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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터키의 입 안에 던져준 쿠르드족의 운명은] 미국, 그동안 일관성 있게 쿠르드족 ‘배신’ 

 

트럼프 “돈 많이 든다”며 시리야에서 철군... 미, 지난 100년간 7차례 배신

▎사진:연합뉴스
미국 백악관이 10월 6일 시리아 동북부에서 소수민족 쿠르드족 민병대인 인민수비대(YPG)와 함께 작전을 펼치던 미군을 철수시킨다고 발표하면서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그러자 터키는 10월 9일 시리아 내 쿠르드족 지역을 폭격하고 지상 병력도 보내 공격에 들어갔다. 터키는 시리아와의 국경에서 수십여 ㎞ 안쪽까지 점령해 쿠르드족을 몰아내고, 이른바 ‘안전지대’를 설치하려 한다. 세력을 확대하고 무장까지 한 시리아 쿠르드족이 자국의 쿠르드족과 접촉하고 연결하는 것을 이러한 차단 장치로 막아보겠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미군의 시리야 철군은 미국의 사실상 동맹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던 쿠르드족에 대한 보호막을 제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조치다. 시리아 쿠르드족이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자국내 쿠르드족과 연결할 것을 두려워한 터키가 시리아 쿠르드족을 공격해 세력을 약화시키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리아 쿠르드족은 미국에는 동맹이지만 터키는 이들을 ‘테러 세력’으로 간주한다. 터키는 나토 회원국으로 형식적으로는 미국의 동맹이다. 미국의 나토 동맹국이 미국을 도와 온 또 다른 동맹인 쿠르드족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결정으로 미국의 동맹인 쿠르드족을 배신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미군 철수를 발표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돈이 많이 든다”는 말을 했다. 혈맹도 돈 앞에선 사자의 입으로 던질 수 있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트럼프의 조치로 세계는 혈맹도 돈 앞에선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금권 동맹 시대’를 맞고 있다.

혈맹도 돈 앞에선 헌신짝


시리아에선 동북부에 주로 거주하는 쿠르드족이 2011년 3월 시리아 내전이 발생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자체 무장을 하고 자치 행정을 펼쳤다. 이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쿠르드족은 2014년 1월 하사케라는 도시에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치안 공백을 틈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이슬람국가(IS)가 시리아 동부와 이어진 이라크 북부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IS가 서구에서 테러를 벌이자 미국과 일부 나토 동맹국은 IS 격퇴전에 나섰다.

쿠르드족 민병대인 인민수비대(YPG)는 2014년 9월 이후 미국에 협조해 IS 퇴치 공격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과정에서 1만5000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전쟁 승리에 기여했다. 2017년 IS의 사실상 수도인 시리아 북주 락까를 장악한 데 이어 지난 3월에는 IS 마지막 근거지로 불리던 바구즈를 미군과 함께 점령했다. YPG는 시리아의 반정부군이 모인 시리아민주군(SDF) 소속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이처럼 쿠르드족은 지난 5년간 땀과 피를 바치며 미국에 협조했지만 그 대가는 미국의 배신과 미국의 동맹국가 터키의 공격이었다. 미국 의회와 국제사회의 비난에 직면한 트럼프는 터키의 쿠르드족 공격을 “나쁜 생각”이라고 말한 데 이어 공격할 경우 “터키 경제를 쓸어버리겠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터키가 예상대로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해 시리아 쿠르드족을 공격하자 11일에는 양측을 중재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터키는 쿠르드족을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자국 국민인 쿠르드족에 대해서도 군사적 공격을 가하고 있다. 터키가 상당한 군사력과 실전 경험을 갖춘 시리아 쿠르드족과 진짜 대화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사태 해결 전망이 어두운 이유다. 트럼프가 열어젖힌 배반의 시대는 쉽사리 사라질 것 같지가 않다. 쿠르드족은 어떤 민족인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BBC방송 등의 정보를 종합하면 이렇다. 전체 인구는 CIA 2015년 추정치로는 3000만 명이며, 프랑스 파리의 쿠르드 연구소의 2017년 추정치는 3640만~4560만 명이다.

쿠르디스탄으로 불리는 쿠르드족 밀집 거주지역은 터키, 이라크, 시리아, 이란에 걸쳐 있다. 터키에는 1430만~2000만 명, 이란 820만~1200만 명, 이라크 560만~850만 명, 시리아 200만~360만 명의 쿠르드족이 거주한다. 쿠르드족이 민족국가를 건설해 독립하려면 이 4개국이 영토와 인구를 내놔야 한다는 이야기다. 쿠르드족 독립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다. 쿠르디스탄 외에도 많이 퍼져 나가 있다. 독일에 80만 명, 이스라엘 20만 명, 프랑스 15만 명, 스웨덴 8만3600명, 네덜란드 7만 명, 벨기에 5만 명, 러시아 6만3800명, 영국 5만 명, 카자흐스탄 4만2300명, 아르메니아 3만7500명, 스위스 3만5000명, 덴마크 3만 명, 요르단 3만 명, 오스트리아 2만3000명, 그리스 2만2000명, 미국 1만5400명 등으로 추정된다. 주목할 점은 미국에는 겨우 1만5400명밖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발언권이 약한 셈이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도대체 왜 쿠르드족을 배신했을까. 10월 7일 아침 뉴욕 타임스(NYT)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은 트위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왜 쿠르드족을 배신했는지에 대해 3가지 추측을 내놓았다.

“트럼프는 이렇게 쿠르드족을 배신했는데 그 이유는 (a)그는 터키에 사업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b)잔혹한 독재자인 에르도안(터키 대통령)이 그와 같은 부류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c)그의 상관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완벽하게 그럴듯하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쿠르드족, 19세기 후반 독립 추구


이에 미국 온라인 뉴스매체 ‘더 인터셉트’는 “미국은 지난 100년 간 쿠르드족을 최소한 8차례 배신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사용한 배신(Betray)라는 용어는 쿠르드족을 사자의 입 안에 던져준 진짜 배신, 쿠르드족에 대한 잔혹한 공격을 묵인한 사례, 그리고 희망을 저버린 경우를 모두 포함한다. 이번 조치를 포함한 8개의 배반 내용을 상세하게 알아보자. 쿠르드족은 현재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 등에 걸쳐 살고 있다. 쿠르드족은 19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에 확산한 민족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독립을 추구했다. 당시는 오늘날 터키를 중심지로 하는 다민족 국가인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을 들었던 오스만 제국은 패전국이 되었다. 1920년 8월 20일 연합국과 맺은 세브르 조약에 따라 제국은 해체되었다. 터키가 아닌 영토는 모두 승전국이 점령했다. 지중해 동부의 중근동 지역은 오랫동안 눈독을 들이던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해 점령했다. 오늘날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은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오늘날 이라크인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이 들어선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에 가혹했지만 쿠르드족에는 독립국가 건설의 희망을 안겼다. 오늘날 터키 영토의 상당 부분을 승전국에 넘겨주기로 했다. 이스탄불 주변의 유럽 영토인 동트라키아의 대부분, 아나톨리아 반도(오늘날 터키 본토에 해당), 서부의 스미르나(오늘날 이즈미르)를 그리스에 넘기기로 했다. 터키 동북부는 아르메니아에 할양하고, 동남부는 쿠르드 국가 건국을 위한 땅으로 남겨졌다. 하지만 더 많은 영토를 원한 그리스가 터키에 쳐들어갔다가 1922년 패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터키 군부는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연합국과 재협상해 세브르 조약을 로잔 조약으로 바꾸었다. 로잔 조약은 서부의 동트라키아와 스미르나는 물론 아르메니아와 쿠르드족에게 주기로 했던 동부 영토도 터키에 돌려주기로 했다. 미국은 로잔 조약을 지지했다. 미국이 쿠르드족에 상처를 준 첫 번째 사례다.

쿠르드족은 1922년 9월 영국이 위임 통치하던 메소포타미아(오늘날 이라크) 중동부의 쿠르드족 거주지에 쿠르디스탄 왕국을 세웠지만 1924년 7월 영국에 의해 무너졌다. 1927년 10월에는 터키 동부 지역에 아라라트 쿠르드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1930년 9월 터키에 의해 재점령되고 나라는 사라졌다. 이웃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군은 터키를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이를 반겼지만 쿠르드족보다 터키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는지 터키의 재점령을 방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강대국이 된 미국은 중동에서 영국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라크 내 쿠르드족에게 무기를 공급해 그들을 무장시키고, 이라크 중앙정부에 맞서도록 도왔다. 1932년 영국이 세웠던 이라크 왕국은 1958년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고 반영주의자 압둘카림 카심이 총리 겸 국방장관을 맡아 독재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 지원은 1963년 이라크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바트당 군사쿠데타가 발생해 카심이 제거되자 즉각 중단됐다. 미국은 이라크의 새 정부에 네이팜탄 등 군수물자를 지원했으며 바트당 군사정권은 이를 쿠르드족에 사용했다.

세 번째 배신은 1970년대에 발생했다. 미국은 당시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 군사정권이 친소정책을 펼치자 이라크 쿠르드족을 다시 무장시켜 중앙 정부에 맞서게 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 행정부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그때에는 친미국가였던 이란을 통해 국경을 맞댄 이라크 쿠르드족 지역에 무기를 공급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란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쿠르드족이 이란에도 상당수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국경을 맞댄 이라크에서 쿠르드족이 중앙정부를 상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두면 독립을 추진하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이란 내 쿠르드족도 이란에서 분리해 쿠르드 국가 건설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란의 샤(군주)가 쿠르드족에 대한 무기 공급을 중단하는 내용의 협정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맺는 것을 방관했다. 후세인은 협정에 서명한 직후 북부의 쿠르드족 거주지역에 군대를 보내 한때 미국의 동맹이던 쿠르드족 수천여 명을 살해했다. 미국은 쿠르드족의 피의 절규에 귀를 닫았다. 의회에서 이 문제를 묻는 질문에 키신저는 “은밀한 활동을 선교 활동과 혼동해서는 안된다”라고 잘라 말했다.

4번째 배신은 1988년대 발생했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정부는 국제사회가 금지하는 화학무기인 신경가스 살포를 포함해 잔혹한 방법으로 ‘인종학살’을 저질렀다.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을 절멸시키려고 했던 것처럼 쿠르드족을 말살하려는 시도였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88년 3월 이라크군이 이란 국경에 가까운 쿠르드족 마을인 할라브자에서 독가스를 살포해 3200~5000명이 숨지고 7000~1만 명이 신체 손상이나 부상을 입은 사건이다. 당시 이라크는 이란-이라크 전쟁(1980년 9월~1988년 8월)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은 이란 견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라크를 지원했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샤의 군주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와 이슬람 시아파 율법학자들의 감독체제가 결합한 신정 체제가 들어섰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벌어지면서 이란발 반미 이슬람 혁명의 중동지역 확산이 주춤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후세인이 신경가스를 사용하는 것을 알고도 눈감았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비난 받고 타격을 입는 것은 이란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쿠르드족은 다시 한 번 미국에 배신당했다. 미국의 책임 있는 당국자 누구도 사담 후세인의 쿠르드족에 대한 인종 학살을 비난하지 않았다.

5번째는 1990~1991년 걸프전 당시에 벌어졌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하자 미국과 서방 국가,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상당수 중동국가는 연합군을 조직해 이라크를 공습했다. 당시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군대와 국민이 스스로 나서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슬람 수니파 중심의 후세인 정권에 맞서던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와 북부의 쿠르드족이 이에 호응해 봉기했다. 하지만 이라크군이 시아파와 쿠르드족의 진압에 나섰는데도 미국은 방관했다.

NYT의 베이루트 지국장 출신으로 국제전문 컬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부시 대통령은 쿠르드족과 시아파 반란군은 물론 이라크의 민주화 운동가들도 지원하지 않았다”며 “후세인의 철권통치는 이라크뿐 아니라 이웃한 미국의 동맹국 사우디아라비아와 터키의 철권통치도 합리화해주었다”라고 설명했다. 프리드먼은 “미국은 이라크에 민간 정부가 아니라 군사 정권을 원했다”며 “미국이 원하던 최선의 시나리오는 후세인 아닌 다른 군사 정권이 들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계 여론이 악화하자 미국도 뭔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이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보호에 나서다 미국은 이를 지원했다.

미군 지원 받은 터키, 쿠르드족 살해


▎사진:연합뉴스
6번째 배신은 1990년대에 있었다. 당시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에는 쿠르드족에 대한 2가지 시선이 동시에 존재했다.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미국의 적인 사담 후세인 정권의 박해를 받기 때문에 미국에 ‘좋은 쿠르드족’이었다. 하지만 터키 동부의 쿠르드족은 터키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분리를 원하면서 미국의 나토 동맹국인 터키를 성가시게 했기 때문에 ‘나쁜 쿠르드족’이었다. 미국은 터키에 엄청난 무기를 지원했으며, 터키는 이를 사용해 수만 명의 쿠르드족을 살해하고 수천 개의 마을을 불태웠다.

7번째 배신은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에 이뤄졌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이 조직한 군대인 페슈메르가(죽음에 맞서는 사람이라는 뜻)는 미국의 편에서 후세인의 이라크군에 맞섰다. 전쟁이 미국 측의 승리로 끝나고 사담 후세인 정권이 몰락하자 이라크 내 쿠르드족 자치지역의 주민들은 독립의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2007년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을 우려한 터키는 이라크 내 쿠르드족 지역을 폭격했다.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던 미국은 이를 승인했다. 미국은 이처럼 일관성 있게 쿠르드족을 배신해 왔다. 이번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시리아 철군은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8번째이자 최신 사례다. 쿠르드족의 속담으로 “친구가 아니라 산을 벗하라”라는 말이 있다. 쿠르드족에게 이 말이 틀렸다고 누가 말할 수가 있을까.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1505호 (201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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