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26일, 민족의 큰 별이 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독립운동의 표상 백범 김구 선생이 사저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암살범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온 국민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건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 행렬에는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추모 인파로 넘쳐났다.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은 그 해 8월 월간지 에 비통한 심정을 담아 ‘인간으로서의 백범’이라는 장문의 글을 남겼다. “그러나 미사자(未死者) 슬퍼함이 정감일 따름이요, 혁명가의 생이 외로웠거늘 사 어찌 슬픔이리오? 오호! 백범 옹은 진실로 애국자시요, 혁명가였더니라. 정신이 꺼지지 않고 호기(浩氣) 깊이 남아 있음을 산하와 더불어 겨레의 자랑으로 받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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