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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을’이었던 밀라노가 콧대 파리를 누른 비밀  

전시-건축-패션-출판… 디자인 아이디어부터 장사까지 ‘원스톱’ 도시
디자인 마케팅의 힘은 문화에서 나온다… ‘팍스 로마나’ 저력 부활
커버스토리 디자인·전시 산업의 메카 밀라노 

사진■최재영 월간중앙 사진부장 [presscom@hanmail.net]

밀라도 두오모광장.

"모든 디자인 제품은 중국시장에 팔기 위해서도 밀라노에는 꼭 한 번 들렀다 와야 합니다.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에 출품됐었느냐 안 됐느냐로 그 제품의 수준이 결정되니까요. 이것이 밀라노의 파워죠.”

최경란 국민대 실내디자인과 교수의 말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세계 가구업계에는 ‘모든 디자인은 밀라노를 통한다’는 말이 있다.

전시 면적이나 참여 업체 등 단순히 규모만 비교한다면 독일의 쾰른국제가구박람회가 아직 세계 1위이지만, 창의력과 다양성 측면에서는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가 월등히 앞선다는 것이 디자인 업계의 평가다.

소재나 기능성을 보려면 쾰른국제가구박람회를, 디자인의 트렌드를 읽기 위해서는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를 둘러봐야 한다는 것이 디자인 업계의 상식이다.

또한 전시장 내에서만 열리는 쾰른국제가구박람회와 달리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는 ‘푸오리 살로네(Fuori Salone·외곽박람회)’라는 말이 고유명사로 정착할 만큼 박람회가 열리는 5일 동안 피에라밀라노(Fiera Milano) 전시장뿐 아니라 도심 전체가 축제로 변한다.

공간 상의 이유로 피에라밀라로 전시장에 진열하지 못한 상품이 도심 쇼룸에 전시되는 것은 물론, 도심 곳곳의 갤러리가 국제가구박람회 기간에 맞춰 각종 전시회와 이벤트를 열기 때문이다.

이 푸오리 살로네는 피에라밀라노에서 열리는 본 행사인 국제가구박람회보다 도심 행사가 더 흥미진진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전 세계 디자인 관계자들이 매년 4월이면 밀라노를 찾는 또 다른 이유로 정착했다. 밀라노가 전 세계 디자인 산업의 수도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전시산업분야에서 독일에 이어 유럽 제2의 국가이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전시장이 밀라노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밀라노 외곽에 위치한 피에라밀라노는 독일 하노버 전시장(49만5,000m²)에 이어 전 세계 전시장 중 두 번째로 넓은 면적(47만m²)을 자랑하며 연간 80회 이상의 국제박람회가 개최된다.

연간 전시 참여업체는 약 3만 개로, 2만5,000개인 하노버전시장보다 많다. 뿐만 아니라 피에라밀라노는 1995년 이래 유럽에서 ㎡당 공간 임대료가 가장 비싼 전시장으로 꼽힌다.


Massimiliano fuksas가 설계한 피에라밀라노 전시장 내부 곡선이 아름답다.

피에라밀라노 1년 수익 3,200만 유로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를 비롯해 밀라노국제패션박람회 등이 열리는 피에라밀라노는 밀라노의 상품을 전 세계 시장으로 연결하는 창문 역할을 한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아이디어와 제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현대사회에서는 팔려야 의미가 있는데, 바로 피에라밀라노가 ‘Made in Italy’의 판로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피에라밀라노에서 열리는 박람회 중 가장 대표적인 박람회라고 할 수 있는 국제가구박람회(salone internqzionale del mobile)의 경우 매년 평균 2,000여 업체가 참여하며, 방문객은 300만 명에 달한다.

이 중 절반은 외국인이다. 페리니 피에라밀라노 회장은 “2년에 한 번씩, 혹은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박람회가 있기 때문에 매년 수익에는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대략 1년에 3,200만~3,400만 유로(약 576억~612억 원)의 수익을 올린다”고 한다. 그는 “피에라밀라노의 경제효과를 밀라노에 국한하지 않고 이탈리아 전체로 확대할 경우 50억 유로(약 9조 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밀라노 관광객의 80%는 박람회 또는 회의 참석을 위해 방문한 전문가들과 비즈니스맨들이며, 이들은 일반 관광객보다 평균 5배 이상의 돈을 쓰고 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정치·행정수도라면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경제수도로 통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밀라노의 국내총생산(GDP)은 1,370억 유로. 이탈리아 전체 GDP(1조5,680억 유로)의 약 10%을 생산하는 셈이다.

이탈리아 전체 기업 중 6%가 밀라노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의 2대 강대산업인 패션·디자인 사업과 전시산업이 모두 밀라노를 중심으로 발달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 디자인 = 밀라노 디자인’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만큼 ‘made in Italy’의 대표적 브랜드 대부분이 밀라노를 본산지로 한다.

로마·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이 과거의 유적을 팔아먹는 관광산업에 매달려 있을 때, 밀라노는 밀라노대성당과 라스칼라극장, 임마누엘2세갤러리에 만족하지 않고 이 같은 문화유산을 토대로 디자인과 전시라는 두 개의 미래산업을 선점했던 것이다. 밀라노는 어떻게 전시산업과 디자인 산업이란 두 가지 미래산업을 선점할 수 있었을까?

파리 하청공장에서 세계 디자인 수도로

오늘날 세계 디자인의 수도로 불리는 밀라노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만 해도 밀라노는 ‘파리의 하청공장’으로 불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패션디자인은 파리가, 산업디자인은 독일이 선도했다. 밀라노는 파리 디자이너들의 제품을 인근 수공예 공장에서 생산해 납품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던 밀라노가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 디자인의 수도이자 전시산업의 메카로 성장한 데는 1970년대 일군의 기업가, 건축가, 디자이너와 출판업자가 합심해 ‘밀라노디자인시스템’이라는 이 도시만의 독특한 시스템을 발전시킨 것이 밑바탕이 됐다.

밀라노디자인시스템은 알레시(alessi)·카르텔(Kartell)·에드라(Edra) 등의 기업과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 등 유명 디자이너, IED(Istituto Europeo di Design)·SPD(Scuola Politecnica di Design) 등의 학교, <오타고노(Ottagono)> <도무스(Domus)> <카사벨라(Casabella)> 등 매체, 트리엔날레(La Triennale di Milano)·피에라밀라노 등의 전시기관이 거미줄처럼 엮여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것이 핵심이다.

기업이 선도한 ‘밀라노디자인시스템’


스와치 매장 디스플레이.
밀라노 기업들의 특징은 자체 디자이너(인하우스 디자이너)를 거의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2005년 사장단과 함께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장을 찾았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밀라노디자인선언’을 발표한 뒤 삼성전자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을 스카우트한 일이었다.

국내기업뿐 아니라 외국 유명 기업들도 대부분 인하우스 디자이너를 고용해 제품을 개발한다. 독일이나 프랑스 기업도 외부 프리랜서와 일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밀라노 기업만큼 일반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밀라노 기업들은 인하우스 디자이너에게 제품 개발을 맡기기보다 프로젝트별로 프리랜서 디자이너들과 계약해 제품을 개발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밀라노에 수천 개의 소규모 디자이너 스튜디오가 밀집한 이유다.

밀라노 기업의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은 디자인개발 업무보다 외부 프리랜서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역할을 주로 한다. 밀라노 기업들이 자체 디자이너를 두지 않는 이유는 자체 디자인센터를 유지하기에는 기업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중소기업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에 비해 프리랜서 디자이너들이 경계를 뛰어넘는 창의적 아이디어를 쏟아낸다는 생각에서다.

일반적으로 밀라노 브랜드들은 프리랜서가 개발한 디자인의 경우 제품명에 디자이너 이름을 넣어 준다. 디자이너의 이름 자체가 제품의 홍보수단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디자이너를 존중하고 중요시하는 문화가 정착했기 때문이다. 세계적 디자인 제품은 있어도 세계적 디자이너는 없는 우리 현실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밀라노 기업에서 인 하우스 디자이너가 없는 대신 발달한 직책이 아트디렉터다. 아트디렉터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잡아주고, 이들이 개발해온 디자인을 최종 선택하는 일을 한다. 한마디로 브랜드의 디자인 개념 및 정체성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밀라노의 유명 브랜드에는 브랜드만큼이나 상징적인 아트디렉터가 있는 이유다.

알레시의 알레산드로 멘디니, 에드라의 마시모 모로찌(Massimo Morozzi) 등이 그 예다. 디자인 스튜디오라고 해서 큰 규모도 아니다. 3~4명의 디자이너로 이뤄진 것이 보통이다. 디자이너가 15명만 넘어도 중대형 스튜디오로 분류될 정도다. IED·SPD 등 디자인학교를 졸업한 디자이너들은 이런 소규모 스튜디오에서 8~10년 정도 경험을 쌓은 뒤 자신의 스튜디오를 차려 독립한다.

이러한 수천 개의 소규모 스튜디오는 클라이언트 회사가 의뢰한 프로젝트를 전문 분야별로 분담해 공동으로 수행한다. 밀라노 디자인 스튜디오의 반 이상은 외국 클라이언트들로부터 의뢰받고 있으며, 10% 정도는 오직 외국 기업의 프로젝트만 전담한다.


멘다니 아뜰리에 내부. 밀라노 스튜디오 중에서는 중·대형에 속하는 규모다.

1970년대 건축가·디자이너 출신 기업인들 문화운동 일으켜

밀라노 기업들의 또 다른 특징은 CEO 가운데 디자이너 혹은 건축가 출신이 많다는 점이다. 이탈리아 조명업계의 대표기업인 아르테미데(Artemide)의 창업자 에르네스토 지스기스몬디(ernesto gismondi), 루체플란(Luceplan)의 창업자 리카르도 사르파티(Ricardo Sarfatti)는 모두 건축가 출신이다.

이재규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교수는 “밀라노 기업은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에 CEO가 직접 참석해 결정을 내린다”며 “밀라노의 디자인 산업을 말할 때 기업의 역할을 빼놓으면 안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이처럼 디자인을 아는 CEO가 실험적이고 진취적 디자인을 앞장서서 개척해 나갔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1966년 건축가였던 에르네스토 지스몬디 아르테미데 대표가 주축이 되어 밀라노를 대표하던 가구·조명 분야의 8개 회사(Arflex·Artemide·Bernini·Boffi·Cassina·Flos·ICF·Tecno) 대표가 모여 공동으로 창간한 잡지인 <오타고노>는 1970년대 밀라노의 디자인 산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매체로 꼽힌다.

영어로 8각형(octagon)을 뜻하는 이 잡지는 창간 당시에는 멤버인 8개 회사의 신제품 소개와 홍보가 목적이었다. 일종의 사보였던 셈이다. 하지만 <오타고노>는 점차 이탈리아는 물론 전 세계 프로덕션 디자인 분야의 최신 경향과 유행·신소재·이벤트 등을 이슈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분야를 넓혀 갔으며, 나아가 단순한 사실 전달에서 벗어나 비평 기능을 통해 디자인 업계를 선도해 나가는 역할을 했다.

1979년 <오타고노>는 잡지로서는 드물게 이탈리아 산업디자인 분야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상인 황금콤파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타고노>와 함께 밀라노의 디자인 산업을 이끈 대표적 잡지는 <도무스>와 <카사벨라>. 1920년대 후반에 창간된 이 두 잡지는 모두 1970~80년대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편집장을 맡으며 밀라노를 넘어 세계 건축·디자인 업계의 중심에 서게 됐다.

촌철살인의 비평 기능으로 건축·디자인 업계를 선도해 나갔을 뿐 아니라 밀라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의 정보 교류의 장으로 역할했기 때문이다.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당시 출판 부수는 1만 부 남짓했지만 건축·디자인 업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독자층이었던 만큼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고 회상한다.

양영환 홍익대학교 조형대학 영상·디자인학과 교수는 “잡지가 젊고 실험적인 디자이너와 이들의 제품을 발굴해 소개하면 그 기사를 통해 젊은 작가와 기업가가 연결돼 제품 생산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의 중심에 매체가 서 있는 것이 밀라노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오타고노> <도무스> <카사벨라> 외에도 <리네아그라피카(Lineagrafica)> <인테르니(Interni)> <아비타레(Abitare)> 등 수없이 많은 건축·디자인·인테리어 전문잡지가 출판되는 밀라노에서는 디자인 전문 잡지가 신문 가판대에서 팔린다는 점이다. 그만큼 밀라노에서는 디자인 잡지가 전문가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일반대중과도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기업과 디자이너 스튜디오, 매체와 함께 밀라노디자인시스템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핵심은 트리엔날레와 피에라밀라노를 비롯한 전시산업의 발달이다. 1923년 설립된 트리엔날레는 ‘3년마다’라는 단어의 뜻에서 알 수 있듯 애초에는 밀라노 교외에서 디자이너들과 제조업자를 연결해 주기 위해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국제 전시회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밀라노 도심에 상설전시관을 세우면서 ‘트리엔날레’라는 이름은 상징적으로 남았다. 현재 트리엔날레는 미술·디자인·건축 분야의 전문 전시공간이지만, 밀라노 디자인 산업에서 트리엔날레가 차지하는 위상은 단순한 전시공간 이상이다.

프랑코 알비니(franco albini)·렌조 피아노(lenzo piano) 등 20세기 거장이 모두 트리엔날레를 거쳐가며 건축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공간으로 이름을 높였으며, 앤디 워홀(andy warhol)·키스 하링(keith haring)·장 미셸 바스키아( Jean Michel basquiat)3부작 전시 이후 현대미술 분야에서도 트랜드를 정확히 집어내는 전시공간으로 자리잡았다.

트리엔날레 전시목록이 곧 건축과 디자인, 현대미술의 바로미터인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트리엔날레가 밀라노 디자인 산업의 구심점이 되는 까닭은 젊은 디자이너들의 실험적 아이디어가 트리엔날레 전시를 통해 실제 생산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안드레아 칸첼라토 관장은 “트리엔날레는 전통적으로 실험적 디자인을 산업으로 연결시켜 주는 장소였다”며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현실화하기 위해 트리엔날레의 문을 두드린다”고 말한다.

기업 프로젝트가 수업과제인 현장중심 커리큘럼

트리엔날레가 전시공간으로서 밀라노 디자인 산업에 ‘문화’를 공급한다면,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를 비롯해 밀라노국제패션박람회 등이 열리는 피에라밀라노는 ‘판로’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피에라밀라노는 국제가구박람회 기간에 대형 전시관 하나를 털어 ‘살로네 사테리테(Salone Satellite)’를 개최한다.

‘위성박람회’라는 이름의 이 박람회는 일반 기업체가 아닌 신예 디자이너들을 위한 공간이다. 실험성이 넘치는 신예 디자이너들과 이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찾는 기업의 만남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밀라노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디자인을 가르치는 도시임에도 밀라노대학교(politecnico di milano) 교과과정에는 최근까지 디자인학과가 없었다는 점이다.

밀라노대학교에 디자인 박사학위 과정이 개설된 것은 1980년대 중반이며, 학사과정은 1993년에야 개설됐다. 양영완 홍익대학교 조형대학 디자인·영상학부 교수는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밀라노의 오랜 역사 속에서 디자인에 관한 제도권 교육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희박했던 것이 그 이유인 것 같다”고 설명한다.

지오 폰티(Gio Ponti)·알레산드로 멘디니 등 밀라노를 대표하는 유명 디자이너가 건축가 출신인 점도 이런 이유에서다. 학부과정에 디자인학과가 없었던 탓에 밀라노에서는 SPD·IED·도무스아카데미(Domus Academy) 등 디자인 전문학교가 발달했다. 이들 교육기관은 대학이라는 고전적 틀에서 벗어나 철저한 현장중심 커리큘럼을 발전시켰다.

1966년 밀라노 캠퍼스를 시작으로 로마·토리노·베네치아·마드리드·바로셀로나·상파울루 등에 캠퍼스를 갖고 있는 IED는 상아탑 속의 이론교육이 아닌 현장형 교육으로 유명하다. IED의 커리큘럼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이 한 학기 동안 기업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으로 짜여 있다.

프란세스코 모레리(Francesco Morelli) IED 교장은 “우리의 교육철학은 지식과 노하우는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아카데믹한 생각과 시장감각이 조화를 이루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IED는 학생들에게 예술적 감각 못지않게 기업가로서의 시각을 가르치는 데도 중점을 둔다”고 말한다.

IED가 철저히 현장중심의 커리큘럼을 운영하는 이유다. 3M·BMW·페라리·피아트·필립스·알레시 등의 기업이 수시로 학교로 찾아와 학생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학생들이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 수업 내용인 식이다. 세계 유수 기업이 프로젝트를 들고 IED를 찾는 이유는 전 세계 학생들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수집하기 위해서다.

기업은 학생들의 작품 중 상품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 있으면 상품화한다. 모레리 교장은 “처음에는 우리가 기업에 프로젝트를 먼저 제안했지만, 지금은 기업들이 프로젝트를 들고 우리를 찾아온다”며 “IED 출신 디자이너들이 글로벌 그룹에 널리 퍼져있는 영향도 있지만, 기업이 그만큼 IED 학생들의 실력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철저한 현장형 커리큘럼 덕분에 IED는 명실공히 유럽 최고의 디자인학교로 인정받으며, 9,000명의 학생 중 외국인학생 비율이 무려 50%에 달한다. 출신 국가는 무려 92개다. 1954년 설립된 SPD는 밀라노 최초의 디자인 전문학교. IED에 비해 학생규모는 작지만 SPD 역시 모든 수업을 철저한 현장중심 커리큘럼으로 진행한다.

안토넬로 푸세티(Antonello Fusetti) 교장은 “우리 학교의 모든 프로젝트는 람보르기니·애플·마이크로소프트, 하이네켄·아디다스 등 기업의 후원을 받고 있다”며 “SPD가 소규모 클래스를 고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업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학생들의 작품이라고 해도 기업의 눈높이에 맞는 전문가 수준의 작품을 내놓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교수가 모든 학생의 프로젝트 진행사항을 직접 챙길 수 있는 소규모 클래스여야 한다는 것이다.

거미줄 인프라의 힘

그는 기업들이 프로젝트를 SPD에 맡기는 이유에 대해 “우리 학교는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가진 학생들이 전 세계 40개국 이상에서 오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40개의 다른 문화에서 온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또 “이러한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학교 수업과정에서 기업과 함께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며, 기업은 우수한 학생을 선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때문에 서로 윈윈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학교는 수업이 우선이다. 우리 학교의 경우 기업들이 충분한 시간, 즉 한 학기의 기간을 줄 때만 프로젝트를 받아들인다”고 한다. 아무리 유수 기업이 프로젝트를 제안해와도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커리큘럼을 활용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을 경우 거절한다는 것이다.

“밀라노가 전후 반세기 만에 폐허에서 세계 디자인 산업의 수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분명 로마문명의 후예로 찬란한 문화적 업적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밀라노는 조상의 문화적 업적을 그대로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기반으로 복합성과 유연성을 가진 네트워크와 상호 유기적 시스템을 발전시켰습니다. 저는 밀라노의 디자인 파워는 바로 그 유연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IED 졸업 후 멘디니 아틀리에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출신 디자이너 차영희 씨의 말이다.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이론가와 커뮤니케이터를 비롯한 전문가들, 수공예 장인기업 등 제조회사, 피에라밀라노·트리엔날레 등 전시산업 등이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내는 가운데 밀라노 디자인 산업이 이웃 프랑스와 독일을 제치고 세계 넘버 원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밀라노의 도시개혁은 천재 디자이너 한 명의 영향 또는 유명 대학의 교육 결과, 혹은 정부나 협회의 정책 등 어느 한 사람이나 기관이 특출난 성과를 내서가 아니라 이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엮이면서 만들어낸 인프라가 핵심이 됐던 것이다.

미켈레 페리니(michele perini) 피에라밀라노 회장 인터뷰
피에라밀라노는 단순한 전시공간이 아닌 토털마케팅 회사 문화와 맥락을 만들어줘야 전시 성공

피에라밀라노의 역사가 곧 밀라노의 전시 역사라고 할 만큼 피에라밀라노는 밀라노 전시산업에서 상징적 공간이다. 2006년 밀라노 중심의 좁은 전시장에서 벗어나 시 외곽 로-페로(Rho-Pero) 지역에 22만2,000m²에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건물을 짓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페리니 피에라밀라노 회장을 BIT 현장에서 만났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과학기술박물관이자 세계 10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레오나르도다빈치박물관 이사장이며, 또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 피에라밀라노는 밀라노 전시산업의 중심에 서 있는 회사다. 애초 밀라노에서 전시산업이 발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북부 이탈리아의 상업 중심지였던 밀라노의 국제박람회 역사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밀라노에서 최초의 국제박람회가 열린 것은 1881년. 두 번째 국제박람회는 1906년 열렸다. 이것이 밀라노 전시산업 발전의 시초가 됐다. 피에라밀라노가 설립된 것은 1920년이다. 초기에는 시정부의 지원을 받았지만 곧 자생력을 갖추게 됐고, 지금은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된다.

피에라밀라노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밀라노가 기본적으로 산업도시였기 때문이다. 물론 밀라노는 금융도시이자 관광도시이기도 하지만 밀라노의 뿌리는 여전히 인근의 공장들이다. 피에라밀라노의 대표적 박람회인 국제가구박람회의 경우 1958년 밀라노 인근에 공장을 가지고 있는 목재산업연맹 가맹자들이 부진했던 가구산업을 진흥하기 위해 국제 박람회를 개최해 보자는 데 의견을 모은 것이 시초가 돼 1961년에 시작됐다. 전시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제품산업이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 전 세계 기업들이 피에라밀라노를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피에라밀라노는 전시회사이기도 하지만, 토털마케팅 회사다. 피에라밀라노박람회에 오는 기업들은 피에라밀라로를 통해 전 세계로 나가기를 원하는 회사다. 하지만 단지 피에라밀라노에 부스를 차린다고 해서 성공할 수는 없다. 우리는 피에라밀라노를 찾는 기업들에 토털마케팅을 제공한다.”

- 피에라밀라노가 트리엔날레·레오나르도다빈치박물관 등과 함께 인천 밀라노디자인시티에 진출하기로 했다. 인천 진출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개인적으로 한국의 인천에 밀라노디자인시티를 세운다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천 진출을 결정한 이유는 입지가 매우 좋다고 판단해서다. 인천은 전 유럽을 시장으로 하는 피에라밀라노보다 3~4배가 큰 아시아를 시장으로 한다. 아시아 기업은 결국 아시아에서 사업할 수밖에 없다. 현재 아시아 지역에는 피에라밀라노인천 규모의 대형 전시장이 없기 때문에 인천이 아시아 지역에서 전시 중심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피에라밀라노인천이 성공하기 위한 팁을 전수한다면?
“전시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문화와 맥락을 만들어줘야 한다. 허허벌판에 전시장을 짓는다면 그 어떤 기업도 오지 않을 것이다. 전시장은 결국 창문에 불과하다. 그 창문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또 전시장은 한 번 보고 마는 쇼인 엑스포와 다르다. 전시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제품산업이 발전해야 하는 이유다. 나아가 밀라노디자인시티가 성공하기 위해서도 역시 이를 통해 무엇을 아시아에 소개할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밀라노 디자인 역사의 증인 알레산드로 멘디니
밀라노 디자인 발전의 1등공신은 혼이 있는 기업가
기업가·건축가·매체가 영감 주고받으며 디자인 중흥운동 이끌어

1931년 밀라노에서 태어나 1959년 밀라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78세의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밀라노 디자인 역사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스스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이기도 했지만, 1970~76년 <카사벨라> 편집장을, 1979년~85년 <도무스> 편집장을 맡아 밀라노 디자인 혁신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실험적 디자인을 선보였던 알키미아(Alchimia) 그룹의 멤버이자 수장이기도 했다. 그는 또 오랫동안 밀라노의 대표적 기업인 알레시의 아트디렉터를 맡으며 알레시의 철학과 개념을 세웠으며, 스위스의 대표적 시계 회사인 스와치의 아트디렉터로도 활동했다. 현재 그는 친동생이자 건축가인 프란체스코 멘디니와 함께 멘니디 아틀리에를 운영 중이다.

- 밀라노 디자인 중흥운동의 멤버이자 이론가로 활동했다. 밀라노가 반 세기 만에 세계 디자인의 메카로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
“밀라노에서 산업디자인이 발전한 것은 1946년 이후다. 당시 밀라노는 매우 가난했지만, 국가 재건 시기였기 때문에 젊은 건축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많았다. 또 당시 플라스틱 등 새로운 소재의 개발과 기술의 발달은 디자이너들에게 좋은 자극이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밀라노 디자인산업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기업들이다. 전후 새로운 기업이 많이 생겼는데, 이들은 건축가 그룹과 엔지니어 그룹, 화학자·예술가·디자이너들을 하나로 묶으며 기술적으로는 물론 미적으로 혁신적 제품을 경쟁적으로 출시했다. 이런 가운데 산업 간 장벽 없이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한데 섞여 일하는 플렉서블한 비즈니스 모델이 밀라노의 홀 마크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또 1960~70년대 많은 디자이너 그룹과 단체가 생겨났고, 이들에 의해 밀라노 디자인산업은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1972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이탈리아 유명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전시한 ‘Italy:the New Domestic Landscape’ 전시회는 이탈리아의 디자인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 전시를 기점으로 세계 디자인 업계가 이탈리아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 밀라노의 디자인 중흥운동을 이끈 대표적 건축가와 디자이너로는 어떤 사람이 있나?
“셀 수 없이 많다.(웃음) 대표적으로 몇 명을 꼽으면 지오 폰티·프랑코 알비니·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 비코 마지스트레티(Vico Magistretti)와 안젤로 만지아로티(Angelo Mangiarotti)·마르코 자누소(Marco Zanuso) 등이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밀라노는 외국 디자이너들에게도 열린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유명한 외국 디자이너 가운데 대부분이 밀라노에서 밀라노 기업과 디자인을 시작했다.”

- <카사벨라> <도무스> 등을 이끌며 밀라노 디자인 발전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잡지가 밀라노 디자인 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건축가가 직접 만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카사벨라>나 <도무스> 외에도 밀라노에서는 디자이너나 건축가가 잡지 발행인 또는 편집인인 경우가 많다. 밀라노는 전통적으로 대학에 디자인학과가 없었기 때문에 건축가들이 회사와 연계해 제품을 디자인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잡지와 건축가, 기업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일했다.

또 서로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잡지가 나오기 전까지 수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그 가운데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기획전 아이디어도 나오고, 그러면 그 아이디어를 트리엔날레에서 받아 전시하는 식으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또 건축가들과 대화를 나누다 건축법규 중 바꿔야 할 것이 있으면 잡지가 문제제기해 실제로 바뀐 경우도 많다. 칭찬도 많이 했지만 비평도 많이 했다.”

- 밀라노 디자인의 특징이자 파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일본이나 독일 디자인과 비교할 때 이탈리아 디자인은 보는 사람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이 많다. 사람들의 감성을 충분히 가미한 인간적 디자인이 많은 것이다. 또 이탈리아의 디자인 사무실은 과거의 공방처럼 굉장히 작은 규모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아 기업과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도 디자이너와 기업이 직접 만나 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프로젝트가 굉장히 유연하게 이뤄지는 것이 특징이다.”

- 한국이 디자인 강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밀라노의 어떤 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나?
“영혼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디자인은 기술적 측면이 강한 것 같다. 굉장히 정확하고 정밀한데, 이탈리아 디자인은 이런 측면에서는 한국보다 상당히 뒤떨어졌다. 하지만 둘 중 어느 하나가 맞거나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두 나라의 사고가 굉장히 다르기 때문이다.”


200905호 (200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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