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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21) 전국사공자의 인재 사랑] 편견·선입관 배제하고 사람 뽑아 

 

맹상군·신릉군, 출신성분·직업도 따지지 않아... 자만심, 낮은 안목 탓에 놓친 사람 없는지 반성

▎일러스트 김회룡
전국시대 말기, 강대국 진(秦)나라의 파상공세에 맞서 자국을 지켜냈던 네 명의 정치가가 있다.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이 그들이다. ‘전국사군(戰國四君)’ 또는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라고 불렸던 네 사람은 수천 명의 인재를 거느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맹상군은 제선왕의 이복동생이자 재상이었던 전영의 서자로 이름은 전문(田文)이다. 전영은 5월 5일 전문이 태어나자 내다버리도록 했다. 이날 태어난 아이가 방문 높이만큼 자라면 부모에게 해를 끼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문의 모친은 차마 아들을 버리지 못했고 5년이 지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전영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자 전문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이 부여하는 것입니다. 어찌 방문이 정해주는 것이겠습니까? 만에 하나 정말 방문이 사람의 목숨을 결정한다면 방문의 높이를 더 높게 만들면 그뿐입니다.”

수천 명의 인재 거르려

이처럼 어릴 적부터 현명함이 돋보였던 전문은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해 맹상군이 된다. 그는 인재를 귀하게 여겨 문하에 수많은 식객을 거두었는데 그 수가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자연히 맹상군의 명성도 천하에 널리 퍼졌고, 진나라 임금의 귀에까지 소문이 들어갔다. 진나라 소왕은 동생 경양군을 볼모로 보내면서까지 맹상군을 초빙했는데, 맹상군을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고 싶어서였다.

맹상군은 내키지 않았다. 진나라는 이리나 승냥이와도 같은 나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벌일 수 있다. 근래에만 해도 초나라 회왕을 속여 땅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억류시켜 죽게 만들지 않았는가. 자신도 저들의 눈에 어긋날 경우 돌아오지 못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강대국 진나라의 요청을 거절할 수만은 없는 노릇. 제나라 임금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맹상군은 진나라로 길을 떠났다.

진나라에 도착한 맹상군은 걱정했던 대로 위기에 빠진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했던 진나라의 승상 저리질이 맹상군은 제나라의 왕족이므로 결코 진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을 것이라며 후환이 되지 않도록 죽여 버리자고 주장한 것이다. 맹상군은 소왕이 총애하는 후궁 연희에게 뇌물을 바쳐 가까스로 탈출했는데, 이 과정에서 개 흉내를 내며 보물을 훔쳐 온 식객과 닭 울음소리를 내 내어 관문을 열게 만든 식객으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얻었다.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고사성어의 유래다. 맹상군이 평소 보잘 것 없고 천시 받는 재주를 가진 사람까지 모두 보듬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밖에도 맹상군은 아무 능력도 없어 보이는 풍환을 중용했다. 그는 풍환에게 백성들에게 빌려준 돈을 거둬들이는 임무를 맡겼는데, 풍환은 마음대로 차용증서를 불태우고 빚을 탕감해주었다. 맹상군이 화를 내자 풍환은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자만 더할 뿐 돈을 갚을 처지가 못 됩니다. 이런 이들을 성급히 독촉하면 바로 달아날 테니 영원히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이익에 눈이 멀어 백성을 사랑하지 않은 꼴이니, 백성이 빚을 갚지 않으려 주군을 떠난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맹상군은 풍환의 손을 부여잡고 고마워했다고 한다. 훗날 풍환은 정치적 위기에서 맹상군을 구해주기도 했는데, 인재를 알아보고 소중히 대한 맹상군의 도량 덕분이다.

다음 평원군은 조나라의 왕족으로 이름은 조승(趙勝)이다. 그는 혜문왕과 효성왕 대에 세 차례에 걸쳐 재상을 지냈다. 평원군은 자신의 애첩이 절름발이 선비를 비웃자 그녀의 목을 베고 사과할 정도로 인재를 아꼈다. 그와 관련해서는 ‘모수자천(毛遂自薦)’이라는 유명한 고사가 전해 온다.

평원군이 외교 담판을 위해 초나라로 떠날 때의 일이다. 그는 자신의 식객 중 용맹하고 학문이 뛰어난 스무 명을 골라 수행원으로 삼고자 했다. 열아홉 명을 뽑고 나머지 한 자리를 채울 적임자가 없어 고심하고 있을 무렵, 모수라는 이가 스스로 추천하며 평원군 앞에 나섰다. 평원군이 물었다. “선생은 내 문하에 있은 지 몇 해나 되었소?” 모수가 대답했다. “3년이 되었습니다.” 평원군은 차갑게 말했다.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면 주머니 속에 송곳이 있는 것과 같소.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여야 하는 법이오. 지금 선생이 내 문하에 3년이나 있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소. 나도 선생에 대해 들은 적이 없소. 이는 선생에게 이렇다 할 재능이 없다는 뜻이오. 선생은 같이 갈 수 없으니 남아 있으시오.”

그러자 모수가 말했다. “저는 오늘에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공께서 저를 좀 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더라면 그 끝만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평원군은 여전히 모수가 못미더웠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수행원으로 삼았다. 이 모수가 초나라와의 외교전에서 큰 활약을 펼치게 되는데 평원군은 돌아와 이렇게 찬탄했다고 한다.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 내가 지금까지 고른 선비는 못해도 1000명은 될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보지 못하고 잃어버린 선비는 없다고 자만해왔다. 그런데 이번 모 선생의 경우를 보니 내가 크게 자만한 것이다. 모 선생의 세 치 혀는 군사 100만보다도 강했다.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을 것이다.” 함부로 인재를 재단하지 않을 것이며, 혹시라도 자신이 놓친 인재는 없는지 늘 조심하겠다는 것이다.

후대하는 수준 넘어서 직접 다가가

이어서 세 번째 신릉군의 이름은 위무기(魏無忌)로 그 역시 수천 명의 문객을 거느렸다. 그는 조나라를 침입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조나라·초나라·한나라와 연합해 진나라를 압박하는 등 종횡무진 활약했다. 신릉군은 특히 정성을 다해 초야에 묻혀있는 인재들을 찾아 나섰는데, 이를 두고 사마천은 “당시 천하의 여러 공자들이 선비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오직 신릉군만이 깊은 산과 계곡에 숨어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니 일리가 있다”라고 말한다.

맹상군·평원군·춘신군이 자신을 찾아오는 인재들을 후대하는 데 머물렀다면 신릉군은 직접 인재에게 다가갔다는 것이다. 신릉군은 문지기였던 후영, 푸줏간 백정에 불과했던 주해의 능력과 인품을 알아보고 진심으로 예를 갖춰 대했는데 후에 두 사람은 목숨을 바쳐 신릉군을 보위했다. 이때 주해가 남긴 말이다. “저는 시장에서 칼을 휘둘러 짐승을 잡는 백정입니다. 그럼에도 공자께서 몸소 자주 찾아 주셨습니다. 그간 일일이 공자께 답례하지 않은 것은 하찮은 예의 같은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제 공자께서 위급한 처지에 계시니 지금이야말로 제가 목숨을 바칠 때인 것 같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신릉군은 노름꾼 사이에 숨어 살았던 모공, 술집을 운영하던 설공을 찾아가 친교를 맺었다. 이에 대해 신릉군의 매형 평원군은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당신 아우가 천하에 둘도 없는 인물인줄 알았소. 그런데 지금 들리는 말로는 노름꾼이나 술파는 자와 사귀고 있다니 참으로 망령되지 않았소?” 이 말을 전해들은 신릉군은 크게 실망하는 낯빛이었다. “평원군은 사람을 사귐에 있어 그저 호걸인 척하는 몸짓만 있을 뿐 참다운 선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군요. 저는 예전부터 이 두 사람이 어질다고 들은 터라 혹시라도 그들을 만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내가 사귀고 싶어 해도 그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평원군은 그들과 사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다니, 평원군이야말로 사귈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인재를 대함에 있어서 평원군처럼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모공과 설공 역시 훗날 신릉군에게 큰 보탬이 되었으니 신릉군이 평원군보다 한 수 위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춘신군은 초나라의 정치가로 이름은 황헐(黃歇)이다. 진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초나라 태자를 탈출시켜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재상이 됐다. 춘신군도 인재를 아끼고 좋아해 3000여 명의 식객을 거느렸는데 그 위용이 실로 웅장했다고 한다. 그는 순경(荀卿, 순자)을 등용해 법제를 정비했고 추나라와 노나라를 병합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다른 세 공자가 문객을 활용해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면 반대로 춘신군은 그들의 조언을 흘려들어 몰락을 초래했다. 그가 재상이 된 지 25년째 되던 해, 초나라 임금이 병석에 눕자 주영이라는 문객이 춘신군에게 조언한다. “세상에는 생각지도 않던 복이 찾아올 수 있고 또 생각지도 않은 재앙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지금 임금께서 병에 걸려 돌아가시려 합니다. 그러면 어린 새 군주가 즉위할 텐데, 이 틈을 노려 이원(초나라의 권세가로 태자의 외숙부)이 권력을 잡고 공을 제거하려 들 것입니다.” 춘신군은 코웃음을 쳤다. “이원은 나약한 사람이오. 어찌 그가 그런 일을 벌이겠소.” 하지만 이로부터 열이레가 지나 임금이 죽자 이원은 정말로 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로부터 열이레가 지나 임금이 죽자 이원은 정말로 정변을 일으켰다. 이원이 숨겨둔 병사들의 칼날에 춘신군의 머리가 잘렸고 그의 집안은 몰살당한다. 문객의 조언을 무시하고 화근을 자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화가 자신을 향한 것이다.

문객의 조언 듣지 않아 몰락한 춘신군

이상 맹상군·평원군·신릉군·춘신군의 사례는 오늘날 인재 경영에서도 명심해야 할 점을 보여준다. 인재를 정성껏 대하고 예우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은 인재를 찾은 이후의 문제다. 우선은 어떻게 하면 좋은 인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부터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요즘 인재가 없다’ ‘쓸 만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라는 말에 익숙하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편견이나 선입관 때문은 아닐까? 만약 맹상군이나 신릉군이 인재의 가문과 계급, 출신성분을 따졌다면 저처럼 결정적인 위기를 벗어나게 해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런 인재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리더가 알아보지 못하고 놓치는 인재가 없으려면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의 잣대로 인재를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할 게 아니다. 신분이 낮아서 학력이 낮아서 하는 일이 보잘 것 없어서 하고 아예 무시해버릴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재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 나의 자만심과 선입관 때문에 언제든 인재를 놓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그래야 조심스럽고 세밀하게, 겸손한 마음으로 인재를 대할 수 있게 된다. 그런 후에 역시 나의 주관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는 것이다. 인재가 전해주는 소중한 조언을.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75호 (201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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