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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추월한 힘 삼성 글로벌 질주 속에는 ‘이병철 DNA’있었다 

도쿄구상으로 투자 대결단 … 위기 때 강해지는 ‘기업본능’ 위력
<논어>와 메이지유신이 교과서 … 인간중심의 혁신기업 창출
커버스토리 다시, 호암처럼!
삼성시스템의 진화 

글 곽재원 중앙일보 중앙종합연구원 원장 [kjwon@joongang.co.kr]
이병철 회장이 만든 ‘삼성 DNA’는 삼성이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삼성 고유의 경영 시스템이다. ‘삼성 DNA’는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졌나? 과거와 현재 삼성에 어떤 역할을 했고, 미래에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생전 신입사원과 대화하는 이병철 회장.

호암 이병철은 이미 과거의 인물인가?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호암이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적다.

그가 세상을 떠난 1987년 이후 2008년까지 태어난 인구가 전체 인구의 27%에 해당하는 1300만 명을 넘어서니 당연한 이치다. 이제는 호암이 창조한 ‘삼성 DNA’를 몸 속에 지닌 ‘삼성맨’조차 자신들의 뿌리를 잊어가는 것 같다.

삼성 DNA는 삼성이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삼성 고유의 경영 시스템이다. 이는 삼성의 관리시스템·인재제일주의·삼성비서실·신사업전략 등으로 상징되고는 한다. 삼성 DNA는 호암 사후 삼성이 어려운 환경에 봉착할 때든, 잘 나갈 때든 쉼 없이 작동해 왔다.

세계의 산업구조가 바뀌고 글로벌기업들이 대 격돌하는 이른바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일컬어지는 요즘 이 DNA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삼성그룹, 나아가 한국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의 중핵에 자리 잡은 삼성 DNA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거대한 다리다.

한국경제의 근·현대사를 담은 채 미래 비전을 열어주고 있다. 그래서 호암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한국의 이정표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암 이병철이 만든 삼성 DNA는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와 관련해 많은 경영서적이나 평전들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나름의 이론을 펼치고 있지만, 필자는 새로운 각도에서 호암 파헤치기를 시도해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병철 DNA =삼성 DNA’라는 등식에서 ‘이병철 DNA’를 찾아가는 것이다. 호암의 생애 전반은 일제강점기(1910년 8월29일~1945년 8월15일)에 해당한다. 호암이 1910년생이니 그는 일본 쪽에서 보면 메이지(明治)시대(1868년 9월12일 明治 개원~1912년 7월30일 明治 국왕 죽음) 사람으로 분류된다.

이 두 가지 사실은 그의 인생행로를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호암 생애의 전반은 한반도에 유교가 엄연히 존재했던 시대에 배우고 익힌 <논어(論語)>사상과 메이지유신에서 정립된 일본의 국가목표인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지켜보고 직접 시험해본 ‘실업(實業)’사상이 체화한 시기다.

지방에서의 유생 경험, 도시와 서울에서 신학문 습득, 일본유학에서 선진 문물 경험, 만주·중국여행에서 동아시아 정세 파악 등이 이 시기 그의 행로다. 한마디로 주유(周遊)였다. 이것은 훗날 그의 지경을 넓혀준 모색과 준비의 단계였음이 증명됐다.

1938년 삼성상회(삼성물산의 모체) 창설은 <논어>의 ‘삼십이립’, 즉 나이 서른이 되어 비로소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서게 된다는 자립을 실천한 것이다. 사실상 삼성그룹으로 가는 첫 신호탄이다. 자기발견-정세파악-직관력-강한 실천의 이병철 DNA가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호암은 해방 이후부터의 생애 후반을 ‘나’ 중심에서 ‘기업’ 키우기, ‘국가’ 위하기로 경영철학을 확대해 나간다. 그가 내세운 ‘사업보국’은 한국형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이다. 1950년 6·25전쟁 후 바로 제일제당·제일모직을 설립하고 많은 은행을 인수한 뒤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 회장을 맡게 되는 일련의 활동이 이를 대변한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전후 상처를 치유하면서 극빈경제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탈바꿈하는 시기와 맞물려 당시 척박한 산업과 기업 실정을 감안했을 때 호암의 역할이 얼마나 막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십불혹(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는 시기)과 오십지천명(하늘의 뜻을 알아 그에 순응하거나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최선의 원리를 안다는 시기)을 경영철학에 대입함으로써 그는 마침내 주관적 세계에서 객관적 세계로 DNA의 틀을 업그레이드했다.


▎1978년 7월11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방문한 이병철 회장(왼쪽에서 둘째)이 신산업 전망과 기술 트렌드를 보고받고 있다. 왼쪽부터 KIST 천병두 소장, 이병철 회장, 한 명 건너 KIST 최상삼 박사, 홍진기 회장, 한 명 건너 KIST 한준석 감사, 이건희 회장.

이때 호암은 개인-기업-국가라는 3각 구도 속에서 기업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한 진로를 찾는다. 이에 따라 문화·교육·언론·의료 등 다방면에 걸쳐 사업 영역이 확대된다. 이른바 삼성의 ‘질풍노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병철 DNA가 삼성 DNA로 전이되고 자리 잡아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삼성은 이때부터 요즘 말하는 경영의 핵심 4대 요소, 즉 인재·아이디어·투자·리더십을 조합하는 ‘삼성형 경영 시스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 특징은 이들 4대 요소가 일직선상에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보며 16개의 조합(4×4=16)을 만들어 사업 포트폴리오를 짜게 돼 있어 당시로 보면 30~40년 앞선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호암 어록에서는 “한 사람의 개혁(이노베이션)보다 모든 사람이 개혁하는 것이 낫지만, 한 사람의 인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식의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인재를 중용하되 전체적 경영개혁을 늘 염두에 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개별력을 아끼면서 통합력을 중시했다.

그의 인재경영의 핵심이기도 하다. 1960년부터 계속된 것으로 알려진 호암의 ‘도쿄(東京)구상’은 자기 DNA에 대해 스스로 확신하면서 부하들에게는 직접화법으로 훈도함으로써 삼성 DNA를 구축하는 효과적이고 강력한 수단 중 하나가 됐다.

1960년대의 일본은 특히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그야말로 선진국을 향해 욱일승천하는 나라였던 만큼 호암에게 일본의 전략과 구상은 영양가가 대단히 높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비교하면서 일본의 약점을 하나하나 따져볼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호암의 일본 따라가기는 1960년대 말부터 완연히 지일(知日)에서 추일(追日)로 바뀐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로 가면서 삼성전자 설립, 일본 산요와 NEC 합작, 삼성전기·삼성정밀 심지어 삼성중공업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성장과 투자에 그대로 반영됐다. 일본 추격형 경영은 이때가 하이라이트다.

1970년대는 이 같은 추격형이 완결되는 시기였다. 1975년 삼성물산의 종합상사 1호 지정과 1978년 삼성반도체 설립은 글로벌 경영의 본격화와 자본 축적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조치였다. 마침내 1980년 전자와 반도체를 통합하면서 우리의 차세대 성장동력이면서 먹을거리인 반도체 투자에 나서게 된다. 극일(克日)의 선언이었다.

호암은 1982년 4월2일 미국 보스턴대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자리에 마련된 강연에서 “새로운 태평양의 시대를 열자”고 주창했다. 1985년 삼성반도체는 세계 세 번째로 256K D램 양산공장을 준공했다. 일본을 추격하고 극복하던 60, 70대에 그는 그의 생애 중 일본인들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

<논어>에 걸맞게 인화로 견제를 피하고 경세제민을 도모한 것이다. “GM(제너럴 모터스)에 좋은 것은 미국에 좋다”는 말이 있지만, 호암 이병철의 삼성이야말로 국운(國運)을 만들어온 기업이다. 호암 이병철은 메이지시대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동시대 사람들을 좋아했고, 그들과 오랜 교분을 가졌다.

도고 도시오(土光敏夫·1896~1988·전 도시바 회장, 게이단렌 회장)·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1904~87·전 신일본제철 회장, 게이단렌 회장)·세지마 류조(瀨島龍三·1911~2007·전 이토추상사 회장)는 호암이 가장 좋아하고 자주 만났던 사람들이다.

도고 회장은 도쿄 근교의 66m2(20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면서 게이단렌 회장 때도 자가용을 마다하고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 국민들로부터 검소와 청렴의 상징으로 존경받은 인물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시절 행정개혁의 총책을 맡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왼쪽)이 이나야마 요시히로 일본 게이단렌 회장과 KBS 프로그램 <일요방담>에 출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나야마 회장은 ‘참음의 철학’과 ‘화합의 경영’을 실천한 인물로 포항제철(포스코)을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세지마 회장은 군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옛 소련에 11년간 억류돼 있다 풀려나 이토추상사에서 활약했다. 그는 국가의 책사라고 할 정도로 정책·전략에 능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내가 흐뜨러지면 기업이 흔들리고 나라에 누를 끼친다” “철은 국가다” “전략 없는 국가에 내일은 없다”는 등의 많은 명언을 남겼다. 호암은 이들 3인의 특징과 강점을 경영에 활용했다. ‘업(業)’의 개념을 세워 사람을 중시하고 옛것을 지키되 새롭게 나아가는 호암의 ‘논어경영’은 도고·이나야마 회장 등과 만나면서 확실히 굳힐 수 있었다.

물론 일본 논어경영의 원조는 일본 기업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시부자와 에이치(澁澤榮一·1840~1931)이지만 그 후배 격인 이들이 실천에 옮겨 경제대국 일본의 발판을 만든 것이다. 특히 세지마는 독특한 인물로 나이로 보나, 성향으로 보나 호암과 딱 맞았던 것 같다.

세지마를 통한 일본 연구가 삼성 경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종합상사 삼성물산을 만든 뒤 이를 기반으로 세계 정보를 모아 글로벌 전략을 짜면서 수출입국의 선구자가 되는 과정은 일본 경영사를 압축해 놓은 것 같다. 삼성물산은 미쓰이(三井)·미쓰비시(三菱)·니쇼이와이(日商岩井)·이토추(伊藤忠)·스미토모(住友) 등 일본 유수 종합상사들의 행적을 밟아가며 경쟁력을 키워갔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종합상사 전성시대는 삼성물산으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세지마가 이토추상사에 들어가 이 회사를 키우는 과정, 특히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일본경제가 흔들리고 기업들도 망연자실할 때 역으로 회사의 경쟁력을 발휘하는 전략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세지마는 여러 정보를 수집·분석한 뒤 머지않아 중동전쟁이 일어나고 에너지 위기가 온다는 것을 예측하고 중동 국가들과 미리 석유거래 계약을 이중삼중으로 맺어뒀던 것이다. 세지마는 이 과정을 호암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자세히 소개했고, 호암은 삼성물산을 삼성그룹의 머리 사업체로 키워나갔다.

삼성의 강점을 지적할 때 흔히 제일모직과 제일제당 출신 재무와 인사통의 중용을 꼽는다. 회장을 보좌했던 실세들이 대부분 이곳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어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삼성이 세계적 기업으로 나가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종합상사 삼성물산은 일본적 경영을 많이 닮았다.

삼성을 이끌어온 기획통과 전략통은 대부분 삼성물산 출신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재무·인사와 기획을 전문화하는 사내 업종구분 또는 경력전문화일 것이다. 이 체제는 경제가 좋을 때는 기획에 힘을 주고, 경제가 나쁠 때는 재무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경기변동에 대응한 경영자원의 유효배분과 활용을 가능하게 했다.

세지마는 일본 전쟁사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게 된 동기, 전쟁 초기 한때 승승장구했던 일, 패망에 이르는 길, 그리고 후회와 반성 등. 추측하건대 호암은 일본군의 대본영(일본군 핵심참모부)을 깊이 연구했을 것이다.

삼성 비서실은 일본의 대본영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대본영은 실패의 모델이었고, 삼성 비서실은 성공의 모델이었다. 조직의 형태가 비슷한데 어디서 차이가 났을까? 우선 오너의 장악력을 꼽을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듣고, 현장을 확인한 뒤, 분석하고, 지시하고, 책임지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호암은 직접 챙겼다.

그는 이 프로세스에서 ‘있는 그대로 듣는 것’을 가장 중히 여겼다. 거짓 보고, 가공 보고는 엄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비서실은 회장을 보좌하는 사심 없는 조직이었다. 호암은 후계자인 이건희 회장에게 ‘경청(傾聽)’을 가장 중요한 유훈으로 남겼다.

삼성 비서실은 대본영 같은 존재

둘째, 비서실은 책임경영을 선도했다. 어떤 일이든 시작에서 끝까지 최고경영자나 부서장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삼성의 임원이 되면 회사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된다. 바둑에서 ‘착안대국 착수소국’ 이라는 말이 있다. 큰눈으로 국면을 들여다보되, 막상 돌을 놓을 때는 목표가 매우 명확하고 착점이 세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 임원이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는 덕목이 아닐까 싶다. 셋째는 현장경영이다. 삼성 비서실은 계통보고를 철저히 유지하면서도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안테나를 늘 가동했다. 예를 들면 지방에 있는 공장의 전기가 나가도 곧바로 전해졌고, 날씨 변화가 생산 수율과 품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보고됐다.

넷째, 삼성 비서실은 재무와 인사, 그리고 기획통의 혼성조직으로 서로 경쟁하면서도 그룹 경영의 큰 줄기를 찾아나가는 비전경영의 산실이다. 비서실은 각 부서에서 우수한 인재를 뽑아가지만, 비서실에서 근무하면 훌륭한 인재가 된다는 말도 있다.

다섯째는 국제적 시각이다.

삼성이 글로벌 전략을 펼치는 데는 삼성물산과 삼성전자 등 각 그룹사가 보고하는 국가·지역·산업·기업 동향을 모아 분석하고 전망하는 작업이 필수였다. 전략을 짤 때의 필요 요소인 정확성·치밀성·객관성·현실성·미래성 등을 정리한 보고서를 호암은 비서실에 주문했다.

일본 대본영의 실패는 삼성 비서실의 강점을 뒤집어 보면 알 수 있다. 세지마 자신도 삼성의 도약과 비서실을 보면서 대본영의 성공 모델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호암은 생애 최후반 10년을 기술경영(MOT, Management Of Technology)에 몰두한다. “기술자는 경영을 알아야 하고, 경영자는 기술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을 그는 종종 했다.

선진국에서 최근 유행하는 MOT를 그는 일찌감치 실천에 옮겼다. 경영의 한복판에 기술을 놓고 모든 재원을 배분하는 새로운 혁신(이노베이션) 체제다. 호암이 돌아가던 해인 1987년 10월 개원한 삼성종합기술원은 MOT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호암은 이곳에 ‘무한탐구’라는 휘호를 남겼다.

기술개발과 창조적 경영을 결합한 그의 철학은 융합창발력·기술혁신·혁신역량을 인재경영으로 결집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실천됐다. 이건희 회장은 2006년 9월18일 뉴욕 삼성전자 사장단회의에서 “20세기와 21세기의 경영은 다르다. 20세기에는 물건만 잘 만들면 1등이 됐지만 지금은 품질에 별 차이가 없다.

21세기에는 여기에 디자인·마케팅·연구개발(R&D)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창조적 경영의 실행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한 인재 확보와 R&D에 대한 투자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연구개발비를 매출의 10%까지 늘려라”라는 이 회장의 지시에 따라 삼성의 R&D 투자는 7조원(연구인력 5000명, 박사급 10%) 이상으로 늘어났다. 삼성의 CEO는 모두 최고기술책임자(CTO)가 돼야 한다고 한다. 호암의 기술중시 경영은 미래를 대비한 비전경영의 핵심이다. 후계자는 거기에 창조성을 입혀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삼성 DNA도 문화다

‘기술은 경영, 경영은 기술’이라는 깃발은 이병철 DNA를 승계한 삼성 DNA를 함축한 것이다. 삼성 경쟁력의 원천이다. 삼성은 1970년대 전반 기술 흡수 단계에서 1970년대 후반 모방 단계로 가면서 비약의 시기를 맞았다. 삼성의 기초가 이때 다져졌다. 1980년대에는 4개 연구소 설립을 계기로 개량 단계로 들어갔다.

삼성의 글로벌화가 본격화했다. 1990년대는 혁신 단계로 뛰어올랐다. 기술의 해외 이전이 가능해졌다. 2000년대의 삼성은 창조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요코하마(橫浜)국립대의 조두섭 교수는 기술능력 구축전략과 삼성 경쟁력을 분석했다. 연구개발체제와 관련 기구들의 변화를 기술 습득 과정과 대응시켰다.

삼성전자를 이끌며 기술경영을 안착시킨 윤종용 삼성 고문은 “삼성 임원들이 새 사업을 할 때면 늘 사람·시간·돈·정보 순으로 생각한다”며 이것이 삼성이 일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삼성 경쟁력을 파악하는 또 다른 시각이다. 그렇다면 ‘삼성은 어떻게 글로벌 기업이 됐는가?

왜 강한가’라는 질문에 정답은 있을까? “삼성은 조직”이라는 말을 하는데, 매년 인사철이 되면 삼성만큼 뜯어고치는 기업도 별로 없다. 늘 조직개편이다. 삼성은 늘 변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병철 DNA다. ‘인간중심경영(human oriented management)’과 ‘하나의 삼성(Single Samsung)’이다.

이 두 축이 삼성 경영력을 받치고 있다. 삼성의 5대 경영이념인 인재제일·최고지향·변화선도·정도경영·상생추구는 이 두 축 위에서 실천되고 있다. 이병철 DNA는 조직이 아니라 문화다. 삼성 경쟁력을 상징하는 삼성 DNA도 문화인 것이다. 결국 문화경쟁력이 삼성의 경쟁력이라는 등식이 가능해진다.

몇 가지 짚어보자. 우선 삼성경영은 위기경영이다. 조직은 언제나 ‘헤쳐모여’ 하는 태스크포스(TF)다. 삼성전자를 보면 한 부서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곳이 없다. 외부사람은 물론이고 다른 삼성맨들도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삼성전자의 제품별 사업부서제는 그 대표적 사례다.

삼성 성장의 원동력이기도 한 위기의식도 여기서 나온다. 삼성의 위기경영은 그냥 죽는 소리를 하면서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대안과 비전을 요구하는 고도의 경영전략이다. “성공할 때 이미 실패의 싹은 트고 있다”는 말을 삼성맨들은 귀가 닳도록 듣는다.

삼성경영은 퓨전경영이다.

수많은 인재가 문턱 없이 부서와 기업을 넘나든다. 일본말로 ‘나와바리’가 없다. 자연히 사심을 부릴 여지도 없다. 일을 따라 다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삼성전자에 새 사업이 있으면 그룹 내 다른 기업에서 인력을 빼내온다. 다른 시각과 다른 커리어를 가진 사람이 들어옴으로써 융·복합사업이 활발해질 수 있다.

삼성종합기술원과 기업연구소들 간의 교류도 기술 삼성을 지탱하는 요소 중 하나다. 삼성경영은 일류경영이다. 삼성은 일등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류를 지향한다. 삼성의 제품과 서비스는 시장 셰어보다 부가가치를 중시한다. 휴대전화의 성공은 일류경영의 승부처였다.

일류경영은 글로벌 경영으로 이어졌고 글로벌 인재 확보와 글로벌 R&D센터 운영 등 선도적 경영 모델을 구축했다. 삼성전자의 지역본사제도, 글로벌 프로젝트 매니저(GPM)제도, 글로벌 비즈니스 매니지먼트(GBM)제도 등을 꼽을 수 있다.

삼성경영은 훈도경영이다.

삼성은 상사의 지시와 교육을 중시한다. 선배다운, 부장다운, 사장다운, 회장다운 언어가 있다. 1993년 ‘신(新)경영’을 발표할 때의 이건희 회장의 발언은 호암의 훈도경영과 맥을 같이한다. 디지털시대일수록 반대로 훈도경영의 가치는 빛난다. 삼성경영은 속도경영이다.

삼성이 새 사업을 할 때 숙고를 거듭하다 전격적으로 시행에 들어가는 수법은 다른 기업이 따라갈 수 없다. 특히 대규모 투자가 동반되는 사업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D램 반도체 진출과 계속되는 대형 투자가 상징적이다. 삼성경영은 정보경영이다. 삼성에는 참 정보가 많다.

삼성물산에서 체득한 정보 수집력과 분석력은 그룹 전체로 확산됐다. 기업들이 글로벌화하면서 정보 마케팅을 할 정도로 삼성의 정보는 충실해졌다. 삼성경제연구소가 그 중심에 서 있다. 삼성 사장단회의는 첨단 정보 교류의 장이다. 여기서 발표되거나 오고 간 이야기들은 한국경제의 나침반이 된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삼성경영은 보람경영이다. 삼성의 PS(profit sharing)제도는 단위 부서라면 가능하지만 그룹사 전체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비용도 만만찮고 관리도 까다로워 최고경영자의 용단이 뒤따라야 한다. 그룹 내 전문대학원·기술상 등도 보람경영의 일환이다.

삼성경영은 동반경영이다.

삼성의 협력사와 계열사는 매출이나 이익의 성장률이 삼성과 같이 간다. 중견 또는 중소 정보기술(IT)업체 가운데 증권시장에 상장된 회사는 거의 삼성 관련 기업이다. 삼성과 손을 잡기가 어렵지 한번 잡으면 살판난다는 말도 있다. 삼성경영은 이래서 깊이를 재기 어렵다.

세계적 라이벌들에 삼성의 전력이 좀처럼 노출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삼성의 조직과 기술은 볼 수 있지만 이를 가동하는 문화적 경쟁력은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호암은 디지털화·모바일화·네트워크화·IT화·복합화로 대변되는 세계 전자산업을 리드하는 데 꼭 맞는 삼성전자의 경영 시스템도 진작에 만들어 놨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삼성의 경쟁력은 언제까지 갈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한 해답은 역시 없다. 다만 최근 삼성전자와 일본 전자업체들의 2009년 3분기 경영실적에서 삼성이 일본 주요업체 9개사를 합친 것보다 나은 영업이익을 올리자 일본 측이 본격적인 삼성 타도에 나선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삼성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지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기업들의 분석은 현재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자신들은 실패의 모델, 삼성은 성공의 모델로 전제하고 무엇이 일본을 약하게 만들었는지를 삼성을 강하게 만든 요인과 역으로 대비하는 것이다.

삼성 최고경영자의 장악력과 영향력은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는지, 삼성 사장단의 내공과 시각은 어느 수준인지, 그룹사 간의 결합력과 인재 간의 화합력에는 변화가 없을 것인지, 삼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어떤지, 기술경영의 추동력은 어디서 나오는지 등 실로 전방위적 탐색이다.

이 탐색에는 <일본경제신문> <주간 다이아몬드> <월간 웨지>를 비롯해 심지어 <(일본은)기술이 강한데 왜 경영에 실패하는가>와 같은 도발적 제목을 단 책들도 가세하고 있다. 삼성은 한 단계 더 뛰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먼저 되돌아봐야 한다. 내 몸 속의 DNA를 다시 꼼꼼히 살펴봐야 할 때다.

어떤 부분을 남기고 어떤 부분을 새로 갈아 채워야 하는지 결정하고 세게 밀어붙여야 한다. 이병철 DNA의 본류를 재탐사하고, 1993년부터 지금까지 성공신화를 이룩한 신경영을 점검해 ‘위대한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는 작업이다. 신경영은 국제화와 복합화를 통해 최고경쟁력을 갖추는 소위 ‘질(質)경영’을 기반으로 21세기 초일류기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는 다시 50년을 내다보는 미래전략을 짤 탐사조직을 가동해야 할 때다. 도쿄구상은 프랑크푸르트 신경영선언으로 이어지며 삼성 DNA의 역량을 극대화했다. 기업활동의 범세계적 배치(가로)와 범세계적 조정(세로)의 좌표 위에서 삼성은 조직을 변화시켜 왔다. 삼성은 지금 어떤 좌표를 그리고 있는가?



201001호 (20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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