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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29) 신일용 만화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만화로 그렸죠.” 

 

B2B 마케팅 30년 전문가 출신… 차기작은 영어 학습만화

▎사진 : 전민규 기자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습니다. 만화를 그리는 동안엔 시간 가는 줄 몰라요. 회사 다닐 때처럼 매일 작업실로 아침 8시에 출근해 저녁 8시에 퇴근하고, 여름엔 7 to 9도 해요. 만화책이 잘 팔리면 좋겠지만, 앞으로도 팔리는 만화보다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릴 겁니다.”

지난해 만화책 [아름다운 시대 라벨르 에뽀끄]를 펴낸 신일용(63) 만화가는 “인생 2막을 아마추어 만화가로 살겠다”고 말했다. ‘만화로 떠나는 벨에포크 시대 세계 근대사 여행’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3권짜리다. 책 앞날개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깃거리가 열 개쯤 있는데 만화로 그리고 싶었다. 10~15년 걸릴 것 같아 당장 시작하려 회사를 떠났다. 꽤 괜찮은 회사들에서 꽤 오래 일했다.”

책날개에 ‘작가의 출간 예정작’ 예고하기도

그는 경기고,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삼성에 입사해 삼성물산, 삼성SDI 등에 근무했고, 효성그룹 계열사인 갤럭시아커뮤니케이션즈 대표를 지냈다. 삼성그룹 비서실 인사팀 과장으로 근무 당시 지금의 삼성 채용시스템을 만든 실무자였다. 스토리텔링에 강한 자칭 이야기꾼에 고교 시절 미술반 활동을 한 것이 만화를 그리게 된 배경이다.

“만화는 도구일 뿐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데 출판시장도 경쟁이 치열하잖아요. 차별화를 노리는 한편 소셜 미디어에 빠진 젊은 층의 눈길을 끌려고 만화라는 장르를 고른 거죠.”

그는 기업에 종사하던 시절 B2B 마케팅에 30년 몸담은 마케팅 전문가이다. 그가 생각하는 만화 생산자로서 자신의 강점은 세 가지다. 우선 품질의 수준을 떠나 질 자체가 고르다. 통계 용어를 빌리자면 분산이 작은 편이다. 둘째 하루에 만화 네 쪽을 그리는데 이 정도면 만화가로서 생산성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스토리를 끝까지 끌고 가는 스토리텔러로서의 힘이 강하다. 라벨르 에뽀끄는 3권 합쳐 950여 쪽에 이르는 긴 스토리이다. “20대에 만화가가 됐다면 프로가 되어야 했겠죠. 팔리는 토픽을 찾고 시류를 따라 만화 대본의 논조도 시장에 맞췄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아마추어 만화가로 남고 싶습니다. 큰돈 욕심도 없어 작업실 유지할 정도만 벌면 돼요.”

만화는 노트북 화면에 스케치북이라는 프로그램을 활용해 터치 펜으로 그린다. 종이도 물감도 필요 없다. 그가 이번에 다룬 ‘라벨르 에뽀끄’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1차 대전 발발 전 유럽의 황금시대를 가리킨다. 식민 자본주의가 꽃피운 시대이자 그 반작용으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가 꿈틀댔고 새로운 사조의 미술과 음악, 문학이 활기를 띠었다. 과학은 발달했고 사람들은 낙관주의에 젖어 있었다. 격동의 시대였고, 역사가 직선으로 진보한다고 당대의 사람들은 믿었다. 무엇보다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종횡으로 첨예하게 부딪치며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인상적인 사례가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이다. “드레퓌스 사건을 은폐한 프랑스 군부는 독일과 유태인에 대한 국민의 혐오와 증오심을 악용해 되레 국민을 협박했습니다. 고용된 에이전트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도적적 해이의 전형이죠. 당시 보수와 진보 양 진영에서는 스스로 믿고 싶어하는 드레퓌스에 관한 거짓말이 확대 재생산됐습니다. 마치 요즘의 우리 사회와 같죠. 그러나 진실은 진영을 넘어서는 가치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소셜 미디어는 가짜 뉴스의 유통과 확증 편향 강화의 통로가 되고 있어요. 근본적으로는 빗나간 입시 교육과 책을 읽지 않는 세태에 원인이 있다고 봐요.”

그는 프랑스가 위선과 반목, 야만과 혐오로 얼룩진 드레퓌스 사건을 겪으며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발전했고 똘레랑스의 전통을 이어갔다고 주장했다. “똘레랑스가 생기려면 깊은 자기 성찰이 필요하고 성찰을 하려면 재료가 되는 자기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은 독서를 통해 만들어져요. 독서는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킵니다. 단 자기 생각을 할 기회를 되레 빼앗는 자기 계발서는 논외예요.”

그는 다음 작품을 ‘작가의 출간 예정작’으로 책의 뒷날개에 이미 예고했다. 올 여름 출간할 예정인데 영어 학습만화이다. 영어 사교육, 영어권 연수 등 영어 때문에 온나라가 난리지만 영어 실력은 세계 최하위권이라는 게 그의 인식이다. 주인공은 영화 ‘쿵푸 허슬’의 고수 두꺼비 아저씨이다.

내년 11월께 나올 그 다음 작품은 ‘우리가 모르는 동남아시아’이다. 동남아는 경제·외교 면에서 우리나라의 중요한 파트너이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기회의 땅이 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남아를 관광지 정도로 생각하고 이들 나라를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는데, 잘 모르거나 잘못 알아서입니다. 동남아는 역사, 문화, 사회, 정치 면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는 정말 흥미로운 땅이에요.”

2막은 한겨울 나목의 벌거벗은 힘으로 살아야

그에게 인생 2막을 사는 지혜를 구했다. “가능하다면야 밥벌이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죠. 그 일이 사회적으로도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또 혜택을 받은 세대로서 어떤 형태로든 봉사를 하며 살아야죠. 타인에 대한 존중과 관용은 모든 세대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젊은 세대를 자기 자신만큼 존중해야 합니다. 상대를 존경할 수 없더라도 존중할 수는 있어요.”

그는 은퇴 후엔 한겨울 나목이 보여주는 벌거벗은 힘, 벌거벗은 자의 아름다움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지위, 조직 내에서의 권위, 금력까지 다 벗어던지고 나서도 초라해지지 않으려면 나목처럼 강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명예는 가장 마지막에 벗는 내복 같은 것인지도 몰라요. 이렇게 다 벗어버리고도 남는 건 인간성과 인간미죠. 그러자면 자기 희생을 해야 돼요.”

그는 보수도 진보도 힘을 잃은 건 희생을 하려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잘사는 사람, 이른바 가진 사람들 자제의 군 복무율은 보통사람의 자식보다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으로 낮습니다. 보수가 희생을 하지 않는다는 단적인 증거죠. 유럽, 미국 심지어 일본의 사회 지도층도 이렇지 않아요. 노블레스 오블리주야말로 우파의 훈장입니다. 반면 진보는 30년 전의 운동 경력을 평생 훈장처럼 우려먹어요. 시니어가 대접 못 받는다고 하는데, 좌우 가릴 거 없이 시니어들이 반성해야 합니다.”

그가 말한 벌거벗은 힘은 영국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떡갈나무’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대 삶을 살아라 젊었든 늙었든, 저기 저 떡갈나무 같이. 마침내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면 보라, 나무가 서 있는 줄기와 가지의 벌거벗은 힘(naked strength)을.” 그의 카톡 상태 메시지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emento mori)’이다. “역사상 모든 위인은 죽었습니다. 언젠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판단의 실수를 줄일 수 있어요.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사람을 보면 좀 딱해요.”

1521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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