니스트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한국시각장애인선교회장으로 있을 땐 시각장애인들에게 골프를 보급하는 일을 했다. 그 시절 사회봉사에 눈떴다. 김 대표는 몇 년째 경기도 여주의 소망교도소에 가 봉사활동을 한다. 30명의 강사진과 공동으로 시도하는 재소자 대상 글쓰기 강의다. 과거 외국 유학을 떠난 두 자녀에게 약 2000통의 편지를 쓴 그의 강의 주제는 편지글 쓰기다. 지난 9월 하순 페이스북에 올라온 소망교도소 글쓰기 강사 초빙 글에 그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저는 간암이 척추암으로 전이됐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통증으로 운전도 못합니다. 항암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면 그때 다시 적극 참여하겠습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이 자신을 기리는 추모 공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어린 두 손주가 나중에 할아버지의 인생관을 접할 수도 있죠. 그래서 진실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남깁니다. 이 아이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면 가정과 사회, 이 나라의 일원으로서 제몫의 책임을 다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는 편지를 쓰면 관계가 좋아진다고 말했다.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도 골프 선수가 되겠다는 아들과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머리가 명석한 아들이 골프를 취미로 하기를 바랐지만 아들은 프로 골퍼로도 잘살고 국위선양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시작한 편지 덕에 그는 포털에 골프 칼럼을 쓰게 됐고 문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요즘 직원들보다 한 시간 일찍 퇴근해 장충동의 헬스클럽에서 가벼운 운동을 한 후 반신욕을 한다. 부인이 이 시간에 맞춰 헬스클럽으로 와 같이 운동을 한다. 그러고 나서 부인이 운전하는 차로 함께 귀가한다. “해가 떨어질 때쯤 되면 기운이 없고 통증도 옵니다. 평생 새벽에 출근했지만 출근 시간도 늦췄어요.”

1년 전 뜻밖의 암 선고

간이 좋지 않아 4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았었다. 1년 전 명의 소리를 듣는 주치의에게서 ‘더 이상 간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고 아내와 함께 행복해 했었다. 항암 치료는 힘겹다. 통증이 극심하다.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고통스럽다.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면 몸을 뒤척이게 되는 침대보다 의자가 편해, 며칠씩 밤이면 의자에 앉은 채로 30분~1시간 눈을 붙인다. 울면 통증이 덜해져 서럽게 울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자칭 ‘교만한 신자’다. 기도가 부족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위한 기도를 멀리하는 편이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한테 나까지 징징대지 않겠다’는 생각에서다. “원망스럽다는 생각보다 감사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10년 전 이런 일을 당했다면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감사한 일이죠. 뭘 모르고, 세즈윅 한국지사장으로 있던 바로 그 10년 전쯤에 조기 은퇴하겠다고 젊었을 때 마음먹었었거든요. 그땐 한심하게도 빨리 퇴직해 골프나 치러 다닐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황혼에 암과 맞서야 한다면 암과 화해하고 무리수를 두지 말라고 권했다. “인구의 4분의 1이 암환자입니다. 나이가 젊다면야 강인한 의지로 파이팅해야겠지만, 이 나이엔 그저 평화로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지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겠죠.” 그는 회복되면 시각장애인을 위한 골프 매뉴얼을 만들려 한다. 과거 그가 제1회 시각장애인 골프 대회를 열었을 때 만든 것을 보완해 국내외 시각장애인들에게 보급할 생각이다. “회복된다면 그때부터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죠. 전보다 더 이타적이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을 먹으면 치료를 받을 때 결과도 좋고 통증을 더 잘 견딜 수 있죠.”

그는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될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의 경우 그가 나온 고등학교의 동기회장, 대학의 행정학과총동창회장을 맡은 것이 그랬다. 그는 당시 단임 정신으로 열심히 일하고 후임자에게 자리를 넘겼다. “억지로 진 십자가도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그랬듯이 사실 모든 십자가가 억지로 지는 것이죠.”

김 대표가 정한 그의 집 가훈은 ‘정직, 독립, 자존’이다. 1998년 그가 투자에 실패해 파산지경에 이르렀을 때 프로골퍼가 되려 호주에 유학 중이던 아들은 귀국해 골프장에 취직, 경기과에서 일하면서 KPGA 정회원이 됐다. 오빠의 뒤를 따라 유학길에 올랐던 딸은 돌아와 한 학기 남짓 배화여중을 다닌 후 민족사관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 후 미국 조지타운대 국제관계 학부로 유학을 떠났고 그 시절 [10대, 꿈을 위해 공부에 미쳐라]란 책을 냈다. “배화여중 전학 후 첫 학기에 동급생 300명 중 석차가 100등이 넘었습니다. 담임교사가 영어 말고는 잘하는 게 없으니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시키라고 했던 아이죠.”

그는 독립을 강조한 덕에 아이들이 일찍이 고기 잡는 법을 익혔다고 말했다. 그가 과거 골프 유학 중인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책자엔 ‘아들아, 우리 인생을 이렇게 살자’란 제목이 달려 있다. 딸이 떠난 후 두 자녀에게 보낸 편지 묶음엔 ‘얘들아, 우리 인생을 이렇게 살자’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는 요즘 두 손주들에게 읽히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기록 중이다. 가족 간에 벌어지는 에피소드 등을 남긴다. “돌이켜보면 이 시대에도 우리가 중학교 때 배운 대로 ‘정직은 최선의 방책’입니다. 일찍이 아이들에게 자기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빵집을 차리더라도 이름을 걸고 할 만큼 정직하게 빵을 구우라고 했죠. 명예를 중시하라는 이야기지만 전문성을 길러 차별화된 브랜드가 되라는 뜻도 있습니다.”

신용불량자가 될 뻔했던 시절 그는 영국 출장길에 낯익은 고층 빌딩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죽고 싶었다. 마침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 딸이 보낸 편지가 있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전폭적으로 지원해 줘 고마워요. 한국에서 열심히 해 볼 게요. 아빠도 힘 내세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귀국 후 상환에 8년쯤 걸릴 거로 내다봤던 빚을 2년 앞당겨 다 갚았다. 어쩌다 두 자녀가 그에게 보내는 카드엔 “아빠를 존경한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저로서는 영광스런 찬사죠. 참 행복합니다. 자식이 존경한다고 하면 괜찮은 인생, 어쩌면 성공한 인생인지도 모르죠. 재소자들에게 강의할 때 ‘존경받는 부모는 누구나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출소해 인생 후반전을 다시 시작해 보라고 해요. 쓰러져 못 일어나지 않는 한 인생의 실패자란 없습니다. 패자 부활전에서 올라가 우승하면 기쁨이 두 배가 되죠.”

1456호 (20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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