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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호적수(13) 신숙주와 성삼문] 원칙(성삼문)이냐, 현실(신숙주)이냐 두고 경쟁한 라이벌 

 

세종, 정치적 신념 다른 두 사람 중용… 정치적 격변기 겪으며 정적으로 갈라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두고 극명하게 대립한 성삼문(왼쪽)과 신숙주(오른쪽) 영정.
1456년(세조 2) 6월 2일, 단종을 복위하려던 사육신(死六臣)의 시도가 실패한 날 밤, 집으로 돌아온 병조판서 신숙주는 깜짝 놀랐다. 아내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급히 집 안 곳곳을 찾아다녔고, 다락 대들보에 베를 묶고 있던 아내를 발견했다. “아니 부인!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감께서 평소 성삼문 등과 형제보다도 더 깊은 우정을 나누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그분들이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대감 또한 체포되어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감이 돌아가시면 저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준비하던 참입니다. 한데 어떻게 하여 살아 돌아오신 것입니까?”

조선 중기 [송와잡설(松窩雜說)]에 처음 소개된 이래, 널리 퍼져나간 일화다. 결론부터 말하면 허구다.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신숙주의 아내는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만, 이 말만큼은 사실이었다. 신숙주가 성삼문과 절친했다는 것 말이다. 신숙주가 세조의 편을 들면서 멀어졌던 두 사람은 이제 영원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출발부터 남달랐던 ‘어학의 천재’ 신숙주

신숙주(申叔舟, 1417~1475)와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세종의 집현전을 묘사할 때 세트처럼 등장한다. 신숙주는 1439년, 성삼문은 1438년에 각각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신숙주가 더 많은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스물한 살 때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하고 바로 이듬해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한 데다 어학의 천재로 불렸다. 대제학을 역임했고 뛰어난 학문과 문장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장(申檣)의 아들이라는 후광도 더해졌다. 이에 비해 성삼문의 합격등수는 33명 중 29등. 돋보이기에는 힘든 성적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성삼문은 세종의 눈에 든다. 그의 잠재력과 인품을 알아본 세종은 그를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다. 신숙주, 박팽년, 이석형, 이개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 능력 있는 젊은 문신에게 유급휴가를 주어 학문과 독서에 전념하도록 한 것) 인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이후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작업에 참여하였고, 한자 표준음을 확정하기 위한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도 관여했다. 이때 중국학자로부터 자문을 받기 위해 여러 차례 요동을 오가기도 하였는데, 항상 신숙주와 함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계속 붙어서 일을 하다 보니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고 경쟁심을 갖는 모습도 나타나긴 했다. 그렇지만 나이도 한 살 차이. 세종의 관심과 격려를 받으며 집현전에서 같이 생활하고,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하다 보니 끈끈한 유대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상대에게 배우고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두 사람이 주고받은 30여 편의 시에는 이러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그 시들 중에서 성삼문이 신숙주에게 보낸 두 편의 시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대의 재주와 명성이 천지를 흔들어 / 중화 사람들도 벌써 그대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네 / 시와 글씨는 대적할 사람이 없고 / 인품은 원숙하되 나이는 아직 젊도다…… 스스로 말하길 궁핍과 영달은 하늘의 뜻에 달려있다 하였으니 / 궁핍하거든 자신을 지키고 영달하거든 정치를 펼치라”

“마음을 다잡길 쇠와 같이 견고해야 하니/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그대 갈고리마냥 휘어지지 말라/ 곤궁하더라도 마음을 편하게 하여 천명을 즐길 것이요/ 영달하게 되면 마음을 넉넉하게 하여 나랏일을 펼칠 일이다/ 곤궁하면 홀로 선(善)을 따르고, 영달하면 함께 선을 따르리니/ 군자의 한결같은 덕이 어찌 성대해지지 않겠는가?”


결과론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일 수도 있지만, 성삼문이 신숙주의 미래를 예견한 듯한 느낌이다. 원칙이 무너지고 도(道)를 따를 수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지조를 잃지 말고 올바름을 지켜내라는 것이다. 곤궁함을 감내해야 할 시점에 오히려 영달을 추구하고 정치에 참여한다면 이는 자신의 덕을 해치게 된다는 의미다. 훗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지지한 신숙주의 행보를 여기에 대입시켜본다면, 성삼문의 시는 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진다.

물론 성삼문이 전적으로 옳고 신숙주가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신숙주의 행적으로 볼 때 그가 단종을 지켜달라는 세종과 문종의 부탁을 저버리고 (야사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당부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수양대군을 선택한 것이 부귀나 권력을 원해서가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아직 조선의 기틀이 완전히 다져지지 않은 상황에서, 신숙주는 단종보다 세조가 임금의 자리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하관 대상 중시에서 장원 차지한 성삼문

성삼문이 도덕 원칙을 고수했다면 신숙주는 권도(權道), 즉 지금 이 상황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원칙에서 이탈하는 것을 감수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두 사람의 차이는 1447년(세종 29) 당하관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중시(重試)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 법을 만들었는데, 그 법에서 다시 폐단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라는 문제가 출제된 이 시험에서 성삼문은 장원하고 신숙주는 4등을 차지했다. 먼저 성삼문은 새로운 법을 만들 필요 없이 지금의 법을 잘 지키되, 임금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통치자의 마음이 올바르면 자연히 상황을 바르게 인식, 판단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음으로 좋은 정치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의 폐단 또한 일어나기 전에 미리 차단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비해 신숙주는 상황이 변하고 시간이 흐르면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폐단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현실을 직시하고 시의(時宜)에 맞게 끊임없이 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폐단이 누적될 틈을 주지 말고 능동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이다. 성삼문이 원칙을 중시했다면 신숙주는 현실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세종처럼 이상과 현실, 원칙과 실리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군주가 계속 통치했다면 달랐겠지만, 세종 사후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고 정치적 혼란기가 도래하면서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신념에 따라 갈라서고 만다. 세종을 보좌해 눈부신 성과를 이뤘던 날들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신숙주가 수양대군의 편으로 돌아서자 두 사람의 교유는 완전히 끊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성삼문은 “신숙주가 나의 벗이었으나 죽이지 않을 수 없다”라 말하게 되었고, 신숙주는 성삼문이 단종의 사사를 앞장서 주청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신념의 차이, 정치적 상황이 선의의 라이벌로 남을 수 있었던 두 사람을 정적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68호 (202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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