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세력, 노딜 브렉시트 겨냥하고 매도 포지션… 존슨 총리는 벼랑끝 전술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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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유럽에서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놓고 지난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영국에 이어 다른 회원국의 연쇄적인 EU 이탈이 잇따를까 염려될 수밖에 없는 EU로서는 영국에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하지만 EU와 경제적으로 밀접하며,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이 망가져서는 EU에 좋을 게 없다. 국제금융의 중심지인 런던에서 금융업이 갑자기 제 기능을 잃는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영국의 EU 이탈(브렉시트)이 경착륙해서는 EU나 영국이나 득 될 것이 없다.당초 예정됐던 공식적 브렉시트 기일은 2019년 3월 말이었다. 하지만 EU와 영국 정부가 2018년 11월에 끌어낸 합의안이 영국 의회 비준에 번번이 실패하며 미뤄졌다. 현재 예정일인 2019년 10월 말에 그대로 브렉시트가 현실화될지도 여전히 안갯속이다. EU 이탈을 선언하기는 쉬웠으나, 실행까지는 또 다른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큰 장벽은 영국령 북아일랜드와 EU 회원국인 아일랜드가 맞대고 있는 국경 문제다. 10월 말 기일을 앞두고 극적 합의에 이를지는 기존 합의안에 담긴 해법이었던 안전장치(백스톱 조항)를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묘안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기존 합의안에서는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아일랜드가 각자의 국경 통과 때 통관·통행 절차를 엄격히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조항이 있었다. 즉 별도 합의가 있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북아일랜드가 EU 단일시장 규제를 수용하고 영국 전체는 관세동맹에 잔류하도록 한 것이다. EU와 협상을 주도했던 테레사 메이 전 영국 총리는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피의 역사’를 피할 유일한 방안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존슨 현 영국 총리 등 강경파는 EU에 종속된다며 극렬하게 반대했다. 기존 합의안이 힘을 얻으려면 당사자인 아일랜드는 물론 영국 의회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10월 17~18일 진행된 EU정상회담까지 극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합의안이 영국 의회 비준에 또 다시 실패하면 브렉시트는 다시 미뤄질 운명에 처한다. 9월 초 통과된 영국의 ‘유럽연합(탈퇴)법’에 따라, 영국 정부는 10월 19일까지 EU탈퇴 합의안의 재협상에 실패하거나 노딜 브렉시트(합의 없는 EU 이탈)에 대한 의회 승인을 받지 못할 경우 EU 측에 탈퇴 시한(당초 10월 31일)을 2020년 1월 31일로 연장해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 하지만, 변수가 있다. 만일 그런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존슨 총리는 법의 망을 피해서라도 브렉시트를 관철시키겠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금융시장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 노딜 브렉시트가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존슨 총리가 노딜 브렉시트를 강행하려는 것은 영국 내 난맥상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아무도 노딜 브렉시트를 원치 않지만 영국 내 합의가 번번이 무산되면서 차라리 EU로부터 영국에게 더 좋은 합의안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벼랑 끝 전술로 노딜 브렉시트를 감수하는 식이다. EU와의 합의 및 영국 내 합의가 정녕 불가능하다면 합의를 포기할 일이지, 브렉시트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심산으로 해석할 수 있다.아무런 합의 없이 EU를 탈퇴하게 되면 제조업 등의 상품 부문을 중심으로 통상관계에서 경제적 손실이 커질 것이다. 영국 내 투자는 더욱 위축될 것이며, 영국 부동산 등 자산가격 하락도 불가피하다. 8월 초 블룸버그 설문에 따르면, 노딜 브렉시트 때 파운드화 가치는 1파운드당 1.10달러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경우 금융시장의 위험회피심리도 부각될 것이다. 한국 경제의 영국 수출 비중은 1%가량으로 교역량만 놓고 보면 비중이 미미하다. 그러나 금융시장의 심리 악화는 한국 금융시장에까지 파급될 것이다.세간에서는 향후 브렉시트 시나리오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유명 정치 사이트인 ‘프레딕트잇(Predict It)’에서 이를 엿볼 수 있는데, 9월 초 유럽연합(탈퇴)법 마련 이후 2019년에 노딜 브렉시트가 발생할 확률은 낮은 것으로 점쳐지지만 10월 들어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이다.
금융시장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기피한다. 영국이 처한 운명의 불확실성은 곧 파운드화 가치의 저평가를 초래했다. 브렉시트 이슈를 어렴풋이 알고 있다면, 실제 브렉시트가 공식화되는 상황에 파운드화가 추가 하락할 것이라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단순한 브렉시트는 이미 시장이 차고 넘치게 반영한 터라, 무난하게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면 즉 정상적인 합의 절차를 거쳐 브렉시트가 발생하면 파운드화는 오히려 반등할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노딜 브렉시트가 가시화되지는 않은 현재의 외환시장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문제는 노딜 브렉시트가 발생하는 경우다. EU와 영국이 이에 대비해서 통관절차를 간소화하고, 수입관세율은 대폭 인하하는 등 최소한의 완충장치는 마련해뒀다. 그러나 충분치 못하다. 영란은행은 아무 대비 없이 노딜 브렉시트가 발생할 경우 영국의 경제 규모가 7.5% 감소할 것으로 전망한 데 비해, 이러한 완충장치를 감안할 경우에는 경제 규모 감소폭을 5.5%로 전망해 충격이 완화될 것으로 예상했다.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의 국운이 서서히 쇠퇴하는 과정에, 파운드화도 숱한 위기를 겪으며 그 가치가 장기적으로 하락해왔다. 현재 외환시장의 투기세력들은 이미 달러화 대비 파운드화 매도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영국이 노딜 브렉시트를 피해 간다면 투기세력들은 재빨리 파운드화 매도 포지션을 정리하면서 파운드화 가격 반등에 기여할 가능성이 크다.단지 브렉시트가 아니라, 노딜 여부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영국의 운명은 10월 말에 윤곽이 드러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시기를 다시 내년으로 미루게 될 수도 있다. 단, 존슨 총리가 침몰하는 영국호(號)를 구할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혹여 브렉시트를 원만하게 이끌어 노딜 브렉시트라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더라도 영국인의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기는 어려운 듯하다.
※ 필자는 신한은행에서 환율 전문 이코노미스트로 일하고 있다. 공인회계사로 삼일회계법인에서 근무한 경력을 살려 단순한 외환시장 분석과 전망에 그치지 않고 회계적 지식과 기업 사례를 바탕으로 환 위험 관리 컨설팅도 다수 수행했다. 파생금융상품 거래 기업의 헤지 회계 적용에 대해서도 조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