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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보고 | 홍콩 ‘우산혁명’ 현장을 가다 - 중국의 자본·체제 공습에 우산을 펼쳐 맞서다 

경제력 역전되자 본토에 예속 위기감 고조… 무력진압 가능성 적지만 지배력 강화 기조 계속될 듯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특파원

홍콩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우산을 펼친 시위대의 행렬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우산혁명’으로 불리는 홍콩 민주화 시위는 정부 수반인 행정장관 직접선거를 앞두고 중국이 입후보를 제한하는 것에 반발해서 시작됐다.
중국 신문의 일기예보란에 반드시 등장하는 정보가 있다. 이른바 승기(昇旗)시각과 강기(降旗)시각, 다시 말해 베이징 천안문광장의 국기게양대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五星紅旗)가 올라가고 내려오는 시각을 말한다. 인민해방군 의장대 병사들이 특유의 절도있는 동작으로 오성홍기를 게양하거나 내리는 장면을 보려는 관광객들은 승기 시각이나 강기 시각에 맞춰 천안문광장에 모여든다. 지난 10월 1일에는 동이 트기 전부터 수만 명의 인파가 천안문광장에 모였다. 국기게양식이야 매일 있는 일인데도 이날 유독 많은 인파가 모인 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기념일이기 때문이었다.

같은 날 오전 8시 홍콩의 진쯔징(金紫荊) 광장에서도 국기 게양식이 거행됐다. 1997년 7월 1일, 150년 가까이 홍콩을 통치했던 영국 국기를 내리고 홍콩의 주권을 되찾은 중국 국기를 게양하는 기념식이 거행됐던 바로 그 자리였다. 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오성홍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자 량전잉(梁振 英) 행정 장관을 비롯한 홍콩 지도층 인사들과 수백 명의 시민이 우렁찬 목소리로 중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을 따라 불렀다. 하지만 경찰이 저지선을 친 행사장 바깥에선 딴 세상이 펼쳐졌다. 일단의 학생들이 몰려와 국기게양대에 등을 돌린채 양팔로 불복종을 뜻하는 엑스(X)자를 만들고 침묵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의 손에는 홍콩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노란 리본이 묶여 있었다. 이 시위대를 이끈 학생 지도자는 지난여름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17세의 조수아 윙이었다.

‘시위’ 같지 않은 시위에 세계가 주목


중국 건국기념일인 10월 1일 홍콩 정부청사 앞 광장에서 량전잉 행정장관(가운데) 주재로 열린 기념식에는 량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국기 게양식이 끝난 뒤 실내로 장소를 옮겨 진행된 리셉션에서도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정장을 차려 입은 한 서양 신사가 노란색 우산을 펼쳐 들고 실내 행사장 곳곳을 누비고 다닌 것이다. ‘우산혁명’으로 불리는 홍콩 민주화 시위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실내에서 우산을 쓰고 돌아다니는 기발한 행동으로 취재진의 플래시 세례를 한 몸에 받은 주인공은 네덜란드 태생의 홍콩 남구 구의원 폴 짐머만이었다. 경호원들은 그가 연단의 량전잉 행정 장관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지만 초청장을 갖고 나타난 그를 행사장 밖으로 쫓아내진 못했다. 짐머만은 “경찰이 학생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한 건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며 리셉션장을 누비고 다녔다. 홍콩의 반중(反中) 시위가 중국 최대의 국경일인 건국 기념일과 시기적으로 겹치면서 빚어진 풍경들이었다.

민주 선거를 요구하며 도심을 점거한 홍콩 시위가 급속히 확산되자 많은 이가 25년 전의 천안문사건을 떠올렸다. 홍콩 언론들은 천안문광장을 가득 메운 1989년 베이징의 학생 시위와, 고층 건물 숲 사이의 간선도로를 가득 메운 2014년의 홍콩 시위 사진을 나란히 실었다. 홍콩 시위는 1989년 이후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최대규모의 집단적 시위였다. 조직화되지 않은 20대 초반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화 혹은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홍콩 시위는 천안문사건과 비슷했다.

바로 그런 유사성 때문에 많은 이가 이번 홍콩 시위의 결말도 25년 전의 천안문사건처럼 비극으로 끝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시위 초반 “인민해방군이 시위 진압을 위해 중국 본토에서 진주해올 것”이라거나 “중국 정부가 곧 발포 명령을 내릴 것”이란 소문이 퍼진 것도 25년 전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런 기억들이 겹치면서 홍콩 시위의 향방은 전 세계가 비상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빅 이슈가 됐고 세계 언론들은 앞다퉈 홍콩에 취재진을 보내 시시각각 변해가는 시위 상황을 타전했다. 베이징 특파원인 필자도 홍콩으로 급파돼 시위 사흘째인 9월 30일부터 소강 상태로 접어들기 시작한 10월 7일까지 ‘우산혁명’의 현장을 취재했다.

현장에서 본 홍콩 시위는 필자의 머릿속에 있던 시위에 대한 상식과 많이 달랐다. 단 하루도 시위 없는 날이 없었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극한 대립의 노사분규에서부터 광화문광장의 촛불시위까지 각종 시위 현장을 취재한 필자의 눈에 비친 홍콩 학생들의 모습은 전혀 시위대답지 않았다.

학생들은 간선도로를 차단하고 바리케이드를 친 채 말 그대로 ‘도심을 점거(Occupy Central)’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한국 시위에서 보듯 대형 확성기를 틀어 놓고 주도자의 선창에 따라 쉴새 없이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공공건물에 난입하거나 경찰 저지선을 뚫기 위해 각종 도구를 동원해 몸싸움을 벌이는 등의 과격 행동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간혹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우산을 펼쳐 드는 퍼포먼스를 하긴 했지만, 대부분 도로에 죽치고 앉아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거나 휴대폰 조작에 몰입하는 식으로 각자의 행동에 열중할 뿐이었다. 대로 위에 앉아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따금 누군가가 마이크가 설치된 연단 위에 올라가 연설을 하거나, 시위 지도부가 향후의 행동 계획이나 주의 사항을 알려주지만 않는다면 시위장에 와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홍콩의 ‘점거 시위’는 그렇게 평온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무장 진압을 한다는 건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시위장에서 만난 학생들의 절대다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시위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우산을 펼쳐 든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시위는 홍콩 정부 수반인 행정 장관 선거 방식을 둘러싼 논란에서 촉발됐다. 그동안 홍콩의 행정 장관은 1200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간접선거로 선출되어왔지만, 주권반환 20년째인 2017년부터는 직접 선거로 뽑게 된다. 이는 1997년 영국으로부터 주권을 반환받은 중국이 공표했던 사항인 동시에 홍콩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홍콩기본법에 명기된 내용이다. 이를 앞두고 중국의 국회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는 8월 30일 행정 장관 선거 시행 방안을 확정 발표했다. 전인대는 18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하는 1인 1표의 ‘보통선거’가 처음으로 시행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홍콩에선 즉시 반발이 일어났다. 진정한 민주선거와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에서였다.

전인대가 확정한 방안에 따르면 입후보자는 1200명으로 구성된 지명위원회에서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는 2∼3명으로 제한된다. 홍콩인들은 이 점을 문제삼고 나섰다. 중국 당국의 입맛에 맞는 사람에게만 입후보가 허용되고, 민주· 개혁 성향의 인사에게는 출마 자체가 원천 봉쇄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은 행정 장관 입후보자가 ‘애국애항’(愛國愛港·중국과 홍콩을 사랑한다는 뜻) 인사여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해왔다. 이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되는 건 ‘애국’이다. 입후보자가 반드시 공산당원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공산당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은 출마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비서장 리페이(李飛)는 “행정 장관은 공산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이 발표는 20년만의 민주 선거를 기대해 온 다수 주민을 실망시켰다. 홍콩 일간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주민 1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53.7%가 ‘전인대의 결정을 거부해야 한다’고 밝혀 ‘찬성한다’ 는 의견(29.3%)을 크게 앞질렀다. 이런 여론을 업고 홍콩의 24개 대학생들은 ‘우리는 진정한 보통선거를 원한다(我們要 眞普選)’는 구호를 내걸며 9월 22일부터 1주일간 동맹휴업에 돌입했다. 이 동맹휴업이 대규모 도심 점거시위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됐다.

‘1국 2체제’ 지키기 위한 저항


지난 2012년 7월 의무교육 과정에 국민교육을 포함하려는 조치에 반발한 시위대가 홍콩 시내를 가득 메웠다.
행정 장관 선거를 둘러싼 대립의 이면에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일국양제’(一國兩制)의 본질, 나아가 홍콩의 정체성과 관련된 근본적인 물음이 그것이다. 홍콩은 공산당이 통치하는 사회주의 국가 안에서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일국양제의 무대다. 지구상에서 마카오와 함께 딱 두 곳밖에 없는 곳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은 1984년에 “향후 50 년간 홍콩의 자본주의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주권 반환에 주저하던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를 설득할 수 있었다. 홍콩인 부유층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1997년 반환을 앞두고 한때 ‘안전한’ 서구 사회로 이민을 갔다. 상당수는 반환 이후 다시 홍콩으로 돌아왔다. 반환 전이나 후나, 홍콩인들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보장된 일국양제 덕분이었다.

홍콩은 외교와 국방 분야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고도의 자치를 보장받았다. 중국이면서 중국이 아닌 홍콩의 지금 모습은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장쩌민(江澤民) 이래 역대 중국 지도부가 홍콩과 중국의 동질화보다는 홍콩의 안정과 지속적인 번영에 무게를 둔 덕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홍콩을 직접 통제하려는 중국 정부의 입김이 세지기 시작했다. 2012년 7월의 국민교육 파문이 대표적이다. 당시 의무교육 과정에 ‘도덕 및 국민교육’ 과목을 신설하려 하자 중·고교 학생들이 국민교육은 중국 정부의 ‘세뇌교육’이나 다름없다고 반발하며 철회를 요구했다. 그때의 주도자가 이번 우산혁명 주도세력 가운데 하나인 학민사조(學民思潮)의 대표 조슈아 웡이다. 중국 국기에 등을 돌리고 침묵 시위를 벌였던 바로 그다.

시진핑(習近平) 체제에 들어와서는 홍콩을 통제하려는 움직임이 더욱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6월 10일 중국 국무원이 발표한 <홍콩특별행정구의 일국양제 실천>이란 제목의 백서에 시진핑 정부의 입장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중국이 사상 처음 펴낸 홍콩 백서에는 일국양제에 대한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일국양제의 ‘양제’와 ‘일국’을 동등한 가치로 여겨서는 안 된다. ‘양제’는 ‘일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략)홍콩의 관할권은 전면적으로 중앙정부가 보유한다. ‘고도의 자치권’은 중앙정부가 부여하는 만큼만 누릴 수 있으며 그 이상의 권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태까지는 ‘일국양제’를 거론할 때 ‘일국’보다 ‘양제’에 무게를 두는 게 일반적인 관점이었는데 백서에서 이를 뒤집은 것이다. 백서는 또 “홍콩에 장기적으로 누적되어온 모순이 드러나고 있다”며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에는 한계와 기준이 따른다”고 적시했다. 이는 “홍콩도 중국의 한 부분일 뿐”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홍콩에 대한 특별 대우가 점점 사라질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도 읽히는 부분이다.

반면 시위에 가담한 시민·학생들은 “홍콩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왜 중국식 방식을 강요하느냐”고 반발하고 있다. 결국 “홍콩도 중국의 일부”라며 고삐를 죄는 베이징 당국과 “홍콩은 중국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시민·학생들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간격이 이번 시위의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이다.

경제력 역전되자 ‘예속심화’ 위기감


1997년 7월 1일 홍콩 컨벤션센터 앞 진쯔징 광장에서 거행된 홍콩 주권반환식에서 중국의 오성홍기를 게양하고 있다.
1997년 반환 이후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진행되어 온 홍콩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위기의식이 홍콩 주민들 사이에 퍼져있는 것도 이번 시위 확산의 배경 중 하나다. 홍콩의 위상은 날로 쪼그라들고 있다. 반환 직전인 1996년 홍콩의 역내총생산(GDP)는 중국 전체 GDP의 18.7%에 해당했다. 하지만 지난해 홍콩 GDP는 중국의 2.96%에 지나지 않았다.


1989년에 일어난 중국 천안문사태 때 시위대가 덩샤오핑의 대형 초상화가 걸린 천안문광장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모방한 대형 조형물을 들고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다.
중국에 홍콩이란 존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홍콩은 이제 더 이상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아니다. 홍콩의 GDP는 2009년 상하이(上海)에 추월당했고, 광저우(廣州)에도 역전당할 처지에 놓였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함께 홍콩 달러와 위안화의 가치는 이미 역전된 지 오래다. 조셉 청 홍콩시립대(정치학) 교수는 “과거 홍콩은 중국 본토와는 다른 ‘특별한 곳’이었는데, 이젠 ‘그저 그런 곳’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홍콩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고 설명했다.

날로 가속화하는 본토인들의 유입 현상에 대한 위기감도 만만치 않다. 돈 많은 본토인이 밀려들면서 홍콩인들은 자신이 밀려나고 있다고 느낀다는 얘기다. 이는 지표로도 확인된다. 중국 부유층이 홍콩의 부동산에 대거 투자하면서 집값이 치솟고 이는 전반적인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국제 부동산업체 새빌스(Savills)의 보고서에 따르면 홍콩의 주택가격은 기록적인 저금리와 급속한 경제 성장, 중국인 구매자들의 수요 급증에 힘입어 2008년 이후 지난해까지 두 배로 뛰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1997년엔 물가 상승률이 연 0.5% 수준이었지만 요즘은 3.4% 수준이다.

계층 간 격차도 날로 심화되고 있다. 홍콩의 지니계수는 2006년 0.533에서 2011년에는 0.537로 높아졌다. 지니계수는 0.5에 이르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수준’으로 간주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홍콩이 거대한 블랙홀과 같은 중국 경제에 빨려 들어가 독자성을 상실하게 되리란 전망도 나온다.

이런 요인들을 감안해보면, 이번 홍콩 시위는 1997년 반환 이후 홍콩 사회에 서서히 누적되어온 문제점과 불만들이 선거제도 논란을 계기로 분출되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이번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계속 불씨로 남게 되리란 얘기다.

중국 당국이 시위대의 요구대로 전인대의 선거방안을 철회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홍콩 학생들이 바라는 완전한 보통선거의 실현은 중국 정부의 입장에선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서구식 자유선거가 허용되면 국가분열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분리독립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티베트·신장은 물론,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여타 소수민족 자치지역에서까지 “우리도 홍콩처럼 지도자를 우리 손으로 뽑겠다”고 요구하고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이 9월 하순 둥젠화(董建華) 초대 행정 장관과 아시아 최고 부자인 리카싱(李嘉誠) 청쿵(長江)그룹 회장 등 홍콩 지도층 인사 40명을 만난 자리에서 “중앙 정부의 홍콩에 대한 기본방침과 정책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고 못박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시위 끝나도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중국 당국에 최악의 시나리오는 홍콩 시위의 불똥이 중국 본토로 튀어 정치개혁 요구가 일어나는 것이다. 중국 당국은 홍콩 시위 소식이 본토로 전파되지 않도록 언론과 SNS 검열을 강화했다. 홍콩대 푸킹와 교수는 “포스팅 1만 건당 98건의 비율로 삭제되고 있는데 이는 지난 6월 천안문사건 25주년 때보다 더 많다”고 분석했다. 중국 국영 CCTV는 연일 “홍콩에서 일부 인사가 불법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외부 세력과 결탁되어 사적인 목적을 채우려 한다”며 “중화민족의 단결을 해치는 이런 행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란 요지의 비난 기사를 내보냈다.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가 홍콩 시위 비난에 할애하는 기사의 분량은 2012년 희대의 정치 스캔들인 전 충칭 당서기 보시라이(薄熙來) 사건 때보다도 더 많다. 하지만 이런 소식을 전하면서도 시위 현장의 사진이나 동영상은 일체 보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국 당국은 홍콩 시위가 조기에 끝나지 않고 장기화할 경우 어떻게 대응할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혹시 천안문사태 때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는 않을까 많은 이가 우려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우려가 아니다. “1997년 이후에도 홍콩 사람들의 공산당 비판을 허용할 것이지만 그러한 말이 행동으로 옮겨져 민주를 핑계로 대륙에 저항한다면 베이징은 간섭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소요가 발생할 경우에만 군대를 동원할 것”이라고 말한 이는 다름아닌 덩샤오핑이었다. 1987년 홍콩기본 법 기초위원회에서 한 연설의 일부다. 지금 상황을 예견이나 한 것처럼 들리는 이 발언은 아직도 유효한 내용임에 틀림없다. 덩샤오핑이 이 말을 한 2년 뒤, 중국 당국은 실제로 군대를 동원했다. 다만 장소가 홍콩이 아닌 베이징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홍콩의 시위 상황이 덩샤오핑이 말한 ‘심각한 소요’에 이른 건 아니다. 홍콩 주민의 생활에 불편을 주고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극심한 혼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위 초기 홍콩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강제 진압에 나섰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냈기 때문에 강제해산 작전을 펼치는 데에는 여전히 신중한 편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베이징 당국은 여태까지 직접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럴만한 사정도 있다. 당장은 11월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베이징에서 열리기로 돼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홍콩 시위를 언급할 정도로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강경 진압에 나섰다가 자칫 불상사라도 일어나면, 중국 정부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더구나 시위 장소는 중국 본토가 아니라 고도의 자치가 보장된 홍콩이다. 중국은 25년 전 천안문사태의 비극적 결말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중국 당국으로선 시위가 제풀에 꺾이는 게 최선의 시나리오다. 그럴 조짐도 보이고 있다.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홍콩 내부에서 반대 여론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친중단체에 의해 조직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학생 시위나 집회를 방해하는 움직임도 있지만, 실제로 생업에 타격을 받은 상인들도 시위대에 거센 반감을 나타내고 있다. 대학 총장단이나 종교 지도자들도 충분하게 학생들의 요구사항이 전달된 만큼 이젠 학교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시위 인파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런 식으로 시위의 동력이 줄어들어 끝내는 소멸하는 걸 중국 당국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시위가 사라졌다고 해서 홍콩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적절한 계기를 만나면 다시 분출될 수밖에 없는 불씨가 잠복해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주권반환, 혹은 중국회귀 17년이 지난 2014년 홍콩의 모습이다.

201411호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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