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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의 ‘소확행’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팍팍한 현실에 작은 행복 추구하는 경향...“넉넉한 삶이 생산적인 일”

▎사진:© gettyimagesbank
‘낙엽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가을에는 듣지않고, 음미하지 않고 넘어가면 괜히 섭섭해지는 음악과 글이 있다.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가 그런 수필이다. 1938년 발표됐으니 올해로 80년 됐다. 딸 이나미씨는 [낙엽을 태우면서]는 이효석이 평양 창전리 48번지 집에 머물때 썼다고 회고했다. 창전리 집은 빨간 벽돌의 단층 양옥으로 여름이면 담쟁이로 온통 집이 가려져서 주위에서는 ‘푸른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씨는 “가을이면 부모님과 함께 정원에 떨어진 낙엽을 긁어 모아 태우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였던 이효석은 이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메밀꽃필무렵](1936년), [석류](1936), [개살구](1937),[해바라기](1938),[황제](1939) 등 주옥같은 단편이 이 무렵 쏟아져 나왔다. 소설가 김동리는 이효석을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고 평가했다. 작품이 너무 시적이어서 소설스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이효석은 네스팅족이자 모던보이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덧 날아 떨어져서 또 다시 쌓이는 것이다.’ 이효석이 가장 귀찮아 하는 낙엽은 담쟁이 낙엽이다.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드는 데다 비라도 맞고 나면 흙 속으로 묻혀 지저분하다. 때문에 떨어지는 족족 뒷시중을 해야 한다. 이효석은 잎을 다 떨어뜨리고 메마른 줄기만 그물같이 벽에 친 가을의 담쟁이를 “지릅떠볼 값조차 없다”고 평한다.

하지만 이런 낙엽도 산더미같이 모아서 태울 때면 느낌이 달라진다. 낙엽이 푸슥푸슥 타면서 뜰안을 가득 채우는 연기가 내뱉는 커피를 갓 볶아낸 듯한, 잘 익은 개암의 냄새가 너무나 좋기 때문이다. 어느새 옷자락과 손등에 배여버린 그 냄새를 맡으며 효석은 잠시 상념에 빠진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꾸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이효석은 그냥 가을에 취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냄새를 통해 활력을 되찾는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시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바라지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죽어버린 꿈의 시체를-땅 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효석은 손수 목욕물을 긷고 혼자 아궁이 속에 불을 지핀다.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새빨갛게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어린아이처럼 웅크리며 바라보기도 한다. 마침내 물이 데워졌을 때 자욱하게 김이 오르는 목욕물에 전신을 담근다. 효석은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고 말한다.

몸이 나른해지고 몽롱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효석은 ‘생활’에 대한 생각을 이어간다. 커피를 찧어서 가방 속에 넣어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며 집으로 돌아오거나, 올 크리스마스에는 트리를 세우고 색전기를 장식하거나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볼까 생각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하면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진다고 이효석은 설명한다.

낙엽 떨어진 뜰을 정리하는 것을 즐긴 이효석은 ‘네스팅족’이다. 네스팅족이란 둥지를 뜻하는 영어 ‘nest’에서 유래한 말로 가정의 화목을 중시하고 집안 가꾸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 52시간이 확산되고 가족과 함께 있을 시간이 늘어나면서 네스팅족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돈과 명예보다 작은 행복을 찾는 경향이 확대된 것도 원인이다. 때문에 야근보다 정시 퇴근을 바라고 가정과 개인 취미생활을 중시한다.

이효석은 ‘모던보이’였다. 빵과 버터를 즐겨먹었고 커피를 남달리 사랑했다. 쇼팽과 모차르트의 피아노곡 연주를 좋아했고 서양 영화 감상을 즐겼다고 한다. 1930년대 엄혹하던 일제 강점기 지식인이 시대를 보내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이나미씨는 “(아버지는) 원고를 쓰실 때에는 항상 진한 커피 향기를 맡으면서 밤새도록 글을 쓰셨다”며 “1930년대 초 어머니 고향인 함경북도 경성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실 때에는 십리 떨어진 나남까지 일부러 커피를 마시러 가실 정도였다”고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런 이효석은 ‘시피족’으로도 분류된다. 시피족은 지적인 개성과 합리적인 행동을 지향하는 청년들을 말한다. 시피(cipie)라는 말은 개성(character)·지성(intelligence)·전문성(professional)의 머리글자를 딴 ‘CIP’에서 비롯됐다. 시피족은 자신만의 개성을 중요시하고 지적 성숙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소비를 한다. 또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기 위해 자기계발과 관심분야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

이효석이 추구한 행복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과 닮았다. 소확행(小確幸)이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뜻으로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 나온 단어다. 하루키의 소확행은 막 구운 따뜻한 빵을 손으로 뜯어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부터 뒤집어 쓸 때의 기분 등이다. 어쩌면 하루키도 낙엽을 태우면서, 목욕을 하면서 소확행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현실이 팍팍하면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하루키에게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있었고, 이효석에게는 일제 강점기가 있었다. 개인으로서는 어찌할수 없는 거대한 시대의 벽 앞에서 적응하는 방법은 행복의 기대치를 낮추는 수밖에 없다.

작은 행복은 고도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북유럽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휘게(hygge)’는 편안함·따뜻함·아늑함·안락함을 뜻하는데,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또는 혼자서 보내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과 일상을 의미한다. 스웨덴에는 ‘라곰(lagom)’이 있다. 라곰은 스웨덴어로 ‘적당한’ ‘충분한’ ‘딱 알맞은’을 뜻하는 말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균형 잡힌 삶을 사는 스웨덴인들의 철학이다. ‘라곰스타일’은 추억을 되살려 주는 소중한 기념품과 실용적인 제품으로 집을 꾸미는 소박한 인테리어를 말한다.

고도성장기 지난 북유럽에서도 작은 행복 추구

이효석은 이런 넉넉한 삶이야말로 진짜 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보통은 촌음을 아껴서 일하는 것이 생산적이고, 시간이나 때우는 뜰정리는 비생산적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적어도 가을에는 말이다.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고 경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些事)에 창조적·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 때문일까. 깊어가는 가을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때문일까.’ 올해도 정신없이 달려왔을 당신. 단풍 들고 낙엽 지는 이 계절엔 잠시 쉬어가보는 게 어떨까. ‘쉬는 것도 투자다’라는 증권가의 격언처럼 말이다.

1456호 (20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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