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체코 프라하(Praha) 

‘이야기의 땅’에 등장한 세계 최초의 ‘로봇’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세상에서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프라하. 이곳에는 거리마다 전설과 이야기가 배어 있는데, 16세기 말에는 유대인 지역에서 인조인간 골렘 이야기가 탄생했고,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에는 프라하 국립극장 무대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로봇’이 등장했다

▎비셰흐라트 언덕에서 본 블타바강과 멀리 보이는 프라하 성과 시가지 / 사진:정태남
140년 전인 1881년 2월 10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호프만의 이야기]가 초연되었다. 환상과 현실이 혼재된 이 오페라는 파리에서 활동하던 독일 출신의 유대인 음악가 자크 오펜바흐(1819~1881)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오페라에서 주인공은 독일 후기낭만주의 시대 작가 호프만(1774~1822)인데 그는 자기가 겪었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에피소드 세 개를 들려준다. 이 오페라 제1막에 나오는 ‘인형의 노래’는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끄는 소프라노 아리아이다. 제1막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호프만은 올림피아를 몹시 사랑한다. 그녀는 노래도 부를 줄 알고, 춤도 출 줄 안다. 그런데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과학자 스팔란자니가 만든 정교한 발명품이다. 단, 그녀의 아름다운 눈은 코펠리우스가 만들었다. 코펠리우스는 지식재산권을 두고 스팔란자니와 다투다가 속은 느낌이 들어 올림피아를 해체해버린다. 호프만은 그때서야 올림피아가 인간이 아니라 고도의 기계장치인 ‘리얼 돌’이었음을 알고 허탈감에 빠진다.

그러니까 올림피아는 그냥 봐서는 인간과 전혀 구분할 수 없는 가상인간, 또는 로봇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로봇’은 이 오페라가 초연된 지 40년이 지난 다음, 그러니까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선보이게 된다.

프라하 국립극장에서 처음 등장한 ‘로봇’


▎프라하 국립극장 내부. 100년 전 이 무대에서 세계 최초로 ‘로봇’이 등장했다. / 사진:정태남
체코 관광청이 내세운 슬로건 중 하나는 ‘이야기의 땅 체코’이다. 사실 체코에서는 가는 곳마다 별의별 전설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특히 프라하에서는 비셰흐라트 언덕에 얽힌 체코 건국 전설, 유대인 지역의 인조인간 골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프라하의 아름다움과 풍부한 이야기 뒤에는 시련의 역사가 스쳐간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체코는 17세기부터 로마 카톨릭을 신봉하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산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주권을 잃었고 이에 따라 독일어가 체코 공용어가 되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야 체코는 슬로바키아와 합쳐져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으로 비로소 독립국이 되었다. 하지만 격동기는 계속되었다. 나치 독일의 점령, 공산주의 통치, 1989년 벨벳 혁명 등을 거친 다음에는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갈라졌다.

이러한 체코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라면 블타바강 변에 솟은 비셰흐라트 언덕일 것이다. 체코 건국 전설이 깃든 이 언덕 위에 특별히 조성된 묘지에는 정치, 음악, 미술, 문학,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체코를 빛낸 인물 600여 명이 묻혀 있다.

비셰흐라트 언덕에서 블타바강 변을 따라 시내 중심 쪽으로 2㎞쯤 가면 프라하 국립극장을 볼 수 있다. 이 화려한 극장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지배하에서 공용어인 독일어가 아닌 체코어로 된 오페라와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 민족의식에 불타던 체코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오페라·연극 및 발레의 전당이다. 체코 국민의 민족적 자부심을 상징하는 바로 이곳에서 1921년 1월 25일에 요세프 차펙(1887~1945)이 디자인한 연극무대 위에 그의 동생 카렐 차펙(1890~1938)이 1920년 11월에 발표한 체코어 희곡 [R.U.R]이 초연되었다. 이 연극에서 [R.U.R]은 브랜드 이름으로, 체코어 Rossumovi univerzální roboti의 약자이다. 영어로는 Rossum’s Universal Robots, 즉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들]이다. 바로 이 작품에서 ‘로봇’이라는 단어가 역사상 처음 쓰였다. 즉, 전 세계에서 흔히 쓰는 ‘로봇(robot)’이란 단어는 원래 영어가 아니었다.


▎1621년에 처형된 보헤미아 신교도 지도자들을 기념하는 로봇 형태의 기념상. / 사진:정태남


‘로봇’과 차펙 형제


▎프라하 국립극장. / 사진:정태남
카렐 차펙은 그의 형 요세프와 자주 함께 작업했는데, ‘로봇’이란 용어를 제안한 사람이 바로 형이었다. 요세프 차펙은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화가이자 삽화가이며 시인이자 작가이며 언론인이었다. 그는 ‘로봇’을 그냥 아무렇게나 지어낸 것이 아니라 옛 체코어 ‘로보타(robota)’를 차용했다. 이것은 ‘노동’, ‘노역’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실 ‘로봇(robot)’은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조금만 알아도 그 뜻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일’을 뜻하는 러시아어 ‘라보타(работа=rabota)’와 독일어 ‘아르바이트(Arbeit)’에는 모두 자음 ‘r, b, t’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로봇’이 프라하에서 탄생해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날 프라하 음악대학으로 사용되는 리히테슈타인 궁 바로 앞에 일렬로 서 있는 나지막한 철제 조각상은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로봇을 연상하게 한다. 이것은 카톨릭을 신봉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항거하다가 400년 전인 1621년에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서 처형당한 보헤미아 신교도 지도자 27명을 기리는 독특한 기념상이다. 그런데 [R.U.R.]에 등장하는 로봇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런 형상이 아니라 그냥 봐서는 인간과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첨단 바이오기술로 생산한 인조인간이다. 따라서 호프만이 사랑에 빠졌던 올림피아보다 훨씬 더 인간스럽다. 하지만 영혼은 없다.


▎요세프 차펙의 묘소. / 사진:정태남
카렐 차펙은 [R.U.R]에서 삶의 기적보다는 경이로운 기술에 더 매료되는 세상을 비판하는데, 그 내용은 여러 각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들’이란 제목에서 보듯 사업가 로숨은 ‘로봇들(robots)’을 생산한다. 즉, 올림피아처럼 하나가 아니라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인조노동자인 로봇들은 쉽게 조작이 가능한 집단으로 돌변할 수 있다. 이 로봇들은 나중에 인간에게 반항하고 마침내는 권력을 잡고 오히려 인간을 말살한다. 그러고 보면 카렐 차펙이 이 작품을 쓴 1920년대 초반은 유럽에서 공산주의, 파시즘 및 나치즘 같은 집단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그는 점점 더 본색을 드러내는 이런 비이성적인 집단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다가 1938년 크리스마스에 폐렴으로 48세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몇 달 후 나치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군했다. 요세프 카렐 역시 나치즘에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프라하를 점령한 독일군은 그를 체포하여 독일에 있는 죽음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냈다.


▎유대인 지역 레스토랑 벽에 장식된 골렘 형상. / 사진:정태남


블타바강이 내려다보이는 비셰흐라트 묘지에는 차펙 형제의 묘소가 있다. 그런데 형 요세프의 묘소는 진짜 묘소가 아니라 가묘(假墓)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그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가묘는 ‘로봇’의 ‘창조자’가 나치즘이라는 영혼 없는 집단주의에 의해 희생되었음을 떠올리게 하는 듯하다. 그가 사라진 지 몇 년 후, 그의 조국은 또 다른 격동기를 맞았다. ‘공산주의’라는 또 다른 영혼 없는 집단주의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다시 암울한 역사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요세프 차펙의 자화상(1920년). / 사진:정태남


유대인 지역의 골렘 이야기

한편, 유대인 지역의 인조인간 골렘 이야기는 ‘로봇’이 등장하기 약 440년 전인 1580년경에 탄생했다. 당시 박해받던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유대인 지도자 랍비 뢰브는 하늘의 계시를 받고 골렘을 만드는데, 골렘이란 히브리어로 ‘아직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랍비는 유대교 비법에 따라 블타바강변에서 채취한 흙으로 골렘을 만들고는 히브리어로 ‘진실’이란 뜻의 글자 ‘에멧’을 골렘의 이마에 붙였다. 그러고는 코에 정기를 불어넣자 골렘이 생명을 얻어 일어섰다. 골렘의 임무는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골렘은 날로 점점 포악해져 유대인까지 죽이기 시작했다. 이에 랍비는 골렘을 파괴하겠다고 약속하고는 골렘의 이마에 붙은 글자에서 ‘에’를 떼어냈고 골렘은 그만 생명을 잃고 흙으로 돌아갔다. 히브리어 ‘멧(Met)’은‘ 죽음’이란 뜻이다.

그러고 보면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올림피아가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것도 골렘 이야기와 뭔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 또 [R.U.R]도 따지고 보면 골렘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차펙 형제가 ‘이야기의 땅’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2110호 (202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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