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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현지리포트② ‘사돈의 나라’ 사람들의 한국사랑 - 과거는 가슴에 묻고 미래를 바라보다 

1천 년 넘는 인연, 한류(韓流)와 국제결혼 확대로 더욱 돈독해져… 불행한 현대사 딛고 양국 발전 모색하자는 정서 높아 


▎호치민시 떤빈군에 있는 롯데마트 앞으로 오토바이 행렬이 오가고 있다. 롯데마트 떤빈점은 베트남의 10번째 체인점으로 지난해 12월 18일 문을 열었다.
부리부리한 눈과 훤칠한 이마. 깃을 세운 셔츠와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 기사가 딸린 중형 세단이 성공한 중년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베트남 변호사 응우옌(48·가명)을 만난 건 호치민 시내 상업지역에 있는 그의 사무실이었다. 외모와 말투 모든 게 여느 베트남인과 다를 바 없다. 다른 것은 한국말 솜씨가 농담을 곧잘 할 만큼 유창하다는 것이다. 그는 전쟁 중에 태어난 라이따이한(來大韓), 한국계 베트남인이다.

그의 출생에 대해선 그의 성장 과정을 잘 아는 한국 교민들을 통해 미리 얘기를 들은 터였다. 한국인 아버지를 찾으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한국 NGO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공부한 끝에 변호사가 된 라이따이한 중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그에게 한국에 대한 생각을 직접 물었다. 그의 아픈 과거 때문에 증오가 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응우옌은 꽤 낙천적인 성격을 가졌다. 한국과 한국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유창한 한국어 실력도 독학을 통해 익혔다고 한다. 그와 나눈 대화를 나누며 한국과 베트남의 문화와 역사적 인연, 음식문화 등 다양한 주제와 시간을 넘나들었다. 응우엔은 “한국은 부지런하고 정이 많아 베트남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일본의 기업과 투자자들을 주로 상대해 투자 관련법률 컨설팅을 해왔지만 앞으로 한국 파트너와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대다수 베트남인이 갖는 한국에 대한 생각은 응우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베트남전쟁 당시 서로 총부리를 겨눴으니 반감을 가질 법도 한데 현지에서 그런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한국에 호의적이고 한국의 문화와 경제 발전상을 동경하는 정서가 짙다. 베트남 사람들의 인식에서 과거 전쟁의 그늘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의 인연은 역사적으로도 1천 년을 거슬러 올라갈 만큼 길고도 깊다. 대표적인 사례를 찾자면 한국에 있는 성씨 중에 화산 이씨를 꼽을 수 있다. 화산 이 씨의 시조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 리(Ly) 왕조의 개국 황제인 태조 이공온(李公蘊·리꽁우안)의 7대손으로 알려졌다. 이용상은 베트남 내부의 쿠데타를 피해 고려로 망명했다가 몽고군에 맞서 싸운 공로로 품계를 받은 인물이다. 정선 이씨의 시조 이양혼과는 종손과 증조부 사이다.

라이따이한의 아픔을 넘어


▎한국과 베트남은 한때 전장에서 총부리를 겨눴지만 지금은 ‘사돈의 나라’로 어느 나라보다 돈독한 교류국이 됐다. 베트남전쟁 당시 작전 중인 맹호부대원이 베트남 어린이를 보호하고 있다.
이에 반해 현재 베트남에는 리 왕조의 대가 끊겼다. 화산 이 씨가 양국이 공인하는 유일한 직계 종손이다.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가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도무오이 당시 공산당 서기장을 비롯해 베트남의 지도급 인사들이 방문단을 환대해주었다.

두 나라는 정서적으로도 공통점이 많다. 유교와 한자 문화권에 속해 예의범절을 중시하고 조상을 모시는 풍습이 그렇다. 여러 차례 외침을 받고 극복한 옛 역사는 물론 각각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를 당했다가 해방 후 남북으로 분단돼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근현대의 역사도 대체로 일치한다. 그래서 베트남 사회에는 한국에 대해 남다른 동질감과 애착이 깊이 뿌리내려 있다.

이런 인연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호치민에서 확인한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상당히 높았다. 최근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한류의 영향도 적지 않다. 한국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식료품점에 가면 한국산 식료품들이 인기상품 목록에 여러 개씩 이름을 올리고 있다. 호치민에서 가장 큰 유통점 체인인 ‘Co,op’마트에는 한국 라면이 진열대의 4~5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베트남 라면은 면발이 얇고 국물이 맑은 데 비해 한국 라면은 면이 굵고 매운 게 특징이다. 현지 무역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과거에는 일본의 우동이 인기를 누렸지만 최근 들어서는 한국 라면이 오히려 더 잘 팔린다. 마트에서 만난 베트남 여성 미얀 씨는 “한국 드라마를 통해 라면을 알게 됐는데 조리가 간편하고 맛있어서 자주 해먹는다”고 말했다.

동남아의 여타 국가의 경우 한국 드라마나 영화, 가요를 보고 들으려면 중국을 통해 우회적으로 수입해왔지만 베트남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일찍감치 한국의 문화 콘텐트를 받아들여 친숙해졌다. 하노이와 호치민 등 대도시에는 한국산 화장품이 큰 인기를 누리고 한국의 성형외과 병원들도 성업 중이다. 한류가 베트남인들의 얼굴마저 바꾸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의 방송국들은 공영채널과 민영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K팝 등 한국가요도 인기를 끈다. 베트남의 명문으로 꼽히는 호치민 인문사회대학과 하노이대 등 10여 개 대학에 개설된 한국어학과와 한국학과는 대학 내에서도 인기학과로 손꼽힌다. 교수진만 100명이 넘고 학생 수는 2천 명을 넘는다고 한다. 가장 먼저 개설된 호치민 인문사회대 한국학과(1994년 9월 개설)와 호치민 외국어대 한국학과(1995년 9월 개설)는 학생 정원이 각각 300명 안팎에 이를 정도로 많다.

한국 남성은 베트남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결혼 상대 중 하나다. 국내에서 베트남계 한국인의 비중은 꽤 높은 편이다. 2013년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2013년 말 기준 국내 다문화가족은 75만 명 정도에 이른다. 결혼이민자와 귀화자가 28만 명이고 자녀가 19만 명이다. 2020년에는 그 수가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이들 가운데 중국 동포 가정이 10만여 명으로 가장 많고 중국이 6만8천 명, 베트남이 5만2300여 명으로 그 뒤를 따른다.

특히 베트남계 다문화가정 자녀 수는 4만9458명으로 조사 대상 11개국 중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산을 선호하는 베트남 여성들의 적극적인 성격 때문으로 파악된다. 이들이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완화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부의 2014년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초등학교 이상 다문화가정 학생의 16.5%는 베트남과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로 조사됐다.

개방적 성향이 열렬한 한국 사랑 낳아


▎베트남인들은 자국의 이익이 침해를 당했을 때에는 더없이 단호하게 대처한다. 지난해 5월 중국의 영해 침범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중국 지도부 퇴진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한국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열정적인 사랑은 외국 문화에 개방적인 베트남인들의 국민성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현지에서 느끼기에 베트남인들의 합리적인 사고와 문화적 수준은 오히려 한국인보다 높아 보일 정도였다. 호치민 시내에는 프랑스 점령기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100년 전 점령자들의 사교 공간이었던 유럽식 고급 레스토랑과 오페라하우스는 옛 방식 그대로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외국의 문물을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로 흡수해서 누리는 것이 베트남인들의 국민성이다. 외국의 다양한 문물을 수용하는 것을 자존심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재성 호치민한인회 사무국장은 “베트남인들은 이념적 편가르기보다 현재와 미래에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우선적으로 판단하는 성향이 있다”며 “미국과 한국을 최고의 경제 협력 파트너로 받아들이고 한국 문화를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모두 아문 것은 아니다. 특히 오랜 전쟁의 낳은 라이따이한 문제는 양국이 모두 들추고 싶지 않은 아픈 역사로 남아 있다. 전쟁 당시 태어난 라이따이한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밝힌 공식 통계는 없다. 하지만 그동안 양국의 인도적 교류와 지원사업에 앞장서온 민간 활동가들은 그 수를 600~1500명쯤으로 가늠하고 있다. 그중에서 현재 베트남에 살고 있는 라이따이한은 500명가량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돕기 위해 베트남 현지에는 적지 않은 한국인과 NGO가 아직까지도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정부도 공적개발원조(ODA)나 NGO를 통해 우회적으로 이들을 돕는다. 40여 년 전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퇴역군인들도 자체 조직망을 통해 라이따이한들을 경제적으로 돕거나 한국인 아버지를 찾아주는 활동을 벌인다. 베트남 현지에 조직된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와 국가유공자베트남협의회,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호치민지회 등 여러 참전군인 단체도 마찬가지다. 국가유공자베트남협의회의 한 관계자는 “우리가 펼치는 인도적 활동에 대해 베트남인들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우리네 정서로 보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도 있다. 베트남 정부가 과거사에 대해 관련 당사국들에게 사과를 촉구하거나 보상을 요구하기보다는 과거사를 묻어두고 한국의 자본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국민성이 그렇다. 이에 대해 황성원 베트남한국교민사편찬위원장은 “승리자의 시각에서 이해하면 간단하다”고 말했다.

베트남은 베트남전쟁의 종전일(4월 30일)을 ‘사이공 해방 기념일’ 혹은 ‘전승기념일’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월남 패망일’로 말하는 것과 정반대다. 그들에게 베트남전쟁은 강대국들에 맞서 승리한 자랑스러운 역사다. 호치민 시내에 있는 전쟁기념관에는 전투기를 비롯해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들이 진열돼 있다. 특이하게 한국군과 관련된 기록은 거의 없다.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는 표현도 찾아보기 어렵다. 전쟁 당시의 사진과 유물, 역사 기록 들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황 위원장은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싸움을 벌였는데 이긴 사람이 ‘없던 걸로 할 테니 앞으로 잘 지내자’며 악수를 청하면 진 사람이 손을 맞잡는 것으로 화해가 이뤄지지 않느냐? 베트남전쟁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자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국인에 의해 자국민이 피해를 당하거나 국익이 훼손될 때에는 더없이 단호한 입장을 보인다. 지난해 5월 중국과 영유권을 다투고 있는 베트남의 동해(남중국해) 황사군도(중국명 시사군도)에서 양국의 해상 충돌이 발생하자 2만여 명의 반중국 시위대가 중국계 공장을 공격하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외국인이 현지인이나 여성을 희롱하는 행위는 금기시돼 있다. 호치민교민회 관계자는 “한국에서 가졌던 편견으로 현지에 와서 베트남 여성들을 희롱하던 한국인 관광객이 베트남인들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한 적도 있다. 이들은 외국인이 자국민을 괄시하거나 특히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승자의 관용으로 과거보다 미래 지향

이는 베트남인들의 강한 자존심과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정착된 성평등 의식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벌어진 베트남 이주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 소식이 베트남에선 큰 뉴스가 되기도 한다. 또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남성들의 폭력적인 장면 때문에 전체 한국 남성이 그런 것처럼 오해를 사기도 한다. 더구나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는 양국 남녀의 국제결혼은 서로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기도 한다.

현지 교민들에게 들은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국제결혼 실태는 이렇다. 우선 한국의 중매업체에 국제결혼을 의뢰하면 베트남 현지 업체와 연결해 신붓감을 물색한다. 남성은 베트남에 가서 후보 여성들과 차례로 맞선을 보는데 맞선이라기보다 ‘인간시장’에 가깝다. 상대 선택권은 오로지 한국인 남성에게 있을 뿐이다. 선택이 끝나면 결혼했음을 증명하는 사진을 찍기 위한 요식행위로 결혼식이 진행된다. 체류비용을 줄이기 위해 하루 이틀 만에 맞선부터 결혼예식까지 모든 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결혼 이민 수속이 끝날 때까지 베트남 여성은 한국의 정부기관이나 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교양강좌를 통해 기초적인 한국어와 김치 만들기 등 간단한 한국 관련 지식을 배운다. 이렇게 결혼식에 드는 비용은 1천만원 남짓이다. 체류비와 행사비, 중개수수료 등을 떼고 나면 신부의 집에 돌아가는 사례비는 100만~200만원에 불과하다.

이렇게 상대에 대한 정보와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만나는 탓에 갈등이 생기거나 불행한 결말을 낳기도 한다. 한국 남성에 의한 폭력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고 한국 남성과 위장결혼을 했다가 이혼하거나 야반도주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서로의 피해를 막으려면 결혼의 전 과정을 공신력 있는 기관이 감독하고 조정하는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현지에서 오랫동안 베트남의 문화와 정서를 지켜본 한국 교민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인들도 과거의 일보다 미래를 강조한다. 호치민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베트남인 여성 사업가 프엉 타오 맛트(40) 씨도 마친가지였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에요. 억지로 사과를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차라리 미안한 마음을 더 깊은 우정으로 바꾸는 게 서로에게 이익이에요.” 프엉 씨는 한국의 식료품을 수입해 현지에 유통하는 업체를 운영한다. 종업원 수가 1천 명이 넘는 큰 규모다. 그녀는 2000년 한국어 통역을 맡았던 한 직원을 통해 라이따이한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직원은 베트남전쟁이 끝나 갈 무렵에 태어났다. 한국인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현지에서 철수하는 미군, 한국군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베트남 수교가 이뤄진 뒤로 자기를 찾으러 온 아버지를 만나 한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은 뒤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베트남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프엉 씨는 그때부터 라이따이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들을 도울 방법을 궁리했다. 경기도 이천에서 라이따이한 돕기 활동을 펼쳐온 활동가 이연실 씨와 함께 한국의 지자체와 기업들을 찾아 라이따이한의 자녀나 수교 이후 태어난 다문화가정 2세들의 한국 취업을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라이따이한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를 파고들고 한국에 동정심을 촉구하는 건 그의 관심 밖의 일이다. 프엉 씨는 “옛날에는 아버지가 없고 혼인신고가 안 돼 있어서 라이따이한들이 호적 등록도 못한 채 어렵게 살았지만 이제 그들은 ‘전쟁고아’가 아니라 일가(一家)를 이룬 어엿한 가장 세대가 됐다”며 “이제는 개혁개방 이후 새로 태어나고 있는 새 한-베트남 세대들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베트남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면 두 나라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니까 커서 양국 협력의 중추를 담당할 훌륭한 인재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도 ‘베트남 제대로 알기’ 붐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 태어난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은 양국 관계를 돈독히 하는 가교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이들을 돌보고 육성하는 건 두 나라 공동의 몫이다. 한국에 시집온 베트남 여성이 한글을 배우고 있다.
수교 직후부터 지금까지 베트남에서 라이따이한과 베트남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지원사업을 펼쳐온 김영관(73) 목사도 “라이따이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20년 넘게 라이따이한들의 자립을 도와 현지에서는 ‘라이따이한의 아버지’로 불린다. 호치민에 정식 교육기관인 ‘휴맨직업기술학교’를 열어 베트남 청소년들에게 직업교육사업을 벌인다. 휴맨직업기술학교는 1990년 호치민에서 라이따이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2000년까지 10년 동안 라이따이한들을 수소문해 교육을 시키고 기술을 가르쳤다. 김 목사는 “90년대에 수교 직후 베트남에 건너와 전쟁 중에 태어난 한인 2세들을 찾아보니 1500명을 헤아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베트남 청소년들을 위한 기술 교육사업과 ‘부스러기사랑나눔회’라는 봉사단체를 통해 거리의 아동들을 돕고 있다. 김 목사는 “라이따이한의 나이가 벌써 40대를 넘어 이제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 들었다”며 “과제는 과거에 천착해 아버지를 찾거나 동정심으로 이들을 돕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베트남을 제대로 공부하려는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양국 관계 발전에 고무적인 현상이다. 2013년 교육부의 국외 한국인 유학생 통계자료에 따르면 베트남에 유학 중인 한국인 대학생 수는 319명으로 집계됐다. 역대 최다를 기록한 2011년(840명)에 비하면 절반에 못 미치지만 같은 기간 비영어권 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중국·일본에 이어 셋째로 많았다. 또 2011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베트남 현지에 설립한 청년사업가 양성과정에는 매년 3대 1이 넘는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한국 청년들의 관심이 높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9월 베트남을 방문해 ‘사돈의 나라’라고 칭했다. 쯔엉 떤 상 베트남 주석은 ‘사위의 나라’라며 박 대통령을 환대했다. 베트남인들과 현지 한국 교민들은 이 말을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라이따이한이란 용어는 더 이상쓰지 말자는 얘기다. 그 대신에 ‘한국계 베트남인(Korean Vietnamese)’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한국의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혼혈아’라는 말 대신 ‘베트남계 한국인(Vietnamese Korean)’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일리 있는 얘기다. 라이따이한의 ‘라이(來)’는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다. 냉전의 시대에 피아를 구분하고 외세에 대한 적개심이 낳은 말이다. 베트남인들 사이에는 이미 기억에서 지워진 단어일 뿐이다. 세월이 흘렀어도 한국은 저들에게 분명한 아버지의 나라다. 우리 스스로 자식들에게 낙인을 찍는 것은 부모의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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