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① 미국 뉴욕 | 자유인의 우정, 경계인의 도시 - “마음을 여는 순간, 세계인과 통한다” 

어떤 생각도 없이 뉴욕에 갈 것. 뉴욕의 길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느끼고 변할 것.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뉴욕을 최대한 즐기고 있는 ‘뉴요커’다. 

글·사진 김해완 재미 유학생
신년호부터 전 세계 메갈로시티 시민의 살아가는 법, 그들의 행복 추구법을 탐구한다. 거대 도시에 퍼져 코스모폴리탄의 삶을 추구하는 한국인들의 현장통신이다. 뉴욕, 모던이라고 불리기엔 이제는 늙어버린 도시. 그럼에도 이 도시는 세계인이 들끓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한 젊은 유학생의 눈에 날카롭게 포착된 뉴욕, 뉴욕인. 뉴욕의 어떤 특별함이 ‘뉴요커’를 탄생시켰는가?<편집자>

▎맨해튼의 중심 매디슨 에비뉴에서 거리공연을 벌이는 이름 모를 재즈 밴드. 거리공연에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가 없다.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악기를 들고 나와 거리에 서도 이상할 게 없는 곳, 여기가 뉴욕이다.
나는 뉴욕에 거주한 지 1년째인 20대 유학생이다. 현재 뉴욕시립대학교 산하의 헌터 칼리지(Hunter College)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고, 몇 년간 이 도시에서 학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일단 서류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내가 친구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이곳에 닿기까지 여러 인연이 모였다는 것이다.

2009년 가을,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수유너머 남산(현 남산강학원)에서 인문학 공부와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 고미숙 선생님(감이당)은 일명 ‘이타카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계셨다. 세계의 수도 뉴욕에 연구실 지부를 만들겠다는 것. 대학도 직업도 없는, 앞길 창창한(^^) 백수인 내가 이 프로젝트의 첫 타자로 발탁되었다. 또 해외로 뻗어나가는 움직임이 이타카 프로젝트 말고도 여러 개가 생기면서 이 네트워크의 집합체인 ‘무빙비전탐구(MVQ)’가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2014년 1월, 나는 이타카 프로젝트의 첫 시작이자 MVQ 베이스캠프가 될 ‘뉴욕지부’에 깃발을 꽂으러 비행기에 올라탔다. 여기 뉴욕 친구들에게는 종종 연구실 뉴욕지부의 가정부(housekeeper)가 되기 위해서 뉴욕에 왔다고 농담을 한다. 남들이 학생비자로 위장 취업을 한다면 나는 위장유학 중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희한했다. 위장 취업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는 이 공간에 발을 딛자마자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함을 느꼈다. 이 편안함은 익숙함과는 달랐다. 뉴욕은 분명 낯선 도시였다. 그러나 이 낯섦 속에서도 나는 내 존재가 이방인이라기보다는 이미 평범한 뉴욕 사람 중 한 명이 된 기분이었다. 한국에서는 그 반대였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내가 자퇴를 했고 대학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항상 불편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 느낌, 도대체 뭘까? 그때 이곳에 산 지 30년째 된 한 베테랑 뉴요커가 내게 한마디 던졌다. 이상할 것 없다고. 이곳은 경계인의 도시라고. 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2014년 한 해가 걸렸다.

이게 진짜 뉴욕인가


▎뉴욕 지하철 역에서는 언제나 음악 공연을 볼 수 있다. 큰 악기가 필요 없는 아티스트들은 때때로 한산한 틈을 타 지하철 안에서 직접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한 손에는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주말에는 브로드웨이에서 문화생활을 즐기며, 자기만의 패션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길거리를 당당하게 활보하는 사람들.

이것이 한국을 뜨기 전 내 마음속의 ‘뉴요커’였다. 나에게 뉴욕이란 모던의 최첨단에 선 도시였고, 이 세계의 수도에 사는 뉴요커들은 이 모던함을 즐기는 사람들인 줄 알았다. 사실, 뉴욕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내가 이런 망상을 품고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뉴욕 땅에 첫발을 딛자마자 나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눈앞에 펼쳐진 실제 뉴욕은 서울보다 더 낡은 건물들, 눈으로 질퍽한 거리,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고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게 진정 드라마 <섹스 인 더 시티>의 그 화려한 뉴욕이 맞는 걸까? 그 근사한 ‘뉴요커’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지난 4월, 뉴욕의 베개싸움 축제 때 찍은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이상한 축제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곳이 정말 ‘뉴욕’이라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내 환상이 깨진 첫 순간은 지하철을 타면서부터였다. 뉴욕 지하철은 시설이 낙후되었기로 유명하다. 생각해보면 100년 전 뉴욕 지하철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 한국에서는 경의선이 막 출발하고 있었으니, 이 시설이 낡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제는 뉴요커들이 이 낡은 시스템을 뜯어고칠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 이 방임주의를 틈타 수천 마리의 쥐들이 지하철 노선에 살림집을 차렸다. 지하철 바깥은 또 어떨까? 맨해튼의 길거리는 폭이 좁고 차들도 천천히 일방통행을 하기 때문에 보행자들이 도시를 활보하기에 딱 좋다. 하지만 이 산보의 즐거움도 날씨에 따라 좌우된다. 이 오래된 도시에는 길거리에 하수구와 연결된 구멍이 거의 없기 때문에, 눈이 오면 오는 대로 쌓이고 눈이 녹으면 녹는 대로 웅덩이가 생긴다. 장마철은 말할 것도 없다.

뉴욕의 실내도 충격적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근사한 건물 외양에 속으면 안 된다. 그 내부로 들어가면 환풍이 안 되어서 음식 냄새가 하루 종일 안 빠지는 집, 겨울에는 얼음장처럼 추운 집, 좁은 복도에 방이 칸칸이 들어선 감옥 같은 고시원, 레스토랑을 밑에 끼고 쥐와 바퀴벌레가 활보하는 집들이 튀어나온다. 이 예측할 수 없는 건물들 역시 맨해튼의 100년이라는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2014년 3월에는 할렘 구역에서 가스 누출 폭발로 건물 두 채가 무너졌는데, 순전히 파이프가 낡아서 벌어진 참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이 강렬했던 첫인상이 뉴욕의 전반적인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욕스타일은 구식이었다(^^). 놀라운 것은, 뉴욕 사람들이 이 낡은 풍경 속에서 위화감 없이 섞여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이 허름한 시설 속에서도 전혀 불편하지 않아 보였다. 내 머릿속의 모던걸·모던보이 ‘뉴요커’는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물론 이런 내 스케치가 뉴욕의 전부라고 믿지는 말자. 블리커가 주변의 오래된 재즈 바, 타임스스퀘어를 끼고 있는 브로드웨이 극장들, 센트럴파크 근처의 분위기 좋은 카페로 이 글의 물꼬를 텄다면 뉴욕도 훨씬 더 매력적으로 묘사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곳들이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및 드라마의 주된 촬영 장소다. 재즈, 커피, 패션, 로맨스야말로 뉴욕의 대표적 드라마니까 말이다. 하지만 뉴욕의 밑바닥 일상에는 이 낡은 건물, 질척한 길거리, 쥐가 다니는 지하철이 있다. 뉴욕에서 삼시세끼 챙겨 먹고 출퇴근을 하는 동안은 늘 부딪힐 수밖에 없는 공간들이다. 뉴욕처럼 화려한 드라마에 일상이 가려진 도시도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려는 것도 바로 이 일상을 통해서 뉴욕의 일부가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뉴욕, 모던이라고 불리기엔 이제는 늙어버린 도시. 그럼에도 이 도시는 여전히 코스모폴리스의 선두를 이끌고 있고, 세계인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아마도 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왜 드라마 속에 나오는 ‘뉴요커’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가가 아니라, 왜 아직도 많은 사람이 뉴요커가 되기 위해 이곳을 찾으며 또 뉴욕 사람들의 어떤 특별함이 뉴요커라는 이름을 탄생시켰는지로.

뉴욕의 맨 얼굴에 직면하다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늦여름의 햇살을 마지막으로 만끽하는 사람들. 센트럴파크는 마천루의 정글을 그래도 숨쉴 만한 곳으로 만들어주는 뉴욕 모든 사람의 보물이다.
이 늙은 뉴욕을 젊게 유지시키는 힘은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사람이 사람을 끌어모은다. 이것이 내가 뉴욕에서 얻은 첫 번째 배움이다.

뉴욕에 대한 내 멋대로의 고정관념이 일단 깨지고나자, 그제야 뉴욕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뉴욕의 풍경은 세계의 축소판을 보는 듯했다. 이전까지 ‘수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쓸 때 내가 찍은 강조점은 그 숫자가 많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사람이 얼마나 천차만별일 수 있는지 나는 이곳 뉴욕에서 매일 새롭게 목격하고 있다. 한 번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인종차별적 질문을 던졌다가 뒤늦게 후회한 적이 있었다. 싸움구경 이야기를 듣다가 “그 사람들 흑인이었어, 백인이었어?”라고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인종차별적이기 이전에 지극히 관념적이다. 뉴욕 사람들의 실제 피부 색깔은 흑백논리로 환산되기엔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지하철역에서 누가 싸웠느냐고? 그들은 히스패닉일지도 모른다. 동아시아인 혹은 인도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미국에서 태어나 중국말을 모르는 중국인, 히스패닉과 백인의 혼혈, 아니면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홈리스들일지도 모른다.

뉴요커들. 그들은 기본적으로 이미 길을 떠난 사람들이다. 미국의 역사가 다 그렇듯이 이 도시에 원래부터 ‘뉴요커’였던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맨해튼 자락에서 몇 천 년을 살아온 원주민들은 이미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밀려났고, 이 빈자리를 세계 각지의 이민자가 채웠다. 미국에서 태어나 현재 시민권을 가진 뉴욕 사람들도 그들의 윗세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그 출발은 이민자였고 비미국인이었다. 특히, 뉴욕은 예부터 이 이민의 물결이 가장 치열하게 들이닥친 장소 중 하나였다.

<뉴욕 열전>을 쓴 이와사부로 코소는 뉴욕이 역사적으로 “항상 세계 도처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입구이자 세계로 나가는 출구”였다고 말한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부모님 세대의 이주를 기억하는 미국인들, 터를 잡고 사는 이민자, 젊은 유학생, 귀향을 꿈꾸는 노동자, 끝없는 관광객과 불법체류자들의 행렬까지. 이 사람 모두가 뉴욕에서 일상을 보내는 자들이다. 굳이 뉴욕의 정체성을 표현하자면 거대한 이국인(異國人) 마을쯤 되지 않을까.

세상에 이런 곳이 또 있을까? 뉴욕이 끊임없이 그 숱한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까닭도, 이런 곳에서라면 뭐라도 벌어질 것 같다는 기대감 때문 아닐까?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은 뉴욕에 매력을 느껴 이곳을 찾지만 정작 뉴욕의 최고 매력은 뉴욕 사람의 다양성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뉴욕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 ‘더 나은 삶’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 욕망은 하나로 수렴되기는커녕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게 뻗어나가 뉴욕 안에서 꿈틀거린다.

지난 1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나는 한국에 머물렀더라면 마주칠 수 없었을 기상천외한 사람을 여럿 만났다. 사실, 이들은 특별할 것 없는 사람이다. 다만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 나의 일상과 너무 다르고, 그들이 걸어가는 길이 내가 그전까지는 한번도 상상하지 못한 길일 뿐이다.

내가 학교에서 만난 한 러시아 부부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3년 전 홀연 뉴욕으로 왔다. 바텐더와 미용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남자의 꿈은 뮤지션이다. 여자는 아직 자기 길을 모르겠다고, 하지만 이곳 뉴욕에서 찾아보겠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이 둘은 여기서 대학에 재입학해 공부를 멈추지 않을 계획이다. 알 수 없는 미래에 조바심을 내지 않으면서도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이 부부의 배짱이 멋지다.

마천루가 아니라 사람이 움직이는 도시


▎브라이언 파크에는 수많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서 누구든 지나가던 길에 편하게 쉬었다 갈 수 있다. 특히 낮에는 도시락을 먹거나 커피 한잔 하면서 점심시간을 보내려는 직장인들로 붐빈다.
또, 내 친구의 친구는 거북이를 너무나 사랑하는 한 뉴요커다. 그녀의 집에는 30마리가 넘는 거북이가 사는데, 나도 그 탱크를 씻는 일을 몇 번 도와주었다. 그녀는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의 품성은 나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꿈꾸는 세상은 동물이 다치지 않는 세상이다. 그녀의 집은 동물애호가의 사랑방 역할을 한다. 사회운동을 하던 중 불교에 귀의한 미국인 주지스님도 만났다. 한국의 스님보다 더 캐주얼했고, 특히 유머감각이 돋보였다. 한 번은 함께 요가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어려운 동작이 나오자 “오 지저스(Oh, Jesus)…”라는 신음소리를 내셔서 본의 아니게 내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부모 세대와 달리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대 중에서는 부모의 나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내 동갑내기 친구가 그렇다. 그녀의 사정을 모두 듣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보고 있으면 역시 이민 2세대인 뮤지컬 <워싱턴 하이츠>의 주인공의 노래가사가 생각난다. “어렸을 때는 뉴욕 지하철 노선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알았다. 가끔씩 내가 맨해튼을 보지 않았다면, 내 나라에서 내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대학 교육을 받은 제3세계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를 떠나 뉴욕의 택시 운전사가 되는데, 그것이 행복한 삶이냐고. 미국은 대학 졸업자들도 택시를 굴리는 나라라고. 이처럼, 행복한 삶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꿈이었던 것이 다른 이에게는 족쇄가 된다.

뉴욕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말 그대로 ‘섞여’ 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는 않는다. 누구는 꿈을 이루고 누구는 실패한다. 뜻이 안 맞아서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에너지가 곧 뉴욕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뉴욕은 다종다양한 인류전시관이 아니라, 다종다양한 힘이 실제로 부딪치는 공간인 것이다. 이 대도시를 지탱하는 것은 거대한 마천루가 아니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삶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경계가 있다. 인종의 경계, 성별의 경계, 학벌의 경계, 국경의 경계 등등. 뉴욕은 이런 경계에서 어쩌다 벗어난 사람, 또 경계에 구애받고 싶지 않는 사람이 흘러 들어오는 도시다. 나와 극적으로 다른 사람 덕분에 나도 모르게 갇혀 있는 경계가 문득 드러나기도 한다. 흑백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종, 남녀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 성별, 국경을 가로지르는 저녁 메뉴, 문화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연애까지!

이런 환경에서는 어떤 특이한 사람이라도 섞이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뉴욕에서 맨 처음 느꼈던 희한한 편안함의 정체는 바로 이것일 터이다. 지난 8월에 며칠 동안 뉴욕을 방문하신 연구실 선생님들마저도 오자마자 적응을 너무 잘 하셨다(^^). 다르다는 게 문제가 되기는커녕 다르지 않은 게 더 이상한 공간, 다양한 사람이 분투하고 사랑하고 애쓰면서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공간, 뉴욕.

뉴욕이 유독 허름해보이는 이유도 다양한 사람이 항상 섞여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정 공간이 깔끔하려면 관리가 철저히 되어야 한다. 하지만 관리가 촘촘 할수록 그 공간의 이용자 역시 한정되게 되어 있다. 서울의 지하철이 뉴욕보다 더 깨끗할지 몰라도 뉴욕처럼 홈리스 싱어가 활동하는 창의적인 풍경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서울 지하철에 아예 출입조차 불가능할 테니까.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가 없는 도시


▎뉴욕을 대표하는 미술관 중 하나인 MOMA. 스크린이 사방에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이 편하게 누워서 작품을 관람한다.
뉴욕 사람들이 형성한 이 독특한 환경은 뉴욕에서만 누릴 수 있는 독특한 선물을 그들에게 되돌려준다. 뉴욕 사람들의 행복을 구체적으로 꼽자면 몇 가지가 있다. 먼저, 바깥을 돌아다니는 재미다. 뉴욕의 길거리에는 사람 사이의 경계를 확 열어버리는 장소가 있다. 바로 공원이다. 공원은 뉴욕 전 구역 어디에나 있다. 59가부터 110가까지 차지하는 거대한 센트럴파크부터 미드타운에 있는 브라이언트파크, 브루클린의 명물 프로스펙트파크, 각 동네마다 흩어져 있는 아주 작은 공원까지. 뉴욕 사람은 공원을 끔찍이 사랑한다. 그들은 공원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데이트도 한다. 아마추어 연극인과 음악인이 늘 퍼포먼스를 벌이고 사시사철 축제가 벌어지는 곳도 바로 공원이다. 공원이라는 앞마당이 없었으면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이 안 될 정도다. 심지어 뉴욕의 대표적인 스케이트장도 브라이언트파크에 있다.

상황에 개의치 않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뻔뻔한 분위기도 뉴욕의 매력 중 하나다. 워낙 다양한 사람이 부대끼기 때문에, 뉴욕 사람은 남들과 다른 의견을 내비치는 데 절대로 주저하지 않는다. 뉴요커가 불평불만이 많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특히, 이 뻔뻔한 자신감은 예술계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뉴욕은 어디에서나 거리 예술가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지하철 역에는 생계형 홈리스 예술가가 노래를 하고, 유니언스퀘어에는 시장에 설자리가 없는 마이너 예술가가 그림을 그린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청소년 댄스그룹도 종종 공원이나 시청 앞 광장에 출몰한다.

중요한 점은 이런 거리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도시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견고한 경계를 확 열어버린다. 하루는 헌터 칼리지 ESL 코스의 연극반 선생님에게 연극반을 개설한 이유를 물었다. 이 코스의 본 목적은 영어를 배우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뭔가를 배우고 있는데 왜 표현할 수 없느냐”고. “예술은 브로드웨이에만 있지않다. 예술은 일상 어디에나 있다. 네가 외국어를 배우고 있다면 그것을 네 방식으로 표현할 때 그 언어가 네 것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그녀의 말이 나를 후려쳤다. 남들이 인정해줄 만한 실력이 아니라면 앞에 나서서 표현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내 안에 깔려 있었다. 뉴욕 사람에게는 바로 이런 자의식이 없다. 센트럴파크의 한 다리 밑을 지나는데, 초보는 아니었으나 프로도 아닌 실력으로 트럼펫을 연주하는 아저씨를 보았다. 그는 연주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누구도 이 사람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 주변에 앉아서, 그의 서툰 연주를 배경음악 삼아 각기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 상황은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표현하고 싶다면 주저 없이 표현하라,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 판단하는 건 다른 사람들 몫이니!

마지막으로, 뉴욕은 전 세계 친구를 한꺼번에 만나 우정을 다질 수 있는 특수한 공간이다. 뉴욕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사람 중에는 뉴욕이 다른 메가시티와 별 다를 게 없다고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뉴욕의 진가는 네트워크에 있다. 여기가 아니라면 평생 만날 수 있었을지조차 모를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 이게 뉴욕이 줄 수 있는 제일 큰 선물이다. 다른 국적의 청년들과 만나고 어울리는 것은 말 그대로 또 다른 세계를 느끼는 것과 같다.

내가 올 한 해 동안 뉴욕의 ESL 코스를 밟으면서 행복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으로만 어렴풋이 짐작했던 미지의 땅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사람을 배려하는 방식이나 삶의 어려움을 대하는 태도는 내가 익혀온 방식과 또 달랐고, 덕분에 내 배움의 과정도 더욱 풍요로워졌다. 이런 정보는 인터넷 검색으로는 결코 알 수 없다. 신체가 서로 만나서 그 차이를 직접 느낄 때에만 전달될 수 있다.

우정은 뉴욕 바깥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다른 세계를 만날 기회이고, 뉴욕에서 태어난 이민 2세대에게는 자기 문화와 차단되지 않을 기회다. 친구를 사귀는 순간, 뉴욕은 세계와 통하는 로터리가 된다.

뉴욕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뉴욕 사람은 종종 말한다. 이 도시처럼 다종다양한 시공간은 이 세계에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가끔씩 이런 의문이 든다. 다종다양한 것이 진짜 좋은 것일까? 만일 우리가 분별의 경계선을 넘어갈 수 없다면, 다종다양한 ‘경계’가 그대로 굳어지기만 한다면 오히려 이것은 더 나쁜 상황이 아닌가? 흑인은 흑인대로, 황인은 황인대로, 동성애자는 동성애자대로 모여 소통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종다양한 것이 진짜 좋은 것일까


▎필자가 뉴욕에서 만난 선생님과 20대 친구들이다. 러시아·콜롬비아· 일본·한국 등 세계 각지에서 각자의 꿈을 품고 뉴욕을 찾아왔다.
세상에 유토피아가 없듯 뉴욕도 지구촌 마을의 완벽한 모델은 아니다. 현재도 뉴욕시청 앞에서는 뉴욕법원의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큰 시위가 진행 중이다. 뉴욕법원이 천식 환자였던 흑인 에릭 가너를 과잉 진압하다가 숨지게 한 뉴욕경찰에 무죄선고를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뉴욕에서 차별의 문제는 단지 갑이 을을 괴롭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기 문화외의 다른 문화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무지, 경계심으로 대응하는 것도 일종의 공격이다. 사람들은 흑인이 공격적이라거나 중국인이 무례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인종차별주의자라는 평판을 듣기 싫기 때문이다. 그 대신 (흑인들이 모여 있는) 할렘가는 위험하다고 말하고 (라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잭슨 하이츠는 물이 안 좋다고 말한다. 이렇게 차별과 분별은 간접적이지만 공공연하게 드러난다.

내 룸메이트 중 하나는 종종 중국인과 히스패닉에 대해 이유 없는 적대감을 드러내곤 했다. 그 사람들이 끝없이 몰려오기 때문에 미국이 갈수록 살기 힘들어진다는 투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녀는 이곳 뉴욕에서 몇 년째 영주권 없이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매일 밤 슬픈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녀는 외국인으로서 자신이 겪은 피로감을 또 다른 외국인에게 전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중국인과 히스패닉을 욕할 때만은 마치 자기가 외국인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실제 생활에서 피부에 구체적으로 실감되는 ‘외국인’은 누구일까. 미국인에게 외국인은 그린카드가 없는 자이고, 다른 외국인에게 외국인은 그들이 얕잡아보는 스패니쉬와 차이니즈다. 국경을 떠나 뉴욕에 온 사람은 이곳에서 다시 경계를 긋는다.

이처럼, 이 경계인의 도시는 동전의 양면을 갖고있다. 수많은 경계를 동시에 가로지를 수 있는 교차로. 혹은, 경계를 가장 견고하게 지키는 차단로. 뉴욕에서 마음을 닫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경계 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한국인’이라는 내 정체성을 고집한다면 내 인간 관계와 활동 구역은 한인 타운인 플러싱으로 제한될 것이다. 내가 하루 종일 마주치게 될 다른 인종의 사람에게는 거부감만 들 것이다. 결국,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이 뉴욕에서 모든 것이 벌어질 수도,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빛나는 우정의 순간을 맛보다


▎뉴욕의 벼룩시장. 오래된 물건뿐만 아니라 이미 편지가 쓰여진 엽서까지도 팔고 있었다. 첨단 모던 도시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뉴욕은 의외로 중고매장이나 벼룩시장이 활발하다.
이 뉴욕행은 나에게 절호의 찬스였다. 학교를 자퇴해 삐딱선(?)을 시작한 이후, 10대에 내가 가졌던 목표는 물적·심적 독립이었다. 이 마음이 20대가 되어서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또 만나서 변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렇게 뉴욕에 왔다. 올 한 해는 참 숨가쁘게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과의 우정으로 빛났던 시간이었다.

특히, 이 중에서 잊지 못할 친구가 한 명 있다. 1년동안 그녀와 함께 어울린 횟수는 고작 열 번이 안 된다. 개인적인 대화를 깊이 나눠본 것도 세 번이 전부다. 하지만 그녀와의 대화는 언제나 강렬했다. 우리는 사적인 고민부터 세상에 대한 어설픈 질문까지 두루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툰 영어 속의 내 진심이 그 친구에게 가 닿았다는 것을 느꼈을 때의 감동은 마치 사랑에 빠지는 것 같았다(^^). 얼마 전 그 친구가 콜롬비아로 돌아갔다. 우정은 만나는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강도의 문제라는 것을 이제야 실감한다. 지금껏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왔고 뉴욕에서는 채 10개월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이런 인연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이 행운을 시험해보기에 뉴욕은 최적의 장소다.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색다른 우정을 실험할 수 있다. 세계의 수도? 이 거창한 수식어에 기눌릴 필요는 없다. 내가 가는 길이 곧 뉴욕이라는 배짱을 가졌다면, 뉴욕은 누구에게든 편안하게 갈 길을 열어줄 것이다. 어떤 생각도 없이 뉴욕에 갈 것.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느끼고 변할 것.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뉴욕을 최대한 즐기고 있는 ‘뉴요커’다.

김해완 - 1993년 생. 10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가방끈은 짧아도 선생님 복과 친구 복은 많다. 현재는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을 사귀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201501호 (2014.1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