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News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 존 볼턴 대해부] 美외교기밀 폭로 ‘제2 치머만’ 될까 

 

트럼프와의 노선 갈등이 촉발… 한미동맹에 부정적 그림자 우려

▎2018년 5월 9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내각회의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설 모습을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존 볼턴이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 / 사진: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외교정책 내막과 인간성을 폭로한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으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존 볼턴(72) 전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에게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볼턴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고,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그의 주장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그 파장은 어디까지일까.

볼턴의 폭로성 회고록은 외교가에 1917년 외교문서 폭로 참사를 떠오르게 한다. 바로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의 도화선이 됐던 1917년 ‘치머만 전보’ 폭로 사건이다. 치머만 전보 사건은 1917년 1월 16일 독일의 아르투르 치머만 외교장관(1864~1940년, 재임 1916년 11월~1917년 8월)이 주멕시코 독일대사에게 보낸 비밀 외교전문이 폭로된 사건이다. 이 전문은 영국군에 포착되고 해독된 뒤 관련국인 미국에 전달됐다.

당시 독일은 미국의 연합군 참전을 막는 것을 외교 목표로 정하고 있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치머만은 이 전문에서 만일 미국이 중립을 포기할 경우 멕시코에 동맹을 맺도록 제안하라고 주멕시코 독일대사에게 지시했다. 멕시코를 독일의 동맹으로 끌어들여 함께 미국을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멕시코에 재정 지원은 물론 과거 멕시코 땅이었지만 미국이 이주민을 보내 점령하거나 전쟁 승리로 인한 전리품으로 가져간 텍사스·애리조나·뉴멕시코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미국은 1845년 텍사스를, 1848년에는 뉴멕시코와 애리조나를 각각 합병했다. 하지만 당시 혁명으로 집권한 멕시코의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대통령(1859~1920년, 재임 1917~1920년 5월 21일)은 독일의 제안을 거절했다. 혁명 동지였던 판초 비야(1878~1923년), 에밀리아노 사파타(1879~1919년)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느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볼턴 폭로전에 대선 앞둔 트럼프 이미지 타격 우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 / 사진:AFP=연합뉴스
문제는 영국이 이 전보의 내용을 워싱턴에 전달하자 미국의 반독 여론이 들끓고 급기야 참전으로 급속히 기운 것이다. 당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1856~1924년, 재임 1913~1921년)은 1914년 1차대전이 발생하자 중립을 선언했다. 윌슨은 심지어 재선할 당시 “전쟁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공약을 앞세웠을 정도였다. 미국은 중립을 지키며 전쟁 초기 2년 반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국인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여론이 들끓자 윌슨도 1917년 4월 참전을 결정했다. 영국으로 향하는 비무장 상선이나 여객선을 공격하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도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는 1915년 5월 7일 아일랜드 해안에서 독일 잠수함에 격침돼 미국인 126명을 포함한 1191명이 사망했다.

치머만 전보 사건은 루시타니아 격침과 함께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을 이끈 대표적 사건이다. 치머만은 전쟁 당시 영국에 맞서던 아일랜드와 인도인의 저항운동을 부추기고, 러시아의 차르 정권을 전복하려는 볼셰비키들을 지원해 연합군의 힘을 분산하는 공작도 진행하면서 외교와 공작으로 전쟁 수행을 돕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의 외교 전문이 공개되면서 커다란 역풍을 맞아야 했다. 미국의 참전 이듬해인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항복하고 전쟁은 끝났다. 한 나라의 비밀 외교 정책과 전문의 외부 노출이 세계의 운명과 역사를 바꾼 셈이다. 볼턴의 트럼프 행정부 외교 내막 폭로가 앞으로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알 수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다. 볼턴의 폭로성 회고록 출간은 줄리언 아산지의 위키리크스 사건 이후 최대의 외교 내막 폭로 사건으로 평가 받을 수도 있다.

벌써 러시아는 미국과 외교적 기밀을 공유할 수 없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자신에 대한 트럼프의 공공연한 뒷방 평가가 공개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거액의 방위분담금 협상 내역과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한 평가가 공개된 일본도 마찬가지다. 이번 폭로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한 내막과 트럼프의 뒷방 언행, 그리고 대한민국에 대한 볼턴의 부정적인 평가가 회고록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한미동맹에도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올 11월 3일 대선을 앞두고 있는 트럼프는 코로나19 사태 확산과 경기침체, 그리고 대규모 시위사태에 이어 이번 볼턴 회고록으로 이미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됐다. 대선의 향배를 쥔 대부분의 경합주에서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조 바이든 전 부통령에 더욱 큰 차이로 뒤지고 있다.

그렇다면 볼턴은 왜 백악관의 내막을 폭로하며 트럼프를 궁지로 몬 것일까. 볼턴의 이력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 볼턴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2018~2019년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으며, 앞서 조지 W 부시 정권에서도 2005~2006년 유엔대사를 지냈다. 외교 공무원인 셈이다. 변호사인 그는 보수 성향의 폭스뉴스 등 방송의 정치평론가, 공화당의 정치 컨설턴트로 오랫동안 일해왔다. 보수성향의 싱크탱크인 미국 기업연구소(AEI)에 오랫동안 일하면서 군사력 동원을 강조하는 호전적인 성향으로 미국 보수 정치인의 주목을 받았다.

볼턴의 호전성, 백인 기득권 주창한 골드워터 닮아

그의 호전적인 성향은 젊은 시절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삶을 살펴 보면 드러난다. 볼턴은 1948년 미국 동북부 메릴 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주목할 점은 볼턴이 태어나고 성장했던 볼티모어라는 도시의 특성이다. 미국에서 비교적 가난한 노동자들이 많은 거주하는 지역으로, 인구의 63.7%가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이고, 29.6%만 카프카스계 미국인(백인)이다. 흑인 노동자들이 밀집해서 거주하는 볼티모어 중심지의 가난한 백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볼턴은 교육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한 인물이다. 1970년 예일대를 우등 졸업했으며 예일대 법대를 마치고 변호사가 됐다. 대학 시절 징병검사를 받고 베트남 파병을 기다리다 주방위군에 지원해 4년간 장교로 근무하면서 병역을 마쳤다. “베트남의 논에서 죽기는 싫었다”는 게 주방위군 지원의 이유였다. 파병은 피했지만 병역 거부자는 아닌 셈이다.

볼턴은 대학 시절부터 강경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갖게 됐는데, 미국 공화당 정치인으로 1964년 대선 후보에 나섰다 패배한 배리 골드워터(1909~1998년)의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골드워터를 살피면 볼턴은 물론 미국 공화당의 속내를 살펴볼 수 있다. 유대교도였다가 미국 성공회로 개종한 골드 워터는 1953년~1965년과 1969년~1987년에 걸쳐 애리조나주 연방상원의원을 지낸 유력 정치인으로 외교국방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온정주의 공화당을 강경보수로 바꾼 골드워터 DNA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4월 9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군사지도부와의 회의에 앞서 당시 새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한 존 볼턴과 악수하고 있다. / 사진:EPA=연합뉴스
골드워터의 사고 방식을 살펴보면 트럼프와 볼턴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수적인 측면과 볼턴이 더욱 강하게 드러내는 성격이 분명이 보인다. 골드워터는 1955년 로자 파크스 사건이 터지자 법과 질서를 내세우면서 백인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앞장섰다. 로자 파크스 사건은 같은 이름의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 좌석에 앉았다가 옮기라고 요구하는 차장의 지시를 거부하면서 촉발된 것으로 미국 민권운동의 효시다. 침례교 목사이던 마틴 루서 킹(1929~1968년)이 민권운동에 뛰어들어 미국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골드워터는 미국 역사에서 이런 도도한 흐름에 반기를 들고 강경 보수의 기치를 든 인물로 통한다. 공화당 소속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1890~1969년, 재임 1953~1961년)이 민권운동에 동조하자 골드워터는 아이젠하워 비판의 대표적인 인물이 됐다. 그 뒤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대통령(1917~1963년, 재임 1961~1963년)을 거쳐 린든 존슨 대통령(1908~1973년, 재임 1961~69년)이 민권운동을 지지해 흑백 분리 정책을 종식하고 인종통합 정책을 실시하자 골드워터는 반대론자의 중심에 섰다. 골드워터는 복지 확대에도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가 대선에 나온 1964년은 미국에서 민권운동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존슨 대통령은 1964년 민권법, 대선 이듬해인 1965년 투표법에 서명해 흑인의 평등권과 투표권을 연방 법률로 보장했다.

하지만 골드워터는 이런 시대적 흐름에 대놓고 맞선 강경 보수파였다. 그는 19세기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1809~1865년, 재임 1861~1865년)의 노예제 폐지를 뒷받침했던 온정주의적 미국 공화당을 오늘날의 보수 강경 정당으로 바꿔놓은 인물로 평가 받는다. 무엇보다 골드워터는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활용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극대화했다고 믿었으며, 심지어 핵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초강경 군사 모험주의를 대놓고 거론했다.

골드워터는 1964년 대선에서 38.5%의 득표율로 61.1%를 득표한 존슨 대통령에게 대패했다. 양측의 득표차 22.6%는 미국 대선 역사상 다섯 번 째로 크며, 존슨의 득표율은 1920년 이후 미국 대선 후보가 얻은 최고 득표율이다. 이 선거는 미국 대선 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선거로 평가된다. 대선에서 당락을 결정하는 선거인단 확보 숫자에서도 골드워터는 본거지인 애리조나와 딥사우스로 불리는 남부의 사우스캐롤라이나·조지아·앨라배마·미시시피·루이지애나에서 불과 52명을 확보하는 데 그쳐 486명을 확보한 존슨에 큰 차이로 패배했다. 골드워터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패배를 한 셈이다. 그럼에도 선거 과정에서는 물론 선거 뒤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공화당 우파 지지자들과 보수적인 백인들 사이에서 골드워터는 자신들이 미처 내뱉지 못한 말을 속 시원하게 대신 해 준 뒤 대선이라는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이념적 영웅’으로 통했다. 청년 볼턴도 이런 골드워터를 우상으로 삼고 그의 발언과 이념, 정책을 강하게 흡수했을 것이다.

골드워터의 이런 생각은 공화당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다. 강경파가 지배하는 현재 미국 공화당의 유전자에는 골드워터의 DNA가 자리 잡고 있다. 레이건과 부시 등이 이런 영향을 완곡하게 말하고 실현했다면 트럼프는 이를 대놓고, 시끄럽고 거칠게 말한 셈이다. 실제로 레이건 시절 미국은 소련과의 군비경쟁을 가열차게 지속해 결국 경제력에서 밀린 소련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는 1990~91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전을 일으켰다. 미국이 가진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유감없이 사용해 국제정치에 활용한 셈이다. 골드워터가 남긴 이런 유산은 미국 공화당에 도도하게 흘러온 셈이다.

트럼프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예산을 줄이고 세금을 깎자는 공화당의 감세 정책에 무게를 실었다면 볼턴은 군사 개입, 즉 전쟁을 통해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볼턴은 이란 핵합의에 반대하고 이란에 대해 군사력을 사용하자는 주장을 펼쳐왔다. 이런 점은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업적인 이란 핵합의를 원점으로 돌리려고 했던 트럼프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볼턴은 이라크·시리아·리바아 등에도 군사 개입을 주장했던 매파이자 호전파로 통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직접적인 전쟁으로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는 데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자신의 지지층인 백인 노동자들이 세금 부담 때문에 등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볼턴은 골드워터의 후계자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볼턴은 직접적인 전쟁을 주장한 반면 트럼프는 이를 말로 떠들며 협상력을 높이려 했다는 점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볼턴의 전쟁불사론, 감세·협상 앞세운 트럼프와 대립

볼턴은 명문 로펌인 컨빙턴앤드벌링에서 일하다 법률 전공을 살려 1985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1917~2004년, 재임 1981~1989년) 행정부의 법무부 차관보로 공직에 들어가 1989년까지 일했다. 외교안보가 아닌 법률 분야 전문가로 공직에 입문한 것이다. 법무부 법무담당 차관보를 맡다가 1988년 사회담당 차관보로 옮겼다.

볼턴은 1989년 조지 HW 부시 대통령(1924~2018년, 재임1989~1993년) 행정부가 들어서자 국무부로 자리를 옮겨 국제기구담당 차관보로 일했다. 정권이 민주당에 넘어가자 러너 리드볼턴맥매누스 로펌을 공동설립하고 변호사로 일했다. 그러다 조지 W부시 대통령의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국무부에 들어갔다. 2001년 국제기구 담당 차관에 이어 2001년부 군축·국제안보 담당 차관를 맡아 2005년까지 일했다. 볼턴이 정계에 이름을 크게 알린 것은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유엔 주재 미국대사를 지내면서다. 당시 그가 청문회에서 민주당의 반대로 인준을 받지 못할 상황에 이르자 부시 대통령이 의회 휴회 기간 중 기습 임명했다. 전쟁을 불사하자는 강경한 발언 때문에 민주당의 반발을 샀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 변호사로 돌아가 커크랜드 앤드엘리스 로펌 고문을 지내던 그는 폭스뉴스 해설자를 맡아 강경 보수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선캠프에 들어가 외교정책 고문을 맡았으며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돼 미국의 이란 핵합의 탈퇴, 북미정상회담 등을 밀거나 중지시키는 역할을 했다. 결국 볼턴의 강경 보수 정책이 트럼프의 관심을 끌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보좌관에서 해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강경 정책, 특히 군사력 사용 문제에선 두 사람이 간극이 컸던 셈이다.

결국 볼턴의 회고록 출간은 골드워터에서 시작된 미국 공화당의 강경 보수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노선 갈등이 원인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더해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능력 문제, 미국의 오만한 태도 등이 복합된 사건으로 분석할 수 있다. ‘문제적 인간’인 트럼프와 볼턴의 인간성과 자질 문제도 요인이다. 볼턴은 25만 달러로 알려진 선인세를 받은 데 이어 수많은 인터뷰를 즐기고 있다. 앞으로 수많은 강연에 초청자로 설 것이다. 볼턴 사건의 파장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장기화할 가능성도 있다. 파문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주목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볼턴과 나의 운명’을 생각하는 정치인은 전 세계에 너무도 많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1541호 (2020.07.06)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