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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이슈 - 조직 갈등 부추긴 혁신지상주의의 실패 

이석채 전 KT 회장의 도전과 좌절 

권건호 전자신문 기자
KT와 어울리지 않는 정치권 인사 영입하면서 결속력 무너져…카리스마에 눌려 잘못된 판단 아무도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이석채 전 KT 회장이 11월 12일 사직서를 내고 5년에 걸친 CEO 생활을 마감했다.



“사랑하는 임직원 여러분, 회장입니다. 오늘 저는 이사회에 KT 대표이사, 회장직의 사임의사를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조속한 시일 안에 후임 CEO를 선정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최근 일련의 일로 저는, KT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 더 이상 현 상태를 지속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 이 모든 것이 다 제가 부덕했던 탓입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여러분.”

11월 3일 이석채 전 KT 회장이 직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이 전 회장은 며칠 뒤인 12일 열린 이사회에 참석해 사표를 제출하고 KT를 떠났다. 2009년 1월 KT 수장 자리에 오른 이 전 회장의 CEO생활을 5년 만에 이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대표이사 회장으로서의 직을 내려놓은 그 앞에는 험난한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다. 배임과 횡령, 노동탄압 등으로 고발돼 검찰수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퇴를 전후해서 KT사옥 헐값 매각 혐의와 관련해 임직원 자택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 수차례 실시됐고, 비자금 조성과 정치권 로비 등 새로운 혐의가 추가됐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다. 그는 어떻게 혁신 전도사에서 배임 혐의의 피의자로 전락하게 된 것일까?

비통신 사업으로 영토확장 지속

경상북도 성주 출신인 이 전 회장은 행정고시 7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경제 전문관료로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을 거쳤다. 이후 김영삼 정부에서 재정경제원 차관, 농림수산부 차관, 정보통신부 장관 등을 거쳐 1996년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PCS특혜의혹 수사와 관련해 미국으로 3년간 도피했다 귀국하는 등 굴곡을 겪게 된다.

KT와의 인연은 2009년부터 시작됐다. 이 전 회장은 남중수 전 KT 사장이 구속된 후 흔들리던 KT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2009년 1월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되더니 얼마 뒤인 3월에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 전 회장은 KT의 부활을 위해 취임 초기부터 의욕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는 취임사에서 KT의 미래상을 ‘완전히 새로운 KT(All New KT)’라고 강조하면서 ‘주인의식’, ‘혁신’, ‘효율’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특히 일하는 방식·조직·인사·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의 혁신을 강조했다.

업무적으로도 파격적인 결정과 과감한 실행이 이어졌다. KT의 오랜 과제 중 하나였던 유무선 통합을 이루기 위해 취임 6개월 만에 KT와 KTF를 합병하는 성과를 거뒀다. 통신시장의 대세인 유무선 통합 서비스 기반을 빠른 시간에 마련하면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높아졌다.

2009년 11월 통신시장에 또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 일어났다. 국내 제조사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폰을 도입하면서 통신시장에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이다. 아이폰의 도입으로 국내 통신시장에 스마트 혁명이 불어닥쳤다. 이로써 KT는 소비자와 통신시장에 ‘혁신’ 이미지를 제대로 각인시켰다.

이 전 회장은 통신사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비통신 분야로의 진출도 적극 추진했다. 스카이라이프·BC카드·금호렌터카 등을 잇달아 인수하면서 미디어·금융·렌탈 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추진했다. 지난해 3월에는 연임에 성공하면서 2015년 3월까지 3년 임기를 보장받았다.

하지만 연임을 전후해 그동안 곪아온 문제들이 하나둘씩 불거지기 시작했다. 참여연대의 고발, 실적 악화, 노동탄압, 조직 갈등 등의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왔다. 결국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이 전 회장은 임기를 1년 넘게 남겨둔 시점에서 불명예 퇴진했다. 의욕적으로 출발했던 이석채호가 꼬이기 시작한 지점은 바로 ‘인사’다. 인사는 크게 ‘영입 인사’와 ‘낙하산 인사’ 문제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전 회장은 KT의 혁신을 위해서는 외부 수혈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브리티시텔레콤(BT) 출신으로 이 전 회장의 측근으로 활동한 김일영 사장과 김홍진 사장이 대표적인 영입 인사다. 이들 외에도 외부 인사를 다수 영입해 정체된 조직에 변화를 일으키려 시도했다. 문제는 영입 인사와 기존 KT 임직원이 융화되지 못하면서 갈등을 빚었고, 기존 직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면서 KT라는 거함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영입 인사보다 더 큰 문제는 낙하산 인사였다. 사실 이 전 회장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낙하산으로 KT 대표가 됐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래서인지 이 전 회장은 KT와 어울리지 않는 정치권 출신 인사들을 다수 영입했다.

MB 정부 시절에는 김규성 전 대통령직인수위 경제2분과 팀장과 이태규 전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 서종렬 전 대통령직인수위 전문위원, 김은혜 전 청와대 대변인, 윤종화 전 청와대 경제비서실 행정관 등이 KT로 자리를 옮겨왔다. 사외이사 자리에는 이춘호 MB정부 초대 여성부장관 후보, 허중수 전 대통령직 인수위원이 선임됐다. 검찰과 국정원 등에서 영입한 인사도 있다. 자회사 감사 등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도 정치권 출신 인사가 다수 포진했다.

‘원래KT’ VS ‘올레KT’ 갈등 불러

새 정부가 출범한 올해도 KT는 현 정권과 가까운 인사를 대거 영입했다. 지난 3월 친박계 핵심 인사인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과 김병호 전 국회의원이 잇달아 자문위원으로 들어왔다. 홍 전 부의장은 대표적인 친박계 인사고, 김 전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경선캠프 공보단장을 지낸 인물이다.

지난 6월에는 뉴라이트전국연합 대변인, 뉴라이트 후신 민생경제정책연구소 상임이사 등을 거친 변철환 씨를 경영연구소 상무로 영입하기도 했다. 정권과 가까운 인사가 잇달아 영입되자 일각에선 이 회장의 임기를 보장받기 위한 안전장치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칠 줄 모르는 낙하산 인사는 고액 연봉 등으로 인한 경쟁력 저하는 물론이고, 기존 임직원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이 와중에 외부에서 영입한 인물은 승진시키거나 요직에 배치하며 중용한 반면, 정통 KT 출신으로 내부 직원들의 신망을 받던 사람들이 퇴사하거나 자회사 등으로 밀려나는 일이 발생했다. 기존 조직원의 불만은 폭발 일보직전까지 갔다. 아무리 혁신을 위해서라지만 지금의 KT를 만든 사람들은 모두 개혁 대상으로 내모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당시 KT 한 직원은 “외부 출신들은 전부 승진시켜 요직에 배치하고, KT에서 일해온 사람들은 외부로 내몰린다”면서 “믿고 따르던 선배들이 밀려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인사에서 촉발된 조직의 갈등은 KT를 분열시켰다. 언제부턴가 KT는 이 전 회장 이전의 사람을 뜻하는 ‘원래KT’와 이 전 회장의 사람을 뜻하는 ‘올레KT’로 갈렸다.

기존 KT 직원들의 눈에 이 전 회장의 지원을 등에 업고 큰소리치는 외부 영입 인사들이 사람들이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반대로 영입된 인사들은 자신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기존 조직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KT 한 임원은 “외부에서 영입된 사람들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기존 조직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이라며 “기존 조직과 업무를 인정하면서 함께 가려는 노력이 부족해 갈등을 빚게 됐다”고 말했다. 갈등은 갈수록 심화됐고, 조직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 갈등을 넘어 심각한 내분을 낳았고, 협력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반목하는 상황이 초래됐다. 실제로 이 전 회장에 대한 비리 내용 중 상당부분은 내부 고발자에 의해 외부로 알려진 내용이라고 알려졌다.

내분이 심각해지자 지난 9월 이 전 회장은 사내 결의대회에서 “바깥에다 끊임없이 회사를 중상모략하고 낮에는 태연하게 회사 임원 행세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며 “게으른 사람, 아직도 태평인 사람들은 나가라고 걷어차야 한다”며 반대 세력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1 지난해 12월 KT의 롱텀에볼루션(LTE) 서비스 출시 기자 간담회에서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와 포즈를 취한 이 전 회장(왼쪽에서 셋째). 2 올 6월 통합 4주년 KT 출범 및 미래비전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이 전 회장.



방향 잘 잡았지만 목표 관리에 실패

KT를 둘러싼 문제들이 누적되는 동안 KT그룹의 경쟁력도 눈에 띄게 허물어져갔다. 이 전 회장은 취임 초부터 KT그룹의 사업 방향을 크게 틀었다. 취임 직후 29개였던 KT 계열사는 현재 52개로 거의 갑절로 늘었다. 통신을 넘어 한 단계 도약하겠다는 이 전 회장의 의지에 따라 미디어·금융·렌탈 등 다양한 비통신 분야 기업을 인수합병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위성·미디어·부동산 등 핵심사업을 분리해 자회사로 독립시키기도 했다.

의욕적인 변화를 시도했으나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가상 재화, 모바일결제(모카페이) 등 그룹 차원에서 시작한 사업도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핵심사업이라며 분리시킨 자회사 중에 미디어를 제외한 위성과 부동산은 위성과 사옥헐값 매각이라는 이 전 회장의 비리 의혹과 직접 연관돼 있다. 비통신 사업에 집중하느라 그룹의 주력사업인 ‘통신’ 분야 경쟁력이 약화되는 치명적인 문제도 초래됐다.

장중혁 애틀러스리서치앤컨설팅 부사장은 “이 전 회장이 남들이 하면 따라하는 식으로 움직이던 KT의 보수적 행보를 깬 것은 긍정적”이라면서도 “너무 트렌디한 사업만 쫓아갔고, 사업 관리도 제대로 못했다”고 평가했다. 컨설턴트나 애널리스트와 달리 기업가는 사업 단계별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고, 이를 달성하는지 확인하면서 가야 하는데 방향만 제시했지 목표는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신사업이 혼란을 겪었다는 지적이다. 장 부사장은 “기업가는 사업 단계별로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면서 단계적으로 안착해야 한다”면서 “이 회장은 방향성으로는 긍정적이었지만, 목표를 관리하지 못하면서 여러 사업을 벌이기만 했다”고 말했다.

KT 상황이 악화된 데는 수장인 이 전 회장의 책임이 누구보다 더 크다. 이 전 회장을 말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수식어 중 하나가 ‘카리스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앞세운 리더십은 이 전 회장의 강점으로 꼽힌다. 관료 시절에도 강한 추진력이 돋보였고, 이는 KT 회장으로서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한 추진력은 약이 될 때도 있지만, 방향을 잘못 잡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다. KT에서는 둘 다 나타났다. 아이폰 도입처럼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입함으로써 통신시장 나아가 국내 IT 시장을 흔들어놓았다. 아이폰 도입의 경우는, 국내 IT 산업이 한걸음 빨리 발전하는 데 보탬이 됐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추진력이 독이 된 사례도 많다. 그의 카리스마 앞에 측근 인사들조차도 반대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이 화를 키웠다. 특히 합병과 그 이후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구조조정을 명목으로 한 인력 퇴출 프로그램이 곳곳에서 잡음을 냈다.

사업 방향을 정할 때도 주변에는 그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아주는 이가 없었다. 요컨대, 롱텀에볼루션(LTE) 도입이 경쟁사보다 늦어진 것이 KT로서는 뼈아픈 패착이 됐다. 단순한 통신 서비스 하나 늦은 것이 아니다. LTE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사업기회까지 통째로 날려버렸다.

이는 최신 트렌드와 기술에 민감한 국내 이동통신 가입자의 성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 결과, 최근 롱텀에볼루션어드벤스드(LTE-A) 도입까지 늦춰지면서, KT는 통신시장에서 허덕이는 신세가 됐다. 올해 KT 가입자는 9월까지 매달 감소한 결과 총 54만 명이 줄었다.

정권 교체기마다 나타나는 5년 주기의 데자뷰

실적도 경쟁사인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는 계속 호전되는 것과 달리 KT만 부진에 빠져있다. 이 전 회장은 그 실적 부진을 메우기 위해 임기 동안 KT 자산인 전국 사옥을 매각하기도 했다. 사옥 매각 과정에서 시세보다 싼 값에 매각하며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이 전 회장을 둘러싼 각종 비리 의혹이 불거지며 지난해 말부터 그의 퇴진설이 흘러나왔다.

일각에서는 특정인을 차기 회장 후보로 거론하기도 했다. 올해 초 새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하마평이 더 구체적으로 떠돌았다. 청와대가 직접 이 회장에게 사퇴 압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럼에도 이 전 회장은 끝까지 버텼지만, 결국 회사와 본인, 측근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 본격화되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이 전 회장 사태에서 5년 전의 데자뷰가 느껴진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KT가 민영화됐지만 여전히 공기업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KT가 매번 낙하산 인사 논란에 휘말리는 것도 정권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구조적 이유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면 어김없이 CEO가 교체되고, 정권과 함께 취임한 CEO는 여권 인사를 영입해 요직에 앉히는 일이 반복됐다. 이번 이 전 회장의 경우도 이 사이클을 어김없이 따랐다. 결국 정권으로부터 독립과 민간기업으로서의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KT는 진정한 혁신을 할 수 없다.

차기 KT 회장의 자격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모든 사람이 첫손에 꼽는 것은 정권으로부터 독립적이면서 전문성을 갖춘 인사다. 전문가들은 신임 회장이 무너진 통신 경쟁력을 회복하고, 통신 맏형으로서의 KT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통신은 단순히 경영 실적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통신네트워크와 가입자는 KT그룹 사업 전체를 관통하면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기반이다.

이 전 회장이 보낸 마지막 메일을 보면 본인도 이러한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임원 수를 20% 줄이고, 그간 문제가 제기된 고문과 자문위원 제도도 올해 내에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낙하산 인사만 줄여도 임원 20%를 충분히 줄일 수 있고, 불필요한 고문과 자문위원 제도만 없어도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권이 KT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201312호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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