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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인물 - 탈북 삼형제 남쪽에서 이룬 ‘허준’의 꿈 

 

박지현 월간중앙 인턴기자
1990년대 7년에 걸쳐 차례로 ‘귀순’해 한의학 공부…각자 한의원 운영하며 남북한 한의학 연구 잇는 꿈꿔

▎북한 출신으로 탈북 후 남쪽에 정착해 한의사가 된 박씨 삼형제. 오른쪽부터 수현(47·성남) 씨, 태현(42·광주) 씨, 세현(37·양주) 씨.



“집에 가셔서 약재를 물에 타서 한 모금씩 차처럼 드셔야 해요~.” 다소 왜소한 체구에 북한 사투리를 쓰는 그는 밖에까지 나와 환자를 배웅했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묘향산 한의원’을 운영하는 ‘귀순자’ 출신 1호 한의사 박수현(47) 원장 이야기다. 안에서 전화 벨이 울린다. 역시 한의사로 일하는 막내 동생이라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통화 내용이다. “형, 소화가 안 된다며 찾아온 환자가 얼굴이 많이 부어있네.” “소화제에다 ‘오령산(몸이 붓는 부증과 오줌이 잘 나오지 않는 증세에 쓰는 약재)’을 처방해줘봐.”

‘묘향산 한의원’ 간판은 이곳 성남 말고도 경기도 광주시와 양주시에도 걸려 있다. 박 원장 삼형제는 모두 한 간판을 달고 한의원을 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삼형제는 환자들을 진단하고 처방하면서 서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탈북자 20만 시대. 남쪽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직업도 꽤나 다양하겠지만 이들처럼 삼형제가 한의사가 된 경우는 드물 터이다. 가족구성원 가운데 부모님과 4형제가 북한을 탈출해 모두 남쪽에 정착했는데, 1993년 둘째 수현씨를 시작으로 7년의 세월이 걸렸다. 둘째 수현 씨가 한의사국가고시에 2001년에 합격해 한의사가 된 이래, 막내 세현(37) 씨와 셋째 태현(42)씨도 뒤따라 2009년과 2011년 한의사 자격을 얻었다. 맏형만 직업이 달라 조선업 회사에서 일한다.

요즘 한의업계의 사정은 그리 녹록치 않은 듯하다. 2000년대 초반 정점을 찍은 뒤 줄곧 내리막길이다. 발기부전 치료제의 등장과 각종 건강보조식품이 쏟아져나오면서 한의업계가 된서리를 맞았다는 설명이다. 시장의 규모는 줄어드는 상황에서 한의사 수는 오히려 늘어나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도 심화됐다. 하지만 박수현 원장의 말투에서는 느긋함이 느껴진다. “한의원 사정이 예전 같지는 않죠. 약을 지으려는 사람이 많이 줄었거든요. 그렇지만 북한에서도 목숨 걸고 한국으로 왔는데, 이 정도 일로 힘들다고 하겠어요?”

북한에서도 공부 잘한 ‘엄친아’ 형제

남쪽 사람들조차 쉽지 않다는 한의사 자격증을 따내며 ‘남조선 드림’을 이룬 삼형제가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 막내 세현 씨가 운영하는 양주 묘향산 한의원에서다. 마침 막내가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쳤다고 해서 두 형제가 병문안을 온 날이다. 한의원 입구에 묘향산의 풍경을 담은 액자그림이 눈에 띈다.

삼형제는 서로 닮은 듯하지만 성격은 제각각이다. 야무지고 재치 있는 둘째 수현 씨, 어머니를 닮아 과묵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셋째 태현 씨, 반면 호탕하고 불 같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는 막내 세현 씨. 하지만 삼형제는 누구를 닮았는지 너나할것없이 입담이 좋다.

추석 명절에도 여느 해처럼 경기도 광주에 있는 부모님 집에 온 가족이 모일 예정이다. 자녀들까지 합치면 모두 15명이다. 1999년 셋째 태현 씨의 귀순으로 가족 모두가 남쪽으로 건너온 이래 14년 째 맞는 추석이다. 한의사 하는 자식들이 보약이라도 한 재 드시라 권하면 아버지는 늘 “건강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보약 안 먹어도 든든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신다고 한다.

이들 박씨 형제들은 함경북도 경성군 상온포리에서 나고 자랐다. 강원도 인제가 고향인 부친은 6·25 전쟁 때 8남매가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북한에서 자리를 잡게 됐다. 북한에서는 운전기사이자 당비서였고, 어머니는 농사일을 했다. 여느 형제들과 다름없이 토닥거리며 추억을 쌓아갈 즈음, 열여섯 살에 징병된 맏형을 시작으로 4형제가 모두 군에 입대해 명절 때라도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시간이 드물었다.

삼형제는 군복무를 모두 채우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가지각색이다. 둘째 박수현 원장은 북한에서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달렸다. ‘성분 좋은’ 사람으로 분류돼 고위간부로 발탁될 수 있는 수순을 차근차근 밟았다. 머리가 명석해 인민학교 때부터 고등중학교 때까지 1등 자리를 놓친 적이 드물었다.

16세에 군에 입대해서 24세까지 묘향산여단 국제친선전략관 호위사령부(한국으로 치면 대통령 경호부대)에서 근무했다. 박씨 형제가 한의원의 이름을 ‘묘향산 한의원’으로 이름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군당국의 추천을 받아 5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청진의과대학에 진학하면서 10년 복무 중 8년 만에 제대하는 영예를 안았다. 의대에 입학하면서 ‘로동당’에 입당해 충성을 맹세했다. 졸업하면 의사이자 북한의 고위간부로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형의 뒤를 이어 군에 입대한 셋째 태현 씨는 몸이 허약해 군복무를 다 마치지 못했다. 16세에 징병된 그는 6년 만에 ‘감정제대(의가사제대를 이르는 북한 말)’를 했다. 북한에서 전역군인의 경우 농민집안의 자식은 집으로 보내지만 일반 노동자의 자녀는 탄광에 보내진다고 한다.

태현 씨는 “우리는 노동자 자식이기 때문에 (은박지를 감아주는) 절연지광산, 운모 광산에 보내졌다”고 설명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보위부로부터 짐을 싸라는 명령을 받았다. 둘째 형 수현 씨의 탈북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다. 가족들에겐 청천벽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막내 세현 씨는 둘째 형의 탈북 소식을 접할 당시 군복무 중이었다. 그는 군에서 역적으로 몰리며 전방부대로 다시 배치됐다.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혈기 왕성한 17세,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 적도 있었다. “턱에 총구를 겨누는데, 어휴~그건 못하겠더라고요.” 고민 끝에 그는 왼손 바닥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일로 부대에서 내쫓겨 ‘생활제대(불명예제대)’로 집에 돌아가게 됐다. 그의 손에는 그때 얻은 흉터가 남아있다. 왼쪽 손등은 아무렇게나 꿰맨 자국으로 흉하게 일그러졌고, 손가락은 아직도 감각이 없다. 둘째 수현 씨는 농담조로 “막내는 열 살 터울이라 늘 어린 줄만 알았죠. (손으로 곤지곤지 흉내를 내며) 그래서 마냥 송고송고(곤지곤지의 강원도·함경북도 방언) 할 줄 알았더니 제 손을 쏴버릴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의도하지 않은 탈북, 송두리째 바뀐 운명

하지만 둘째 수현 씨에게 4년 간의 의과대학 생활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던 듯하다. 청진의대는 동의학부(침술), 위생학부(보건대), 약학부(약학·한약학과), 기초학부(의대 1~3년), 의학부(의대 4~6년)로 이뤄져 있는데 마침 그는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없는 한약학과에 입학하게 됐기 때문이다.

한약학과는 의대생들 사이에서는 약초만 캐는 ‘농작꾼’이라고 무시를 받는 학과였다. 하지만 대학 시절 매년 4~5월이면 ‘동원’되어 1인당 10㎏이나 15㎏ 정도 약초를 캐고 연구한 경험이 한국에서 한의사 생활에 큰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동의학과와 한약과에서 6개월 정도 중국어를 배우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것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수현 씨가 중국어 통역을 빌미로 친구와 탈북을 감행한 것이다. 그의 설명. “어린 시절 친구 중에 골동품 장사를 하는 이가 있었어요. 북한에서는 총살 감인데 몰래 한 거죠. 그가 어느 날 제게 ‘1만원 줄 테니 3일만 중국어 통역을 해달라’는 엄청난 제안을 했어요.” 북한 돈 1만원이면 한국 돈으로 1억원 정도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순진하게도 그 약속을 믿었는데 백두산을 넘는 순간 그 친구가 갑자기 꺼이꺼이 목놓아 우는 것이었다.

“이 친구가 북한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골동품 장사를 하다 들켜서 추적을 당하다가 국경을 넘었던 거지요. 결국 저까지 오도가도 못한 신세가 됐죠. 혼자서 돌아가면 죽고, 이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 따라 중국으로 월경을 하게 된 셈이죠.” 의과대학에서 4년 동안 공부한 것도 물거품이 돼버렸고 그는 충성맹세를 한 북한을 등지게 된 것이다.

북한의 가족들은 ‘평지풍파’를 만났다. 하루 만에 가족들이 함경북도 길주군의 추방지로 내쫓긴 것이다. ‘역적마을’로도 불리는 그곳은 ‘반동’(술 마시고 행패를 부리거나 사회불만의 발언이나 행동을 한 사람)으로 몰려 쫓겨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셋째 태현 씨가 말했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을 일컫는 ‘하모니카’ 세대의 이웃은 서로가 믿지 못할 스파이였어요. ‘저 집의 아무개는 몇 시에 나갔다, 몇 시에 잠들었다’ 등을 종이에 써서 보위부의 편지함에 넣어주는 식이었거든요.” 악몽 같은 날들이 반복되는 동안 가족들은 수현 씨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동생 태현 씨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아버지께서 ‘형이 먼저 한국에 터를 잡으려고 나간 거다. 통일이 금방 될 거다’고 말씀하셔서 그런 줄만 믿고 참아냈지요.” 그의 나이 스물 세 살 때였다. 그런 차에 군대에 있던 막내도 얼마 안 가 총상을 입은 손에 붕대를 감고 집으로 왔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둘째 수현 씨도 중국에서 험난한 나날을 보내긴 마찬가지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세 끼 식사도 제대로 챙겨먹기 힘들었다. 공안의 눈을 피하느라 위험 천만한 순간을 수없이 모면하던 그에게 북에 남은 가족들의 안위를 떠올릴 틈조차 없었다. 중국에서 수현 씨는 우선 친구의 친척 집에 머물렀다. 그때 받았던 문화충격이 엄청났다.

수현 씨가 말을 이었다. “자동차로 치면 티코·엑센트·에쿠스급 자전거인 샛별·갈매기·삼천리 브랜드가 거리에 물결치듯 지나가는 거에요. 북한에서는 자전거도 큰 재산이거든요.”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북한 체제에 대한 반발이었다. 친구의 조선족 친척이 북한 지도자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처음에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더라고요. 당시에 신과 같은 존재를 동네 아저씨처럼 비난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생각도 차츰 바뀌게 됐다. 1993년 10월 10일 그는 결국 톈진항에서 한국행 여객선에 몰래 올라탔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40㎏ 조금 넘는 바짝 곯은 몸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북한을 탈출한 지 10일 만이었다. 한국에 ‘귀순자’(당시엔 탈북자를 귀순자로 불렀다)가 10명도 채 안 되던 시절이었다.




줄이은 형제들의 탈북, 극적인 가족 상봉

남은 가족들의 추방지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해발 1500m에 있는 외진 광산마을에서 생명을 걸고 곡괭이로 광물을 캐고 약초를 채취하는 데 동원됐다. 매일 일터를 오가는 데 6시간 동안 40~50㎞를 걸어 다녀야 했다. 배급도 없어 음식도 땔감도 자력으로 조달해야 했다. 셋째 태현 씨는 “운송수단이나 식량배급이 없으니 수렵채취 생활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주식은 옥수수·두부콩·감자 등이었다. 이런 암흑 생활이 4년 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1998년 2월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한국에서 정착해 살던 둘째 수현 씨가 북한 돈 4만원을 브로커를 통해 보내온 것이다. 이 얘기가 나올 즈음 형제들은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막내 세현 씨는 “북한 노동자의 월급이 80원 정도 하던 때였으니 한국으로 따지면 4억원에 가까운 돈이었다”라고 말했다. 1998년 3월 셋째 태현 씨와 맏형은 탈북을 감행했고, 막내와 부모님도 그해 11월 어느 날 새벽, 둘째 형이 보낸 브로커와 함께 살얼음이 진 두만강을 건넜다.

하지만 셋째 태현 씨는 탈북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탈북과정에서 소식이 완전히 끊긴 것이다. 그는 인신매매단에 붙들려 내몽고까지 가게 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했다. 그곳에서 둘째 형한테 무작위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수십 통의 편지가 착신지를 찾지 못하고 버려지다 마침내 형과 연락이 돼서 한국에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오는 탈북자가 흔하지 않던 시절 수현 씨가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남쪽으로 데려오는 일은 ‘전투’를 방불케 했다. 그는 한때 여권위조 때문에 형사입건 돼 조사를 받기도 했고, 그의 장인·장모·친구들도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셋째 태현 씨의 탈북을 끝으로 온 가족이 남쪽으로 넘어왔다.

셋째 태현 씨와 어머니의 생일인 1999년 4월 24일 안기부(국정원) 시설보호소에서 온 가족의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졌다. 북한의 남은 가족을 남쪽으로 모두 데려온 그 순간에 대해 수현 씨는 “굉장히 감격스러웠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막내 세현 씨도 “남조선에서 가족들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어색하고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삼형제는 한국에서의 새로운 인생 2막을 열어젖혔다.

둘째 수현 씨가 한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한 것은 경호원처럼 그에게 붙어 다니던 담당형사의 권유 때문이라고 한다. 전립선염증을 앓던 형사에게 북한에서 배운 약초학 솜씨를 발휘해 약재를 달여줬는데 완쾌된 일이 계기였다. 그는 결국 경희대 한의예과에 편입하게 됐다. 의학도로서 첫 출발을 하던 날 학과 친구들 앞에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백두산 밑에서 살다 왔습네다.” 강의실 전체가 박장대소로 뒤덮였다. 당시에는 한국으로 건너온 귀순자가 10명 안팎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동료 학생들은 수현 씨의 자기 소개를 그저 북한말투 흉내 잘 내는 개그맨 같은 친구가 농담을 하는 줄로 여겼던 것이다. 남쪽에서 한의학을 공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영어가 걸림돌이었다. 그의 설명. “해부학, 생리학 모두 영어라 너무 어려웠어요. 보다 못한 친구들이 영어를 한글로 괄호 안에 써주는 일이 많았어요.”

막내 세현 씨가 형을 따라 한의학도의 길을 이었다. 2000년 상지대 한의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한자를 잘 사용하지 않는 북한과 달리 한국에서는 한의학 책이 한자투성이다. 그는 피골이 상접하고 동전만한 원형탈모가 다섯 개나 생길 정도로 공부에 매달렸다고 했다.

셋째 태현 씨는 고려전문대 물리치료학과를 다니다 졸업 후 형과 막내를 따라 한의학 공부로 전향했다. 그의 설명이다. “공부가 길어져서 고민이 많았죠. 나이도 마흔에 가까운데 장가도 못 가고 이 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때 형과 막내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한자 1000자만 외우면 된다고 용기를 줬죠. 깜빡 속은 거죠.”

(웃음) 방학 중에도 4~5 과목을 재수강하며 공부에 매달려야 했다. “대학 동료들이 ‘유급할 것 같은 녀석이 다음 학기가 되면 신기하게도 나타나더라’며 놀렸죠.”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막내 세현 씨가 짓궂게 끼어들며 말했다. “그때 우리 형 머리가 다 벗겨졌어요.” 국시(한의사 국가고시)에서는 고배를 몇번이나 마셔야 했다. 세현 씨와 태현 씨는 각각 2009년, 2011년에 2전 3기의 기적을 일구며 한의사가 됐다.

2001년 둘째 수현 씨가 한의원을 개원한 일은 큰 화제를 몰고 왔다. ‘귀순 1호 한의사’란 보도가 신문지상을 화려하게 장식했기 때문이다. 신문을 직접 들고 찾아오는 환자도 많았다. 그는 “북한 한의학이 한국보다 나을 거라는 오해 때문에 제가 덕을 본 꼴”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반면에 불쾌한 환자들도 있었다. “약을 처방해줬는데 ‘과연 나을 수 있겠느냐’며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는 환자도 더러 있었거든요.”

한 번은 중년 남성 환자가 한의원을 찾아왔다. 수현 씨가 그를 진단해본 뒤 뇌출혈이 예상되니 얼른 치료를 하라고 경고했는데 믿지를 않았다. 그 환자는 두 달 뒤 실제로 뇌출혈 진단을 받고 그를 다시 찾아왔지만 치료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일이 주변에 소문이 나면서 묘향산 한의원은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남북 한의학 간에는 재료의 격차 있을 뿐”

수현 씨는 처방할 약재를 쓸 때, 북한과 비교를 해본다고 한다. “열이 많은 사람에게 무조건 오가피·황기·인삼을 처방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거든요. 북한 사람은 쌀이 없어서 굶어 죽는 거고, 남한 사람은 쌀이 남아도는데 제대로 먹는 법을 몰라 죽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순환이 안 될 때 반대로 다 뽑아주고 열을 내리는 대나무나 뽕나무, 도인, 홍화 등을 처방해줘요.”

남의 한의학과 북의 고려의학에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는 “이론적으로는 흡사하지만 북한은 약재가 부족해 치료를 못한다”고 설명했다. 북한에서는 황백나무 껍질을 벗겨 만든 ‘황백가루’가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였단다. 막내 세현씨는 “감기에도 설사에도 황백가루를 만병통치약처럼 썼다”고 거들었다.

한국에서는 한의약재가 지나치리만큼 풍부하다. 둘째 수현 씨가 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체했을 때 진피를 물에 타 먹으면 좋다’는 한의학 문구가 나와요. 하지만 북한에 진피와 꿀이 어디 있겠어요?” 남이나 북이나 환자의 증상은 비슷하다는 데 삼형제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 형제는 남다른 꿈이 있다. 북한 고려의학과 남한의 한의학을 접목하는 ‘허준’이 되겠다는 것이다. 둘째 수현 씨는 한의학 공부를 계속해 경원대학교에서 한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환자와의 유대’를 중시하는 그에게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

그는 “전문지식을 쌓아가는 것은 환자와의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는 동생들에게도 공부하기를 권한다. 한의사로 한국 사회에 헌신하고 싶은 꿈은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다. 쉬 고쳐지지 않을 함경도 사투리로 “우리 이제 한국사람 다 됐어요”라고 말하는 삼형제의 꿈이 영글어간다.

201310호 (201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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