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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이병호 체제의 국정원 다운사이징? - 한국판 모사드(이스라엘 비밀 정보기관)로 거듭난다 

정치 비중 줄이고 안보역량 강화하는 국정원 개혁에 시선 집중 … 이 원장, 국정원을 권력기관 아닌 안보 전문기관으로 규정해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최근 국정원발 북한 소식이 연일 톱뉴스를 장식한다. 북한 고위관료 공개 처형 등 고급 정보가 국회 정보위에 가감 없이 전달되는 까닭이다. 이병호 원장의 국정원은 정치 관여를 줄이는 대신 대북 정보 역량 강화에 나선다는 관측도 있다.

▎이병호 원장은 국정원이 대공·대테러 업무와 같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권도 수련 중인 국정원 신입 요원들.
“비서실부터 먼저 쳐내겠다. 나 한 사람을 위한 보좌 조직이라고 보기엔 너무 비대하다.”

지난 3월 최고정보기관 수장에 오른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의 취임 일성은 비서실의 인원과 규모를 대폭 축소하겠다는 방침이었다. 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돕고 일정 관리와 의전을 담당하는 비서실의 권한과 기능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문제의식에 따른 결정이다. 첩보 수집과 대공수사 및 산업보안 현장을 뛰어야 할 젊은 엘리트 직원들이 원장 비서실에서 허드렛일이나 하고 거들먹거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도 깔렸다는 얘기다.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원장의 외부행사 행차 때면 똑같은 모양의 최고급 에쿠스 승용차 3대가 함께 출동하고, 안전통제팀과 경호원들이 줄지어 뒤따르는 관행에 대해 국정원 안팎에서 비판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장을 테러 등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어느 차량에 탔는지 알 수 없게 하려는 조치라고 국정원 측은 해명해왔었다. 하지만 총리 의전이나 경호를 뛰어넘는 모양새에 대해 과잉이란 지적이 끊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청와대-국정원 잇는 ‘B-B라인’ 찰떡궁합


▎국정원 직원들이 대테러 훈련의 일환으로 권총사격을 하고 있다
신임 원장이 자신의 수족이라 할 비서실부터 자르겠다는 언급을 내놓자 국·실장급 핵심 간부들 사이에서는 “조직을 다이어트 하겠다는 신호탄”이란 말이 흘러나왔다. “이제부터 바짝 긴장해야겠다”는 분위기도 감돈다고 한다.

이병호 원장이 국정원 조직에 대해 개혁의 메스를 들이댈 것이란 전망은 내정 시점인 2월 말부터 나왔다. 이 원장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제대로 된 정보기관이 되도록 개혁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며 “이 부분에 대해선 직원들도 충분히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말부터 국정원 자문위원을 맡아온 그는 “내부적 개혁의 불꽃이 강하게 타오르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이명박 정부 말기 대선개입 댓글 논란과 원세훈 전 원장 구속 등으로 국민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뼈를 깎는 조직개혁은 불가피하다는 말이었다.

이런 기류는 3월 19일 서울 내곡동 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도 감지됐다. 이 원장은 “국정원은 권력기관이 아니라 순수한 안보 전문 국가정보기관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병호 원장을 낙점한 배경을 둘러싸고도 마찬가지 관측이 나왔다. 전임 이병기 원장이 불과 7개월 만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국정원 조직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장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정보기관 혁신을 연속성 있게 추진해 갈 인물로 후보군이 좁혀지면서 이병호 원장이 꼽혔다는 분석이다.

그의 발탁에는 이 비서실장의 천거가 상당부분 반영돼 있다는 평가도 정부 안팎에서 나온다. 이 원장은 이병기 실장보다 앞서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을 지냈다. 중앙정보부 7년 선후배 관계이기도 하다. 대북부처 당국자는 “청와대와 외교안보 핵심 관계자들 사이에서 ‘B-B라인’이라 불리는 이병기-이병호 전·후임 원장의 호흡은 그 어느 때보다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국정원 개혁 의지나 정보당국에 대한 주문이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원장에게 곧바로 전달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 있다는 설명이다.

이병호 체제의 국정원 내부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베일에 싸여 있다. 정보기관의 특성상 조직이나 인사 문제가 극비에 부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조실이나 총무조직에 근무하는 어지간한 직원들도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낼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청와대가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차장급 정무직 간부에 대한 인사 외에는 확인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정원을 관장하는 국회 정보위 핵심 의원이나 청와대와 여당 고위인사들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비서실 등 일부 조직의 개편 외에 현재까지 파악된 건 정치개입 오해를 줄 수 있는 국내 정치정보의 수집·보고가 축소되거나 거의 없어졌다는 점이다. 청와대에 보고하는 자료에 정치항목이 빠졌다는 말도 나온다. 대북 문제나 해외 정보에 집중하겠다는 뜻도 밝히고 있지만 아직 상세한 변화 내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국정원과 여권 안팎에서는 이병호 체제의 국정원 개혁 청사진이 곧 선보일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조직개편에 따른 주요 실·국장과 지방도시의 지부장급을 교체하는 인사가 이뤄지고, 차장급 정무직의 업무분장 조정까지 단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는 “어떤 경우든 결국 모사드가 이병호 체제 국정원의 지향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국정원 직원들은 이병호 원장에 대해 ‘모사드빠’라고 지칭한다. 이스라엘 비밀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따라 하려 한다는 점을 꼬집은 표현이다. 모사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치하의 집단학살에서 생존한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에 이주시키려 1951년 총리 직속기관으로 설립됐다. 1972년 9월 뮌헨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들을 테러한 아랍 게릴라 13명을 7년 동안 끈질기게 추적해 암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랍세계에 대한 정보능력은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을 능가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기드온의 스파이>를 번역한 ‘모사드빠’


▎2012년 대선 국정원 댓글 의혹사건으로 인해 국정원장이 형사처벌을 받으면서 국정원의 대(對)국민 신뢰도가 크게 추락했다.
이 원장의 모사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3월 16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석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발언을 마친 이 원장은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질의 과정에서 모사드를 언급하자 반색했다. 문 의원이 “이스라엘은 정보기관이 국민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정권의 바뀌어도…”라고 언급하자 “의원님 지적해주신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화답한 것이다. 1996년 말 안기부 2차장을 끝으로 퇴임한 이 원장은 오랜 야인생활 동안 언론기고 때마다 모사드를 미 중앙정보국(CIA) 등과 함께 일류 정보기관으로 꼽았다. 정보운영의 기본과 상식에 따라 철저히 운영되기 때문에 정치개입 시비 같은 건 원천적으로 차단돼있기 때문이란 게 그의 주장이다.

모사드와 관련한 이 원장의 좀 더 내밀한 관심은 번역서<기드온의 스파이>에서 드러난다. 영국 BBC의 작가 겸 PD인 고든 토마스가 쓴 이 책은 관계자 200여 명을 인터뷰해 이스라엘의 최정예 정보기관 모사드를 파헤치고 있다. 이 원장은 번역작업을 한 뒤 5년 전 펴냈다. 이 원장은 책 출간과 관련 “모사드는 국가 안위를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하면서 치열하게 움직여야 하며, 동시에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정보기관 사례”라고 강조했다. 우리 정보기관에게도 좋은 참고가 될 것이란 얘기였다.

정보기관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이런 인식은 이 원장의 경력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경기도 시흥 출신인 그는 육군사관학교 19기다. 1963년 임관해 2년 후엔 베트남전에 파병됐다. 수색소대장으로 전투를 체험했다. 당시 경험한 전쟁의 참상 때문에 국가안보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안보관과 가치관을 갖게 됐다는 게 이 원장의 설명이다. 중령으로 예편한 그는 1970년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에 발을 들여놓았다. 주로 해외파트와 정보 분야를 다룬 그는 1988년 안기부 국제국장을 지냈다. 미주 공사로 임명돼 워싱턴에 근무할 때는 조지타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열성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말레이시아 대사와 외교통상부 본부 대사를 지내면서 외교 분야로까지 경험을 넓혔다.

2003년부터 국정원장 임명 전까지 그는 울산대 국제학부 초빙교수 자격으로 언론기고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여기에는 국가안보와 정보기관, 국정원 개혁 등에 대한 이병호 원장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다. 지난해 한 기고문에서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최근 16년간 국정원장이 열 번 바뀌었다”며 이를 국정원이 정치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대목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실제 이 원장은 정치개입에서 탈피하는 게 국가정보원의 국민의 정보기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사청문회 석상에서 그는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국정원을 망치는 길”이라고 단언했다. 국정원의 현주소에 대해 평가하면서 “신뢰가 많이 떨어졌다. 정치개입에 무리하게 휩싸였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후배 직원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나타냈다. 이 원장은 “솔직히 내 생각에는 주눅이 들어 있다”며 “국정원은 지금 적극성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작금의 안보상황에서 국가안보를 약화시키는 것은 역사적 범죄다. 나는 결코 역사적 범죄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란 대목에서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그는 “사기를 올리고 국정원 직원들이 자부심을 갖도록 만드는 것 하나는 확실히 하겠다”고 약속한 뒤 국정원 최고책임자에 올랐다.

반쪽 짜리 취급받는 힘 빠진 국정원장


▎이병호 국정원장(앞줄 오른쪽)은 3월 18일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왼쪽은 전임 국정원장인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
이병호 원장의 국정원 개혁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젊은 시절부터 정보기관에서 잔뼈가 굵어 내부 사정이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힌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보기관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충실하게 수행할 적임자로 꼽히는 것도 긍정적 요소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기관 박사는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박 대통령의 트라우마는 그 후신인 국정원을 어떤 식으로든 바로 세워야 한다는 원천적 에너지일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정원 내부에서도 젊은 직원들을 중심으로 과거의 적폐를 해소해야 하겠다는 개혁의지가 뿜어 나오는 상황이라 원장에게 힘이 실릴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대목도 있다. 무엇보다 원세훈 전 원장 체제에서의 불법적인 정치개입 후유증이 너무 크다는 점이 꼽힌다. 국내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한 실무요원은 “국정원장이 대선 개입성 인터넷 댓글 사건으로 형사처벌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건 국가 최고정보기관이란 자부심으로 살아온 우리에겐 충격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등돌린 국민여론은 아직도 싸늘한 상황이고 이를 바꿀 수 있는 대책은 여전히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설픈 ‘셀프 개혁안’으로 신뢰를 더 잃는 자충수를 두기도 했다.

여기에다 야권은 국정원의 국내정보 수집 문제나 수사권, 테러방지법 관련 사안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는 상황이다. 아예 국정원을 대통령이 아닌 총리실 산하로 옮겨버리고 국내정보 파트의 해체와 대공수사권 박탈까지 거론하는 형국이다. 이 원장은 과거 민간인 시절 언론기고 등을 통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인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국정원 간판만 남을지 모른다는 우려도 내곡동 본부 쪽에서 나오고 있다. 그만큼 정치개입의 후유증이 컸다는 얘기다.

모사드를 표방하는 이 원장의 구상이 현실과 상당한 괴리가 있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 등 민족생존을 위한 극단적 임무를 수행하는 모사드와 한국의 정보기관은 역사적 배경이나 인식이 다르다는 얘기다. 북한의 중동 미사일 판매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모사드 측과 접촉했던 우리 전직 정보요원은 “모사드는 선조들이 당했던 고초와 탄압을 그대로 되갚아 주는 응징보복이 활동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공작에 실패해도 국가나 언론이 비판적으로 다루질 않고 문제삼지 않는 분위기란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잔혹하고 대담한 활동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직 요원은 “모사드는 모든 정보기관 요원들의 꿈일 뿐 실제 그렇게 첩보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국내 정치정보 수집 중단 같은 조치가 현실화 할 경우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란 우려도 조심스레 제기된다. 국정원장을 지낸 한 고위인사는 “취임 후 대북첩보와 국제정보, 산업스파이 문제 등에 집중했고 정당 쪽 정보나 정치관련 수집활동은 챙기지 않았다”며 “결국 청와대와 국회 쪽으로부터 반쪽 짜리 원장으로 치부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물밑접촉 통한 남북관계 돌파구 열까


▎서울 서초구 내곡동 소재 국정원 안내실을 한 관계자가 지나고 있다. 국정원은 내부 개혁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고 있다.
대북정보 수집·분석이나 공작활동에 이 원장의 철학이 어떻게 반영될지를 눈여겨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이 원장은 “북한이 김일성의 유훈인 남조선 혁명역량 강화라는 끈을 놓을 가능성이 없다”며 “이에 대응하는 건 결코 시대정신을 망각한 색깔론이 아니다”고 주장해왔다. 국정원이 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 처형을 국회 정보위에 전격적으로 보고하고 공개한 것도 북한의 실상을 가감 없이 그대로 국민들에게 보여주겠다는 이 원장의 인식이 반영됐다는 후문이다.

그렇지만 국정원이 남북대화나 교류협력 사업을 지원하고 추진해나가는 기능도 수행해야 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대안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정보기관이 물밑접촉 등을 통해 남북관계 돌파구를 여는 역할도 할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다. 대통령 직속기관으로서 박 대통령이 주창한 ‘통일대박’ 실현이나 대북접근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국정원의 몫일 수 밖에 없다.

이병호 원장은 과거 언론기고 글에서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은 대통령이 총괄 운영하므로 국정원의 역사는 그 시대의 대통령과 안보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19년 만에 친정인 국정원에 돌아온 그는 오랫동안 구상하고 별러온 개혁의 칼날을 뽑아 들었다. 적당히 타협하거나 칼끝이 조금이라도 무뎌졌다가는 ‘올드보이의 귀환이었을 뿐’이란 혹평을 면키 어려울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 개혁이란 무거운 짐을 짊어진 그가 어떤 역사를 써 나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201506호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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