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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몰락 가능성 짚은 두 지식인의 시각-조우석 

한국 몰락의 씨앗 : ‘왼쪽, 더 왼쪽으로’ 리버럴 강박증 

조우석 문화평론가
사회적 약자 배려와 정의 추구하는 저항적 지식인 그룹이 사회적 분노와 적대감 전파 한반도 근대화는 조선조 특유의 인문학적 전통인 ‘文弱’과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 성과물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현실과 역사의 뒤에 숨어 개탄과 저주를 반복할까? 서구 학문을 얕은 수준에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허우적댄 절대순수주의의 함정에 다시 빠져드는 용렬함에 불과하다. 그 결과 진보의 ‘가짜 신화’가 판을 치고 한국인은 통째로 좌파정서에 볼모로 잡혔다.

▎촛불시위는 이제 한국에서 하나의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들어가며 -

최근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항구적인 위기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한국은 분명히 20세기 이후 가장 성공한 근대국가고, 표면적으로는 역동적 변화를 거듭하지만 항상 출렁거리며 위태롭다. 주변을 한번 돌아보라. 좌우를 편 가르는 철 지난 이념 분쟁의 여진, 남이 쌓아 올린 부(富)에 품는 과도한 적대감과 반기업 심리, 자기 현대사를 우습게 보는 몸에 밴 백안시와 외면의 태도, 그런 심리가 더 조야한 형태로 무한 반복되는 인터넷 공간의 반문화와 몰지성주의 팽배…. 이런 현상을 구조적으로 짚어낸 신간이 등장했다.

신문기자 출신의 조우석이 최근 펴낸 <나는 보수다-진보에 홀린 나라 대한민국을 망치는 다섯 가지 코드>(동아시아)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항구적 위기를 ‘구조적인 사회통합의 불안정’으로 지적하고, 이런 상태라면 국가의 실패, 몰락 내지 붕괴로 이어질지 모른다고 진단했다. <월간중앙>은 대한민국이란 공동체의 큰 그림을 그리자는 이 책 내용을 3회로 나눠 연재한다. 2회 ‘백범 김구는 영웅인가, 분열주의자인가’, 3회 ‘2000년대 신 민족개조론’.


한국 사회엔 책임 있고 건강한 주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꼬리가 몸통을 흔들고, 상수도와 하수도가 함께 흘러가는 이상현상이 벌어진다. 사회는 위기의 연속이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사회 발전을 이끌 창조적 소수? 그런 건 없어도 좋다. 적어도 우리 사회를 떠받칠 주류로서의 기성체제(Establishment)만이라도 있었으면 한다.

주류가 없는 사회는 언제나 불안에 시달린다. 한국 사회가 항구적인 위기를 반복하며, 사안이 돌출할 때마다 허둥대기 일쑤인 까닭이다. 그 결과 각종 사회 병리현상에 대응하고 처방해야 할 주인은 사라지고 목소리 높고 내 이익만 챙기려는 객꾼이 득실거린다. 속을 들여다보면 사회통합에 필수인 신뢰와 동의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은 없거나 태부족이다. 즉 개인은 뿔뿔이 흩어져 있다. 그들은 구조조정의 물결 앞에 나 홀로 생존전략만 생각할 뿐이다. 지식인도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며, 이 와중에 대중은 크게 격앙됐다.

대한민국 공동체가 사라지거나 해체되기 직전이라는 우려가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이 여기 있다. 우리는 서로 힘들다며 하소연하거나, 나보다 형편이 좋은 사람에게 적대감과 분노를 표출하는 데 너무도 익숙하다. 점차 벌어지는 빈부격차와 이에 따른 위화감이 만만치 않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과, OECD 회원국가 평균보다 현저하게 낮은 세계 최저 출산율도 그걸 새삼 보여준다.

한국 사회의 핵심 코드 ‘분노’

피폐해진 삶, 엄습하는 불안감은 나이 든 세대나 20, 30대나 마찬가지다. 지난해 한 명문대 학생은 “G(글로벌)세대로 빛나라는 신망을 한 몸에 받지만, 속으로는 88만원 세대로 빚을 내야 하는” 고통을 털어놓으며 분연히 학교 자퇴를 선언했다. 그 선언에 엿보이는 격앙된 감정과 분노의 찌꺼기를 요즘엔 누구나 거리낌없이 발산한다. 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고 불안하다고 하지만, 한국 사회를 관류하는 핵심코드는 사실 분노의 정서가 아닐까?

‘헝그리(hungry·배고픈) 사회’였던 우리는 어느덧 ‘앵그리(angry·화난) 사회’로 바뀌었다. 분노의 정서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파괴적인 사회 에너지인데, 지금 이 땅에선 만인이 만인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그 부정적 에너지가 뭉쳐 다니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 폭발할 경우 국가 실패, 즉 한국 사회의 몰락 내지 해체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괜한 걱정이 아니다. 갓 출범한 이명박 정부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했던 2008년 대한민국의 촛불시위가 대표적 사례다.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 내용을 반대한다는 의사 표현이었던 이 시위는 삽시간에 사회적 위기로 치달았다. 한국 사회 해체의 한 문법을 보여준 셈이다. 부정적 사회 에너지는 의외로 쉽게 타오를 수 있다. 분노의 심리는 우선 개인별로 잠재돼 있다. 문제의 대학 자퇴생이 “억울하다”고 거듭 말했지만, 누군가가 다가와 귓전에 살며시 속삭인다. “대학 등록금 1000만원, 청년 실업자 100만 명 시대에 당신만 혼자 살려 하지 말고 스크럼 짜고 일어나라.” “신자유주의 파고 탓이니 그 세력을 혼내줘야 하고, 가진 자와 대기업들에 목청껏 항변하라”고 말이다.

반기업 심리와 부(富)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공권력을 무시하는 태도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증폭되어 가지만, 한번 램프 밖으로 튀어나온 분노의 지니(소원을 들어주는 정령)를 다시 집어넣기란 매우 어렵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걱정스러운 보수 세력의 대응도 어설프고 비이성적이다. 중립적 입장의 지식인도 못내 안타깝다. 그들은 “삶의 조건과 방향을 설정해주는 민주공화국의 핵심 이상과 가치는 내면에서 파괴됐다. 이게 우리가 헌신해야 할 민주공화국과 인간공동체의 참모습이란 말인가?”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 말에도 무언가 분노의 기미가 있고, 누굴 향해 삿대질하려는 심리가 없지 않다. 이런 심리는 누가 만들었을까?


▎2008년 서울 시청 앞에서 미국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를 마친 후 광화문 사거리에 도착한 시위대가 광화문역 부근 골목에 저지선으로 주차돼 있던 경찰버스를 끌어내고 있다.

우리는 엄연히 성공한 현대사를 놓고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했다고 굳게 믿으면서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못 했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전임 대통령 노무현의 볼멘소리와, 그의 집권기간 내내 이어졌던 소모적인 과거사 청산 소동을 우리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들, 아니 우리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선과 악의 잣대로 역사를 재단하려는 조급주의가 아닐까? 여기에는 외곬 심리의 DNA도 함께 숨어 있다. 외곬 마인드란 한국사 최대의 역사 실패 시기인 17~19세기에 고착화된 이후 20세기 역사 경험을 통해 붙박이가 된 집단심리의 한 변종이다.

우리는 현실이 힘들고 다른 선택이 불가능할 때 “어디 두고 보자”며 앙앙불락하는 원한과 복수의 마음을 키웠다. 문제는 그 방향이었다. 중국의 루쉰(魯迅)이 <아큐정전>에서 밝혔던 아큐의 멘털리티와 구조가 일단 같다. 현실에서 패배했으나 정신적으로는 결코 지지 않았다고 우기는 패배주의 혹은 허위의식의 원형인 셈이다. 한국사의 실패 시기인 19세기 말 20세기 초 중국에 훨씬 앞서서 조선 사회가 집단적으로 창출했다. 더구나 우리는 지금도 그걸 고스란히 품고 있다. 사실 아큐 멘털리티의 집단심리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지적했던 르상티망(Ressentiment)의 전형이다.

‘분노의 알’을 부화시킨 지식인들

니체는 인간정신의 발달을 의무와 복종을 상징하는 낙타의 단계, 단호한 부정(否定)과 자유의 획득을 뜻하는 사자의 단계, 진정한 망각과 새로운 창조로 나아가는 어린아이 단계 등 3단계로 나누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맨 아래 낙타의 단계에 머무는 셈이다. 구한말의 역사 실패와 함께 식민지로 굴러떨어지고 분단을 경험하는 최악의 역사경험 속에서 ‘강제된 의무와 복종’을 통해 굳어진 집단심리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죄의식을 품고, 타인을 향해서는 종종 공격적 분노를 표출하는데 이런 우리 모습은 니체의 분석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그럼 한(恨)이란 무엇일까? 한국의 기본적 정조라는 한이란 밖으로 표출되지 못했던 공격적 분노와 원망을 청승과 슬픔으로 잠시 억누른 것에 불과하다. 즉 르상티망의 청승 버전이 한이다. 시인 김소월 식의 한의 정서에서 벗어난 지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집단적 분노로 불타오르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안으로 자책하던 우리는 그동안의 원한을 밖으로 표출하는 데 정신이 없다. 1960년대 이후의 놀라운 성공을 경험하며 국부와 재화가 잠시 풍족해진 지금 참된 승화의 작업 대신 방향 없는 분노를 확대 증폭시키기만 한다.

대한민국이 덩치는 키웠으나 그걸 통제할 합당한 ‘집단적 멘털리티’를 갖추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분노를 우리에게 주입했을까? 광복 직후 우리는 근대국가 건설에 필요한 큰 그림 없이 덜컥 출발했고, 사회적 동의 과정도 생략하거나 태부족했다. 이런 과정에서 삽시간에 근대국가로 성장했고, 한은 분노로 자라나지 않았을까?

이 분노를 전방위의 공격적 정서로 만들어낸 대표적인 그룹이 지식인이다. 때문에 1970년대 문화계 중심의 민중문화운동과 그것이 낳았던 분노의 알을 부화시킨 1980년대 사회과학 시대의 공과를 따져야 한다.

우선 지식인 그룹의 허위의식부터 도마에 올려보자. 왜 지식인 다수는 자기가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한국 사회 특유의 ‘리버럴 강박증’ 때문이다.

리버럴이란 깃발은 좋은 것이며, 추구해야 할 가치 혹은 사회적 선(善)으로 통한다. 리버럴이라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정치·경제적 정의를 추구한다는 게 한국 사회에서만 통하는 이상한 불문율이다. 어느 사회에도 리버럴은 존재하고, 현실정치는 물론이고 지식생태계의 다양성을 위해서도 리버럴은 필요하다. 지식인의 경우 본래가 리버럴리즘과 친연성이 있다. 하지만 건국 이후 지식인 사회 지형지물의 변화는 너무도 드라마틱하다. 주류를 이뤄왔던 보수주의 지식인 그룹은 어느 순간 일패도지(一敗塗地)에 가까운 퇴장을 하고 말았는데, 설사 그들이 존재하더라도 떠받치는 논리와 지적 권위, 특히 대중적 지지란 초라하기 그지없다. 당초 리버럴 바람은 단순하고 소박했는데, 그 점을 염두에 두면 더욱 희한한 일이다.

“비판과 저항의 정신이 결여된 사람은 결코 지성인일 수 없다”고 선언했던 문학평론가 김병익의 1970년대 중반 시기의 발언 정도가 문제의식의 출발이었다. 현실과 권력에 비판의 포문을 열지 않으면 지식 기능인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당시 유신권력에 맞서 있을 수 있는 항변이라서 쉽게 공감이 갈 만했다. 유신 시기 대중도 일정하게는 공감했다. 이때 백낙청이 이끄는 민중문학 진영의 핵심 매체 <창작과비평>의 위력도 커졌지만, 한완상 등이 제시한 이른바 민중적 지식인 혹은 언론인 송건호가 제창한 민족지성론 등으로 정리되면서 지속적인 흐름을 이어갔다.

이들은 집요했고 편 가르기와 독선에 능했다. 초기 리버럴 지식인들은 정권에 참여했던 선배나 광복 이후 주류학계 사람들을 어용으로 딱지 붙이거나, 아니면 지식기술자에 불과하다고 조롱하길 즐겼다. 기이하게도 이렇다 할 반론이 드물었다. 간혹 황성모·배성동·이승윤 등이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로 이른바 어용론을 반박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고 자신한 리버럴 지식인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헤게모니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불과 10여 년 사이에 지식인 생태계에 대역전극이 벌어졌다.

그 직후 동유럽과 옛 소련이 몰락하는 역사적 상황이 벌어졌지만 한국 학계의 지형지물은 글로벌 스탠더드와 무관했다. 이후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움직여갔고, 급기야 권력화한 오늘에 이르렀다. 이게 리버럴 지식인 그룹의 30년이 넘는 혁혁한 역사다. 이들이 행사하는 지적 권위 속에서 한국 사회만의 리버럴 강박증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이미 몇몇 이론적 대부도 배출하지 않았던가? 언론인 출신으로 각각 <한국민족주의의 탐구>와 <우상과 이성>을 썼던 송건호·리영희에 이어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를 통해 현대사 붐을 일으켰던 역사학자 강만길, 문학에 영향력을 발휘해온 문학평론가 백낙청 등등….

반값등록금에서 공정사회론까지

리버럴 지식인 상당수는 현실 참여의 명목 아래 공직을 수행해왔다. “김대중·노무현 집권 10년 때 두드러졌는데 특히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는 권력과 일체가 되다시피 했다”고 언론인 남시욱은 지적했다.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에 참여했던 지식인 숫자는 부지기수다. 이들의 광범위한 활동은 광복 이후 지식인 사회의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1960년대 이후 개발연대에 경제학자 남덕우, 철학자 박종홍 등의 권력 참여가 다분히 테크노크라트의 성격을 지녔던 형태와도 달랐다. 옛 시절 테크노크라트 그룹은 정치지도자가 정책방향을 제시하면 그 틀에서 움직이는 데 충실했다. 그러나 2000년대 전후 지식인들은 확신형 ‘지식 정치인’이라서 권력자를 뒤에서 추동하거나 조종하기도 한다.

저항적 지식인 그룹은 산업화의 부정적 현상에 주목하면서 그들이 정당치 못하다고 규정했던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데 앞장서왔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분노와 적대감을 전파해왔다. 당장 최근 몇 개월 새 우리 사회에 논쟁거리였던 무상급식·반값등록금만 해도 리버럴 강박증이 원인을 제공했다. 지식인 중심의 진보 편향이 대중사회의 평등주의 정서를 부추기고, 이게 포퓰리즘으로 마구 쏠렸기 때문이다.

실은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그런 혐의가 없지 않다. 실용주의 정부라고 스스로 자리매김했지만, 건국 이래 현대사의 확실한 자기 인식이 부족한 그의 정부는 틈만 나면 공정사회를 외친다. 공정사회라는 캐치프레이즈는 그 자체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대기업과 재벌 때리기를 통해 여론을 자기편으로 만들겠다는 얕은 철학을 바탕으로 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반값등록금을 외치는 대학생에서 공정사회를 외치는 최고지도자까지 우리는 모두 리버럴 강박증의 포로다. 이미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자 리듬이 된 지 오래다. 그런 인식을 부추기는 책들은 실로 부지기수다. 젊은이들은 그걸 보면서 빗나간 현대사 인식을 키우고 사회정의를 외치게 되는 악순환의 구조다. 이 때문에 현재 서점가를 장식하는 대표적인 저술가들도 리버럴 지식인이 장악했다.

옛 소련과 동구권 등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했음에도 왜 20세기 후반 이후에도 반자본주의의 대항문화가 여전한가?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모습을 바꾸고 더 경쟁적이고 팍팍한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측면이 있을까? 미국의 역사학자 앨런 케이헌은 이를 문화투쟁으로 분류한다. 앞서 언급한 대항문화·반문화와 비슷한 진단인데 요즘에 서구의 좌파는 반세계화·반미·환경·뉴에이지운동 등 문화투쟁으로 모습을 바꿨다. 더욱 광범위하게 전선을 확대한 셈이다.

그게 한국의 경우 반미주의, 촛불시위, 4대강 반대, 종북주의 등으로 표출되며, 일상적이고 식탁 안전 등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문제 제기로 구체화됐다. 문화투쟁은 대중적 호응을 얻기에 유리하니 출판물·TV 등에 곧잘 등장하곤 한다. 특히 단행본 출판이야말로 문화투쟁의 본거지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를테면 생태주의운동가로 알려진 강수돌의 책 <시속 12킬로미터의 행복>(굿모닝미디어, 2010년) 같은 시대의 유행을 타는 생태주의 저술은 실로 부지기수다.

이 책은 가벼운 에세이풍이지만 생태주의 종합세트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한국 지식인들의 평균적 인식을 점검해볼 만한 요긴한 텍스트다. 그는 이제는 전설로 통하는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 헬레네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아동작가 권정생까지 두루 끌어들인다. 느리게 사는 멋진 삶, 어머니 대지의 예찬 등 생태주의의 단골 어휘들이 총동원됐다. 현직 교수이면서 시골 마을의 동네 이장으로 일했다는 그의 생태주의 신념은 그 자체론 나쁘진 않지만 너무 공격적이다. 그는 산업주의란 곧 파괴주의라며 단정하거나, 4대강 개발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삽질이자, 우주의 질서를 깨는 행위”라며 비판한다.

고담준론형 지식인 뿌리 조선 사대부

리버럴 강박증은 왜 경계의 대상인가? 그것은 지식인들이 가진 지나친 자기 열정 내지 순수함으로 스스로를 불태우는 헛된 열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몰입은 혼란을 유포시키거나 비생산적이기도 하다. 개혁을 제도화하는 점진적이고 차분한 노력을 가로막는 부작용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19세기 이래 서구 좌파의 진행 과정을 우리가 그대로 재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실용적 자세가 우선이지 않을까?

리버럴 강박증의 시대적 뿌리가 없지 않다. 경제적 이득이나 이용후생은 한참 뒷전으로 밀리던 답답한 나라 조선시대의 윤리관념 내지 유교 이데올로기의 낡은 변용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까지 내내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지구촌의 통상대국으로 환골탈태했는데도 아직도 우리는 옛 도덕관념에 사로잡혔고, 지식인은 리버럴 강박증에 사로잡혔다. 즉 근엄하고 칼칼했던 조선 사대부야말로 현대 지식인의 ‘오래된 모델’이자 원형이다.

21세기 한국의 지식인 그룹은 서구사회 지식인을 모델로 삼지만, 심층에서는 조선 사대부들이 남겨준 DNA가 작동한다. 즉 사대부들은 군사나 재정, 생산에 관련된 업무를 맡기면 체모가 깎인다 하여 언짢게 생각했다. 그들이 선호했던 직종은 세자 교육이나 임금과의 학문적 토론, 그리고 정무 비판 정도였다. 그러니 고담준론에 능할 수밖에 없었다. 실무적 역할을 맡아도 실제 업무는 서리들에게 모두 맡긴 채 의정부·육조·대간·홍문관을 따지지 않고 모두 국왕과 더불어 국정을 논하던 정치논객 노릇에 충실했다. 지금 21세기 한국인의 정치과잉에는 전 시대 사대부들의 고담준론이 밑그림으로 들어 있는 셈이다.

하늘 저편의 뜻, 유학에서 떠받들던 이른바 천명(天命)을 새기면서 경제적 이해나 부의 증식 욕구를 누르고 살던 근대 이전 우리 모습이 그러했지만, 산업사회로 접어든 지금까지 그렇다면 실로 모순이다. 특히 리버럴 지식인들이 그러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1960, 1970년대 개발연대의 성공은 분명 실무 테크노크라트 그룹의 공헌인데도, 그들은 그걸 애써 외면하려 했다. 그들은 전 시대의 남덕우 등 테크노크라트 그룹을 향해 “당신들은 독립적 지식인상에서 멀며, 기능적 지식인에 불과하다”고 마구잡이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20세기 현대국가에 대한 몰이해, 서구 지식인에게서 배운 짧은 소견과 허위의식이 합쳐진 공허한 삿대질이었다. 결정적으로 분열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조 사대부들이 품었던 순수의 이데아, 거기에서 생겨난 이중적 의식구조가 작동했다. 그건 낡은 잣대로 변화된 현실을 재려는 어리석음이기도 했다. 소모적 갈등은 아직도 거듭되고 있어 유감스럽지만 이 과정은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빠른 근대화·산업화와 함께 우리는 서구적 지식인을 모델로 삼아 저항적 지식인 쪽으로 달려갔다.

문약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모험

당시에는 못했더라도 한 시절이 흐른 지금은 재점검 작업이 필요하다. 그게 조선왕조 지식계층이 물려준 문화유전자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균형감각이 아닐까? 그건 퇴계와 율곡, 그 이전 맹자와 플라톤, 그리고 키케로와 세네카 등이 구름 위에 앉아 돈과 이재(理財)를 향해 꾸짖던 수준에서 내려오는 작업이기도 하다. 특히 아무런 축적 없이 근대 모더니티를 창출했던 한국 사회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 와중에 등장한 동양철학자 한형조의 지적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한반도에서 모더니티 구축에 성공한 결정적인 이유 하나를 꼽자면 절대순수를 내걸었던 조선조 특유의 인문학적 전통, 즉 문약(文弱)과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는 모험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역시 큰 학자는 역사를 보는 시야 자체가 다른데, 그게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멘털리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 그룹과 다른 점이다. 국가가 다른 부문을 심하게 억압하기도 했지만 메이지 시대를 총체적으로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학문적 용기가 아닐까? 현실과 역사의 뒤에 숨어 서구 학문을 방패 삼아 개탄과 저주를 반복하기만 한다면 또 한 번 조선왕조 사대부들이 가졌던 절대순수주의의 함정에 빠져드는 용렬함이 아닐까? 그게 현대 지식인들의 오래된 모델인 조선조 사대부들의 멘털리티를 비판해야 하는 까닭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개발연대란 두 차원의 혁명이었다. 하나는 한반도 모더니즘 창출이다. 지금 삶의 조건을 마련한 정치·경제적 변화 모두를 성공적으로 엮어낸 것이고, 역사적으로는 서구 중상주의를 따라잡은 후발 혁명이 맞다. 다른 차원으로는 전통 유학이 지탱해왔던 견고한 중세적 보편질서를 깨버린 지식혁명이었고, 무자비하게 이룩해낸 현실의 변혁이었다. 진정 안타깝다. 이런 두 차원의 혁명이 가져온 전면적 변화를 총체적으로 읽어내는 큰 학자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학계에 중심축을 이룰 인물이 없고, 그걸 대중사회에 전파해줄 메신저 그룹도 없었던 게 우리 지식 사회의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자리 잡은 개발연대의 모더니즘 창출 앞에 비판적 지식인으로 구성된 현대 지식인 그룹은 꼭 조선시대 전통 사대부들처럼 행동했으니 달리 보면 소극(笑劇)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내 현대사와의 불화로 이어졌고, 여기에 그들 특유의 서구 사회 추종 마인드가 합쳐지면서 오늘 불모(不毛)의 지식 사회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는 엄연히 비극이다.

201108호 (201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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