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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16) 함마르셸드의 ‘베이징 법칙(Peking Formula)’] 대의명분, 유리한 해석으로 역할·권위 당위성 확보 

 

억류 미국인 송환 ‘베이징 법칙’서 빛나… 2차 중동전쟁선 최초로 무장 유엔평화유지군 조직도

▎제2대(재임 1953~1961년)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다그 함마르셸드.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 중에 ‘미제사건, 함마르셸드’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스웨덴 태생으로 제 2대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다그 함마르셸드(Dag Hammarskjöld, 재임 1953~1961년)는 아프리카 DR 콩고(콩고민주공화국)의 내전을 해결하러 가던 길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 추락이 석연치가 않았다. 콩고 반군이 격추했다는 설, 함마르셸드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강대국 정보기관이 암살했다는 설, 콩고를 식민지로 삼고 있었던 벨기에가 개입했다는 설 등 음모론이 난무했다. 다큐멘터리는 바로 이 사건을 파헤친 것으로, 여기서는 벨기에계 용병 얀판리세험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2015년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함마르셸드의 의문사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요청하고, 현 안토니오 구테흐스 사무총장도 재조사 기간을 연장했지만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유엔 헌장’ 정신 내세워 사무총장 권한 강화


▎1950년 10월 말 벌어진 운산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힌 미군의 모습. 중국이 펴낸 전사자료집에 등장하는 사진이다. / 사진:백선엽 장군
그의 죽음은 논란 속에 있지만 그가 탁월한 유엔 사무총장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는 사무총장으로서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활동 범위를 크게 넓혔다. 유엔 사무총장의 역할과 위상을 정립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함마르셸드는 중국에 억류된 미국인 석방,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위기), 헝가리동란(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정부ㆍ반소련 봉기), DR 콩고 내전, 아랍연합공화국(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합병하며 이 국호를 채택하였으나 1961년 시리아가 탈퇴했다)과 레바논의 국경 충돌 등에 개입하여 평화적 해결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강대국과 부딪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자국의 이익을 침해 당한 소련이 그를 공격하며 압박하자 “유엔을 필요로 하는 것은 소련 같은 강대국이 아니라 약소국들”이라며 일갈한 바 있다. 이번 회에서는 그 중에서도 중국에 억류된 미국인 석방, 소위 ‘베이징 법칙’이 등장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954년 중국은 한국전쟁 당시 억류한 미국 정찰기 승무원들에게 간첩죄를 적용하여 유죄판결을 내렸다.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12일자 제네바 협약’은 적대행위가 종료되는 즉시 포로를 송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상 중국 역시 억류하고 있는 미국인들을 석방해야했지만, 계속 붙잡아두기 위해 자국법 위반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자 미국이 발끈했다. 미국 정부는 유엔 회원국을 포섭해 중국의 조치를 비판하고, 미국 조종사와 승무원의 석방을 요구하는 총회 결의안을 채택하게 했다. 군사적 대응에 나설 움직임도 보였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함마르셸드가 중국으로 건너간다.

그런데 중국과 협상은 쉽지 않았다.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던 중국은 유엔이 자신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때는 중화민국, 즉 대만이 유엔 회원국이자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었다. 그 지위를 1971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국이 차지하였고 대만은 유엔에서 축출됐다) 게다가 총회결의안은 중국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었다. 이에 함마르셸드를 만난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불쾌하다는 뜻을 내비친다. 함마르셸드의 역할에도 의문을 표시했다. 중국이 보기에 유엔은 단체로 미국 편을 들고 있다. 중국을 모욕하고 무조건 굴복하기를 요구하면서 무슨 협상이냐는 것이다. “사무총장 역시 권한이 없는 형식적인 중재자인 것 같은데, 과연 당신과 논의한다고 해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겠냐”는 물음도 나왔다. 협상할 자격이 되느냐, 협상을 이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느냐는 것이다.

저우언라이의 우려는 당연한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대국의 입김 속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과연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전임 사무총장 트뤼그베 리도 무기력하게 사임하지 않았는가? 사무총장이란 그저 기계적인 균형을 취하는 관리자라는 인상이 강했다. 더욱이 유엔 헌장은 사무총장의 권한에 대해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과연 권위와 신뢰를 가진 중재자가 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여기에 함마르셸드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는 ‘사무총장은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협한다고 그 자신이 인정하는 어떠한 사항에도 안전보장이사회의 주의를 환기할 수 있다’는 유엔헌장 99조를 거론하며 저우언라이를 납득시켰다. 그는 이 조항을 사무총장이 국제적인 긴장 완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안전보장이사회의 주의를 환기한다는 것은 사무총장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예속되지 않음을 뜻하는데, 이는 총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중국이 유엔총회 결의안을 못마땅해 하자 자신은 총회의 결의에 구애받으며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니 결의안과 상관없이 협상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베이징 법칙(Peking Formula)’으로, 만약 안전보장이사회나 총회가 의견 대립, 알력 등으로 교착상태에 빠진다면 사무총장이 그 빈틈을 메꿀 수 있는 유일한 ‘법적기구’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는 1958년 유엔총회에서 한 그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엔이 추구하는 평화와 안보를 지켜나가는 데 어떠한 공백이라도 생긴다면, 특별한 지침 없이도 유엔 사무총장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이 유엔 헌장의 정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믿는다.”

레바논, DR 콩고 분쟁시 활약도 눈부셔

아무튼 이러한 함마르셸드의 노력으로 저우언라이와의 회담이 성사되었고, 두 사람의 심도 있는 논의 끝에 억류자 석방을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함마르셸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가 막판에 중재자를 바꾸기는 했지만 송환 협상이 성공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이밖에도 함마르 셸드는 제 2차 중동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캐나다, 덴마크, 노르웨이 등 10개 국이 참여한 ‘유엔긴급군(UNEF)’, 즉 최초의 무장 유엔평화유지군(UN Peacekeeping Forces)을 조직해 배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예전에 유엔총회가 채택한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를 활용하여 군대 파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민함을 보여준다. 그 외에 소련의 방해로 인해 헝가리동란에서는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레바논, DR 콩고 분쟁 등에서 그가 보여준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요컨대 함마르셸드는 유엔의 정신, 즉 ‘유엔 헌장’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대의명분을 전제하고, 관련 규정을 유리하게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역할과 권위의 당위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국제평화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헌신으로 그 당위성을 강화했다. 덕분에 그가 나선 담판들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22호 (202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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