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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인터뷰] ‘돌아온’ 천정배가 말하는 야당집권플랜 - “정권 잡고 싶다면 양치기 소년 오명부터 벗어야” 

■야권 전면쇄신하고 정권교체 위해 어떤 역할 할지 ‘고민 중’ ■개혁정치 열망 커지는데 야당은 그것을 담을 그릇이 안 된다 ■뉴DJ들 키워 새정연과 경쟁하겠지만 구체적 신당 창당 계획은 없어 ■호남 출신 대권주자까진 아니더라도 리더 한 사람쯤은 꼭 필요 

최경호 월간중앙 차장 사진 오상민 기자
천정배(61)가 돌아왔다. 4월 29일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광주 서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천 후보는 2만6256표(52.37%)를 얻어 1만4939표(29.80%)에 그친 새정치민주연합 조영택 후보를 가볍게 따돌리고 여의도 재입성에 성공했다. 당선 직후 천 의원이 새정연과의 ‘정면승부’를 예고하자 새정연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천정배 의원은 “제가 뭘 잘해서 당선된 것이 아니다. 단지 광주민심을 잘 따르고 대변했을 뿐”이라며 “내년 20대 총선까지 뉴 DJ들을 키워 광주에서 새정연과 경쟁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천정배 무소속 의원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관통하는 인물 중 하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의 모임’ 창립을 주도했던 그는 김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1996년 15대 총선(안산 단원)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천 의원은 노 전 대통령 시절이던 2004년에는 새정치민주연합 신기남 의원, 정동영 전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 당시 ‘개혁 아이콘’으로 대변되던 ‘천·신·정’의 일원이었다. 2005년 6월부터 2006년 7월까지 노무현 정부의 법무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천 의원은 김 전 대통령에서 ‘시작해’ 노 전 대통령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김 전 대통령에게 돌아왔다. DJ당(새천년민주당)을 나와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던 천 의원은 노무현 정권 마지막 해인 2007년 1월 자신이 만든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이해찬 의원 등 친노 핵심이 빠진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안산에서 출마해 4선 고지에 올랐으나, 선수(選數)에 비해 행동반경은 그리 넓지 못했다.

그는 19대 총선에서는 안산을 떠나 서울 송파을에서 5선에 도전했으나 석패했다. 이후 3년간 천 의원은 재기를 모색해왔다. 그리고 지난 3월 초 새정연을 탈당한 뒤 4·29 재·보선에서 광주 서을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자신을 키워준 당을 배신했다”는 비판이 일었지만 천 의원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또 정동영 전 의원 측 ‘국민모임’이 적극적으로 영입에 나섰으나 그는 끝내 독자행보를 선택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도전에서 천 의원은 문재인 대표를 비롯한 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조영택 후보에게 거의 더블스코어 차의 승리를 거두고 여의도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 천정배’의 대결로 판이 커진 광주 재·보선에서 천 의원이 5선 고지에 오르자 새정연 의원들, 특히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권 의원들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다.

박주선 3선 의원(광주 동구)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천정배 의원이 신당을 추진할 경우 합류 인사가 수십 명은 될 것”이라며 “신당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면서 당을 바꾸고 고쳐나가면서 호남 민심에 호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월간중앙>이 ‘돌아온’ 천정배 의원을 5월 11일 국회의원 회관 521호 천정배 의원실에서 만났다. 마침 521호는 오병윤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쓰던 방으로 안철수 의원실과 대각선으로 마주하고 있다. 안 의원(당시 당 공동대표)은 지난해 7·30 재·보선 때 2013년부터 광주에서 터를 닦아온 천 의원 대신 권은희 후보를 광주 광산을에 공천했다. 그렇지만 이번 재·보선 때는 광주 서구을에서 자당(自黨) 조영택 후보에 대한 지원유세를 하지 않았다. 천 의원에 대한 안 의원의 정치적 ‘부채의식’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

정치인들과의 인터뷰에 앞서 질문지를 먼저 전달하는 게 상례(常禮)지만 천 의원 측은 “편하게 답변하겠다”며 질문서를 사양했다. 2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 동안 천 의원은 “호남의 인내심은 한계를 넘어섰다. 지난 대선 때도 광주는 새정연 문재인 후보에게 92%를 몰아줬지만 결과는 호남 고립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며 말끝에 힘을 실었다.

“지금 야당에 필요한 것은 메기”


▎천정배 의원이 당선 직후 광주 ‘창억떡집’에서 공수해 여야 동료의원 300명에게 돌린 찹쌀떡 상자. 겉면에 “초선의원의 자세로 일하겠습니다”라는 메모가 붙어 있다
당선 후 천정배 의원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일부 야권 지지층 사이에선 오히려 기대가 커진 것 같다.

“정말 커졌나?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웃음) 선거 후 지역 유권자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있는데 끝이 없는 것 같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많아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도 참배했고, 광주 망월동 5·18 묘소도 참배했다.”

새정연의 전신인 민주당에서 4선 의원을 지냈다. 그 때문에 탈 당 명분이 약하다는 지적이 일었다.

“제가 이번에 출마하게 된 동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정연이라는 거대야당이 지금처럼, 또 과거 10년처럼 해서는 집권이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정치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고도성장을 하는 과정 속에서 호남은 철저히 소외됐다. 특권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번에 출마하게 된 것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제가 직접 할 수 있는 일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새정연이라는 거대야당에 큰 충격을 주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이른바 ‘메기론(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적절한 자극이나 위협이 필요하다는 이론)’과 ‘회초리론’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의 당선이 1차적으로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새정연, 특히 호남에서는 충격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야권을 전면쇄신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데 제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에게 92%를 몰아줬던 광주가 이번에는 왜 천 의원의 손을 들어줬다고 보나?

“겸양의 말이 아니라 사실 제가 한 일은 없다. 광주민심을 잘 따르고 대변했을 뿐이다. 선거에 직접 나서 보니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는 광주민심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동안 광주는 정권교체를 통한 정당한 기회를 얻기 위해 새정연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 퇴임 이후로도 12년이나 지났지만 광주는 꾸준히 새정연을 밀어줬다. 하지만 광주가 기대했던 것들이 대부분 충족되지 못했다.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풍토가 되레 광주 정치풍토를 낙후시킨다는 게 광주시민들의 생각인 것 같다. 지난 대선은 광주의 생각이 변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된 듯하다. 대선 때만 해도 정권교체를 바라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지만 결과는 광주의 고립이었다. 시민들의 허탈감이 엄청났고, 이후 ‘이게 아닌가 보다’는 인식이 커졌다. 그럼에도 문 대표를 비롯한 새정연은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소통이 없으니 성찰도 없었고 반성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런 정당이 되면서 기득권주의·패권주의·계파주의만 더 심해졌다. 광주에서는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민의와 관계 없는 시장후보 공천에 이어 7월 재·보선 때는 더 어이없는 공천이 이어졌다.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순천·곡성에서 당선됐던 것도 폭발단계에 이른 민심이 반영된 결과다.”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기득권만 굳혀”


▎천정배 의원과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신임 원내대표는 ‘투톱’으로 호흡을 맞췄던 적이 있다. 2004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 종료 후 자료를 챙기고 있는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위쪽)와 이종걸 수석 부대표.
2004년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는 ‘호남에서 뭉치자’는 주장은 무덤을 파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호남정치 복원(부활)’을 외쳤다. 모순 아닌가?

“상충되지 않는다. 호남정치 부활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개혁하자는 것이다. 시민들의 뜻을 제대로 받드는 정치를 하자는 거다. 또 하나는 강해지자는 것이다. 낙후된 호남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강한 정치력이 필요하다. 많은 분이 ‘DJ(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로 호남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한다. 여야를 통틀어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사람 중 호남 출신은 한 명도 없다. 호남정치 부활은 한마디로 ‘개혁과 힘 기르기’라고 할 수 있다. 정당한 권리를 찾자는 것이 지역주의인가? 보편적 평등과 정의의 관점에서 봐도 매우 정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호남이 달라지면 야당이 달라지고 야당이 달라지면 대한민국이 달라진다. 하지만 다른 지역은 배제한 채 호남끼리만 잘해보자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창당 때 ‘호남에서 뭉치자’는 주장은 무덤을 파는 일이라고 했던 것도 그런 뜻이었다. 호남의 자민련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새정연이 주요 선거에서 연패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뭐라고 보나?

“길게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이후 지금의 야당은 대부분 선거에서 졌다. 패배가 체질화됐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좌우 이념대립→6·25 한국전쟁→독재체제를 거치는 동안 한국사회가 보수화되면서 기득권 세력이 강하게 뿌리내렸다.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 전까지만 해도 선거는 해보나 마나 아니었나? DJ 당선 이후 개혁정치 열망은 커지고 있는 반면 야당은 그 열망을 담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고 있다. DJ라는 카리스마가 있을 때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민주화와 정권교체라는 성과를 거뒀지만, DJ 퇴장 이후 야당은 리더십을 잃은 채 새로운 질서와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모여 계파·패권·기득권을 갈수록 공고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당에 비전도, 정책도 없게 됐다. 대표적인 사안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와 제주 해군기지다. 둘 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 강력하게 추진했던 일들인데, 야당이 되고 나니 같은 사안을 두고 마치 이명박 정권이 새로 벌인 일처럼 공격했다.

당이 국민에게 양극화를 해소할 비전이나 정책을 제시하는 데도 실패했다. 2012년 4·11 총선 때도 다들 이긴다고 했지만 졌고, 이후 대선과 재·보선도 죄다 패했다. 지난 10여 년간 야당은 ‘선거 패배→지도부 사퇴→환골탈태 선언→비상대책위원회 구성→새 지도부 출범’을 반복했다. 한마디로 ‘양치기 소년’이었다. 말로만 정권교체를 외치지 말고 양치기소년의 오명부터 벗어야 한다. 지난해 7·30 재·보선 패배 이후 들어선 비대위는 문재인 대표, 박지원 의원 등 계파의 수장들이 참여한 실세 비대위였다. 마음만 먹으면 제대로 쇄신할 수 있었는데도 기회를 놓쳤다. 근본적으로 패거리정치를 청산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공천도 구태의연한 방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솔직히 지금도 새정연이 잘되기를 바란다. 제가 탈당한 것을 후회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4·29 재·보선 참패 이후로도 당은 여전히 민심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새정연은 2011년 4·27 재보선 승리(분당을 손학규)를 끝으로 이후 모든 선거에서 졌다. 2011년 10·26 재·보선→2012년 19대 총선→2012년 18대 대선→2013년 4·24 재보선→2013년 10·30 재·보선→2014년 6·4지방선거 및 7·30 재·보선 가운데 지난해 6·4 지방선거에서만 무승부(광역단체장 기준 9대 8)를 기록했을 뿐 모든 선거에서 완패했다. 지난 4·29 재·보선에서도 새정연은 4곳에 모두 후보를 냈지만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참신한 인물 공천했다면 내게 기회 왔겠나”


▎2004년 6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수하는 열린우리당 천정배 의원과 신기남 의장(가운데).
문재인 대표 나름대로 경제정당과 탕평인사를 표방하는 등 노력하는 것 같은데 왜 고전을 면치 못할까?

“이번 선거만 본다면 근본적인 쇄신까지는 아니었더라도 공천만 잘했어도 4곳 가운데 최소한 3승을 거뒀을 것이라고 본다. 야당 입장에서는 인천을 제외한 광주 서을, 서울 관악을, 성남 중원 3곳은 가장 확실한 텃밭 아닌가? 그런데도 구태의연하게 대처하다 보니 패한 것이다. 이 세 곳에 참신한 인물을 공천하고 인천에 당력을 집중했다면 4승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천은 어떤 식으로 이뤄졌어야 됐을까?

“진선진미(盡善盡美·완전무결한)한 공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원칙은 있다. 광주민심은 오래전부터 ‘우리를 들러리 취급하지 말고 우리에게 선택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동안 당 입장에서 광주는 ‘공천=당선’ 아니었나? 그렇다면 유권자들의 민의를 어떻게 담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했다. 지난 2월(25일) 문재인 대표에게 만나자고 했다. 공천방식과 관련된 건의와 함께 시민사회단체의 무소속 출마 요구에 제가 어떻게 답해야 할지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오전에 문 대표와 약속을 잡고 저녁에 만나기로 했는데 그 사이 당에서 재·보선 후보자 공모(2월 26~27일) 발표가 났다. 저로서는 그런 방식의 발표를 막아보려고 문 대표와 만나자고 했던 것이다. (텃밭인) 광주가 뭐 그리 급하다고 선거 두 달 전에 후보자 공모를 내야 했을까? 막상 문 대표를 만났을 때는 별로 할 말이 없게 됐다. 지난 일이지만 새정연에서 참신한 신인을 전략공천했다면 제가 어떻게 틈을 노렸겠나? 서울 관악을에서도 문 대표의 직계 친노인 정태호 후보가 아닌 사람이 출마했다면 정동영 전 의원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었겠나?”

천 의원은 열린우리당의 창당 주역이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도 현역의원으로는 유일하게 노무현 후보의 편에 섰다. 그런데 어쩌다 친노와 갈라서게 됐나?

“친노란 말을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할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친한 사람을 친노라고 한다면 저는 원조 친노다. 여기에는 이의가 없다. 그런데 저는 계파 의미의, 부정적 의미의 친노에는 가입한 적이 없다. 친노뿐만 아니라 어떤 계파에도 가입해본 적이 없다.”

천정배에게 김대중과 노무현은 어떤 존재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저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에게는 롤모델이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정치사에서 거의 전무후무한 비전과 정책의 정치인이다. 김 전 대통령 옆에만 가면 주눅이 들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형님 같은 존재였다. 변호사 생활로 치면 1년 선배였다. 노 전 대통령은 엄청난 소신파이면서도 보통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호흡하는 친근한 사람이었다.”

천 의원은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신기남·정동영·정세균·김한길·추미애 등과 함께 수혈된 ‘DJ 키즈’의 일원이었다. 또 천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1993년 법무법인 ‘해마루’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2002년 노 전 대통령이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 현역의원으로 그와 함께했던 정치인은 천 의원이 유일했다. 당시 천 의원은 이렇게 주장했다. “노무현 상임고문이 다음 대통령이 돼야 한다. 왜냐하면 개혁의 원칙을 고집스럽게 지켜왔고, 지역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넘어서려 했다.”

“창당보다 급한 것은 야권을 재편하는 일”


▎2000년 1월 서울 마포의 한 음식점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초·재선 의원들이 당 쇄신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왼쪽 줄 앞쪽부터 정동영·천정배·신기남 의원.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특별히 당부한 말이 있었나?

“김 전 대통령은 저와 고향이 같고(전남 신안), 제 장인과 친분도 있으셨다. 저를 만나면 ‘장인어른은 건강하세요?’라고 묻곤 하셨다. 2006년 10월 28일 목포를 함께 방문했을 때 김 전 대통령은 저에게 ‘어느 마을에서 살았어요?’라고 물으셨다. 동향(同鄕)인 데다 당신이 (정계에) 이끌어주셨기에 (저에 대한) 애정이 있으셨던 것 같다. 퇴임 후 자택으로 인사 드리러 가면 많이 격려해주셨다. ‘항상 신중하게 잘 처신하라’, ‘그때그때 인기에 연연하지 말고 무게 있게 가라’는 덕담을 건네주셨다. 지금도 그 말씀을 새기고 있다.”

동교동계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들이야 대부분 현역에서 은퇴하지 않았나? 그분들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큰 고초를 겪은 분이다. 처음 당에 들어갔을 때 저를 많이 챙겨줬다. 다만 정풍운동(整風運動)을 할 때 그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지만 절대 본의가 아니었고 사적인 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대척점에 섰었기에 인간적으로 죄송한 마음이 있다. 이번에 권노갑 상임고문이 저에게 몇 말씀하셨지만 그 문제에 관해서는 뵙고 풀어야 할 것 같다.”

일명 천·신·정으로 불리는 천정배·신기남·정동영 당시 새천년민주당 의원은 2000년 말 당내 쇄신운동인 정풍운동을 벌이면서 권노갑 최고위원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로 인해 권 최고위원은 자리에서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을 밟아야 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민주당은 국민참여 경선과 노풍(노무현 바람)을 일으켜 대세론으로 무장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그런 구원(舊怨) 때문인지 권 고문은 지난 4·29 재·보선 때 광주를 찾아 조영택 후보를 지원하며 “자신을 키워준 당에 등을 돌렸다”고 천 의원을 비판했다.

얼마 전 이희호 여사를 만났는데 어떤 말을 주고받았나? 이 여사가 “야권 분열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떤 이야기인가?

“제가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거나 이희호 여사를 방문하는 것은 도리이자 인사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명절 때 부모를 찾아 뵙는 것이 특별할 것은 없지 않는가? 이 여사의 꾸지람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이 여사께서는 ‘국회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잘하라’고 덕담하셨고, 저는 ‘큰 틀에서 정권교체를 위해, 야권의 전면쇄신을 위해 출마한 것이다. 다음 대선 때까지는 야권을 살리고 통합하는 데 힘쓰겠다’고 말씀드렸다.”

신당 창당 계획이 있나?

“그 얘기를 할 계제가 아니라는 게 저의 답이다. 4·29 선거 때 내건 공약이 ‘저를 당선시켜주시면 내년 총선 때까지 뉴 DJ들을 모아서 새정연과 경쟁해보겠다. 그럼으로써 광주시민들이 선택권을 갖게 될 것이다’였다. 그렇게 되면 새정연도 살기 위해 부단히 쇄신할 것이고, 저 역시 비전을 제시하고 더 열심히 할 것이다. 좀 더 여력이 있다면 그런 경쟁을 전남·북까지 확대해보겠다는 게 제 비전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야권이 강해지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제가 DJ도 아닌데 국회의원 한 번 됐다고 당장 신당을 만들 역량이 있겠나? 다만 새정연이 이대로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야권을 재편·재구성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 일을 어떻게 할지는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만일 당을 만든다면 호남이 선도하되 전국적이고 개혁적인 정당이 될 것이다.”

‘뉴 DJ 플랜’이란 김 전 대통령의 처조카인 이영작 박사가 1992년 대선을 앞두고 탄생시킨 용어다. 보수층을 겨냥해 DJ의 부드럽고 포용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 닉슨 대통령이 재선 선거운동 때 사용한 ‘뉴 딕슨 전략’이 원조다. 1997년 대선 4수(修)에 나섰던 김 전 대통령은 뉴 DJ 플랜을 바탕으로 ‘준비된 대통령’이란 슬로건을 내세워 사상 첫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비전·정책 만들어 실천하면 승산 있어”


▎천정배 의원은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호남의 인내심은 한계를 넘어섰다”고 진단했다.
과연 새정연으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을까?

“지금 이대로는 어렵다.”

그렇다면 천 의원이 구상하는 야당집권플랜이 궁금하다.

“국민에게는 비전을, 당원에게는 보통선거권을 주는 게 쇄신이다. 야당은 양극화로 고통받는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국가비전과 정책을 만들어서 실천해야 한다. 그게 정의로운 통일복지국가라고 생각한다. 당 지도부가 그런 일에 아주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한다. 정책정당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새정연 내 민주정책연구원 같은 기구를 활성화시키고 힘도 실어줘야 한다. 당원들조차 당의 비전·가치·정책을 전파하는 민주정책연구원의 원장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교체 같은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와 함께 당의 주요 당직 선출권과 의사결정권을 당원들이 갖도록 해야 한다. 친노니 비노니 싸움이 끝나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기득권 내의 다툼이기 때문에 서로 승복을 못하는 거다. 일정한 요건을 갖춘 당원들이 모두 참여한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았더라면 과연 친노·비노 싸움이 계속될 수 있을까? 심하게 말하면 요즘 새정연에 들어가는 것은 입당(入黨)이 아니라 입계파(入系派) 아닌가? 지금처럼 하면 계파청산은 요원하고 정권교체는 꿈같은 이야기다. 또한 전(全)당원 보통선거제가 도입되면 여의도 정치만 하는 정치인은 당대표가 될 수 없다. 당원 속으로, 민심 속으로 들어가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천 의원을 포함해 차기 대선에서 호남 대권주자가 나올 수 있다고 보나?

“2007년에도 대선 출마선언을 했지만 저는 아직 그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호남 대권주자는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키워주는 풍토가 필요하다. 호남 출신 아닌 사람이 호남을 대변하기는 어렵다. 설령 다른 지역 출신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호남의 이익을 지키고 대변하는 리더 한 사람쯤은 나와야 한다고 본다.”

15~18대 4선 의원의 천정배와 1년 임기의 ‘0.25선(選)’ 천정배는 어떤 점이 달라졌나?

“내리 4선을 하는 동안에는 의욕이 좀 앞섰는데 이제는 민심을 잘 따라가는, 민심과 동행하는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를 DJ는 ‘민심을 반보 앞서간다’고 표현했다. 저 스스로도 소통·통합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광주에서 출마를 결심한 뒤로 호남문제에 대해서도 좀 더 치열하게 생각하게 됐다. 주위에서는 ‘그동안 정치를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사심이 없고 깨끗하며 개혁적’이라고 하더라.(웃음) 그게 변함없는 저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천정배 의원은 법무부장관을 지낸 5선 중진의원이지만 소탈하고 점잖다는 평을 듣는다. 참모를 비롯해 측근들에게 말할 때도 하대하지 않는다. 참모들이 되레 부담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귀히 대하는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천 의원은 “3년 가까이 여의도를 벗어났던 것이 주위와 나 자신을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는 또 “확실한 국가비전과 정책을 가진 정치인이 되고 싶다”며 “좀 더 거시적인 비전을 만들면서 단기적인 정책에도 충실한 정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 사진 오상민 기자

201506호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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