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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로 5인(박관용·이종찬·한화갑·김종인·김형오)이 정치인에게 주는 고언(苦言) - 정치가 재난이 되는 시대로 갈 것인가 

국회의원을 정당의 틀 속에 가두지 말고 의사결정의 자율성 줘야… 이대로 가면 국민이 뒤집거나, 대통령이 특단 조치 내릴지도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비단 국회가 공전된다고 해서 위기라 부르진 않는다. 권한을 위임받은 정당과 국회의원이 주권자 위에 군림하는 본말전도를 걱정하는 것이다. 국민이 ‘도저히 안되겠다’고 판단하는 순간은 이미 늦다. 정치판을 떠난 원로들이 후배 정치인들에게 주는 진심 어린 정치 훈수를 모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서울 여의도의 국회는 잦은 시위와 집회로 출입을 통제하는 날이 늘어났다. / 사진·중앙포토

한국 정당정치가 죽어간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분권적 시스템이 점점 다수의 의견을 대변하지 못하고 특정 이해집단과 단체를 과도하게 대변한다.”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문구가 아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 스탠퍼드대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논문(‘The Decay of American Political Institutions’)에서 미국 정치권을 향해 날린 화살이다. 한마디로 “미국의 정치체제는 썩었다”는 외침이다.

요즘 한 국 정치가 꼭 그 짝이다. 정쟁에 휩싸여 다수결의 원칙이 통용되지 않는 국회는 기능을 잃어가고, 이를 지켜봐야 하는 국민은 피로하다. 우리 헌법은 국가권력을 입법·사법·행정에 고루 나눠주었다. 지금 입법 기능이 마비되고 저하됨으로써 사법과 행정도 덩달아 표류하는 국면이다. 급기야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이 정쟁에 매몰된 정치권과 국회를 향해 쓴소리를 쏟아내는 상황에 이르렀다.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그 해법은 무엇일까? 국민의 이익에 자신의 이익을 합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편집자 주



8월 29일 오후 국회의사당을 견학 온 중학생들이 텅 빈 본회의장을 둘러보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올해 초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20세기의 가장 놀라운 우연의 일치 중 하나로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과 영국의 전설적 팝그룹 비틀스의 1963년 11월 22일 행적을 들었다. 이날 케네디는 텍사스주 댈라스에서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졌다.

이곳에서 8천㎞ 떨어진 영국에 있던 비틀스는 팝음악의 진로를 영원히 바꿔놓은 두 번째 앨범 ‘With The Beetles’를 발표했다. 비틀스는 한 달 전 기념비적인 싱글 앨범 ‘I Want to Hold your Hand’도 출시했다.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두 앨범에 담긴 음악들은, 케네디 사망으로 절망에 빠진 미국인들이 엄청난 슬픔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이 잡지는 해석했다. 비틀스 음악이 충격에 빠진 미국을 구했다는 설정이다.

한국도 그런 기적과 위로를 필요로 한다. 4월 16일 단군 이래 최대 참사로 기록될 세월호 침몰에 이어 국론은 사분오열되는 등 나라가 지리멸렬하다. 다들 자기 목소리만 낼 뿐 상대방의 얘기에는 귀를 닫는다. 정치권은 갈등을 양산하고 극한 대립만 일삼는다. 대의제와 다수결이 작동하지 않다 보니 국회가 입법 기능을 상실한지 꽤 됐다. 그러니 한국 성인 8명중 1명은 우울증을 경험할 정도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2008년 7월~2010년 5월 재임)의 요즘 화두는 ‘정당’이다. 복잡하게 뒤엉킨 한국 정치의 난맥상을 푸는 단초를 정당 개혁에서 찾고자 한다. 그에게 정당의 존재감은 지금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더욱 뚜렷했다. 군사정부 시절에는 정당이라는 울타리가 국민 여론을 대변하고 정책에 반영하는 결사체 기능을 했다.

또한 정치인은 물론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호하고 신장하는 교두보 역할도 했다. 그랬던 정당이 민주화가 이뤄진 21세기에는 오히려 질곡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그는 느낀다. 정당이 국민의 다양한 여론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고, 변화무쌍한 사회 발전 속도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현실을 둘러보면 정당이 국회에 짐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론이 제기하는 정책 현안은 정당을 거쳐야 국회에서 입법화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각종 현안이 왜곡되거나 변질된 채 국회로 넘어간다는 점이다. 어떤 건 아예 국회의 문턱조차 넘어보지 못한다. 불필요한 내용을 걸러내고 정리해서 국회에 전달하는 정당이 이제는 스스로가 걸림돌이 돼가는 게 아니냐고 김 전 의장은 반문한다. “이러다가는 정당 때문에 대의민주주의에 위기가올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배경은 이렇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발달로 민의가 국회로 직행할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의 수단은 앞으로도 더욱더 확산되게 마련이다.

영역을 확대하는 직접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와 충돌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때 행동이 둔한 정당 때문에 대의민주주의가 궁지로 내몰리게 된다. ‘정당민주주의가 한국 민주주의의 기틀이자 보루’라는 말은 20세기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개념이다.

21세기는 정당의 존재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가 국회로 직접 전달된다. 국회 기능이 더 날렵하고 확장돼야 한다. 이런 시대 흐름에 뒤처진 정당은 국회의 기능마저 제약한다는 게 김 전 의장의 지론이다.

정당민주주의가 저문다




7월 15일 세월호 희생자 유족과 시민들이 세월호특별법 입법청원 서명지를 국회의장에게 전달하기 위해 의사당으로 향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지금의 정치 난맥상도 이런 프레임을 통해 분석이 가능하다. 세월호 참사 직후인 5월 2일 이후 국회 처리 법률안 건수는 ‘0’이다. 법안 통과 여부를 정당이 당론으로 결정한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은 당론에 발목을 잡힌다. 헌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할 권리를 정당의 당론에 빼앗기고 만다. 모든 걸 당론이 좌우하면서 민생현안이 19대 국회에 진입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당의 힘은 공천권과 막강 조직에 있다. 국회의원은 다음에도 금배지를 다는 게 어쩔 수 없는 숙원이다. 그러자면 공천을 주는 당 대표나 실권자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의정활동 아무리 잘해본들 공천권자의 눈밖에 나면 끝이다. 결과는 뭔가? 의정활동 열심히 하라고 국회의원으로 선출해주니 당 지도부 앞에서 굽신대는 게 한국 정치다. 정당은 대표·최고위원·사무총장·정책위의장 등 지도부가 이끌어간다. 크고 작은 정책·당론은 여기서 결정된다.

그것도 밀실에서 비공개로 몇몇 실세가 ‘당론’이란 이름으로 못박아버린다. 원내대표가 있고 ‘의원 총회’도 있지만 형식적이고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 정당이 국회를 장악하는 메커니즘이다. 김 전 의장은 “국회 기능을 활성화하려면 정당의 비대한 인적 구성을 혁파하고 공천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당을 없애자는 게 아니다. 정당의 힘을 빼는 쪽으로 권한과 인적 구성을 슬림화하자는 것이다. 정당 지도부가 막강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으면 정당 발전은 없다. 국회 발전도, 민주주의 발전도 없다.”



의정활동 열심히 하라고 국회의원으로 선출해주니 당 지도부 앞에서 굽신대는 게 한국 정치다. 정당은 대표·최고위원·사무총장· 정책위의장 등 지도부가 이끌어간다. 크고 작은 정책·당론은 여기서 결정된다. 그것도 밀실에서 비공개로 몇몇 실세가 ‘당론’이란 이름으로 못박아버린다.


이와 관련해 참여정부의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2012년 펴낸 저서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에서 흥미로운 통계를 제시했다. 1988년부터 2006년까지 국회에서 처리된 3131건의 법안의 태동과 입법화, 집행까지 걸리는 기간을 분석했다. 어떤 정책 현안이 정부 입법안으로 만들어져 국회를 통과해 다시 정부에서 집행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한 것이다. 일종의 법안처리 속도라 하겠다. 결론은 약 35개월이었다.

정책 현안이 정부 입법으로 성립하는 데 21.5개월, 국회 심의와 표결을 거쳐 통과하는 데 7개월, 정부가 시행에 들어가는 데 5.9개월이 평균적으로 소요됐다. 당정 협의를 거쳐야 하고 또 여야 간 밀고 당기는 과정을 겪다 보면 법안 하나 집행하는 데 3년의 세월이 걸린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내각제 국가에서는 내각의 결정이 곧 의회의 결정이므로 정책결정이 원(one) 라운드로 끝나지만 대통령중심제는 행정부 결정, 의회 결정 등 투(two) 라운드가 된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중심제는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돼 있어 집행력이 높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앞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언급했듯이 이런 사이클에 들어 있는 정당이 제 구실을 못하면 법안처리 속도를 떨어뜨리게 되므로 의회민주주의의 위기를 야기할 수도 있다.

‘정당의 존재 이유는 정권 창출’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정치권에 회자됐지만 절반의 진실만 담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역임한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는 나머지 절반의 진실을 이렇게 말한다.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고자 정권을 잡는 게 정당이다.” 위정자들은 ‘정권 창출’보다 ‘국민을 위한 정치’에 우선가치를 둬야 한다는 뜻이다.

위기의 근원, 한국 정치의 적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다. 그는 “요즘은 정당과 국민이 따로 논다”고 말하면서 “심지어 정치 이익집단일 뿐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정당이 아니다”고 낙인을 찍기도 한다. 국민이 원하는 걸 찾아서 해줘도 시원찮을 판에 정당이 자신들의 원하는 걸 챙기는 데 급급하다는 말이다.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한 그는 한국 정치를 위기에 빠뜨리는 5가지 요인을 꼽았다. 정권을 타도 대상으로 간주하는 야당, 현안에 손을 놓고 있는 여당, 서로가 잘되는 걸 못 참고 어떻게든 방해하는 여야, 대통령만 쳐다보는 청와대와 정부, 결단을 못 내리는 대통령이 그것이다.

그는 정치를 이렇게 망가뜨린 책임은 정부여당이 더 크다고 비판했다. 세월호특별법의 경우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해결 능력을 가진 정부여당이 보다 적극적으로 유가족들을 끌어안지 못한 것은 중대한 패착이라고 했다. 야당은 야당대로 국민 편에 서기보다는 특정 집단과 이념에 경도되는 오류를 범한다고 충고한다.

한 총재는 그런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에게도 책임을 묻는다. 정당이 지금처럼 기고만장해서 유권자들을 겁내지 않도록 할 책임은 유권자들에게 있다는 것. 선거 때만 되면 영호남은 각기 지역 연고가 뚜렷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에 ‘묻지마 투표’를 한다. “정당과 정치를 바로 가게 하려면 잘못할 때 가차없이 낙선시켜 유권자 무서움을 알게 해야 한다”고 한 총재는 강조한다.

이문열 작가는 현실 정치의 양태와 관련해 “여야 가릴 것 없이 대의제와 다수결 제도에 불복하는 모습”이라며 “불일치가 반감으로 이어지고, 적대적 관계가 불복으로 구조화한다”고 정치의 파행을 경계했다.

박관용 전 의장은 “보수 원로들 사이에서도 자유민주주의 정치는 생명력을 다한 것 같으니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제도 도입을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가 진지하게 흘러 다닌다”고 전했다. 심화되는 양극화와 빈부 격차에 대처하자면 경제적으로 평등과 분배에 더 치중하는 제도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8월 27일 유가족이 동의하는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던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단식농성 중인 문재인 의원과 말을 나누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보수가 사회민주주의를 말하는 시대다

한 총재는 이런 적대감의 근원에 ‘지피아(지역주의 마피아)’가 도사린다고 진단한다. 같은 지역 사람끼리 해먹는 구조가 부패를 양산한다. 한 총재는 “한국정부 수립 67년을 맞아 이승만(12년)·최규하(1년)·김대중(5년) 대통령을 제외한 50년 가까이 영남 출신 대통령이 집권했다”고 지적하면서 “중앙정부가 알고 보면 ‘경상도 도청(道廳)’과 다를 바 없었다”고 했다.

특정지역이 패권을 행사하는 구조를 개선하고, 각종 인사나 예산 배정 등에서 지역 간 형평성이 보장될 때 현실정치의 적대감도 해소되리라는 게 그의 관측이다.

앞서 두 원로가 정당 개혁과 지역주의 해소를 제기했다면 박관용 전 국회의장(2002년 7월~2004년 5월 재임) 정치권에 좀 더 큰 폭의 변화가 올 수 있음에 주목한다. 어디를 가도 국회와 정당이 손가락질을 받는다. 국회는 마비되고 민심은 메마르고 인심은 흉흉하다.

‘이럴 바에 차라리 국회를 해산하자’던 지난해 한 전직 총리의 발언이 점점 현실화되는 게 아닌지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고 그는 말했다. “요즘 국민들이 ‘국회 해산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이는 ‘국회의원을 왜 뽑아야 하느냐”는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입법부의 수장을 지낸 이의 언어로는 파격적이다. 하지만 빈말이 아니다. 인간사회에는 어쩔 수 없이 견해차와 갈등이 존재한다. 이를 수렴하라고 정당이 여럿 존재하고, 만나 타협하고 절충하라고 의회가 있다. 대화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건 기본이다. 지금은 여당은 원칙론, 야당은 선명성에만 매달리다 보니 자기만 옳고 남은 틀렸다는 흑백논리에 갇혀 한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형국이란다.

“마치 권위주의 군사정부 시절 마냥 서로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는 듯하다”는 게 박 전 의장의 관전평이다. 그는 “막판엔 주권자인 국민이 들고 일어나 판을 뒤집든가, 대통령이 특단의 조치로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대통령이 독재를 하거나, 전제정치를 한다는 말인가?

“만약이다. 만약에 훗날 사회가 혼란하고 국회가 국민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상황이라면 아주 용기 있는 대통령이 어떤 권력 수단을 동원할지 누가 알겠나?

그건 역사적 퇴보 아닌가? 우리가 경험해봤지 않나.

“아니 심각하다. 이거 그냥 적당하게 ‘정치권 정신차려’라고 얘기할 때가 아니다. 정치가 실종되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다. 그 위험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닥쳐 올지는 예측할 수 없다. 나라마다 다 다르니까."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면 어떻게 되나?

“헌법 개정을 요구하거나 선거구제 개선 등 정치적 분기점을 마련할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로 갈 수도 있다. 국민들이 시위와 집회에서 의사를 표출하고 정부는 그에 따라가기 급급하고….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사회가 흘러갈 수도 있다. 지금으로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

자주 만나는 전직 국회의원, 장관들도 같이 비슷한 예감을 갖는다고 그는 말했다. 대부분이 ‘정치를 했다는 것이 부끄럽고’, 또 ‘이런 정치를 보고 가만히 있기도 참 부끄럽다’는 자괴감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 정치는 진영 논리에 따라 허우적거린다. 이런 안타까움은 자유민주주의가 한국 정치에 앞으로도 통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로 이어진다.




9월 4일 회의 참석차 국회 대표최고위원실로 들어서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이완구 원내대표·김태원 중앙위의장·서청원 최고위원 등 지도부. (앞쪽부터) / 사진·중앙포토
한국정치는 10월유신 이후 쪼그라들어

박 전 의장은 “보수 원로들 사이에서도 자유민주주의 정치는 생명력을 다한 것 같으니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제도 도입을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가 진지하게 흘러나온다”고 전했다.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와 빈부격차 문제에 대처하자면 경제적으로 평등과 분배에 더 치중하는 제도적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이들 보수 원로의 생각은 지난 2012년 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공약을 주도했던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노선과 상당히 겹친다. 당시 김 전 수석은 “시장경제에 모든 걸 맡겨서는 약육강식만 있을 뿐”이라며 국가는 하나의 공동체이므로 질서를 제대로 잡아주는 건 당연하다는 주장을 폈다. “1%대 99%로 갈라진 사회가 나중에 폭발하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경제민주화 정책도 기업을 위하는 길이다.” 그는 경제민주화는 누가 주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시대적 요청이라고도 했다.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경제민주화 의제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렸다. 경제민주화 법안은 고사하고 일반 법안 처리마저 전면 중단된 마당이다. 김 전 수석은 “한국 정치는 10월유신 이후 줄곧 쪼그라들었다”고 혀를 찼다. 그는 정국의 교착원인의 하나로 리더십 부재를 들었다.

김영삼·김대중 두 대통령은 권위주의 정권과 맞서 결국 문민 권력이라는 새 리더십을 창출했으되 그 뒤가 문제였다고 그는 평가한다. 즉 노무현·이명박·박근혜에 이르기까지 리더가 리더 역할을 못하면서 현실정치가 문제해결 능력을 잃어간다는 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김 전 수석은 “리더가 되서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가겠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현정부의 경제정책도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추진중인 경기활성화 정책(재정지출 증가→소득증대→내수증가→기업 투자 확대→일자리 창출)이 소기의 목적을 거두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저성장 기조에 근거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존 토양을 마련해주는 경제민주화 정책이 선행하지 않는 경기부양은 장기적으로 경제에 주름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지도자의 리더십에 달렸다는 게 김 전 수석의 시각이다.

그는 추락의 끝이 어딜 것 같으냐는 물음에 “이런 식으로 계속 간다면 낭떠러지에 이르러서야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극한 상황에 내몰려야 새로운 리더십이 탄생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는 프랑스의 예를 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리더십 부재로 인해 1950년대를 허송세월했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제 4공화국(1946∼58년)은 군소정당의 난립, 만성적 인플레이션, 식민지 독립운동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유럽의 병자’라는 오명과 함께 승전국의 지위에서 중진국으로 추락할 위기로 내몰리자 1946년 정계에서 은퇴했던 드골이 11년간의 칩거를 끝내고 1957년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복귀하게 된다. “(다소 독재적이고 권위주의적 성향을 가진) 드골이 강력한 대통령 리더십을 확립, 근대 프랑스의 기틀을 새로 닦는 계기가 됐다”고 김 전 수석은 덧붙였다.


65주년 제헌절을 하루 앞둔 지난해 7월 16일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행사 관계자들이 분주히 경축식 준비를 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그럼 한국의 미래는 프랑스 4공화국일까, 5공화국일까?참여정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에 따르면 우 정치권에 국민을 끌고 가는(Lead) 기능은 아주 취약하다. 그가 보는 대부분의 국내 정치지도자는 따라가기(Follow)에바쁘다. “대선주자들조차 자기 비전을 내세우기보다는 국민과 같은 소리를 내는 데 급급해 한다”는 게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일했던 김 교수의 진단이다.

박 대통령, 경각심 갖고 국정 살펴야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도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원로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국민의정부 초대국정원장과 민정당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980~90년대 한국 정치의 중심을 관통한 인물이다. 이 전 원장은 우리가 전에 없는 풍요 속에 살다 보니 과거를 망각하고 현실에 취해 있다고 걱정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추구하던 시절의 ‘더 좋은세상 만들자’는 의지는 오간 데 없고, 눈앞의 과실을 향유하다 보니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당과 국회의원도 예외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공동선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줄어든다. 이 풍요가 언제까지 간다고 보는가? 반드시 큰폭풍우가 올 것이다.”

경험칙이 말해주듯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철밥통을 절대 깨지 않는다. 그래서 이 전 원장은 35% 이상 되는 견고한 지지층을 가진 박 대통령의 어깨가 더 무거운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의 지지층은 취임 초는 물론 지금도 단단한 결속력을 유지한다. 그에 비하면 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층은 정권 출범 후 주저앉았다. 박 대통령이 전임 두 대통령보다 더 좋은 여건에서 국정목표를 향해 매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을 보좌해 국정을 운영해본 그는 한국의 대통령이 하는 일이 상상이상으로 중요하고 광범위하다는 걸 잘 안다. 결단의 순간에는 엄청난 진통이 수반한다고 했다. 그는 국민의정부 시절에 있었던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말했다.

외환위기 당시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대기업 사업 구조조정(빅딜)이다. 이때는 IMF(국제통화기금) 구조조정 광풍이 불던 시절이라 정부 당국자나 기업하는 사람들이나 국가와 기업의 운명을 가르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김 대통령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에도 막아온 일본 대중문화의 유입을 1998년 허용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도 검토됐지만 팽배한 반일감정, 저질문화 유입 논란등으로 유야무야된 사안이었다. 이 전원장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문화를 개방해도 한국문화가 일본문화를 이길 것이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확신을 갖진 못했”면서 “그래서 여러 군데 자문을 구하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용단을 내렸다”고 했다. 그 당시 문화개방이 없었다면 한국의 드라마와 가수들이 일본에 진출해 한류 붐을 낳지 못했을 것이다.

대기업 빅딜 건만 해도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 빅딜에 따르는 파급효과를 본능적으로 읽고 있었다. 빅딜을 통해 기업 하나가 정리되면 그에 딸린 수많은 중소기업 직원과 가족의 생계가 막막해진다. 그 책임은 결국엔 대통령이 다 떠안아야 한다. 이 전 원장은 “옆에서 볼 때 김 대통령이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중복투자로 기업의 재무구조가 악화된 이상 불가피했다. 김 대통령은 기업을 잘 아는 박태준 전 포철회장의 ‘해도 된다’는 말에 힘을 얻었다. 고민고민 끝에 박태준 전 회장의 뜻을 따랐다.”

국정 결정의 순간에는 재삼재사 숙고하지만 일단 결심이서면 뚝심 있게 밀어붙여야 한다. 이 전 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잘 관찰하고 연구해서 해법을 찾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그게 바로 지도력이고 국정목표를 달성하는 지름길”이라고 분발을 당부했다. 정리하자면 박 대통령이 좀 더 경각심을 갖고 국정의 구석구석을 주도적으로 챙겨야 한다는 주문이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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