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월산대군이‘빈 배’탄 이유 오직 살기 위해서였다 

‘대군’은 경계 1호… 만사‘형’통은 역적모의로 간주
프리즘 | 조선왕의 형님들은 어떻게 처신했나? 

글■신명호 부경대 교수 [smh@pknu.ac.kr]
‘봉하대군’과 ‘영일대군’. 대통령의 형들로 인한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중 한 명의 ‘대군’이 벌인 뇌물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전직 대통령이 검찰의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권력과 가까울수록 달콤한 유혹도 늘어난다. 역사에서 왕의 형은 어떻게 처신했을까? 그 가깝고도 위험한 관계를 살펴본다.

고종(왼쪽)과 대원군. 대원군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 어린 셋째 아들(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10년 세도를 누렸다. 이후로도 대원군과 고종은 권력을 놓고 많은 갈등을 빚었다.

고종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 본격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고 국론은 완전히 양분되었다. 개화정책을 놓고 개화파는 구국의 정책이라 찬양한 반면 위정척사파는 망국의 정책이라 매도했다.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은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권력투쟁으로 발전했다. 10년 세도 동안 쇄국정책을 추진한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개화정책을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고종은 개화정책을 통해 자신과 흥선대원군을 차별화하고자 했다. 고종의 개화정책이 추진될수록 위정척사파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위정척사파는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고종을 폐위함으로써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위정척사파가 이용한 인물이 바로 고종의 이복형 이재선(李載先)이었다. 이재선은 고종보다 10살 위로 흥선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였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재선은 본성이 용렬해 숙맥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한다.

위정척사파는 이재선의 그런 어리석음을 이용해 쿠데타를 감행하려고 했다. 위정척사파의 쿠데타 계획은 1880년 3월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귀국하는 길에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계기로 본격화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이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는 <조선책략>의 주장을 위정척사파는 수용할 수 없었다.

<조선책략>의 주장대로 한다면 조선은 일본뿐 아니라 미국 등 서구열강에도 문호를 개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조선이 전면적으로 개방하고 개화해야 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위정척사파는 1880년 연말부터 <조선책략>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기 시작했다.

1881년 봄에는 영남의 이만손·강진규 등이 중심이 된 1만여 명의 유생이 개화정책을 규탄하고 위정척사를 요구하는 이른바 ‘영남만인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 같은 위정척사파의 행동에 대해 고종은 회유책을 쓰기도 했지만 결국 ‘영남만인소’를 주도한 이만손 등의 유생을 유배형에 처했다.

위정척사파 역시 더욱 강경하게 대응했다. 1881년 가을로 접어들면서 팔도의 유생 수백 명이 한양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집단으로 대궐 앞으로 몰려가 한 달이 넘도록 복합상소운동(伏閤上疏運動)을 벌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의 양상은 과격해졌고 논조도 격렬해졌다.

위정척사를 요구하는 유생들은 개화파뿐 아니라 고종까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거세게 비난했다. 예컨대 1881년 윤7월6일 강원도 유생 홍재학 등이 올린 상소문에는 이런 내용까지 등장했다.

무식한 왕이라고 비난한 상소문“(전략) 전하의 위력이라면 저를 비롯한 소두(疏頭) 몇 명을 형조에서 엄형에 처할 수 있고, 영남 바닷가에 유배할 수도 있으며, 저잣거리에서 찢어 죽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팔도의 만백성이 집집마다 원망하고 사람마다 분노하는 것은 전하의 위력으로도 제압할 수 없습니다.

전하가 이처럼 전에 없던 지나친 조치를 취하고도 아득히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학문을 일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하의 지혜는 사리를 깨닫지 못하고 마음은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안일에 빠지는 것을 달게 여기고 참소에 유혹되는 것을 기뻐합니다.

전하가 학문하지 않은 것이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재상 이하 어리석고 이익을 좋아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이 장차 전하의 학문이 성취되면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물리쳐 자신들은 권력을 잃고 욕심을 채우지 못할까 크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경연을 쓸데없는 것이라 하고 어진 이를 내치며 도학(道學)을 썩은 선비의 무용지물이라 하고 속된 무리들을 재주 있고 쓸 만한 사람이라 하여 누르고 올리고 주고 빼앗는 것을 제멋대로 하였습니다. 마침내 전하의 총명까지 오도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그 죄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 <고종실록> 권 18, 18년(1881) 윤7월6일조 -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덕수궁. 월산대군은 물욕과 명리를 초월하고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으로 권력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 상소문에서는 노골적으로 고종을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왕이라고 비난했다. 고종이 배우지 못하고 무식해 개화정책을 주장하는 무리들에게 놀아난다고도 비난했다. 아무리 고종의 개화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군신 간의 윤리를 중요시하던 조선시대에 군주에게 신하가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홍재학은 공개 상소문에서 감히 이렇게 언급했다. 결과적으로 홍재학은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고종이나 개화파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셈이었다. 신하가 왕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그것은 곧 역모나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윤7월8일에 홍재학을 체포해 조사한 후 범상부도(犯上不道)로 몰아 사형에 처했다.

재산도 몰수했다.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위정척사파는 역적이라고 공포한 셈이었다. 고종과 위정척사파는 타협점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복합상소운동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위정척사파 중 일부 과격파는 고종을 폐위하려는 쿠데타를 모의했다. 최초의 주모자는 충청도 출신 유생 강달선으로,

그는 홍재학과 함께 복합상소운동을 주도하던 사람이었다. 당시 27세이던 강달선은 유생들의 힘으로 고종을 축출하고 개화정책을 끝장내고자 했다. 강달선은 이재선을 포섭해 흥선대원군의 협조를 받으려고도 했다. 복합상소운동이 전개되던 7월 강달선은 이재선을 여러 차례 방문해 안면을 익혔다.

그렇게 서로 익숙해진 어느 날 강달선은 ‘벌왜(伐倭)’에 관해 이재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타진했다. 벌왜는 위정척사파가 고종에게 개화정책을 취소하라고 상소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위정척사파가 직접 나서서 일본사람들을 쫓아내자는 주장이었다. 당시 조선과 수교한 일본 공사관이 서대문 밖 천연정(天然亭)에 있었는데, 천연정을 습격해 그곳의 일본인을 모조리 쫓아내자는 주장이 벌왜였다.

벌왜는 위정척사를 명분으로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주장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기회에 궁궐을 습격하고 고종을 붙잡아 폐위하려는 쿠데타 명분이었다. 이재선은 강달선의 ‘벌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벌왜를 명분으로 하는 쿠데타가 성공해 고종이 폐위된다면 다음 왕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어리석고 권력에 눈이 먼 이재선은 그 자리에서 강달선에게 포섭됐다. 이후 강달선은 안기영·권정호 등 흥선대원군의 측근들을 차례로 포섭했다. 이재선 역시 자신의 측근들을 포섭했다. 8월에 접어들면서 쿠데타 모의는 이재선·안기영·권정호·강달선을 중심으로 구체화됐다.

고종 즉위 뒤에 숨은 음모 그런데 이재선은 자신의 측근들을 포섭할 때 “큰사랑의 뜻도 이와 같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큰사랑이란 바로 흥선대원군을 지칭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재선은 강달선으로부터 ‘벌왜’ 계획을 듣고 곧바로 흥선대원군에게 알렸으며, 흥선대원군은 ‘벌왜’를 이용해 다시 권력을 잡으려고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네가 벌왜를 주장하면 큰 공을 세우게 되고 크게 쓰일 것”이라는 말로 이재선을 부추겼다. 흥선대원군 역시 어리석은 이재선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심산이었다. 원래 흥선대원군에게는 이재선·이재면·이재황 이렇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 중 셋째인 재황이 바로 고종이었다.

고종은 열세 살의 미성년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는 신정왕후 조씨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결탁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철종 사후 신정왕후 조씨와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미성년의 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철종 승하 시, 23세의 재선과 20세의 재면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대신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재황이 왕위에 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금의 옥좌. 권력은 모닥불과 같아서 가까울수록 많은 이익이 있으나 자칫하면 치명적일 만큼 위험하다. 옥좌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던 대군 가운데 많은 수가 처신을 잘못해 동족상잔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미성년 재황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흥선대원군의 10년 세도가 가능했다. 1881년 복합상소운동 당시 위정척사파가 쿠데타를 모의할 때 고종 대신 왕으로 추대할 수 있는 인물은 처지로 보거나 자질로 볼 때 재선보다 재면이 적격이었다.

재면은 적자였고 또 자질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재면은 왕으로 추대될 수 없었다. 당시 위정척사파나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한 후 허수아비 왕을 내세워 정치와 외교를 자신들이 주도하려고 했다.

그러려면 재면보다 재선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와 관련해 <매천야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재선의 동복 여동생이 있는데 그가 이윤용의 부인이다.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이 안기영·권정호 등과 내통해 그 음모가 성사되면 대권이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고, 혹 실패하더라도 미련하고 천한 자식 하나만 희생될 뿐이라고 생각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재선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생각했다. 그 같은 흥선대원군의 행동을 윤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한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을 배반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음을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이때부터 이윤용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에게 큰 총애를 받다 갑오경장 이후 갑자기 중용됐다.”

이윤용은 매국노로 유명한 이완용의 서형(庶兄)인데 흥선대원군의 사위이기도 했다. 이윤용의 부인이 이재선의 동복 여동생이었으므로 이윤용은 이재선의 처지나 흥선대원군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이윤용이 보기에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기 위해 이재선을 이용하려고만 했다.

친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권력을 잡으려는 흥선대원군의 잔혹함에 이윤용은 치를 떨었던 것이다. 이윤용의 생각대로 흥선대원군은 위정척사파의 쿠데타가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 모두를 상정하고 대책을 세웠다. 성공한다면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섭정이 될 계획을 세웠다.

반면 실패한다면 모든 책임을 이재선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빠져나올 계획을 세웠다. 어리석은 이재선은 위정척사파나 흥선대원군이 왜 자신을 고종 대신 왕으로 추대하려는지 깨닫지 못했다. 단지 ‘벌왜’라는 대의명분과 ‘왕이 될 수 있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열심히 뛸 뿐이었다. 이재선은 자신이 이용되는지도 모른 채 ‘왜놈들을 몰아내고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떠벌리며 사람들을 포섭하느라 분주했다.

이재선·강달선·안기영 등이 구상한 쿠데타 계획은 거창했다. 그들은 8월21일로 예정된 과거시험을 이용해 거사하기로 했다. 그날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운집한 수천 명의 유생을 선동해 일을 벌인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수천 냥의 거사자금과 1,000여 명의 쿠데타군을 모집하기로 했다.

1,000여 명의 쿠데타군을 반으로 나누어 500명은 유생들과 함께 서대문 밖 일본공사관을 공격하고, 나머지 500명은 유생들과 함께 창덕궁을 공격하여 고종을 폐위한다는 계획은 그 자체만으로는 훌륭했다.

게다가 창덕궁을 공격하는 쿠데타군의 선봉에 이재선을 앞장세움으로써 궁궐 경비병들이 순순히 문을 열고 항복하게 만들자는 계획은 대단히 치밀하기까지 했다. 흥선대원군은 비록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쿠데타 주모자들을 만나 진행과정을 보고받으며 성패를 주시했다.

계획만 있고 군사는 없는 쿠데타 모의 거사를 하루 앞둔 8월20일 한밤중에 이재선·강달선·안기영 등은 한자리에 모여 거사계획을 최종 점검했다. 그런데 문제는 예정했던 거사자금과 쿠데타군이 거의 모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계획은 거창했지만 막상 목숨을 내놓고 쿠데타에 나서겠다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쿠데타 주도자들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운집한 유생들을 선동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거사시간은 해시(亥時, 오후 9~11시)로 잡았다. 이런 내용이 21일 아침 7시쯤 흥선대원군에게 전달됐다. 보고를 접한 흥선대원군은 군사력의 뒷받침이 없어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흥선대원군은 강달선 등을 불러 사실을 확인했다. 그 결과 강달선 등은 정말로 쿠데타군을 거의 모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강달선 등을 ‘금품을 갈취하려고 사람들을 선동한 사기꾼’으로 몰아 체포했다. 이들을 체포함으로써 흥선대원군은 만약의 경우 쿠데타 모의가 누설되더라도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었다.

그간 자신이 이들과 접촉한 이유는 역모를 정탐하기 위해서였다고 둘러대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8월 21일로 예정되었던 쿠데타 모의는 흐지부지됐다. 그렇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이재선·안기영·권정달 등이 중심이 되어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쿠데타 모의를 추진했다.

그들은 쿠데타의 성패는 군사력에 있다고 보고 군사를 모으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먼저 300명 정도의 군사를 모아 강화도를 점령한 후 강화도의 군사들과 함께 한양을 기습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은 8월29일로 잡았다. 하지만 문제는 자금이었다. 300명 정도의 군사를 모아 강화도를 공격하려면 수만 냥의 자금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제대로 모금되지 않았다.

자금 모금이 지지부진하고 군사들도 모집되지 않자 내부에서 변절자가 나타났다. 8월28일 이선풍의 고변에 의해 쿠데타 전모가 드러났다. 이선풍의 고변서에는 물론 이재선도 들어 있었다. 이재선은 8월29일 포도청으로 자진출두했다. 앞뒤 정황으로 볼 때 흥선대원군이 자진출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처음 이재선은 쿠데타에 관한 내용은 전혀 모른다고 잡아뗐다. 자신은 생긴 것도 변변치 못하고 정신도 변변치 못해 쿠데타를 도모할 만한 인물이 아닐뿐더러 집 밖으로 나간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관련자들과 대질신문을 통해 하나둘 진상이 밝혀졌다. 조사 결과 쿠데타의 주모자는 이재선으로 귀결됐고, 흥선대원군은 빠져나갔다.

조사가 마무리된 후 고종은 처음에 이재선을 제주도로 유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사형을 요청하는 신료들의 요청에 결국 사사(賜死)에 처했다. 이복형 이재선을 사사해야만 했던 자신의 입장을 고종은 이렇게 표현했다.

“이재선의 일을 어찌 말하리? 본래 어리석고 몰지각한 사람으로서 부모의 가르침을 받들지 않고 잡된 무리들과 결탁하였다 마침내 흉악한 역적들의 핑계거리가 되었도다. 이것이 어찌 하늘이 준 아름다운 본성에서 감히 나타나며 보통의 인정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랴? 매번 국청(鞫廳)의 보고서를 볼 때마다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러나 오늘의 처분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차마 못할 일이로다. 그렇지만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왕법(王法)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다. 포도청의 남쪽 감방에 갇혀 있는 죄인 이재선을 사사하라.”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대역부도죄인기영등국안(大逆不道罪人驥泳等鞫案) -

동족상잔으로 끝난 왕과 형의 우애 사사로이 생각하면 고종과 이재선은 형제 간이었다. 하지만 외교노선과 국가권력을 놓고 충돌하면서 둘은 형제 간이 아니라 왕과 역적의 관계가 되었다. 고종이 이재선을 사사한 것은 형으로서가 아니라 역적으로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형제 간에 이처럼 참혹한 비극이 발생한 이유는 이재선이 ‘어리석고 몰지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조선의 ‘공의와 왕법’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이재선이 ‘어리석고 몰지각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또 조선의 ‘공의와 왕법’이 아니었다면 이재선은 역적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사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선의 ‘공의와 왕법’은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역적으로 간주했다. 부모형제든 일가친척이든 역적으로 간주되면 혈연 간의 인정과 사사로움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의 부모형제 중에서 역적이 나타나면 부모형제 간에 처참한 동족상잔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형제 간의 처참한 동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종친불사(宗親不仕)’라는 제도를 시행했다. ‘종친불사’란 왕의 8촌 이내 친족은 벼슬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다. 그 대신 높은 명예와 봉급을 보장했다. 왕의 8촌 이내 친족에게 벼슬을 하지 못하게 확정한 왕은 세종이었다.

세종은 ‘종친의 안전을 확보해 친족 간에 의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8촌 이내’의 친족을 정치활동에서 배제했다. 즉, ‘8촌 이내’의 종친이 벼슬을 할 경우 만약 그들이 잘못하면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하는데 법으로 처벌하면 친족 간에 의를 상하게 되고, 또 친족 간에 의를 생각해 처벌하지 않으면 법이 무용지물이 되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므로 그런 곤란한 상황을 당하지 않으려면 벼슬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한국사에서 볼 때 왕의 가까운 친족에게 벼슬을 시키지 않는 제도는 고려 건국 이후 시작됐다. 그 이전에는 왕족들이 나라의 고관대작을 싹쓸이하는 족벌정치체제였다. 예컨대 신라시대의 골품제(骨品制)라는 제도가 그것이었다. 골품제 하의 족벌정치체제는 정치를 성골과 진골만의 문제로 협소화했을 뿐 아니라 성골과 진골 내부의 권력투쟁이 장기화함으로써 성골과 진골 자체가 소진되는 부작용을 불러왔다.

이런 역사적 경험을 겪은 후 고려시대부터 왕족은 정치문제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가 정착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고려시대에 왕족이 정치문제에 간여하지 않게 된 것은 골품제 하의 족벌정치체제를 극복한 역사적 성취라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그런 성취를 계승해 ‘종친불사’라는 제도를 시행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의 종친 중에서 가장 가까운 종친은 아버지 아니면 형제였다. 원리적으로 볼 때 왕위를 적장자가 세습했던 조선왕조에서는 왕의 아버지가 살아있거나 왕의 형이 살아 있을 수 없었다. 왕의 아버지나 형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정상적 상황이었다. 적장자 세습 원칙으로 볼 때 왕의 아버지나 형은 원론적으로 왕보다 왕위 계승 서열이 위였다.

그러므로 왕의 아버지나 형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왕에게는 무시무시한 위협이었다. 이런 상황이므로 왕이 살아있는 형과 좋은 우애관계를 유지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조선시대에 왕의 형으로 살았던 사람이 여러 명 있다. 태종의 형 정종과 회안대군, 세종의 형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성종의 형 월산대군, 광해군의 형 임해군, 고종의 형 이재선과 이재면이 그들이다.

이들 중에서 끝까지 좋은 우애를 지킨 형제는 별로 없다. 대부분 형제 간에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을 겪었다. 이유는 이재선의 경우에서 보듯 형이 어리석거나 권력욕에 눈이 멀어서, 아니면 광해군의 경우에서 보듯 왕이 형을 지나치게 의심해 동족상잔을 일으키고는 했다. 그러므로 왕과 형이 우애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형이 현명하고 권력에 초연해야 가능했다.

물론 동생인 왕도 형을 지나치게 의심하지 말고 형을 우애로 대우해야 했다. 조선시대 왕과 형으로서 끝까지 좋은 우애관계를 지켰던 형제는 성종과 월산대군이다. 성종은 형 월산대군을 은혜와 예절로 대우했으며 종종 대궐로 초청해 함께 술을 마시며 우애를 다지고는 했다. 월산대군 역시 권력에 초연한 자세로 일생을 살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월산대군은 시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월산대군은 성종보다 세 살 많았다. 동생이 열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월산대군은 열여섯 살이었다. 자신이 엄연한 형인데도 동생이 자신을 제치고 왕위에 오르는 현실에 월산대군의 불평불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현실을 월산대군은 물욕과 명리를 초월하고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월산대군 자신이 현명해서였다. 또 동생 성종이 우애로 월산대군을 대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결과로 성종과 월산대군은 아름다운 형제애를 역사에 길이 남길 수 있었다.

신명호 1965년 강원도에서 출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선임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를 거쳐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의 왕>(1998),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2002), <조선의 공신들>(2003), <궁궐의 꽃, 궁녀>(2004), <조선왕비실록>(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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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호 (200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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