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기업

Home>월간중앙>경제.기업

경제이슈 - 5만원권의 딜레마 지하경제 일등공신?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미국 신사는 금발을, 한국 부자는 ‘신사임당’을 좋아한다? 로비와 비자금 조성, 무자료·불법거래, 고소득 자영업자의 세금탈루 수단으로 의심받기도

▎5만원권의 발행은 급증했지만 품귀현상이 벌어지고 화폐 유통속도도 떨어지고 있다. 화폐 정책을 총괄하는 한국은행도 아직 그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경북 경산시 한국조폐공사 화폐본부(옛 경산조폐창) 내 지폐동 앞에는 사람 눈 모양의 상징물과 1만원권 모형을 얹은 대리석이 있다. 여기엔 붉은 글씨로 ‘100-1=0’등식이 새겨져 있다. 관계자에 따르면 “수학에선 100에서 1을 빼면 99가 나오지만, 이곳에서는 1%만 실수를 해도 공(功)은 제로, 즉 100% 실패라고 본다는 뜻”이라고 한다. 화폐 제작에 임하는 조폐공사의 긴장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등식이다. 2009년 6월 5만원권이 처음 세상에 나오면서 조폐공사의 긴장감은 더욱 커졌다. 5만 원권에는 기존 지폐보다 많은 16가지 위조방지기술이 사용돼 제작 공정이 까다롭다. 그만큼 불량품이 나올 확률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가로 61.6㎝, 세로 47.6㎝ 크기의 전지 한 장은 28개의 5만원권으로 변신한다. 바탕과 스크린 인쇄, 홀로그램 부착, 요판 인쇄와 전지 검사, 활판 인쇄 등 8개 공정을 거쳐서다. 최초 바탕 인쇄에서 일련번호가 찍혀 낱장으로 잘려 돈 꼴을 갖추기까지 무려 45일, 기존 지폐에 비해 조폐 기간이 두 배 이상 길다. 스크린 인쇄 및 홀로그램 부착 등 2개 공정이 추가된 데다, 불량품을 없애기 위해 인쇄공정마다 4∼5일의 건조 기간을 따로 두고 결함점검 절차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가히 5만원권은 ‘지폐의 귀족’이라 할 만하다.


▎조폐공사에서 마지막 결함 점검과정을 거치는 5만원권. 기계적 검사와 육안 검사를 병행한다.
5만원권은 조폐공사의 ‘미운 자식’

지폐의 재질은 종이가 아닌 100% ‘면’이다. 지폐를 넘겨받은 한국은행(이하 ‘한은’)은 국제 면화값 시세 등에 따라 장당 200~300원 정도의 비용을 조폐공사에 지불한다. 5만원권은 한은 본점과 각 지역본부 지하에 있는 대형 금고로 옮겨지는데, 그곳에 각각 보관된 지폐의 양은 기밀로 분류된다.

5만원권은 이 과정까지는 ‘돈’이라고 할 수 없다. 상품일 뿐이다. 비로소 돈이 되는 것은 시중은행이 두 가지 방법으로 5만원권을 가져갈 때다. 시중은행이 보유계좌에 있는 금액만큼 교환을 요구했거나, 아니면 한은이 시중은행에 이자로 지급했을 때다. 보통 연말연시, 설 전후에 가장 많이 방출된다.

새 1만원권의 수명은 약 100개월이다. 5만원권은 2009년 처음 나와 아직 그 수명을 알 수가 없다. 한은 관계자는 “5만원권은 비교적 깨끗하게 사용돼 환수된 후 다시 방출되는 비중이 높다”고 말한다. 1만원권에 비해 수명이 훨씬 길 것이란 예측이다.

조폐공사 입장에서 5만원권은 ‘미운 자식’이다. 5만원권이 나오면서 신규지폐 제조량이 5년 새 3분의 1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조폐공사는 적자로 돌아섰다. 2012년 조폐공사가 제조해 한은에 공급한 지폐는 5억5천만 장. 5만원권이 나오기 전인 2008년 공급량 17억1천만 장의 32.2%에 불과하다. 이 여파로 조폐공사의 지폐공급 매출은 2008년 1321억 원에서 지난해 785억 원으로 40.6% 줄었다. 당기순이익은 2008년 56억 원 흑자에서 2011년 5억 원 적자로 돌아섰다. 특히 2012년엔 영업이익도 21억 원 적자를 냈고 당기 순손실은 60억 원으로 커졌다.

조폐공사엔 찬밥 신세지만 시중에서 5만원권은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탈세와 뇌물공여, 부자들의 증여와 상속 등의 수단으로 5만원권이 ‘총애’를 받고 있다는 설이 파다하다. 5만원권이 지하경제의 기축통화가 됐다는 얘기다. 마릴린 먼로의 영화를 빗대 “미국 신사는 금발을 좋아하고, 한국 부자는 신사임당(5만원권 화폐 인물)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5만원권 발행은 급증했는데 품귀현상이 벌어지고, 화폐유통 속도마저 급격히 떨어지는 상황이다.

지하경제가 확대되는 것은 자영업자가 많은 특수성 때문으로도 풀이된다. 자영업자는 현금거래 비중이 높고 거래도 불투명하다. 작년 발표된 LG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자영업 요인이 지하경제의 44.3%를 차지, OECD 평균(22.2%)의 두 배에 이른다.

그 많던 5만원권이 사라진 배경에도 이 같은 ‘비공식 경제’의 블랙홀이 입을 벌리고 있다. 고액 자산가와 자영업자의 금고, 사설 카지노 등의 지하경제로 숨어들어갔다는 게 첫 번째 추정이다. 외국인 근로자와 교포 등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갔거나 10만원권 수표 대신 어디선가 잘 돌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아직은 모든 게 안갯속이다. 화폐정책을 총괄하는 한국은행도 “정확한 이유를 잘 알 수 없다”면서 “고액권 선호 현상은 금융위기 이후의 세계적인 추세”라는 대답으로 얼버무린다. 재무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확보한 5만원권 관련 한은 자료도 매년 발표되는 건조한 내용의 ‘팩트’뿐이다.


3월 28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3년도 연차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말 은행권 발행잔액은 61조1천억 원으로 전년 말 대비 9조 원 증가했다. 이 가운데 5만원권이 7조9000억 원 증가하면서 전체 은행권 발행잔액 중 66.6%의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전년 말보다 3.7%포인트 상승한 것이다.

2000년 이후 은행권 권종별 발행잔액 비중을 살펴보면 2008년 이전까지는 1만원권의 비중이 91~93% 내외를 유지했다. 하지만 2009년 5만원권이 발행되면서 1만원권의 비중은 줄어드는 양상이다.

반면 은행권 발행잔액에서 5만원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28%에서 2010년 46%, 2011년 56%, 2012년 63%로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표 참조)

기존의 고액권이었던 1만원권 수요가 5만원권으로 대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1만원권과 5만원권을 합한 고액권 수요는 2009년 말 93.7%에서 지난해 말 95.8%로 완만히 상승했다. 고액권 수요가 이처럼 증가하는 데 대해 한은은 세 가지 배경을 들어 설명했다.

▷5만원권이 기존 1만원권과 자기앞수표를 대체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 불확실성 확대로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강화되고 ▷저금리가 상당기간 지속되면서 경제주체의 화폐 보유성향이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명절을 맞아 무료임대 서비스를 하고 있는 시중은행의 대여금고. 지난해 전두환 대통령 일가의 대여금고 7개가 발견되면서 일반인들의 사용이 크게 늘었다.



5천원권보다 유통량 많은 5만원권

한은 자료에 따르면 1월 말 기준으로 개인 지갑이나 안방 서랍, 장롱 등 국민이 보유한 지폐는 46억5600만장에 이른다. 이 가운데 5만원권은 8억6100만 장, 43조원을 상회한다. 유통 지폐 장수로 따졌을 때 18.5%를 차지한다. 1만원권(20억6천만 장), 1천원권(14억5600만 장)보다는 유통량이 적지만 놀랍게도 5천원권(2억6천만 장)보다 3.3배나 많다.

이를 인구 수로 나눠보면 성인(2014년 추계인구 3996만 명) 한 사람당 평균 21.6장이다. 2011년 1월 말엔 1인당 10.6장이었으니 불과 3년 만에 5만원권 보유 장수가 두 배로 늘어난 셈이다. 국민이 그만큼 흔하게 접했다는 의미인데, 정작 이를 체감하기란 쉽지 않다.

시중에선 5만원권을 보기 어렵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 7년차 샐러리맨 A씨는 “간혹 부조할 때나 사용하는 5만원권을 국민 1인당 20장 넘게 갖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래시장 상인들도 “(5만원권 유통이) 작년과 올해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살만한 사람들까지 지갑을 닫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며 나름의 해석을 내리고 있다. 한국은행에서 직접 화폐를 공급받지 않는 새마을금고 등에선 5만원권 품귀현상이 자주 벌어지고 일부 은행지점은 뭉칫돈을 인출하는 고객에게 5만원권 지급을 제한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통계로도 뒷받침된다. 지난해 5만원권 지폐 환수율은 48.6%로 1만원권(94.6%)의 절반에 머물렀다. 2012년 61.7%에서 크게 꺾인 것이다. 환수율은 특정 기간 한은이 공급한 화폐 가운데 시중에서 사용되다가 다시 돌아온(환수) 비율을 뜻한다. 시중에 풀린 5만원권의 절반만 한은 금고로 돌아온 셈이다. 화폐 순환 사이클 어디선가 새거나 고여 있어서 돈이 안 돈다는 의미다. 한은 금고 대신 개인의 금고 속에 잠자고 있는 것일까?

은행 대여금고나 개인금고 사용자가 늘어난 것도 5만원권의 ‘실종’과 관련이 있을 개연성이 있다. 대여금고는 고객이 돈이나 유가증권 등 귀중품을 은밀히, 그리고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은행에서 빌려 쓰는 소형금고를 말한다. 모양과 크기는 책상서랍과 비슷하다. 부유층의 전유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대체로 대여금고 이용에는 크게 제한이 없다.

은행 고객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으며 비용은 금고 종류에 따라 임차 보증금은 2만~25만 원, 수수료는 면제다. 지점장 권한으로 우수고객에게는 보증금을 면제해주기도 한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작년 전두환 대통령의 대여금고 7개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사용자가 30% 이상 급증했다”고 말했다.

개인금고 판매도 늘었다. 신세계백화점은 2012년 7월 강남점에 S금고를 신규 입점시킨 뒤 서울 충무로 본점에도 매장을 만들었다. 지난해 12월 매출액은 입점 당시에 견줘 214% 신장됐다. 금고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불이 났을 때 타지 않게 막아주는 ‘내화금고’가 나온 지는 오래다.

요즘엔 도둑을 막는 ‘방도(放盜)금고’, 벽면 전체를 금고로 만들어 감추는 ‘위장금고’가 부자들의 관심을 끈다. 방도금고는 2중 잠금장치에 강철 소재로 중량이 500kg에서 1t에 이른다. 기중기가 없으면 옮기기 힘든 무게다. 강북엔 평창동과 성북동, 강남엔 도곡동·역삼동·압구정동 등 부자동네 주민의 설치 의뢰가 많다고 한다. 2천만 원 정도의 시공비가 드는 위장금고는 별장이나 전원주택 소유주가 선호한다.

요즘엔 금고에도 스‘ 마트 바람’이 분다. 금고 내부에 여러 IT기능을 장착한 금고다. 금고 자체의 물리적 보안 기능에 각종 첨단 보안시스템을 결합한 방식이다. 이동 감지센서, 충격센서, 여닫음 확인센서, 무선통신 기능을 통해 금고는 스스로 동작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 또 침입자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금고문이 열렸을 때, ‘폴리스콜’ 기능을 통해 침입자 모르게 경찰 혹은 보안업체에 연락 해준다. 개인금고 제작업체들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S금고 대리점의 한 관계자는 “판매량이 늘어난 것은 금고를 가구로 생각하는 생활문화의 확산 때문이지 현금 은닉수단으로 활용되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부피와 중량의 효율성’에서 최고

5만원권의 실종과 관련, 가장 의심을 받고 있는 곳이 지하경제 부문이다. 5만원권 지폐의 블랙홀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2012년 장진수 전 총리실 주무관이 민간사찰 은폐 대가로 건내받았다고 주장한 5천만 원은 한은 띠지(관봉)도 풀지 않은 5만원권이 100장씩 10개 묶음으로 돼 있었다. 2011년 전북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 발견된 도박업자의 돈 110억 원도 5만원권이었다.

지난해 뇌물 수수혐의로 구속된 전 한수원 사장도 하청업체 대표에게 와인상자에 담긴 5만원권 1억3천만원을 받았다. 5만원권이 지하경제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증거는 거의 매일 쏟아지고 있다. 거의 모든 뇌물사건에 5만원권이 등장하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대한민국 로비의 90%를 5만원권이 담당한다”는 말이 정치권과 재계, 공직사회 일각에선 이미 상식에 속한다.

최고의 로비 수단으로 5만원권이 각광받는 이유는 이른바 ‘부피와 중량의 효율성’, 자금 추적으로부터의 안전성 때문이다. 100장을 묶어 한 다발로 불리는데, 스무 다발(1억 원) 무게가 고작 2.2㎏밖에 나가지 않는다. 높이도 고작 22㎝ 수준이다. 물론 이것은 한국은행에서 막 새로 나왔을 때 얘기고, 구권으로 세우면 부피가 두 배 이상으로 커질 수도 있다.

그래도 1만원권으로 1억 원을 만들려고 했다면 무게가 11㎏에 높이도 1.1m나 되었을 것이다. 사무실 책상 서랍장 수준인 은행 대여금고에는 서른 다발(1억5000만 원)까지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007가방이라고 불리는 일반 서류가방에 채운다면 아마 5억 원 이상 들어갈 것이다. 2002년 대통령선거 때 1만원권 1억 원이 들어간 서류가방이 발견됐는데 그때보다 은행권 크기가 줄었기 때문이다.

인허가권자를 자주 상대하고 재건축, 재개발과 관련해 조합측과도 은밀한 거래가 필요한 건설사들은 특히 5만원권 확보에 민감하다. 5만원권이 없으면 상품권 등으로 로비를 해야한다. 법정관리 위기를 맞고 있는 한 건설사 재무담당 임원은 “5만원권과 상품권은 로비의 약발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고 털어놨다. 상품권은 추적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임원은 “평소 친분 있는 거래은행 지점장에게 5만원권 교환을 특별히 부탁하지만, 지점장도 확보에 한계가 있어 청할때마다 들어들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말했다.

부자들 사이에선 최근 ‘경제생활 3계명’이 유행한다. ▷비싼 물건은 당분간 사지 않는다 ▷부득이할 경우 현금을 사용한다 ▷절대 현금영수증은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견 유통업체의 사장을 만나 관련된 얘기를 들어봤다.

“요즘 세금이 말도 못한다. 세금폭탄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드러난 소득을 줄일 수밖에 없다. 제일 좋은 방법은 현금으로 거래하는 것이다. 금융기관을 통하지 않고 5만원권으로 돈을 직접 건내받는 것이 좋다. 내가 받을 때도 그렇고, 친한 업자에게 돈을 줄 때도 현금으로 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 ‘상도의’를 아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국세청이 지난해 적발한 고소득 자영업자 52명도 모두 현금거래로 세금을 탈루한 케이스다. 고액의 치료비를 현금으로 받아 개인금고에 쌓아둔 한방성형 의사, 고가의 전시제품을 현금으로 팔아 이 돈으로 별장을 산 화가 등이 뉴스에 오르내렸다. 적발된 현장에서 5만원권 뭉칫돈이 발견된 경우도 있다.

임대료나 고액과외 같이 노출이 잘 안 되는 소득, 또 도박·성매매·사채 등 소득 자체가 불법인 경우 현금 위주로 돈이 돌게 된다. 성형외과·피부과·치과, 악기점·가구점·전자제품 판매점에서는 현금 결제를 적극 유도하며 최대 20%까지 깎아주는 경우도 있다. 카드결제는 세금을 피할 수 없지만 현금 거래는 얼마든지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도 거래의 수단은 주로 5만원권이다.


▎2011년 전북 김제의 마늘밭에서 발견된 한 도박업자의 5만 원권 자금의 일부.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며 벌어들인 돈인 것으로 드러났다.



“세금 내느니 현금으로 보유하겠다”

자산가들의 동향도 심상치 않다. 특히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이 지난해부터 4천만 원에서 2천만 원 낮아진 것에 대해 부자들의 반응이 민감하다. 경기도 성남시에서 활동하는 세무사 변형오 씨는 자산가들의 세금회피 노력이 결과적으로 5만원권 수요를 자극할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분당의 부자들이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 인하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얼마 안 되는 은행 이자를 기대하는 것보다 세금을 덜 내고 현금을 활용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은행에서 뭉칫돈을 빼낸 사람들이 많다. 지금처럼 저금리가 지속된다면 그런 추세는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5만원권의 실종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본다.”

실제로 5개 시중은행 10억 원 이상 고액예금은 지난해 8월 말 기준 1년 전보다 17조원이나 줄어들었다. 부자들이 세금을 줄이는 방편으로 현금 소유를 택한 것이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연간 금융 소득 2천만 원을 넘지 않기 위해 현금 보유량을 늘리고 있다는 얘기다.

2009년 5만원권 등장 이후 화폐경제의 구조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돈은 쉴새 없이 찍어내는데 화폐유통 속도가 최저치를 잇따라 경신하고 있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실물경제의 수준에 비해 화폐발행이 과도한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발행된 화폐발행 잔액은 58조9천억 원(평잔 기준). 새로 찍혀 시중에 풀린 화폐가 전년보다 7조7천억 원(15%) 많다는 의미다. 2000년 이후 1조~2조 원대였던 증가폭은 5만원권이 발행된 2009년 3조 원을 넘어선 뒤, 줄곧 5조~7조 원대를 기록하고 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화폐발행잔액으로 나눈 ‘화폐유통속도’는 지난해 22.4배(성장률·물가 반영한 GDP추정치 기준)로 1980년(22.8배) 이후 가장 낮았다. 2008년 35배까지 올랐다가 역시 2009년부터 5년 연속 하락했다. 화폐 한 단위가 창출한 부가가치가 6년 새 35배에서 22배로 급락했다는 의미다. ‘5만원권 증발’이 화폐의 실물경제 기여도까지 떨어뜨리고 있는 형국이다.

일부에선 5만원권의 해외 유출도 5만원권이 귀해진 이유 중의 하나로 제시한다. 중국 동포들이 국내에서 번 돈을 중국으로 가져가 위안화로 바꾸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옌볜 등 일부 지역의 사설 환전소는 국내보다 더 좋은 환전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중요한 변수는 역시 환율이다. 옌볜에서는 위안 화 대비 원화의 가치가 떨어질 때마다 5만원권이 엄청난 인기를 끈다.

원화가치가 다시 올라갈 것에 대비해 쌀 때 원화를 사두려는 교포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남대문시장에서 만난 한 중국 교포는 “춘절 등을 맞아 중국에 갔다 다시 한국에 돌아올 때 5만원권 수요가 급증한다”고 말했다. 환전 조건이 한국보다 좋은 사설환전소에서 휴대가 편리한 5만원권을 바꾸려는 교포가 많기 때문이다.

세금과 지하경제의 악순환 고리 끊어야

내국인의 해외여행 씀씀이가 커지고 한류 바람이 불면서 동남아 등에서 원화 환전수요가 높아졌다는 분석도 있다. 외국 금융회사의 원화 환전이 2006년부터 허용된 데 이어 해외 유출 원화에 대한 규제도 완화돼 이 같은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를 수치로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이 같은 양상은 ‘원화 국제화’ 차원에서 나쁠 게 없다는 지적도 있다. 한은은 5만원 신권의 일부를 무역결제용으로 은행에 별도 지급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매년 2천억원 정도가 결제용으로 해외로 수출된다”며 “5만원권의 지급에 특별한 한도는 없다”고 말했다.

해외로 유출되는 지폐 수요를 파악하긴 어렵지만, 기축통화인 미 달러의 경우 3분의 2가 해외에서 거래된다는 비공식 통계도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일본 동포들 사이에선 엔화가 강세일 때 원화 예금으로 바꿔놓는 식의 투자도 활발하다”고 말했다.

5만원권은 특히 공단, 환전상이 많은 명동,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대림동에서 수요가 많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부가 과세 강화 의지를 보이면서 공단지역 중소기업들이 5만원권을 현금으로 보유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개인금고에 5만원권으로 10억 원 이상을 보관하는 중소기업 사장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고객은 5만원권 돈다발을 은행에서 가져갈 때도 일련번호를 섞어서 찾아간다. 한국은행 발권국 관계자는 “일련번호를 안다고 5만원권을 추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자금 흐름 등에 껄끄러움을 느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기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추정했다.

한은과 시중은행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한은에서 은행으로 나간 5만원권은 재래시장, 환전상, 경마장, 공단 인근 지점에서 집중적으로 풀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지역은 평소에도 현금수요가 많은 곳이고, 또 통상 경제규모가 커지면 고액권 수요가 늘어나는 게 일반적이다. 부산·경남·울산의 5만원권 환수율(25%·작년 3분기)이 전국(48.6%)의 절반인 것은 수산업과 소상공인이 많은 지역 특성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렇지만 최근 고액권 수요의 가파른 증가에는 더 큰손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기업의 고질적인 비자금 조성에 5만원권이 활용될 가능성이다. 취재 과정 중 만난 20위권 건설회사의 한 재무 담당 중역은 “담당자가 회사가 필요로 하는 5만원권을 척척 확보하지 못하면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바로 이런 대목이 5만원권 실종의 진짜 배경인지도 모른다.

작년 ‘캐시 이코노미(현금경제)의 증가, 지하경제 확대의 경고등’이라는 보고서를 낸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5만원권이 촉발한 현금 수요는 지하경제를 확대할 수밖에 없다”면서 “세원 확보가 어려워 세율을 올리면 지하경제가 다시 커지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1405호 (2014.04.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