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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비화 >> 대북 비밀특사의 막전막후 

“평양 가는 길을 뚫어라” 

윤석진 월간중앙 취재팀장 [grayoon@joongang.co.kr]
DJ 정부 특사 김경재 전 의원, 北 식량난 호소 듣고 쌀·밀가루·옥수수 지원 성사시켜 문성근 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낙점… 대통령 친서 전달하고 정상회담 포석 깔아 남북관계의 비밀 이야기는 수두룩하다. 대북특사는 그 비밀의 주역이다. 노무현 정부의 문성근 씨, 김대중 정부의 김경재 씨 두 비밀특사를 통해 남북협상의 막후를 들여다봤다.

▎문성근 씨(왼쪽), 김경재 씨

“문성근 씨도 2003년 가을쯤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북한을 다녀왔다.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에 임하는 노대통령의 진정성을 이해시키는 수준이었다. 그런 접촉이 (남북정상회담) 분위기 조성에는 도움이 됐을 것이다.”

문재인 변호사(노무현재단 이사장)는 최근 펴낸 저서 <운명>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이런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남북 비밀접촉 사실은 공개되는 경우가 거의 드문 편이다. 더구나 당사자인 문성근 씨의 입이 아니라 제3자인 문재인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의 글을 통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여러 면으로 이례적인 일이었고, 국민의 눈과 귀를 모으기에 충분한 사안이었다.

대통령 특사나 밀사는 어떻게 다른가?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임명하고, 어떤 절차를 거쳐 파견되나? 경우에 따라 휴대하는 대통령 친서에는 무슨 내용이 담기나? 그들은 현지에 가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나? 특히 파견국이 단순한 외국이 아닌 우리와 특수 관계인 북한이라면?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당시 대북접촉 주역인 문성근 씨(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대표)를 만났다. “그때 왜 북한에 갔느냐”는 물음에 문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특사로 (북한에) 갔다 오라고 했다. (나는) 짐작을 했기 때문에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연설할 때 남북관계 얘기를 많이 했다. 남북관계에 토대는 깔아놨으니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데 (노 대통령 임기) 처음부터 대북 송금 문제로 껄끄러웠다. 이게 은폐할 일이 아니다. 전진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북한에) 알리고자 하는 마음에 내가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특사 제안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 말은 문성근 씨가 당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이유기도 하다. 자신이 특사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인 또 하나의 배경으로 선친인 문익환 목사(1994년 1월 작고)의 방북 얘기를 꺼냈다.

“문익환 목사가 1989년 평양을 가서 김일성 주석과 8시간 회담을 했다. 그때까지 북한은 고려연방제를 주장했다. 그런데 문 목사가 ‘우리가 전쟁까지 치렀는데 어떻게 (남과 북이) 외교와 국방을 금방 합칠 수 있겠는가?’ 그 대신 문화 교류, 경제 교류, 이산가족 만남 이런 것부터 함께해 나가자고 제안했다. 그래야만 남북의 국민들이 통일을 가깝게 느낄 것이고, 통일에 동력이 붙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989년 4월 2일 공동성명을 발표하는데 총 9개 항이었다. 북한이 이 조항을 받아들인 것은 혁명적인 변화였다. 마지막 9항에 이상의 합의를 앞으로 있을 남북 당국자 회담에서 논의의 기초가 되도록 남북 당국에 건의한다고 돼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났을 때 합의가 잘됐다. 거기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하지만 문성근 씨는 특사로서 활동사항을 묻자 딱 한마디만 했다.

“우리 외교는 남북관계가 핵심이다. 민족사적인 일이기도 하다. 한 정부 통치의 외교 부분이라서 그 내용을 밝히면 예의가 아니다.”

문씨는 그 이상은 어떤 질문을 해도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

당시 대통령 특사로서 문씨의 역할과 활동은 다른 관계자에게서 들어야 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 전 장관은 문씨의 방북 당시 차관급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었다. 이 전 장관은 참여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3월부터 통일부 장관에 취임했던 2006년 2월까지 꼬박 3년 동안 그 직을 유지했다. MB 정부 들어 폐지된 NSC는 참여정부 시절에 청와대의 외교·안보·국방 관련 통제탑 역할을 했다. 사무차장은 상근자 중에서는 최고 책임자로 남북관계 또한 실무적으로 총괄하는 자리였다.

이 장관은 문씨가 “밀사가 아니고 특사였다”는 점을 우선 분명히 했다. 특사란 국어사전 풀이대로라면 ‘특별한 임무를 부여해 파견한 사절’이다. ‘몰래 보내는 사절’이란 뜻의 밀사와는 구분된다. 그런데 문씨의 방북은 비공개로 이뤄졌다. 그래서 밀사가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나라당은 이 사실이 공개된 뒤 “전문성도 없는 인물을 밀사인지 특사인지 모를 자격으로 보내다니 남북관계의 아마추어리즘을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특사는 공개 특사와 비공개 특사가 있다. 특수한 남북관계 때문에 대북 특사는 비공개인 경우도 적지 않다. 비공개 특사라고 해서 다 밀사는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공개 특사와 비공개 특사는 정부의 준비 단계부터 “가동하는 정부의 선이 다르다”고 이 전 장관은 말했다. 대북 특사의 경우 “공개적일 때는 통일부가 주도하고, 비공개일 때는 국정원 등 관계기관이 늘어난다”고 했다. 문씨를 특사로 임명한 후 “문씨에게 정부 관계부처에서 브리핑을 하는 등 준비를 시작했다”고 이 전 장관은 밝혔다. “어떤 경우든 당시 청와대에서 특사 문제는 NSC가 책임을 지고 일을 진행했다”고 회고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이 전 장관은 특사의 필수 요건으로 대통령 친서 휴대 여부와 “상대방의 공식 대표단과 만나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문씨는 노 대통령의 친서를 지니고 방북했다. 친서 내용을 두고 이 전 장관은 “문성근 씨가 이야기한 것 이상은 말할 수 없다”면서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이 전 장관은 <중앙일보> 6월 16일자에 “대화를 통한 남북관계 증진과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중요한 만큼 이를 김정일 위원장과 논의할 의지가 있다”는 말이 친서의 요지라고 말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대한 철학, 그리고 북핵 문제 해법 등의 관련 뜻을 김 위원장에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한반도의 평화,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남북 지도자가 최소한 상대방 지도자의 의도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이 전 장관은 강조했다.

이 전 장관은 문 특사가 휴대한 친서에 대해 “특별한 제안 내용을 담지 않았다”는 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당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만 해도 성사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만 (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남북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언제라도 만날 용의가 있다는 뜻을 전달해 그 포석의 한 자락을 깔았다. 남북정상회담은 그 후 전체적인 상황의 진전 여부에 따라 진행한다는 구상이었다”고 전했다.

“특별한 제안 없이 대통령 뜻만 전달”

그리고 이 전 장관은 “문 특사는 북한에서 수일간 머무르며 당시 김용순 북한 노동당 대남 담당 비서를 만났다. 면담 같은 자리가 있었다. 김 비서는 북한에서 남북관계 책임자였다”고 말했다. 이 말 끝에 이 전 장관은 “우리는 전문가다. 당시 우리가 김용순을 만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면 왜 문 특사를 파견했겠나?”라고 되물었다.

이 전 장관은 “당시 문 특사를 보내면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것을 전제하지는 않았다. 김 위원장을 만나려면 특별한 현안이나 문제가 있어야 한다. 또 구체적인 제안을 들고 가지도 않았다. 우리가 가진 정보로는 김 위원장의 일정 등을 고려할 때 문 특사가 그 시기에 만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또 “김 위원장은 철저하게 실리적으로 따져 명확히 얻을 게 있거나 자신이 전달할 게 있는 경우가 아니면 특사라고 해서 다 만나주지 않는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 전 장관은 “김용순 비서를 통해 김정일 위원장이 노 대통령의 친서를 잘 받았다는 ‘구두 문서’ 형태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고 강조했다. 문 특사가 당시 간접적이지만 김정일 위원장의 답변까지 받아왔다는 것이다.

문 특사의 방북 성과를 이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출발점은 그때 노 대통령의 의지와 진정성을 전달함으로써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그 발판과 토대 위에서 2005년 6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대통령 특사로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문 특사 방북 후 “북핵 문제나 남북관계에서 엇나가지 않도록 막는 효과도 있었다. 북핵 문제에서 몇 가지 진전이 있었고, 남북 간에 처음 남북장성급 군사회담도 열렸다”고 이 전 장관은 덧붙였다. 그 결과로 “참여정부 5년 동안 서해상에서 교전이 없었다”고 이 전 장관은 문 특사의 방북 성과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 전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문씨를 대통령 특사로 낙점한 사실도 밝혔다. “노 대통령이 ‘대북 특사로 문성근 씨를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극소수 청와대 참모들에게 물었을 때 ‘문성근 씨라면 좋습니다’라고 동의했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이 전 장관은 “노 대통령이 문성근 씨를 특사로 임명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를 깊이 신뢰했기 때문이다. 문씨가 장관 등 공직은 맡지 않았지만 대통령으로부터 큰 신뢰를 받는 것 같았다”고 이 전 장관은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 전 장관은 또 “문씨는 상대방을 설득할 정연한 논리, 남북 문제에 정통한 판단력, 보안성 등 특사가 갖춰야 할 소양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문씨가 “이번에 그 사실이 드러날 때까지 스스로 단 한 번도 연 적이 없는 무거운 입은 특사로서 대단히 훌륭한 인품”이라고 두둔했다. “문익환 목사 아들이라는 점도 고려했겠지만 그것이 문씨를 특사로 임명하는 데 핵심적인 이유는 아니었다”고 이 전 장관은 덧붙였다.

당시 청와대나 정부 인사를 제쳐두고 굳이 민간인 신분이었던 문씨를 특사로 선택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지적에 대해 이 전 장관은 “대통령 특사는 국민 중 대통령이 신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될 수 있다”고 일축했다. “문 특사를 파견할 때는 제안 내용이 없었고 노 대통령의 (포괄적인) 뜻을 전달하는 게 기본 임무였다. 문 특사는 그 임무를 충분히 했다. 만약 북한과의 협상이 특사 파견의 목적이었다면 노 대통령이 문씨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국민의정부 때 박지원 전 장관이나 참여정부 때 정동영 전 장관은 협상을 해야 했기에 정부 인사가 간 것이다.”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 전하기도

DJ 정부 시절인 1999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대북 비밀특사가 또 한 명 있었다. 바로 김경재 전 의원이다. 재선의원으로 민주당 최고위원까지 지낸 김경재 씨는 당시 DJ가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의 초선 의원(15대·순천 갑) 신분이었다. 김경재 씨의 당시 방북활동은 앞의 문성근 씨와는 여러모로 비교된다. 그는 단독 방북한 특사였지만 DJ의 친서도 휴대하지 않았다. 김경재 씨는 DJ로부터 “자네는 내 의도를 잘 아니까 구두로 내 메시지를 전하라”는 지시를 받고 수행원 두 명을 대동하고 방북했다고 밝혔다.

김경재 씨는 현역 국회의원으로서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그해 11월 6일부터 13일까지 7박 8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김경재 씨의 방북 명분은 그가 단장으로 있던 합창단 ‘프리모칸단테’의 평양 공연 협의였다. 북한 측에서는 그가 의장으로 있던 사단법인 ‘보통사람들의 통일운동 시대’가 지원한 자전거와 식량의 배포 상황을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방북 목적은 당시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찾으라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었다. 그가 왜 그런 역할을 해야 했는지 얼마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당시 남북관계는 소통의 통로가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그 주무기관인 국가정보원의 대공 분야 인력이 대거 물갈이됐기 때문이다. 과거 중앙정보부·안기부 시절에 상당한 피해의식을 가졌던 DJ는 대통령 취임 후 이름까지 국가정보원으로 바꾸는 등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국정원의 국내 파트 개혁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공 분야 업무와 관련해 북한과 대결의식에 젖어 있던 많은 직원이 옷을 벗었다. 이 때문에 북한과의 채널이 사실상 막혀 있었다.”

김경재 씨는 당시만 하더라도 DJ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DJ와 1971년 공식적으로 알게 된 이래 그때까지 참모로서 근 30년 세월 동안 고락을 함께한 ‘동지적 관계’였다. 특히 DJ가 미국에 망명 중이던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안팎 현지에서 ‘모셨던’ 특수한 사이다.

DJ는 취임 얼마 후부터 IMF 사태 극복과 국내 정치 현안 등으로 청와대 출입이 잦았던 대선 캠페인 홍보위원장 출신인 그에게 “북한에 접근하는 방법을 연구해보라”는 숙제를 주었다.

“연구하겠다고 말하고 나왔다. 그 뒤 며칠 동안 각종 정보 관계자들과 외국 대사관 당국자들과 접촉하고 토론했다. 북한과의 의사 통로가 당시로서는 거의 없고, 일부 남아 있더라도 사실상 다 드러났다는 판단이 들었다. 완전히 새로운 길을 뚫어야 했다.”

그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가 이 일환으로 시작한 첫 대북사업이 ‘평화자전거보내기운동’이었다. 우연히 만난 유엔개발계획(UNDP) 한국 본부 프랑스인 관장으로부터 “자전거를 보내라”는 아이디어를 듣고서였다.

북한 사정을 잘 아는 그 프랑스인이 “교통 사정이 열악한 북한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의약품을 싣고 환자를 찾아가 진료하는 데 자전거가 아주 유용한 만큼 환영받을 것”이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는 곧 청와대에 보고하고 이 단체를 사단법인체로 등록했다. 김 전 의원은 기업이나 개인의 후원금을 모아 지속적으로 북한에 자전거를 보냈고, 의약품도 세 차례에 걸쳐 300만 달러어치 상당을 보냈다. 북한에 보내는 자전거는 가격 때문에 국산보다는 대부분 중국산이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북한 관계자들이 그와 만나자는 신호를 보내왔다. 김 전 의원은 주로 중국 베이징을 중심으로 10여 차례 북한 관계자들과 만났다. 물론 통일부의 사전 승인을 받은 공식적인 접촉이었다.

“그때 만났던 북한 인사들은 공화국 인민들이 배가 고프다고 솔직히 고백하면서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 나는 남한에서 식량을 지원해도 전선으로 보낸다는 불신이 있어 할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 북한 인사들은 ‘그런 점도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식량을 지원하면 인민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며 여러 번 사정을 했다. 나중에 확인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는 ‘평화자전거보내기운동’ 단체 명의로 “쌀과 밀가루, 옥수수 등을 각각 1000t씩 세 차례 보내주었다”고 기억했다. 1000t이면 25kg 쌀 포대가 4만 개인데 화물열차 23칸이 필요한 부피였다. 북한적십자사가 정식으로 접수했다고 남한적십자사를 통해 영수증을 보내오기도 했다.

“처음에 보낼 때는 남한 관련 표시를 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심지어 운동 단체 마크도 넣지 못하게 했다. 남한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알면 인민들이 충격을 받는다는 이유로 뗄 수 있는 스티커만 붙이자고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식량을 두 번째, 세 번째 보낼 때는 남한적십자사와 단체 마크를 찍어 보냈다. ”

그 과정에서 그는 북한 관계자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다. 중국에서 그를 찾는 연락이 점점 잦아지는 게 그 증거였다. DJ에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식량과 자전거 지원사업 성과를 보고했다. 그의 방북은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공을 들인 결과였다. 당시 북한의 ‘식량 사정’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짐작할 만한 일화가 그가 탄 평양행 고려항공 비행기 안에서 있었다.

“내가 탄 고려항공기가 베이징에서 출발 시간이 되어도 떠나지 않았다. 정몽준 의원이 2002년 월드컵 관계로 평양을 방문하는데 같이 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1등석인 내 바로 옆 좌석이 바로 정 의원 자리였다. 처음 평양 가는 길이 불안하던 마당에 정 의원이 동행한다니 든든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의 비밀 방북이 드러날까 걱정도 들었다. 그런데 정 의원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비행기는 두 시간 후에 이륙했다. 평양에 도착해 첫마디로 정 의원 문제를 물었다. 정 의원의 방문은 급한 일이 아니고, 나를 조용히 따로 모시기로 했다는 답변이었다. 정 의원은 이틀 후 평양에 도착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김일성 동상 참배 문제로 줄다리기

그의 북측 파트너는 김경락이었다. 영어가 유창한 김경락은 1980년대 후반에 포르투갈 주재 북한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 김경락은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 북측 본부의 부의장,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 상무위원 직함을 동시에 가졌다. 김경락은 2001년 제3차 남북이산가족 방문단의 서울과 평양 교차 방문 때 북측 대표단장을 맡기도 했다. 김 전 의원은 더 많은 식량 지원을 기대하면서 적십자사 주요 간부이자 자신의 이름과 해외 체류 경험까지 비슷한 김경락을 파트너로 내세운 게 아닐까 짐작했다.

호사다마랄까? 그가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도착한 첫날부터 큰 사단이 잇따라 벌어졌다. 그 첫 번째는 평양 시내 만수대 언덕에 있는 김일성 동상 참배 문제였다. 환영 인사와 기념 촬영 후 천장이 높은 접견실에 들어서자마자 안내원이 북한 체류 중 일정표라고 그에게 종이를 한 장 건네주면서 이에 동의하는 서명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일정표에 적힌 첫 행사가 김일성 동상을 참배하는 것이었다.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한 날씨였다. 그는 안개 핑계를 대며 말했다.

“안개 때문에 비행기 도착이 두 시간이나 늦었는데 시계가 500m도 안 돼요. 그리고 오자마자 그곳에 가는 것이 당혹스럽소이다.” 그러자 김경락이 즉각 받아쳤다.

“그곳은 조명이 잘되어 있어서 안개가 끼면 더 신비롭게 보입니다.”

“나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 문제는 나중에 다시 협의하십시다.”

그렇게 되어 김경재와 김경락의 ‘기 싸움’은 비롯되었다.

방북에 앞서 그는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으로부터 이와 관련한 주의사항을 단단히 ‘교육’받은 터였다. 그가 전하는 당시 임 장관이 말한 요지는 이랬다.

“북한에 가면 김일성 동상 참배를 강요할 텐데 가능하면 가지 않는 게 좋다. 참배하는 모습을 <로동신문>에 실으면 남한에서 사건이 복잡해진다. 만약 더 강요하면 기자들을 절대 데려가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라.”

그래서 북측에서 “만수대가 가깝다”면서 거듭 권유했지만 김 전 의원은 임동원 장관의 당부를 떠올리며 “가깝고 먼 것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이 중요하다”면서 이렇게 응수했다고 전했다.

“나는 북한의 식량 사정을 살펴보는 게 방북의 주요 목적이다. 평양에 오자마자 귀측의 영도자 동상에 신고하는 건 내가 공식적인 외교 사절도 아니고, 사전에 합의된 바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없다. 나를 일회용으로 취급하지 말라. 내가 남한에 돌아가서 북한을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옹호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으면 통일운동을 계속할 수 없다.”

이 일로 북한 측 인사들이 화가 많이 난 듯했다. 그 분위기는 급기야 밤 10시쯤 시작된 만찬장에서 그와 김경락 사이에 ‘2차 언쟁’으로 연장된다. 그는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시대적 요구다. 남북대화를 하는 것이 남북이 함께 사는 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의 뜨거운 열망이 있다”는 요지의 방문사를 하면서 DJ의 햇볕정책을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김경락의 답사가 그의 예민한 신경을 자극했다. 그가 요약해 전하는 김경락의 답사는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우리도 들어 잘 안다. 그런데 공화국에는 햇볕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있다. 김일성 수령이 큰 태양이어서 공화국에는 그림자가 없다. 햇볕은 직사광선이어서 그림자가 있지 않은가. 따라서 햇볕정책을 계속 이야기해도 공화국에서는 크게 설득력이 없다.”

그는 이를 “만수대 동상을 참배하지 않은 데 따른 복수의 차원”으로 짐작했다. 그러면서도 ‘약이 오른’ 그는 “답사치고는 정중하지 못하다”고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남한에서 방북한 특사로 내가 그들에게 고분고분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자세가 남북 사이에 올바른 대화의 문을 여는 데 더 좋은 길이라고 여겼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북한은 김경재 특사 일행에게 의전 차량으로 벤츠 두 대를 제공했다. 김경재 씨에게는 신형, 동행한 2명의 보좌관에게는 구형이 배정됐다. 차량 번호는 모두 ‘216-’으로 시작됐다. 216은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 2월 16일을 뜻한다. 이 번호의 차량은 대개는 국가 의전용이거나 김 위원장이 선물한 차량이다. 그래서 북한 어디서나 무사 통과였다.

그는 북한에 머무는 동안 군부대를 제외하고 “식량 사정을 파악한다”는 이유로 북한 인민들을 가능한 한 많이 만나려 노력했다. 당시 김 전 의원의 눈에 비친 북한 인민들의 생활상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한 실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강릉수 북한 문화상 등 고위층 인사들도 다수 만날 수 있었다. 김경재 일행을 위해 평양교예단 특별공연도 베풀어주었다. 김일성대학 출신과 인민군 축구 선수 출신인 두 안내원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과 장관도 마음껏 비판한다는, 이른바 ‘남조선 국회의원’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특히 김대중 특사라는 말에 그야말로 칙사 대접을 해주었지만 끝끝내 식량 배포 현황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여러 사람을 만나며 북한에도 현실적인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당근과 채찍’ 대북정책 건의

그해 11월 14일 서울로 돌아오자 임동원 장관으로부터 먼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해야 한다”고 대답했지만 “대통령이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다”고 했다. 그는 임 장관이 질문지에 써서 내미는 질문에 주요한 방북 결과를 가능한 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두세 가지는 임 장관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도 대통령에게 할 얘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 귀환 5일 후에 청와대로부터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DJ에게 “선생님, 북한에 가니 그렇게 유명하더라”는 말부터 꺼냈다. “그래?” 대통령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말로 북한에서도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김대중 대통령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를 만나도 김대중 대통령의 참모라고 하면 우선 놀라워했다.”

“그런데 보고 중에 햇볕정책을 가지고 북한 인사와 언쟁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DJ의 표정이 달라졌다. 자존심이 상한 느낌이었다. 나는 햇볕도 춘하추동이 다르듯 햇볕정책에 능신능굴한 변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른바 나의 햇볕정책 4계(季)론이다.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줄이려면 대북 정책은 채찍과 당근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결론을 말했다.”

DJ는 그의 보고를 듣고 “알았다”고 짧게 응답했다. DJ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그 말이 “마음에 안 든다”는 뜻임을 금세 알아챘다. 그는 “이 기회에 DJ에게 대북 정책에 관한 내 뜻을 분명히 해두겠다”고 마음먹고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을 입에 올렸다.

“북한의 경제적 발전은 우리보다 비교할 수 없이 뒤져 있다. 그러나 정치적 공작은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남북정상회담을 간절히 원한다는 걸 북한은 잘 알고 있다.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칫 이를 이용하려고 할 수도 있다. 북한의 이데올로기가 뭐든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북한을 개방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북한에 시장체제를 도입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긴다. 서둘지 마라.”

DJ로부터 다시 “알았다. 수고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듣기 싫다”는 말이었다. 그 뒤로 DJ는 김경재 씨와 대북 문제를 더 이상 상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DJ 대북 정책 전면에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등장한다.

201108호 (201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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