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이후 헌법 개정하며 공산주의 색채 희석…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현대 국가 건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9월 12일 베이징 향산에 새로 개관한 향산혁명기념관을 시찰한 후 간부들에게 “항우의 전철을 따라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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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10월 1일로 성립(成立·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용어임) 70주년을 맞았다.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년)은 천안문 광장 망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의 중국은 누가 봐도 거대한 용이 승천을 꿈꾸며 꿈틀거리는 형상이다.경제적으로 중국의 발전은 눈부시다. 국제통화기금(IMF) 2018년 통계를 기준으로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명목금액 기준으로 9608달러로 세계 67위다. 구매력 등을 감안한 구매력지수(PPP)로는 9691달러로 세계 82위다. 어느 기준이든 올해 1만 달러를 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됐다. 중국은 건국 70주년과 1인당 GDP 1만 달러 시대 입성이라는 겹경사를 맞게 됐다.
건국 70년, 1인당 GDP 1만 달러 시대 입성이런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화제국’ 수립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고대에 동서 세계를 잇던 육상·해상 실크로드를 현대에 복원하겠다는 ‘일대일로’ 정책에는 국제 영향력 극대화 전략이 엿보인다. 총연장 3만㎞에 가까운 고속철도가 선봉에 서있다. 이미 102개국과 진출 계약을 했다. 군사력도 전방위로 증강 중이다. 공격용 무기체계인 고가의 항공모함을 2025년까지 7척이나 보유할 것으로 알려졌다.지적받는 문제점도 적지 않다. 경제 성장으로 대국을 지향하면서도 민주주의나 자유·인권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를 둔다. 홍콩 사태는 그런 사례이면서 중국 일국양제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중국 내부의 티베트 불교도와 신장위구르 무슬림에 대한 동화정책에 대한 문제점도 국제사회로부터 끊임없이 지적받고 있다. 지난 70년간 대만과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 통일을 위한 협상도 이루지 못한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그럼에도 미국과 무역분쟁을 벌일 정도로 글로벌 경제대국이 됐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누가 봐도 중국은 글로벌 경제대국이다. 중국이 여기까지 오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 길은 역대 지도자의 공과 과로 점철됐다. 중국 최고지도자는 초대 마오쩌둥(재임 1945~76년)을 거쳐 화궈펑(1921~2008년, 재임 1976~78년)과 덩샤오핑(鄧小平·1904~97년, 재임 1978~89년), 장쩌민(江澤民·1926년~·재임 1989~2002년), 후진타오(胡錦濤·1942년~, 재임 2002~2012년)을 지나 시진핑(習近平·1953년~·재임 2012년~)으로 이어졌다. 시 주석은 현재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을 맡아 당군정을 총괄하고 있다.마오쩌둥은 공산주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군사전략가로 공산혁명에 성공해 공산정권을 수립한 건국 주역이다. 하지만 마오는 1957년 반우파투쟁으로 당내 주도권을 장악한 다음 미국과 영국을 15년 안에 따라잡겠다며 농업·공업 대증산 정책인 대약진운동(1958~62년)에 벌였다가 현실을 무시한 시행착오적 정책으로 대혼란과 기아를 초래했다. 중국 통계로 봐도 이 기간에 인구가 1625만 명이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며, 연구에 따라 4500만~76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마오의 과오는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봉건·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를 이룩하겠다는 명분으로 정치·경제·사회·사상·문화의 전반적인 개혁운동인 문화대혁명(1966~76년)을 일으켰다. 어린 홍위병을 앞세워 전통문화를 대대적으로 파괴하고 하방운동을 펼쳐 도시 주민을 대대적으로 지방 농촌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반대자에게는 재판 없이 홍위병의 린치를 가했다. 그 결과는 중국 사회의 전반적인 후퇴였다. 중국공산당은 1978년 열린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 회의에서 문혁기의 사망자를 40만 명, 피해자를 1억 명 정도로 추산했다. 사망자 숫자는 연구 결과에 따라 40만~1000만 명 이상으로 차이가 있다. 문화대혁명은 1976년 마오의 사망과 문혁 기간 중 권력을 휘둘렀던 장칭(江靑)·왕훙원(王洪文)·장춘자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 ) 등 이른바 사인방의 체포로 막을 내렸다.
덩샤오핑, 마오 공산주의 노선을 개혁·개방으로 전환
▎중국 공산혁명 지도자 마오쩌둥(왼쪽)과 덩샤오핑의 1959년 모습. /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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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덩샤오핑은 마오의 공산주의 노선을 개혁·개방으로 전환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대 중국의 노선을 구축했다. 중국이 오늘날 눈부신 경제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근본적인 배경은 덩사오핑의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시장경제 주창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중국 헌법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중국의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서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국가의 근본 과업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길을 따라 전력을 다해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중국의 여러 민족인민은 계속하여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받들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의 지도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과 덩사오핑 이론, ‘세가지 대표’의 중요 사상의 인도 아래 인민민주주의 독재 및 사회주의의 길을 견지하고 개혁·개방을 견지하며 사회주의의 각종 제도를 끊임없이 개선하며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사회주의 법제를 건전화하며 자력갱생 고군분투하여 공업, 농업, 국방 및 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점차적으로 실현하며 물질문명과 정치문명 정신문명의 조화로운 발전을 추진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부강하고 민주적이며 문명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어 나갈 것이다.’이처럼 중국 헌법은 덩샤오핑 이론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덩샤오핑이 주창한 중국공산당의 공식 이념이 되고 개혁·개방의 바탕이 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시장경제’도 헌법에 명시됐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는 마오 시절에는 ‘농민이 주도가 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의미했지만, 덩은 이를 사회주의의 기본 요건을 온전히 갖추는 것으로 바꿔 놓았다. 즉,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흑묘백묘론으로 상징되는 실용주의,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자가 되어라’는 선부론을 바탕으로 먼저 경제 발전을 이뤄 물질적 토대를 갖춘 다음 공산주의 사회로 가자는 이론이다.그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덩사오핑 이론의 정착과 중국의 경제 발전은 상당한 진통을 거쳐 이뤄졌다. 이는 중국의 헌법 개정 역사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마오쩌둥 시절인 1954년 제정된 중국의 헌법은 1975년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공산주의 색채를 희석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현대국가 건설에 힘을 실어줬다. 1975년 첫 개정 때는 유명무실했던 국가주석 제도를 폐지하는 등 정치·제도적 변화에 그쳤지만 1978년 3월의 헌법 개정은 중국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사오핑이 작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덩은 공산주의 계급투쟁 노선을 의미하는 ‘전면적인 독재’라는 구절을 헌법에서 삭제했다. 대신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가리키는 ‘4개 현대화’를 헌법에 명문화했다. 4대 현대화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년, 1949~76년 국무원 총리, 1954~1976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가 주창한 정책으로 덩은 이를 중국의 공식 경제정책으로 삼았다. 중국은 이때부터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운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이렇게 변화의 기틀을 다진 덩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2회 전체 회의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제안했다, 이 1978년 개헌은 중국의 국내체제 개혁과 대외개방 정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시 헌법에 삽입된 ‘4개 현대화’는 개혁·개방의 상징이 됐다. 덩은 “인민들이 잘먹고 잘사느냐가 사회주의냐 아니냐의 핵심”이라며 이념보다 실용주의 노선을 앞세웠다. 덩의 개혁·개방 사상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위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자본주의에도 계획경제가 존재하듯 사회주의에도 시장경제가 있다’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일방적인 평등화나 평준화보다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져라’는 선부론(先富論)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덩의 이러한 신념은 헌법 개정 작업을 통해 비로소 실현에 들어갔다. 공산주의의 기본정신은 부정하지 않고, 인민 민주주의 독재정치체제를 지키며, 공산당의 지도력을 유지한다는 중국 사회주의의의 3가지 원칙을 유지하면서 경제 발전을 통한 부강한 중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덩의 신념이 중국 헌법에 고스란히 반영됐다.개혁·개방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보수파의 반대 때문이다. 1979년 헌법 개정은 정치적으로 일시적인 보수화를 의미한다. 이 개정을 통해 4대 민주, 또는 4대 자유로 불렸던 대명(大鳴·자유로운 발언)·대방(大放·자유로운 조직과 활동)·대변론(大辯論·자유토론)·대자보(大字報·벽보붙이기)를 폐지했다. 1978~79년 웨이징성(魏京生) 등이 베이징 시단(西單)의 벽에 민주화·자유를 선전하는 대자보를 붙인 ‘민주의 벽’ 운동이 원인이었다. 중국공산당이 개헌을 통해 개혁·개방의 한계를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4대 민주는 문화혁명 시기 인민의 완전한 언론·조직 활동을 보장해 기득권 세력을 타도한다며 마오쩌둥이 주창해선 인민동원방식이었지만, 민주의 벽 운동에선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1982년 개헌도 보수파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무산계급독재,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4원칙을 지킨다는 내용의 ‘4항 기본원칙’을 헌법에 반영했다. 급진 개혁 요구를 제한하는 장치다. 이를 통해 덩은 중국의 개혁·개방은 정치개혁 없는 경제개혁임을 분명히 했다. 이후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당제·공정선거 등 정치개혁 없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급진 개혁 요구 제한하는 장치도 마련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6월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만나 무역협상 재개에 합의했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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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개혁을 통해 보수파를 달랜 덩은 시장경제의 발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1988년 개헌에선 민간경제의 가치와 지위를 인정하는 내용이 추가됐다. 헌법 11조에 “자영경제, 사영경제 등 비공동 소유경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중요한 구성부분”임을 인정하고 “국가는 자영경제 사영경제 등 비공유 경제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한다”라고 명문화했다. 토지사용권 양도도 가능하게 했다.1993년 개헌은 획기적이었다. 국유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했기 때문이다. 경제나 기업 활동에서 공산당이나 정부의 입김을 배제한 조치다. 99년 개헌에선 덩샤오핑 이론에 헌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사회주의 법치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헌법 5조에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도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법에 의하여 나라를 다스리며 사회주의 법치국가를 건설한다’며 법치를 명문화했다.2004년에는 사유재산권 보장을 헌법에 못박았다. 헌법 13조에 ‘공민의 합법적인 사유재산은 불가침’이라는 내용을 넣었다. 중국이 공산화한 지 55년 만에 사유재산은 공민의 합법적인 권리로 지위를 회복했다.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 제도를 실현해 빈부격차를 없앤다는 고전적 공산주의의 이념은 인민이 잘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 앞에 설 자리를 잃었다. 아울러 중국공산당은 항상 중국의 선진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는 장쩌민의 3개 대표사상의 헌법적 지위도 확립했다. 이는 앞에서 소개한 헌법 서언에도 들어있다.
중국공산당도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변모헌법 개정에 맞춰 중국공산당도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변모를 꾀했다. 개혁·개방 초기 과거의 잘못된 판결과 정치적 평가를 바로 잡는 평반(平反)을 활성화해 문화혁명을 포함한 과오를 청산하고 중국 사회를 재구성할 계기로 삼았다. 심지어 당원 자격도 무산대중에서 당을 지지하는 자본가(紅色資本家)까지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사회주의는 정치적 의미를 상실했지만 공산당의 권위는 유지됐으며 변화와 개혁을 실험할 수 있는 추진력을 얻을 수 있게 됐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역사는 경제에 활력을 주는 방향으로 부단히 발전해왔다. 이렇게 끊임없는 자기 개혁이 중국 발전의 원동력일 것이다. 중국은 이제 동북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성립 70주년을 맞은 중국과 공존할 방법을 찾는 것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과제일 것이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