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고미숙의 ‘로드 클래식’ | 허클베리 핀의 모험① 야생과 탈주의 연대기 - 문명의 규율과 폭력을 전복, 풍자하고 조롱하다 

살아 생전에 가장 사랑받고 가장 미움받은 작가 마크 트웨인의 역작… 강물 따라 흘러가는 헉과 짐의 유목민적 인생유전 

고미숙 고전평론가
미시시피 강은 마크 트웨인이 지닌 힘의 원천이다. 청춘이 유동하는 거센 흐름이며, 스토리가 약동하는 발랄한 무대다. 정체된 삶을 거부하는, 뿐만 아니라 야유하고 해체하고 뒤집는 통쾌함이 있다. 그러나 종내 추구하는 것은 없다. 흐르는 것에 시작과 끝이 있던가. 그렇게 흐르고 또 흐를 뿐 어떤 곳에도 정착하지 않는다.

▎1993년 스티븐 소머즈 감독이 제작한 영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뗏목 장면. 자유분방한 허크 핀(엘리아 우드 분)과 노예 짐(코트니 B. 밴스 분)이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표류하며 생애 최고의 ‘이상한 여행’을 떠난다. / 사진·중앙포토
지난 8월 말 나는 연구실 동료와 함께 뉴욕 시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맨해튼 건너편에 자리한 ‘퀸즈’의 한 호텔에서 빵과 커피로 아침을 때운 뒤, 왼종일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뉴욕을 발바닥으로 체험하고 싶어서였다. 10년 전 이맘때 처음 뉴욕 JFK 공항에 발을 디뎠다. 뉴욕주에 속한 이타카의 코넬 대학에 가기 위해서였다. <열하일기>를 ‘리라이팅’한 이후 코넬 대학에서 한 학기 ‘방문 교수’로 초빙을 받은 것이다.(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당연히 한국어로 하는 강의였다.^^) <열하일기>가 몰고 온 역마살이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다. 지난해부터 다시금 뉴욕이 내 일상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결국 나와 연구실 동료들은 뉴욕에서 ‘청년세대’를 위한 새로운 ‘네트워크’를 실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해서, 지난가을 적당한 공간을 물색하기 위해 뉴욕거리를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다시 역마살이 도래했음에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올해 초부터 뜬금없이 이 ‘로드 클래식’ 연재를 하게 된 것도 왠지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시절 인연이란 이렇듯 묘한 것이다.


▎필자가 텍스트로 삼은 <주석 달린 허클베리 핀>. 46배판 900쪽이 넘는 분량으로 당시 삽화와 신문기사, 풍속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담고 있다.(마이클 히언 주석·박중서 옮김·현대문학·2010)


내 안에 ‘잭슨 섬’ 있다?


▎만화 <톰소여의 모험>에 그려진 악동들. 톰소여는 허크 핀과 2개의 소설 안에서 운명적으로 연결돼 있다. / 사진·중앙포토
뉴욕의 주택가인 ‘퀸즈’를 한참 돌아다니다 ‘잭슨 하이츠’라는 곳에 딱 꽂혔다. 헌데, 그날 밤 내 손에 들려 있었던 책이 <톰소여의 모험>이었다. 웬 ‘아동소설’이냐고? 이번 달 연재물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짝궁처럼 붙어 다니는 책이기 때문이다. 헌데, 톰과 헉이 자유를 누리고 모험을 즐기던 섬이 다름 아닌 ‘잭슨 섬’이었다. ‘잭슨 하이츠’를 헤매다 돌아왔는데,‘잭슨 섬’을 만나다니. 이건 또 뭔 우연의 일치란 말인가. 물론 두 장소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잭슨 섬’에 대한 주석을 보면, “정식 이름은 글래스콕 섬이고 한때는 해니벌에서 하류 쪽으로 3마일쯤 떨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강물에 침식되어 사라진지 오래다. 트웨인에게 이곳은 항상 성인생활의 긴장에서 벗어나는 성지로 남아 있었다.” 요컨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상상의 공간’인 셈이다. 해서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 잭슨 섬을 하나씩 갖고 있다’고. 그렇다면 내 안에도 ‘잭슨 섬’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튼 그렇게 톰소여를, 또 그를 통해 헉 핀을 만나게 되었다.

헉은 톰의 절친이다. 명성으로 따지자면 톰이 헉을 앞선다. 헉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톰을 모르기는 어렵다. 하지만 두 작품은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톰소여의 모험>(김욱동 옮김, 민음사, 2009)에 헉은 조연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선 톰이 말미에 카메오로 등장한다. 둘 다 악동의 대명사지만 성향이나 기질은 아주 딴판이다(그에 대해선 다음호에 담는다).

일단 톰의 눈에 포착된 헉의 캐릭터는 이렇다. “허클베리는 동네 어머니들이 하나같이 몹시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아이였다.” 왜? 빈둥거리는데다 상스럽기 때문이다. 옷차림도 넝마에 누더기가 기본이다. 하는 짓거리란 “날씨가 좋으면 남의 집 문간 계단에서 잠을 자고 비가 올 때면 큰 나무통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요즘으로 치면 노숙자다. 사회적 약자, 버림 받은 아이, 상처받은 영혼 등의 이미지로 집중 조명 될 판이다. 헌데, 이어지는 멘트는 우리의 예상을 홀딱 깬다. “학교도 교회도 갈 필요가 없고 낚시질이든 수영이든 맘대로 할 수 있다. 목욕을 할 필요도 없고 욕지거리를 해대도 말리는 이가 없다. 한마디로 이 녀석은 정말로 인생을 살맛 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을 뭐든지 다 갖추고 있었다.” 헐~ 아니 헉! 그리고 하나 더.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살면서 어른들한테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얌전한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했다.”(<톰소여의 모험>, 85쪽) 모든 아이의 우상이라는 것이다.

몹시 당황스럽겠지만, 사실 이것이 성장기 아이들의 진면목이다. 지저분하게, 욕설을 해대면서 ‘싸돌아다니는’ 존재들, 그것이 청소년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런 모습이 너무 낯설다. 아니 공포스럽다. 예쁘장하고 고분고분하고 ‘방에 콕 박혀’ 있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어서다. 왜?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문명과 제도에 완전 ‘쩔어’버린 탓이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야생의 추억’을 몽땅 망각해버렸다.

화폐 따윈 필요없어!


▎마크 트웨인을 그린 목판화. 그는 미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현자의 머리에 소년의 마음’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 사진제공·현대문학
그랬던 헉이 톰과의 모험―해적놀이와 보물찾기―덕분에 6천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돈을 갖게 되자 곧바로 문명세계에 편입되었다. 헉은 “이제 더글러스 과부댁의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되자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니, 그 세계 안에 내동댕이쳐졌다고나 할까.” 그렇다. 그에게 있어 문명은 진보가 아니라 추락이다. 온통 빗장과 족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3주간 이 고통을 견디다 마침내 헉은 종적을 감추어버린다. 그가 다시 찾아간 곳은 ‘도살장 뒤꼍에 뒹굴고 있는 빈 나무통’ 속. 그를 찾아낸 톰에게 헉은 절규한다. “과부댁은 종이 땡땡 울리면 식사를 하고, 종이 땡땡 울리면 잠을 자고, 또 종이 땡땡 울리면 일어난다니까. 정말로 견딜 수가 없어.”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하고 있어, 헉.” “톰, 난 다른 아이들이 아니잖아.”

이 대화는 왠지 익숙하다. 요즘도 ‘왜 그렇게 매여서 사느냐’고 물으면 다들 이렇게 말한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잖아요?’라고. 하지만 헉은 다르게 말한다. 난 다른 사람이 아니다.’ 사실 이게 정답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먹을거리가 너무 쉽게 얻어지니까 도무지 밥맛이 없어. 그런 식으로 먹는건 재미가 없거든.” 그렇다. 몸은 외부와의 ‘밀당’을 원한다. 그래야 ‘기혈이 순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얻어지는 것에선 절대 기쁨을 느낄 수 없다. 헉은 거리에서 살면서 그 맛을 제대로 누린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쩌다 이런 인생의 ‘참맛’을 홀딱 까먹은 것일까? 다름 아닌 화폐 때문이다. 헉은 그 사실을 즉각 깨달았다. “톰, 부자가 된다는게 남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고. 걱정에 또 걱정, 진땀에 또 진땀,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늘 생각하게 만드는 거야.” 그래서? “그러니까 내 몫도 네가 다 가져. 나한텐 어쩌다 가끔 10센트짜리 동전 한 닢씩만 주면 돼. 그것도 자주 줄 필요도 없어. 나는 말이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 따위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어.”(405쪽) 부자와 화폐에 대한 신랄하고도 통쾌한 풍자!

청춘의 생명은 자유다. 화폐와는 천적지간이다. 화폐는 문명을 구축하고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모든 주체를 복속시킨다. 그런데 문명인들은 그것을 진보라고 부른다. 야생적 에너지를 알량한 안정과 교환한 것이다. 하지만 헉에겐 그거야말로 ‘부당거래’다. 출구는? 간단하다. 화폐를 버리면 된다! 이게 톰소여가 소개하는 헉핀의 행동방식이다.

내가 뉴욕행 여행가방에 <톰소여의 모험>을 넣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헉 핀의 번역본으로 택한 판본이 사이즈가 너무 커서 도저히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였다. 46배판에 무려 900쪽이 넘는다. 본문의 양도 만만치 않지만 이 판본에는 어마어마한 주석이 달려 있다. 제목도 <주석 달린 허클베리 핀>(마이클 패트릭 히언 주석·박중서 옮김·현대 문학·2010)이다. 해설만 240여 쪽에다 삽화며 신문 기사, 당시 풍속에 관한 상세한 설명까지. 주석가나 번역가의 노고에 입이 쩍 벌어지는 책이다. 아마 책을 펴는 순간 다들 이런 의구심에 사로잡힐 것이다. 아니,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그렇게 대단한 책이었어? 맞다. 그렇게 대단한 책이다.

“현대의 미국 문학은 모두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이후에도 그만큼 훌륭한 것은 없었다.”(헤밍웨이). 한마디로 ‘전무후무한’ 작품이라는 것. 이보다 더 ‘쎈’ 찬사도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영어로 나온 작품 가운데 논쟁의 여지가 없는 걸작, 그리고 신들이 점지해준 천재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 거대한 강의 탁월한 낭만 소설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다.”(161쪽) 하지만 모든 찬사에는 그에 걸맞은 비난도 쏟아지는 법. ‘인종적 쓰레기’라는 비난에다 한때 공공도서관이나 학교에선 젊은이들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금서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살아 생전에 가장 사랑 받고 가장 미움받은 작가’라는 평도 이래서 나온 것이다.

현자(賢者)의 머리에 소년의 마음을 지닌 작가


▎집을 빠져나가는 허크 핀.(왼쪽) 1985년 출간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초판 표지. 표지에 허크 핀이 톰소여의 친구라는 점을 밝혔다. / 사진제공·현대문학
그럼 이런 대단한 ‘문제작’을 쓴 작가 마크 트웨인은 어떤 사람인가? 본명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 1835년 미주리 주의 작은 마을 해니벌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젊은 날 미시시피 강을 오가는 정기선에서 조타수로 일했다. 28세 무렵부터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을 썼는데, 마크 트웨인이란 ‘증기선의 수심을 측정하는 선원의 외침소리’로서 안전항해 수심 약 3.7m를 뜻한다. 이런 직업적 특수용어를 필명으로 쓸 만큼 미시시피 강은 그의 작품의 원천이었다. 뉴욕에서 거주했지만 수시로 전 세계를 돌아다녔으며, 평생 쉬지 않고 작품을 써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왕자와 거지>도 그의 작품이다.

평생의 동료였던 잡지 편집자 하우얼스는 그를 ‘현자(賢者)의 머리에 소년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했다. 현자와 소년(실은 악동)의 조합? 쉽게 말해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미국식 유머의 거장에 베스트셀러 제조기’였고, 3년에 걸쳐 ‘열 아홉개의 침실에 다섯 개의 욕실을 지닌’ 대저택을 지었으며 그곳을 방문하는 지식인, 예술가들을 접대하느라 가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말년엔 대공황의 여파로 파산을 하게 되자 그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며 순회 낭독회를 열어야 했다. 한마디로 ‘가장 멋지고 가장 정신 없는’ 인간이었다.

특히 ‘남북전쟁 이전 남서부의 거칠고 폭력적인 풍토가 몸에 익은 그가 뉴욕의 중상류층 집안에서 자란 교양 있는 아내를 얻은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거칠고 야생적이고 욕설 가득한 그의 글들은 그의 아내와 딸들의 검열과 편집 속에서 다소 얌전하게 순화되어야 했다. 덕분에 뉴욕의 중상류층 삶을 살았으면서도 현대 문명에 대해 가장 전복적인 풍자와 조롱을 쏟아낸 역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병으로 아내와 딸들을 잃고 우울한 만년을 보내다 1910년 4월 21일,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다음날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그의 명성은 불멸이 되었다.”(176쪽)

소설 첫 장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건 다짜고짜 ‘경고’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는 사람은 고발당할 것이다. 여기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는 사람은 추방당할 것이다. 여기서 어떤 줄거리를 찾으려는 사람은 총살당할 것이다.” 뭐 이런 저자가 다 있어? 동기도 교훈도 줄거리도 없는 소설을 누가 읽는단 말인가? 그런데 잠깐! 그럼 우리에게 소설은 동기와 교훈과 줄거리란 뜻인가?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왠지 소설이 영 재미없어진다. 그럼 소설이 뭐지? 헷갈린다. 이럴 땐 일단 건너뛰자.

<톰소여의 모험>이 3인칭이라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1인칭이다. 즉, 헉의 자전적 작품이다. 이야기는 과부댁에서 시작한다. 조금만 참고 살면 대모험에 끼워주겠다는 톰의 회유로 헉은 다시 과부댁으로 돌아간다. 다시 문명세계에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규칙과 예법, 기도와 회개, 친절과 배려 등에 짓눌려 헉으로선 ‘어찌나 서러운지 딱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미셸 푸코가 말한 근대 ‘규율 권력’의 실상이다. 욕망과 신체의 곳곳을 세밀하게 터치하고 조작하는 ‘생체권력’ 말이다. 가족과 학교, 교회야말로 그런 권력이 작동하는 핵심거처다. 헉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간파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 술주정뱅이 아빠가 있다. 그는 부랑자다. 학교와 종교를 증오한다. 그럼 ‘반문명인’인가? 아니다. 그는 문명에 편입되지 못한 ‘주변인’이다. 문명인 못지않게 그는 화폐를 갈구한다. 술을 먹기 위해서다. 또 술은 언제나 폭력으로 이어진다. 1년 만에 나타나선 헉을 과부댁에서 빼내 강 상류에 있는 숲속 오두막으로 데리고 간다. 낚시를 하고 사냥을 해서 그럭저럭 먹고 살 만했다. 하지만 아빠는 신나게 술을 퍼마신 다음엔 헉을 두들겨 팼다. 이런 쓰레기 같은! 하지만 여기도 반전이 있다. 헉은 이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왜? “담배를 피우거나 낚시를 하고, 책도 공부도 없었으니까.” “목욕을 할 필요도 없고, 욕설을 참을 필요도 없으니까.”

금욕 아니면 방탕, 규율 아니면 폭력


▎트루 윌리엄스가 1880년 그린 <집필 중의 마크 트웨인>. 작품을 만드는 작가의 고뇌와 공력이 잘 드러나 있다. / 사진제공·현대문학
자, 이것이 헉이 놓여 있는 자리다. 한쪽은 감시와 보호, 다른 쪽은 주정과 폭력. 전자는 안전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고, 후자는 유쾌하지만 늘 채찍에 시달려야 한다. 사실 이것이 문명의 이중주다. 금욕 아니면 방탕. 규율 아니면 폭력. 지금도 이 둘 사이를 격하게 오가고 있지 않은가. 헉은 아빠의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과부댁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멀리멀리 떠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선 “한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 같았고, 차라리 방방곡곡을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사냥과 낚시로 끼니를 때워야” 할 것 같았다.(316쪽) 유목민이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도주가 무엇일까? 죽음이다. 죽어버리면 낡은 인연들은 절로 정리될 테니까.헉도 그렇게 생각했다. 총으로 멧돼지를 잡아 자신이 마치 강도한테 납치되어 익사한 것처럼 꾸민다. 그런 다음, 카누에 누워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좋아. 그럼 이제는 어디든 가고 싶은 데로 가면 돼. 그래. 잭슨 섬이 딱이야.”(335쪽) 그렇게 잭슨 섬으로 숨어든다. 작전은 성공했다. 마을사람들은 헉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 강물속으로 대포를 쏘는 등 안간힘을 다한다. 헉은 잭슨 섬에 숨어서 마치 영화를 감상하듯 그 광경을 바라본다. 자신의 죽음을 구경하는 맛이라니.

수색은 실패했고, 마침내 헉은 죽었다(고 판단되었다). 야호, 이젠 해방이다! 과부댁의 규율에서도, 아빠의 폭력에서도 완전히 벗어났다. 헌데, 이 자유에는 쓸쓸함이 수반된다.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모든 친구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연은 가고 오는 법. 그 시간 흑인노예 짐도 잭슨 섬으로 숨어들었다. 둘은 서로를 알아본다.

“근데 이 섬에 온지는 얼마나 됐어, 짐?”(헉)

“네가 죽은 바로 그 다음날 여기 왔지.”(짐)

“네가 이 섬에 온 지는 얼마나 된 거야?”(짐)

“내가 죽은 바로 그날부터지.”(헉)

헐~ 무슨 선문답같다. 좌우지간 헉의 죽음과 짐의 도주는 동시적이다. 이 동시성 때문에 마을에선 짐이 헉을 죽인 범인이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짐이 도주한건 짐의 주인인 왓슨 양이 짐을 남부에 800달러에 팔려고 했기 때문이다. 가혹한 노예제로 악명 높은 남부에 팔려가느니 차라리 도망치는 게 낫겠다고 여긴 것이다. 둘은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절실했던 탓이다. 헉은 떠돌이 미성년자다. 함께 다닐 보호자 어른이 필요하다. 짐은 어른이지만 흑인이자 도망노예다. 신분을 보장해 줄 백인이 필요하다. 나이와 신분, 인종을 둘러싼 기묘한 대칭성!

이 대칭성 덕분에 둘은 바로 말을 ‘튼다’. 헉은 어리지만 ‘백인 나리’이고 짐은 노예지만 ‘아저씨’니까. 소년 부랑자와 검둥이 도망자라는 세기적 커플의 탄생! 잭슨 섬에서의 동거는 달콤했다. 하지만 세상이 그들의 평화를 허락할 리가 없다. 짐이 헉을 죽였다고 생각한 마을사람들의 추격이 시작되고, 결국 둘은 뗏목에 몸을 싣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흘러간다.

이로써 헉은 마침내 ‘부활’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아빠와 과부댁을 벗어나는 게 삶의 목표였다. 하지만 이젠 짐과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앞으론 ‘살인자’ 혹은 ‘도망노예’를 쫓는 자들로부터 도주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여행은 더 이상 톰소여와 같이 했던 ‘해적놀음’ 따위가 아니다. 이건 진짜 도주다. 노예제와 공권력, 인종차별의 관습과 무의식 등으로부터의 도주. 그래서 탈주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톰소여’ 류의 악동소설이 아닌 미국문학의 최고봉이 되는 순간이다.

세기적 커플의 탄생


▎영화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그려진 허크 핀과 짐(왼쪽)의 모습. 두 사람은 인종과 나이, 문화를 초월해 평등한 관계를 맺고 끝없이 이어지는 강상 여행의 자유를 만끽한다. / 사진·중앙포토
이 소설이 단순한 모험담이 아닌 유목적 여정이 되는 지점도 여기다. 헌데, 왜 산이나 숲이 아니고 강일까? 잭슨 섬이 미시시피 강변에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의 신체적 조건상 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헉은 미성년자다. 미성년자가 낯선 곳을 떠돌면 바로 눈에 띈다. 즉각 감시 아니면 보호의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짐은 흑인이다. 주인 없이 떠도는 노예는 즉각 도망노예로 간주될 것이고, 도망노예는 당시 미국의 어느 지역에서든 곧바로 체포대상이었다. 말하자면 헉과 짐은 도무지 변장이 불가능한 신체인 것이다.

그래서 강물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강물은 흘러간다. 아니, 흐르는 것이 강물이다. 헉과 짐이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다. 헌데 강물을 따라 흐르려면 뗏목이 필요하다. 뗏목은 강물 위의 텐트다. 그 위엔 작은 오두막도 있고 카누나 보트도 매달 수 있다. 말하자면 일상의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 또 탁 트인 하늘과 숲, 산과 마을이 교차하는 풍경의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그야말로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인생 또한 유동한다. 이제 강물을 따라 흘러가면서 헉과 짐 역시 끊임없이 다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유목민의 운명이다. 출발하고 얼마 안 있어 짙은 안개가 밀려들자 둘은 서로 헤어지게 된다. 헉은 카누를 타고, 짐은 뗏목에 남아 서로를 부른다. 어이, 어이 하면서. “나는 노를 집어 던졌다. 그때 어이 소리가 또 들렸다. 아직 내 뒤에서 들리고 있었지만 아까하고는 또 다른 위치였다. 그 소리는 계속 들려왔으며, 계속해서 위치가 바뀌었고 나는 계속해서 응답했다.”(435쪽) 그러다 헉은 물살에 떠밀려 왼쪽으로 시속 4∼5마일의 속도로 떠내려갔다. 고투 끝에 헉은 마침내 뗏목과 짐을 발견했다. 헉이 돌아오자 짐은 감격에 차서 외친다. “아이구머니나 이런, 너냐, 헉? 죽은 게 아니었구나! 물에 빠진 것도 아니었고! 다시 돌아온 거지?” 그런 짐에게 헉은 시치미를 뚝 뗀다. “아니, 갑자기 왜 그래, 짐? 술이라도 취한 거야?” 짐의 우둔함을 놀려먹고 싶은 악동기질이 발동한 것이다. 한참 만에 헉의 심술을 알아차린 짐은 분노하고 실망한다. “뭐가 쓰레기인고 하니, 자기 친구의 머리에다가 흙을 끼얹어서 친구를 창피하게 만드는 놈들이 쓰레기란 말이야.” 그제서야 헉은 정신이 번쩍! 든다. 자신이 한 짓이 얼마나 비열하고 더러운 짓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즉시 헉은 ‘깜둥이’ 짐에게 몸을 낮추었다. 진심으로 사죄를 표한 것이다.(443쪽)

이 대목은 이 소설의 터닝포인트다. 헉은 드디어 흑인노예 짐을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서곡에 불과하다. 짐은 노예고 누군가의 재산이다. 그의 자유를 도와준다는 건 누군가의 재산을 빼돌린 죄, 쉽게 말해 ‘절도죄’에 해당한다. 헉 같은 ‘반문명인’도 이런 통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정도로 당시 백인들에게 흑인노예제는 ‘신성불가침의 진리’였다. 그러니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재산’이라는 이 폭력적 ‘진리’야말로 헉이 넘어서야 할 최후의, 최고의 문턱인 셈이다. 헉은 과연 이 문턱을 넘어설 수 있을까?

우리를 지배하는 적대적 이분법


▎마크 트웨인 소설의 고향 미시시피강. 2012년 극심한 가뭄으로 미시시피주 그린빌 인근의 강 한 가운데에 모래톱이 드러났다. /사진·중앙포토
이들의 첫 번째 목적지는 케이로였다. 거기에 도착하면 노예제가 폐지된 ‘자유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헛된 꿈이었다. 방향을 잘못 잡았을 뿐더러 케이로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증기선이 뗏목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둘은 다시 찢어지게 된다. 짐이 늪지를 헤매는 동안, 헉은 카누를 타고 표류하다 강둑의 한 마을로 들어선다. 이런 식의 스토리라인에 담긴 저자의 의도는 명료하다. 야생과 유목의 시선으로 정착민을 조명하겠다는 것. 즉, 이 둘은 자유를 찾아 흘러간다.

헉이 우연히 찾아 들어간 집안은 그레인저포드 가문. 교양 있는 중산층이었다. 이 집안 식구들은 친절하고 우아했다. 헉 같은 뜨내기를 기꺼이 환대할 정도로. 그런데 이들에겐 피 터지게 싸우는 원수가 있었다. 바로 셰퍼드슨 가문. 가문끼리의 오랜 원한 때문이다. 이른바 ‘숙원’ 관계인 것. ‘숙원’이 뭐냐는 헉의 질문에 같은 또래의 버크는 이렇게 답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하고 싸우다가, 그 사람을 죽이는 거지. 그러면 그 죽은 사람의 동행이 ‘먼젓 사람’을 죽이는 거야. 그러면 양쪽 편에서 또 다른 형제가 나서고 해서, 하나씩 서로 죽이는 거지. 그러면 이제는 ‘사촌들’이 끼어드는 거야. 그래서 결국 모두 죽어 없어져야만, 숙원이란 것도 끝나는 거라구. 하지만 그 과정이 하도 느리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이 숙원 또한 30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소송이 벌어졌고 소송에서 진 쪽이 이긴 쪽을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럼 총은 누가 쏜 거였어?” “어휴!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아주 옛날이었는데.” “그럼 아무도 모르는 거야?” “어, 맞아. 아빠는 아실 거야. 아마, 나이 많은 어른들도 아실 거고. 하지만 그분들도 지금은 맨 처음에 도대체 무슨 일로 싸우게 되었는지는 모르실걸.”(498쪽)

맙소사! 어떻게 그런 식으로 죽고 죽이는게 가능하냐고? 하지만 이게 숙원의 속성이다. 원인도, 진실도 모른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오랫동안 묵은 감정이 중요할 뿐이다. 이 또한 정착민의 숙명이기도 하다. 소유가 증식될수록 신체와 감정 또한 무거워진다. 그래서 일단 계기가 주어지면 폭발해버린다. 이어지는 복수혈전의 퍼레이드!

더 가관인건 이들은 모두 크리스천이다. 일요일이 되면 양 가문 모두 말을 타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헌데, 예배당에서도 두 가문의 남자들은 총을 무릎 사이에 끼고 있거나 아니면 벽에 세워둔다. 그럼 이 살벌한 두 가문을 앞에 두고 하는 설교는 대체 어떤 것일까? “ 말끝마다 형제 사랑이니 뭐니, 따분한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훌륭한 설교라고 입을 모았고, 집에 가는 내내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하면서 신앙이며, 선행이며, 값없이 얻는 은혜며, 예정 운명 구원설에 대해 열심히들 이야기를 했는데…. 그날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겪은 일요일 중에서도 가장 힘든 하루인 것만 같았다.”(498쪽).

신기하게도 이런 ‘웬수진’ 가문들에선 꼭 ‘로미오와 줄리엣’이 탄생한다. 적대감은 언제나 격렬한 끌림을 내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두 가문의 ‘연인들’은 마침내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다. 그러면 핑곗김에 대충 화해할거 같은데, 그러기는커녕 사태의 원인을 상대방 탓으로 돌리면서 더더욱 증오가 불붙는다. 마을 광장에서 한바탕 시가전이 벌어지고 결국 양쪽의 남성들은 끊임없이 죽고 죽인다. 탐진치의 ‘삼위일체’를 구현한 셈이다. 이것이 마크 트웨인이 “조잡하고 형편없으며, 잔인함과 허영과 고집과 야비함과 위선으로 가득찬 물건”이라고 불렀던 ‘문명인’의 실체였다.

자명한 것을 유쾌하게 전복하다

헉은 역겨워서 토할 것만 같다. 간신히 도주하여 다시 짐과 해후한다. 뗏목도 다시 찾았다. 둘은 다시금 뗏목 위의 자유를 만끽한다. “나는 그놈의 숙원에서 떠나올 수 있어서 너무나도 기뻤고, 짐은 그놈의 늪지에서 떠나올 수 있어서 마찬가지로 기뻐했다. 우리는 결국 세상에 이 뗏목처럼 아늑한 곳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뗏목 예찬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된다. “여러분도 뗏목에 한 번 올라보시면 알 것이다. 그곳이 얼마나 자유롭고 느긋하며 편안한 장소인지 말이다.”(509쪽)

이런 식으로 이 작품은 유목과 정착을 교차시킨다. 강물은 모든 것을 비춘다. 그것은 투명하고 매끄럽다. 헉과 짐 또한 그렇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무식하고, 기겁할 만큼 순진하다. 그들의 사유와 언어는 강물만큼이나 ‘날 것 그대로’다. 마크 트웨인의 트레이드마크인 유머와 풍자의 원천 역시 여기다.

대표적인 예가 ‘솔로몬 대왕’ 장면이다. 짐이 묻는다. “왕이 되면 돈을 얼마나 받는 거야?” “무슨 , 왕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한 달에 천 달러라도 가질 수가 있는 거야.” “와, 그거 좋겠네? 그럼 그 사람들은 그걸 갖고 뭘 하는데, 헉?” “왕이 하긴 뭘 해! 왕은 그냥 앉아 있기만 하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그런 거야. 심심하다 싶으면 으회(의회)랑 입씨름도 하고. 그리고 모두가 자기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모가지를 댕강 날려버리는 거지. 하지만 왕은 대부분 하렘에서 죽치고 살지.” “하렘이 뭔데?” “왕이 자기 마누라를 두는 데야. 솔로몬도 그런 걸 하나 뒀을 거야. 그 양반은 마누라가 백만 명이나 된다고 하거든.”(424쪽)

이것은 일종의 니체식 계보학이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유쾌한 전복을 동반 하는! 전국 순회 낭독회 때 최고의 인기를 누린 대목이기도 하다. 이런 식의 대화는 작품 전체에 걸쳐 쉬지 않고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뗏목 위의 노마드’, ‘강물 위의 철학자’인 셈이다. 그들이 토해내는 언어 속에는 문명과 문화 이전의 카오스, 다시 말해 ‘야생과 탈주의 연대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 책을 ‘미시시피강의 오디세이아’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멋진 삽화를 하나 소개한다. 1982년 중남미문학의 거장 보르헤스는 워싱턴 대학에 초청을 받았다. 그때 그가 내건 요구조건은 마크 트웨인의 고향인 해니벌에 잠시 들를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당시 거의 시력을 잃어가던 그는 박물관의 학예사에게 강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미시시피강이야말로 마크 트웨인이 지닌 힘의 원천입니다.” “그 강을 한 번 만져보고 싶군요.” 그래서 이들은 강변으로 나갔고, 보르헤스는 그곳의 조약돌 위에 웅크리고 앉아 흐르는 강물에 자기 손가락을 담갔다. 그리고 말했다. “자, 이제 여행은 끝났습니다.”(207쪽)

물론 우리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헉과 짐은 미시시피 강을 따라 계속 흘러갈 것이다. 유속이 빨라질수록, 파도가 높아질수록 그들이 마주칠 사건들도 한층 격렬해질 것이다. 동시에 자유와 연대를 향한 그들의 갈망 또한 깊어질 것이다. 그럼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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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호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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