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면권 가진 금융위 반기 들어은행권의 노동이사제 도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KB금융노조는 법무법인 지향 백승헌 변호사를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했지만 자진 철회했다. 백 변호사가 소속된 법무법인이 KB 계열사의 자문업무를 했던 것이 알려져서 혹시 후에 결격 시비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만약 기업은행이 노동이사제를 도입하면 은행권 첫 사례가 된다. 그러나 도입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2월 28일 열린 기업은행 이사회에서 박창완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하겠다는 노조의 안건은 무산됐다. 노조는 사외이사 후보 추천 권한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기업은행 정관 제38조에 따르면 사외이사는 경영, 경제, 회계, 법률 또는 중소기업 등에 관한 전문지식이나 경험이 풍부한 자중에서 은행장의 제청으로 금융위원회가 임면한다고 명시돼 있다. 기업은행 지배구조내부규범 제10조엔 사외이사는 운영위원회에서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해 은행장의 제청으로 금융위원회가 임면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노동이사제를 도입하려면 이사회 지배구조와 중소기업은행법을 개정해야 된다”며 “(노동이사제) 도입에 대해 검토가 선행돼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법적인 근거가 없는 상황이라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기업은행 노조는 이사회에서 안건으로 채택되지 못했지만 노동이사제 도입 가능성은 있다고 보고 있다. 기업은행 노조 관계자는 “청와대와 정치권 등에서 노동이사제 도입에 대해 찬성하고 있고 금융위원회가 사외이사를 임명하면 되기 때문에 문제 없다”고 말했다.기업은행 노조는 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과 함께 청와대·국회·정부를 찾아가 ‘노동자추천이사제’ 도입 제안서를 전달하며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민병두 국회 정무위원장을 만나 금융권 노동이사제에 대해 논의했다. 민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노동이사제 도입으로 금융사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투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금융의 공적기능에 비춰 보았을 때 노동이사제는 기업은행 등 금융공기업부터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문제는 기업은행의 최대주주인 기획재정부와 사외이사 임면권을 쥔 금융위원회는 노동이사제 도입에 시큰둥하다는 점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노동이사제든 근로자추천이사제든 취지는 대주주 전횡 방지와 근로자 권익보호”라며 “은행 쪽은 임금이나 복지 등 근로 여건이 다른 산업보다 양호하기 때문에 이쪽에서 먼저 도입할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반대의 뜻을 밝혔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금융위를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노사 협력 순위 최하위권금융권은 없지만 일부 공공기관에서는 노동이사제를 도입했다. 2016년 서울시를 시작으로 광주 광역시·경기도·인천시 등은 올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도입은 됐지만 노동이사제를 둘러싸고 찬반논란은 여전하다.전문가들도 노동이사제는 ‘잘만 운영되면’ 긍정적인 효과도 적지 않다는 데엔 동의한다. 오너의 ‘갑질’과 경영자들의 전횡을 감시·견제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기업의 생산성이나 노사관계 안정, 애사심도 높일 수 있다. 허권 금융노조 위원장은 “노동이사제는 대주주보다 경영진의 독선적 행위를 막기 위한 제도”라며 “관치금융과 낙하산 인사 등을 없애기 위해서는 노동자 경영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반대 의견도 있다. 노사갈등이 심한 한국의 경우 노사이사제를 도입하면 갈등이 오히려 증폭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법상 근로이사제 도입 보고서’를 통해 “경영전문가가 아닌 노조가 이사회에 참여하게 되면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크게 저해할 것”이라며 “주주가치의 제고와 극심한 국제경쟁력이 요구되는 기업에서는 지배구조의 비효율성 때문에 채택하기 어려운 제도”라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근로이사제 도입 현황과 문제점’ 보고서에서 “노사 협력 순위가 최하위권(2018년 세계경제포럼 조사 140개국 중 124위)인 한국에 노동이사제가 도입되면 갈등만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적대적 노사 관계가 형성된 환경에서 노동이사는 갈등의 ‘중재자’ 역할보다는 노사 갈등을 이사회 내부로 끌어들이는 역할만 담당하게 될 공산이 크다는 의미다.실제로 노동이사제가 정착된 독일에서도 경쟁력 약화와 비효율성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인수·합병(M&A)이나 구조조정, 해외 사업 진출 등의 결정사항을 앞두고 노사 갈등으로 신속한 결정이 불가능해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은 경영이사회와 감독이사회를 각각 설치해 경영이사회의 활동을 감독하는 이원적 이사회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근로자 대표는 비상근이사로 감독이사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한다.의결권이나 발언권에서도 다른 이사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종업원 2000명이 넘는 기업은 감독이사회의 절반을, 500명 넘는 기업은 3분의 1을 노동이사로 선임해야 한다. 유럽노동조합연구소(ETUI)가 독일의 노동이사제에 관한 논문을 조사한 결과 긍정적인 결론이 10건이었지만, 부정적 결론도 7건이었다.- 김성희 기자 kim.sungh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