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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덴노’의 존재 의미는] 상징적 존재지만 국민의 정신적 지주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구헌법에서 ‘천황대권’이란 광범위한 권한 행사… 일본국헌법에서 국가원수직·군통수권자 규정 없애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1월 2일 고쿄(皇居, 일본왕궁)에서 일반 국민 대상의 새해 축하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그는 이날 5월 새 일왕으로 취임하는 나루히토(德仁) 왕세자 등과 함께 황거 베란다에 나와 “일본과 세계인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 사진:연합뉴스
가뜩이나 삐걱거렸던 한일 관계가 아예 얼어붙는 분위기다. 이전에도 악재가 많았던 한일 관계는 한국 대법원이 지난해 10월 3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본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한 후 급속히 냉각돼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과거 일제 강점기에 징용공들에게 일을 시켰던 일본 제철회사의 후신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도록 했던 원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2014년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지 13년 8개월 만의 최종 판결이다.

문희상 의장 “일왕이 사과하라” 발언 후폭풍 거세

여기에 더해 문희상 국회의장이 2월 8일 가진 미국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한일 관계는 일왕이 사과하면 된다”라고 발언한 내용이 공개되면서 한일 관계는 냉각을 넘어 아예 경색되는 분위기다. 문 의장은 인터뷰에서 “역사 문제를 포함한 여러 문제로 악화하고 있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일본) 총리의 한마디가 있으면 좋다. 나는 퇴위를 앞둔 일왕이 발언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전쟁 범죄 주범의 아들이 노인의 손을 잡고 ‘정말 미안했다’고 한마디 말하면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됐다.

일본 NHK방송은 이와 관련해 “이번 발언에 대해 한국 언론에서는 2012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이 한국을 방문한다면 한국의 독립운동 희생자에게 사과해야한다’라고 발언해 일본 측의 강한 반발을 부른 데 이어 또 다시 일본의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우려하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라고 전했다. 6선의 문 의장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직후 일본에 대통령 특사로 파견됐을 정도로 일본과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정치인으로 통해왔다.

문 의장의 발언에 대해 일본은 정부 관계자가 총출동해 문 의장과 한국 정부에 항의를 하는 것은 물론 사과까지 요구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월 12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야당 의원이 문 의장 발언에 대한 생각을 질문하자 “정말로 놀랐으며 너무나 부적절한 발언으로 극히 유감”이라며 “한국에 외교 경로를 통해 엄중하게 항의했고, 사죄와 철회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이어 야당 의원이 “과거엔 한국을 ‘기본적인 가치관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이냐”라고 묻자 즉답을 하지 않고 대신 “‘구 조선반도 노동자 문제(징용 문제)’는 양국 관계의 기초를 부정하는 것으로, 적절한 조치를 한국이 취하도록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문 의장 발언을 두고 한국 정부에 전방위 압박을 가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높은 레벨을 포함한 외교 루트를 통해 ‘(문 의장 발언에) 매우 부적절한 내용이 포함돼 있어 지극히 유감’이라는 취지로 엄하고 강력하게 항의했다”라고 밝히고 “사죄와 철회도 요구했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2월 8일 도쿄에서 가나스기 겐지(金杉憲治)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김경한 주일한국대사관 정무공사를 초치해 문 의장 발언에 항의했고, 9일엔 서울에서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일본대사가 조현 외교부 1차관에게 항의하는 등 전방위로 항의하고 발언 철회는 물론 사과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외상도 이날 “(문 의장 발언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무례하다”고 말했다.

외교부 노규덕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이 문제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명예·존엄 및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피해자 중심 접근에 따라 일본 측이 진정성 있는 자세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취지의 언급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문 의장 측은 일본의 요구에 대해 “사과 할 일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고 “일본은 제대로 사죄한 적이 없어 지도자의 진정 어린 사과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헤이세이 다음 연호는


▎문희상 국회의장이 2월 12일 워싱턴 특파원과의 간담회에서 “일왕 위안부 사죄 발언은 평소 지론이며 사과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사안과 관련해 주목할 점은 일본 정부가 일왕과 관련한 사안에선 유독 예민하고 강경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다. 아베 총리와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한국 정부에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에는 ‘적절한 조치’를 주문했지만 문 의장 발언에는 ‘철회와 사과’까지 요구해 현격한 온도차를 나타냈다. 문 의장의 일왕 사과 발언에 징용공 판결 파장을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게 반발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에서 일왕(일본에선 덴노(天皇)라고 부름)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그리코 아키히토 일왕이 어떠 인물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올해는 일본에서 일본 왕실과 관련한 초대형 이벤트가 열리는 해다. 올해 4월 30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퇴위와 5월 1일 나루히토(德仁) 왕세자의 즉위(즉위식은 10월 22일 예정)라는 국가적인 왕실 행사를 앞두고 있다. 지난해 12월 1일 열린 일본 왕실회의에서 퇴임과 즉위 날짜를 결정했다. 즉위한 달을 앞둔 4월 중에는 새 연호도 발표할 예정이다. 메이지(明治) 이후 한 명의 일왕에 하나씩 부여하는 연호는 일본에서 달력은 물론 세금과 국민연금 등 일부 행정업무에서도 서기 대신 사용하고 있다. 새 연호가 이처럼 국민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은 것은 물론 한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 일본에선 심기일전의 의미도 있다. 현재 헤이세이(平成)가 어떤 연호로 바뀔지는 일본에서 큰 관심 사안이다. 평화를 염원하는 뜻이 담긴 헤이세이의 다음 연호는 일본의 시대정신과 정체성에 어느 정도 심리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 왕실은 1989년 아키히토가 즉위한 이래 올해 30년 만의 국가적인 이벤트를 앞두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 국민의 왕실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크다.

지난해부터 아키히토 일왕이 어떤 행사에 참석하면 일본 미디어는 ‘헤이세이 마지막 OO행사’ 식으로 보도해왔다. 지난해 12월 23일 85세 생일을 맞았던 아키히토 일왕이 기자 회견을 하자 ‘헤이세이 마지막 기자회견’이라고 보도하는 식이다. 이 기자회견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헤이세이가 전쟁이 없는 시대로 끝나게 된 것에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전쟁에서의 많은 희생과 국민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며 전후에 태어난 세대에도 올바로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지적했다. 평화를 강조한 셈이다. 더욱 주목되는 부분은 헌법과 관련한 내용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날 “헌법에 따라 정치적 권한이 없는 상징적인 덴노를 추구해 왔다”며 “덴노로서 여정을 마치려는 지금, 상징적 의미로 나의 입장을 받아주고, 계속해서 지지해준 많은 국민에게 충심으로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1946년 나온 일본국 헌법은 일왕을 국가원수가 아닌 국민 통합의 상징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 발언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키히토 일왕은 재위 중 끊임없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이 때문에 아키히토 일왕은 ‘평화헌법의 수호자’로 불려왔다. 1946년 나온 일본 헌법은 9조에서 전쟁을 금지해 ‘평화헌법’으로 불리는데, 아베 정권은 개헌을 통해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바꾸려고 시도해 왔다. 이날 ‘헤이세이가 전쟁 없는 시대로 끝나게 된 것에 안도한다’는 아키히오 일왕의 발언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적 권한이 없고 상징적인 자리’이기 때문에 ‘전쟁 반대’라는 보편적인 입장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지막 기자회견은 이러한 상황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전쟁 반대 입장을 지지해준 국민에게 감사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2016년 8월 8일 ‘생전 양위’ 입장을 밝히면서 이번에 퇴임하게 됐다. 양위 결정 후 일본에선 아키히토 일왕이 개헌을 추진하는 아베 정권에 대해 무언의 항의를 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 또는 헌법 9조를 무력화하고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바꿔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바꾸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아왔다.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맞는 2018년 전후, 또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 맞춰 일본을 평화국가에서 이른바 정상국가로 바꾸는 ‘제2의 메이지 유신’을 기도해왔다.

아키히토 왕실에 국민의 관심과 지지 여전해


▎지난해 8월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전몰자 추도식이 도쿄의 부도칸에서 열렸다. 추도사를 읽기 위해 등단하는 아베 총리. / 사진:연합뉴스
이를 위해선 상징조작이 필요한데, 그 중심에 일왕이 자리잡고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89년 공포돼 이듬해 시행에 들어갔다가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폐기된 대일본제국헌법(구헌법)에선 일왕을 국가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구헌법의 앞부분은 아예 일왕에 대한 규정으로 채워졌다. 1조에서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왕이 이를 통치한다’로 규정하고 2조는 ‘황위는 황실전범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 황남자손이 이를 계승한다’는 내용이다. 3조는 ‘천황은 신성해 침해해선 안된다’, 4조는 ‘천황은 국가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이 헌법의 조항에 따라 이를 행한다’, 11조는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라는 내용이다. 일왕을 실질적인 국가원수이자 군통수권자, 그리고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규정했다.

실제로 구헌법은 ‘천황 대권’이라고 불리는 광범위한 권한을 일왕에게 부여했다. 일본을 일왕과 국민이 일체인 ‘군민일체의 대가족 국가’로 규정한 점도 눈길을 끈다. 아베 정권이 애용하는 ‘국민총의’라는 말과 사실상 같은 개념이다. 군민일체는 일왕의 권위를 앞세워 국민에게 충성과 복종, 희생을 강요하면서 전쟁으로 내몰았던 군국주의 세력의 구호였다. 일왕 히로히토(裕仁)에게 전쟁책임론을 제기하는 법적인 근거이기도 하다.

패전 이후 미군 점령 하인 1946년 제정돼 1947년 시행된 ‘일본국헌법’은 1조에서 ‘덴노는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이 소재하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라고 규정했다. 주권에 국민에게 있으며 일왕이 상징적인 존재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구헌법에서 일왕이 유지했던 국가원수직과 군통수권자 규정이 사라졌다. 이를 근거로 일왕의 정치 개입이나 발언이 사실상 금지됐다. 그 뒤 히로히토는 1989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상징으로 존재하고 의전만 담당했으며 후임인 아키히토도 마찬가지였다. 아키히토 일왕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집을 잃고 힘들게 사는 피난민을 직접 찾아가 무릎을 맞대고 앉는 등 헌신적인 활동으로 일본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계속해왔다. 일본에서 아키히토와 왕실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지지가 여전한 이유다.

이번에 물러나는 아키히토는 양위 결정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전쟁 금지를 명시한 평화헌법 9조의 무력화와 자위대의 정식군대화, 그리고 일왕의 국가원수화를 통해 ‘제2의 메이지 유신’을 노리는 아베 총리에게 무언의 저항을 한 셈이다. 양위를 통해 그는 자신의 재위 중 평화헌법이 바뀌는 것을 보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난다. 헌법상 ‘상징적 존재’인 아키히토 일왕이 아베에게 상징적인 저항을 통해 ‘일왕 국가원수화’를 막는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셈이다. 일왕 아키히토의 ‘21세기적’인 활동이다.

일본의 역대 일왕 125명 중 양위한 경우가 59건이나 된다. 역사적 기록이 제대로 보존돼 있는 일왕만 따지면 절반을 넘는다. 그만큼 일상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양위는 주로 왕위 계승에서의 힘겨루기 과정에서 발생했다. 권력이 강할 때 직계 후손에게 양위를 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자식들에게 물려주면 자신은 상황 자리에 앉아 섭정을 맡으며 권력을 계속 누릴 수 있었다.

아키히토, 양위로 ‘일왕 국가원수화’ 막아

일왕의 권력이 약한 시절엔 실력자인 쇼군(將軍)에게 정치적인 항의를 하기 위해 양위 줄을 잇기도 했다.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 시대(1603~1868)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면 108대 고미즈노오(後水尾, 1596~1680, 재위 1611~1629)는 쇼군에게 밀려 자존심이 상하자 양위했다. 일왕이 지배한 조정은 고승들에게 자주색 법의인 시에(紫衣)를 입도록 허락하고 그 대가로 헌금을 받아왔는데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가 이를 하지 못하게 하자 고미즈노오는 이에 항의하면서 자리를 던졌다. 고미즈노오는 양위 뒤에도 물러난 일왕이 받는 존칭인 상황과 법황(상황이 불문에 출가하면 받는 존칭)으로서 조정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처럼 일왕의 양위 역사는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권력투쟁과 관련이 깊다. 이번 양위는 ‘평화헌법의 수호자’인 아키히토 일왕이 현실 권력인 아베 정부에 대항한 양위 정치로 볼 수 있다.

1472호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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