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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리비아 어디로] 트럼프 등에 업은 하프타르 시대 열리나 

 

예루살렘=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카다피 쿠데타 동지에서 반대파로 극적인 삶… 석유 매장지 점령하고 리비아 장악 야심

▎리비아 동부 군벌 칼리파 하프타르가 이끄는 리비아 국민군(LNA) 페이스북에 3일(현지시간) 올려진 사진으로, 무장한 군 차량 행렬이 도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 / 사진:LNA 페이스북
리비아발 국제사회 혼란이 시작됐다. 리비아 동부의 대표자의회(HoR) 정권을 따르는 ‘리비아 국민군(LNA)’이 4월 4일부터 ‘존엄성의 홍수’라는 작전명으로 서부 중심지인 트리폴리로 진군을 시작한 것이 계기다. 현재 리비아엔 이들처럼 동부와 서부를 대표하는 정치·군사 세력이 양립하는 것은 물론 1700여 개의 무장정파와, 이슬람주의자 지하드에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한 테러 세력까지 군웅할거하고 있다.

트리폴리에는 유엔 중재의 협상을 통해 2015년 12월 합의안에 서명하고 2016년 구성된 통합정부(GNA)가 자리 잡고 있다. GNA는 의원 출신으로 국가원수인 대통령위원회 위원장이자 총리인 파예즈 알사라즈가 대표다. 하지만 동부를 지배하는 HoR과 LNA는 합의안에만 서명했을 뿐 구성과 운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칼리파 하프타르 사령관이 지휘하는 LNA의 진군으로 리비아와 국제사회가 혼란과 내분에 휩싸이고 있지만 유엔의 중재 노력은 여의치 않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영국은 리비아 휴전을 촉구하는 안보리 결의안을 마련했지만 같은 상임이사국으로 비토권을 쥔 미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상정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교전이 계속돼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교전으로 200명 이상이 숨지고 1000명 이상이 부상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더구나 4월 19일 미국 백악관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미 15일 하프타르 사령관과 전화 통화를 하고 테러 방지 노력과 리비아 평화·안정의 필요성 등을 논의했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성명은 트럼프 대통령이 통화에서 하프타르가 대테러전과 석유자원 확보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두 사람은 리비아가 안정되고 민주적인 정치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대한 비전을 공유했다고 밝혔다. 누가 봐도 트럼프가 GNA의 알사라즈 총리 대신 하프타르 편을 드는 형국이다. 리비아는 다시 혼란에 휩싸이고 있다.

리비아는 간단치 않은 나라다. 국토 넓이가 한반도의 8배에 이르는 175만9541㎢로 세계 16위다. 아프리카 대륙에선 민주콩고공화국과 수단에 이어 3위다. 광활한 국토로 유명한 이란(164만8195㎢, 17위)이나 몽골(156만4110㎢, 18이)보다 넓다. 그렇게 넓은 국토에 인구는 720만 명(2018년 기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리비아엔 석유 자원이 있다. 석유수출기구(OPEC) 2018년 연감에 따르면 리비아의 원유 매장량은 483억 배럴로 전 세계 회원국의 4%를 차지한다. 베네수엘라(3028억 배럴, 24.9%), 사우디아라비아(2662억 배럴, 21.9%), 이란(1556억 배럴, 12.8%), 이라크(1472억 배럴, 12.1%), 쿠웨이트(1015억 배럴, 8.4%), 아랍에미리트(978억 배럴, 8.1%)에 이어 OPEC 회원국 가운데 7위다. 리비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선 최대 매장량을 자랑한다.

러비아산 석유, 운송비 덜 들고 품질 좋아


매장량 외에 리비아의 석유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지리적인 이점이다. 리비아는 거대 석유 소비지인 유럽과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바로 마주보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해 있다. 북미산이나 중동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산과 비교해 유럽과 거리가 가까운 만큼 운송비에서 유리하다. 또 다른 이점은 품질이다. 리비아산 원유는 품질 조건이 다른 지역산보다 훨씬 좋다. 리비아 여행 사이트인 테메후닷컴의 국가 소개란에 따르면 리비아 원유는 기본적으로 저유황 경질유다. 원유 품질은 유황 함유량과 비중이라는 2가지 요소에 좌우된다. 유황 성분이 많이 든 원유로 만든 석유를 연소하면 발전소나 공업시설, 자동차에서 유독성 자극가스인 이산화황이 대기 중으로 많이 배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원유에 있는 유황 성분은 정유를 할 때 촉매를 이용하는 탈활 과정을 거쳐 제거해야 한다. 유황 함량이 높은 원유는 탈황 비용이 추가로 들 수밖에 없다. 국제 시장에서 저유황 원유는 그만큼 비싼 값에 팔린다.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등 걸프 지역산 원유는 기본적으로 유황 함량이 비교적 높고 중(重)질유여서 탈황을 비롯한 정제 비용이 많이 든다.

프랑스 국제방송인 ‘프랑스 24’에 따르면 오일 달러에 기대고 있는 리비아의 석유 매장지는 ‘석유 초승달 지역’으로 불리는 동부 시르테 분지에 80%가 집중돼 있다. 이곳 사막에서 생산된 원유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항구도시인 벵가지 브레가, 라스라누프, 마르사엘하리가 등으로 옮겨져 저장·정제·선적된다. 이 지역은 현재 하프타르의 LNA와 HoR이 차지하고 있다. 이번 트리폴리 진군 기도를 놓고 ‘석유 초승달 지역’을 장악해 풍부한 자금력을 확보한 하프타르가 트리폴리를 무력으로 장악할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유럽연합의 싱크탱크인 유럽외교협회(ECFR)의 리비아 분쟁 소개 사이트는 리비아를 ‘1국가 3정부’라고 표현했다. 2016년 3월 30일 서부 트리폴리에 설치된 대통령 위원회(PC)와 신제헌의회 세력, 그리고 동부의 LNA와 HoR 세력, 그리고 자문기관인 국가위원회가 만들었던 국가구제정부(GNS)가 그것이다. 사실 리비아에는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파나 정치조직이 없다. 170여 개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고, 이들은 1700여 개의 무장 정파를 조직해 지역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크게 나눠 동부의 키라나이카와 서부의 트리폴리로 중심으로 수렴해왔는데, 하프타르가 막대한 자금과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기존 세력균형을 깨고 리비아의 패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이미 2011년 무아마르 카다피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리비아가 왜 지금까지 이런 혼란을 겪는 것일까? 여기에는 ‘두 지붕 한 나라’라는 리비아의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20세기에 리비아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현재 지역적 분쟁과 갈등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170여 개의 부족으로 이뤄진 이 나라는 크게 서부 트리폴리타니아(트리폴리 세력권)와 동부 키레나이카(벵가지 세력권)로 나뉜다. 사실 이 두 지역을 합쳐 리비아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른 것은 1934년부터다.

리비아는 20세기 초 이 지역을 식민 통치하던 이탈리아가 붙인 이름이다. 1912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속령이던 리비아를 차지한 이탈리아는 1927년까지 ‘이탈리아령 북아프리카’라 부르다 1927년부터는 서부 트리폴리타니아와 동부 키레나이카로 나누어 통치했다. 두 지역은 역사적으로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함께 통치된 적이 없는 별개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1934년 이탈리아가 두 지역을 행정적으로 다시 합치면서 리비아라는 이름을 처음 붙였다.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는 역사적으로 한 지역이 다른 지역을 일시 점령해 지배한 적은 있지만 두 지역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한 것은 20세기 이탈리아가 처음이다.

170여 부족으로 이뤄진 서부 트리폴리타니아와 동부 키레나이카를 하나로 통합해 전체를 지배한 인물은 역사적으로 딱 두 사람 밖에 없다. 1951~1969년 존재했던 리비아 왕국의 국왕 이드리스 1세(1889~1983년, 재위 1951~1969년)과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해 42년 간 권력을 장악한 무아마르 알 카다피(1942~2011년, 재임 1969~2011년) 국가평의회 의장이다.

카다피가 1969년 쿠데타로 축출한 이드리스 1세는 리비아 동부의 이집트 국경 근처 출신이다. 무슬림 신비주의 운동인 ‘세누시’를 주도한 집안의 3대 상속자였던 이드리스는 지역 명망가였다. 1920년 이집트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영국으로부터 키레나이카 에미르(이슬람 지역군주) 호칭을, 1922년엔 트리폴리 에미르 호칭을 각각 얻었고 이탈리아도 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드리스는 아예 리비아 동부 키레나이카의 독립을 추진하다 실패하고 이집트로 망명해 이탈리아를 대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분열의 역사로 점철된 리비아


▎리비아 동부 군벌 칼리파 하프타르. / 사진:연합뉴스
전후인 1949년 이드리스는 자신의 근거지인 동부 키레나이카에미르국의 독립을 선언한 데 이어 1951년 12월 24일엔 서부 트리폴리 지역을 합쳐 ‘리비아 연합연방왕국’을 건국했다. 리비아의 독립이다. 1963년 개헌을 통해 연방제를 폐지하자 트리폴리 지역에선 불만이 고조됐는데, 서부 트리폴리 영향권으로 분류되는 중부 시르테 출신인 카다피 중위가 1969년 쿠데타를 일으켜 이드리스를 축출했다. 이드리스는 이집트 카이로로 망명했다가 1983년 세상을 떠난 후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성지 메카에 묻혔다.

카다피는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쿠데타를 벌였지만 실제로는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 사이의 지역 갈등이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 2011년 독재 타토를 외치며 카다피를 축출한 민중봉기도 동부 벵가지가 중심이었다. 쿠데타도, 시민혁명도 그 배후에는 동·서부의 헤게모니 쟁탈전 성격이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역사적인 분열 DNA는 카다피 정권의 무너지고 새로운 통치 체제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장애물이 됐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리비아에선 무아마르 카다피 정부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이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카다피에 반대한 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NTC)가 들어섰다. 유엔 회원국들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서둘러 반군 조직으로 출발한 NTC를 리비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그래야 카다피 정권을 오히려 ‘반군’으로 규정하고 NTC의 요청에 따르는 형식으로 이들을 폭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유엔총회는 2011년 9월 표결 결과 114대 17로 NTC에 리비아를 대표하는 회원국 자격을 인정했다. 도피한 카다피는 그해 10월 20일 고향인 리비아 중부 시르테 근처에서 주민의 총에 맞아 숨졌다.

리비아는 2012년 7월 유엔과 국제 NGO의 지원을 받아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거쳐 다음 달 국민회의(GNC, 총국민회의라고도 번역함)라는 이름의 한시적인 제헌의회를 구성했다. NTC는 GNC에 권력을 이양하고 사라졌다. 선거 결과 GNC는 이슬람법을 사회에 적용할 것을 주장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장악했지만 전국을 통치할 정치력이 부족했다. GNC 내부에선 이슬람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의 대결이 계속됐다. 그러는 동안 리비아는 1700개의 무장정파가 활동하면서 혼란을 더했다.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 같은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단체까지 유입돼 리비아는 무법천지가 됐다.

더 큰 문제는 2014년 첫 의회 선거에서 나타났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선거 결과 패배하자 투표율이 18%로 저조하다는 이유를 들어 무효를 선언했다. 그러자 선거에서 승리한 세속주의자들은 수도 트리폴리를 떠나 이집트 국경에서 멀지 않은 동부 토브룩으로 옮겨 입법부인 ‘하원(HoR)’을 운영했다. 하원을 기반으로 하는 토브룩 정부는 2015년 ‘리비아 국민군(LNA)’의 사령관인 군벌 할리파 하프타르(76)를 리비아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올해 트리폴리로 진군을 시작한 바로 그 인물이다. LNA와 토브룩 정부는 리비아군의 육군과 공군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서부 지역에 있는 수도 트리폴리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옛 GNC 의원들을 다시 모아 ‘신제헌의회(New GNC)’라는 이름의 입법부를 별도로 운영했다. 트리폴리의 신제헌의회 정부는 사실상 리비아 해군을 장악하고 있다.

리비아에선 이들처럼 동부와 서부에 하나씩의 정부만 들어선 게 아니다. 심지어 2011년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던 동부 거점도시인 벵가지는 혼란의 극치다, ‘벵가지 혁명가 슈라 위원회’ ‘데르마 무자히딘 슈라 위원회’ ‘아쥬다비야 슈라 위원회’ 등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이슬람주의자와 무자히딘이 지배하고 있다. LNA의 하프타르 추종자들이 이들과 대치하고 있다. ‘슈라’는 무슬림 사회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협의 또는 협의체를 가리킨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이슬람 교리에 따라 지역을 통치하고 있다.

2015년 12월 유엔은 신제헌의회가 운영하는 트리폴리 정부와 HoR이 대표하는 토브룩 정부 간의 협상을 압박해 합의안 서명을 이끌어냈으며 이를 바탕으로 2016년 통합정부(GNA)를 구성했다. 외신들이 GNA를 유엔이 인정한 정부라고 부르는 근거다. 의원이던 파에즈 알사라지가 2016년 3월 대통령위원회 위원장을, 4월에 총리를 각각 맡았다. 하지만 통합정부는 말뿐이고 리비아는 여전히 서부와 동부로 분열돼 있으며 GNA는 신제헌의회의 입김에 좌우되는 상황이다. 정치도,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도 통하지 않으니 군사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세상이 됐다. 하프타르가 힘을 믿고 트리폴리 진군에 나선 이유다.

트리폴리 진입을 노리는 군벌 하프타르는 무아마르 카다피의 쿠데타 동지에서 사형수와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관리하는 망명자로, 다시 리비아 군벌로 극적인 변신의 삶을 살아왔다. 리비아 국민군(LNA)이라는 군벌을 이끌던 그는 2015년 3월 HoR에 의해 리비아군 사령관에 오르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가 스스로 부여한 계급은 육군 원수다.

리비아 전역 장악해도 정치력 발휘할지 의구심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제재 등으로 석유 공급이 줄자 리비아 석유 매장지를 장악한 군벌 칼리파 하프타르 편을 들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리비아 동부 중심지인 벵가지에서 남쪽으로 150㎞ 떨어진 아지다비야 출신인 하프타르는 군장교로 근무하다 1969년 카다피가 일으킨 쿠데타에 가담했다. 하프타르는 1973년 이집트·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욤 키푸르 전쟁(제3차 중동전쟁)에 리비아 원정군으로 참전하는 등 경력을 쌓았다. 카다피 휘하의 군 경력은 1987년 리비아-차드 내전에서 포로로 잡히면서 막을 내렸다. 카다피는 리비아 남쪽의 사하라 국가인 차드의 북부 영토를 차지하려고 1978년 리비아-차드 전쟁을 일으켰다. 1986년 대령으로 진급한 하프타르는 차드 주둔 리비아군 사령관으로 임명됐지만 차드군의 공격으로 600~700명의 부하들과 함께 포로가 됐다. 카다피가 하프타르가 국민 영웅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석방에 소극적이었다는 관측도 있다. 하프타르는 1990년 풀려난 뒤 자이르를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카다피 정권은 1993년 궐석재판을 열어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던 그는 미국 국적도 얻었다. 그러다 2011년 민중봉기로 리비아가 친가다피와 반카다피로 나뉘어 치열한 내전을 벌이자 하프타르는 귀국해 고향인 동부지역 기반의 반카다피군을 지휘했고 혼란기에 군벌로 자리 잡았다. 서부 트리폴리를 점령해 리비아 전체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하프타르의 야망이 이뤄질지 주목된다. 문제는 그가 과연 혼란에 빠진 리비아를 안정시킬 정치력과 힘이 있느냐에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리비아의 혼란은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482호 (201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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