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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살펴 보니] 효과 반신반의… 명문화에 의의 

 

피해자의 증언에 좀 더 무게 둘 듯… 녹취, e메일 알림, 동료 증언 등 중요

7월 16일부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등 개정안)’이 시행됐다. 그동안 폭행이나 성희롱 등은 형법이나 남녀고용평등법 등으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교묘한 괴롭힘에는 대응할 수 있는 법이 없었다. 법이 정의하는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된다.

직장인들은 실질적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 괴롭힘 행위가 명문화된 것에 의의를 둔다는 분위기다. 한 대기업 5년차 대리는 “같은 업무 지시도 굉장히 모욕적인 언사로 하던 직장 상사의 발언 수위가 많이 달라졌다”며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자기검열에 들어간 상사들이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8년차 과장은 “일부 상사들은 ‘이것까지도 괴롭힘인가?’ ‘이제 후배들한테 아무 말도 못 하겠네’라고 투덜대긴 하지만 ‘부당한 업무 지시와 인격 모독은 안 된다’는 기준이 마련되는 분위기”라며 “과거 미투 열풍이 처음 불었을 때와 유사하다”고 평가했다.

주요 대기업들은 취업규칙에 반영

전문가들은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 내 성폭행 사건과 유사하게 처리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법무법인 율촌 조상욱 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 사건도 성폭행 사건과 마찬가지로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증언에 좀 더 무게를 두고 함부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대기업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삼성·현대차·SK·LG·CJ 등 주요 대기업은 이미 취업규칙에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조항을 넣는 작업을 마쳤다. LG화학 관계자는 “전사 임직원을 대상으로 7월 18일부터 온라인 필수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며 “16일부터는 ‘괴롭힘 신고센터’도 사내 포털을 통해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삼성물산 관계자도 “전 직원 대상 교육을 완료했고 실천서약도 받았다”며 “이전에 성희롱 관련 신고채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직장 괴롭힘 관련 새로운 신고채널도 마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SK·CJ 등에서는 이미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했을 경우 즉시 신고 가능한 사내 익명게시판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직장 내 괴롭힘 이슈 등 리스크 관리를 위한 서비스들도 등장하고 있다. 취업 포털 잡플래닛은 ‘ALRI(Alert Risk)’ 서비스를 내놓았다. 전·현직 직장인들이 잡플래닛에 익명으로 제보한 정보나 뉴스 보도, SNS 분석 등을 통해 매월 이슈 동향 리포트를 제공한다. 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기업 입장에서 심각한 위기로 이어지지 않도록 사전에 점검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다.

주요 법무법인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 대응팀을 구성해 기업에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괴롭힘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노동팀을 주축으로 회사자문, 위기관리 등 내부조사 전문 인력이 괴롭힘의 사실관계를 객관적으로 규명해 기업에 정책적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한계도 있다. 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에 사용자를 강제할 방법이 없다.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을 인지했지만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태료나 벌금 등으로 처벌할 수 없다. 현재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있는 처벌조항은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내용뿐이다.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는 물론 사용자도 처벌될 수 있는 호주·노르웨이 등과 대조적이다.

사용자 본인이 괴롭힘의 가해자일 경우에도 피해자가 보호받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따르면 신고를 받고 조치를 취해야 하는 주체가 사용자로 돼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규모가 큰 회사의 경우 이사회나 감사 등을 통해 사용자에 대한 조치가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제대로 문제제기를 하기 어려운 구조다. 한 중소기업에 재직 중인 50대 차장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라는 이슈 자체를 전혀 몰랐다”며 “회사 나갈 각오하고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사용자들의 우려’도 존재한다. 직장 내 괴롭힘 이슈를 처리하느라 조직이 경직되고 생산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2016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간한 ‘국내 15개 산업분야의 직장 괴롭힘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발생하는 연간 인건비 손실액은 제조업에서 약 9647억원, 도매 및 소매업에서 약 6560억원 등 15개 산업에서 총 4조7835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론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이 사라지면 손실액만큼의 금액이 ‘플러스’되는 셈이다.

다만 ‘이런 것도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모르겠다’는 직장인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조상욱·김완수 변호사에게 헷갈리는 직장 내 괴롭힘 사례를 묻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들어 봤다.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들어와서 지속적으로 댓글을 남기고 업무 외적으로 만나자는 상사가 있다. 성적 수치심이 드는 언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속적인 이런 행동이 불편하긴 하다.

“관계의 우위에서 발생한 일이라면 괴롭힘이라고 볼 수 있다. 얼마나 지속적으로 일어났는지, 본인이 거절 의사를 표한 적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밖에서 만나자고 하거나 지속적으로 댓글을 다는 것은 업무상 필요성이 없는 부적절한 행위다. ‘싫다’는 표시를 간접적으로 했는데도 계속 한다면 상당성의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계속 데이트를 요구한다면 성희롱으로 볼 수도 있다.”

후배한테 괴롭힘을 당하는 선배도 있지 않나.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 지위는 낮은 후배가 직장 내 관계에서 우위에 있을 수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서 규정하는 관계는 폭넓다. 출신 지역, 노동조합 가입, 정규직·비정규직 여부 등 관계에서의 우위를 판단하는 요소를 매우 다양하게 보고 있다.”

남자라는 이유로 정수기 물 교체 등 힘 쓰는 일은 다 도맡아 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이 절대적으로 다수인 조직에서 여성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집단적으로 남성 직원에게만 일을 몰리게 한다면 괴롭힘으로 볼 수도 있다. 집단 대 개인의 측면으로 봤을 때 이 같은 업무 지시가 반복적으로 정도가 넘어서 일어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괴롭힘이라기보다는 직장 내 업무 배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게 좋다.”

업무와 관련한 질책과 지시는 괴롭힘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 모두 앞에서 질책하는 것은 모욕감이 든다.

“업무 지시여도 사회 통념상 상당한 범위를 벗어났다면 괴롭힘에 해당할 수 있다. 물론 한두 번 지적한 것이라면 괴롭힘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모욕감을 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면 괴롭힘에 해당한다.”

직장 내 괴롭힘은 피해자 진술만 인정되는 건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억울한 경우도 있지 않겠나.

“피해자 진술을 100% 다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의 원칙은 ‘피해자 진술을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용자는 확실한 사실관계 조사를 통해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가해자에게도 충분한 진술 기회를 줘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 증거는 피해자가 수집해야 하나.

“피해자가 괴롭힘 당했음을 입증해야 한다. 최근 많이 사용하는 증거는 녹취다. 괴롭힘을 당했을 때 그 순간에 대해 최대한 빨리 e메일로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도 현장성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주변 동료들의 증언도 도움이 된다.”

- 이후연·신혜연 중앙일보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1494호 (20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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