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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신촌의 은둔자’ 이신행 연세대 명예교수 - “토론하고 깨어 있는 시민사회가 나라를 지탱합니다” 

YMCA 활동, 농활 설계, 대안학교 운영 등 지역공동체 운동에 매진 … 대학교수 시절에 고집한 현장학습·토론수업은 건강한 시민 양성의 자양분이 됐다 

글 박지현 월간중앙 기자〈park.jihyun@joins.com〉 / 사진 오상민 기자〈oh.sangmin@joins.com〉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이신행 명예교수는 50년 간 시민운동에 천착해 온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의 선구자다. 2007년 정년퇴임 후에도 그는 ‘마을이 학교다’라는 지론을 실천하는 데 온 열정을 쏟고 있다.
그를 처음 마주했을 때 불멸의 프로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약간 굽은 등 위로 고개를 드는 모습부터가 그랬다. 조금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 느릿한 말투…. 살짝 오그라든 그의 오른손이 조금씩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너무나 또렷해 보인다.

권투계의 전설로 알려진 알리가 1981년 은퇴 후 신경성퇴행질환인 파킨슨병을 앓기 시작한 것처럼, 지역사회 운동의 전설처럼 남아 있는 이신행(74)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도 정년퇴임 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알리는 “나비같이 날아 벌같이 쏜다”는 명언을 남겼지만 이 교수는 “마을이 학교다. 사회변동의 힘도 마을 사람들에게서 나온다”고 말했다.

그의 삶은 이 한마디에 모두 응축돼 있다. 이 교수는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의 선구자다. 학창시절 YMCA 활동 15년, 대학 강의 28년, 퇴임 후 대안학교 운영 8년 등 50년이 넘는 세월을 오롯이 지역 시민사회운동의 대의를 설파하는 데 쏟아부었다.

시민사회운동의 방식은 여느 운동가와는 달랐다. 대학 강단에 섰을 때 그는 언론 인터뷰나 사회 이슈에 코멘트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더 몰두했다. 학생들이 사회로 진출하면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세상을 이끄는 주역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스스로 판단하고 구성원들과 협력해 문제를 푸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그가 도입한 게 토론식 수업이다.

이렇게 훈련받은 학생들이 사회로 나가 역량을 발휘하면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즉 풀뿌리 민주주의가 활성화된다. 이게 바로 한국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시민들의 힘이요, 시민운동의 요체라고 그는 말한다. 연장선에서 정년 퇴임을 앞둔 2005년 ‘풀뿌리 사회지기 학교’라는 대안적 대학교를 설립했다. 나아가 지방의회에 시민사회의 주역들이 더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육신은 시들었을지 몰라도 그의 정신은 황혼녘에 더 불탄다.

지난 4월 25일 불편한 노구에도 ‘풀뿌리 사회지기 학교’ 운영에 남은 열정을 쏟아붓고 있는 이신행 교수를 만났다. 언론에 노출되길 극히 꺼렸던 그가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발병한 지 8년이 지난 지금 그의 병환은 더 이상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고 있었다. 면도를 안 한 자리에 까칠하게 돋은 수염마저 하얗게 쇤, 약간은 야윈 듯한 모습이었지만 눈가에 주름이 가득 잡힐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화여대 공대로 올라가는 후문 옆으로 굽이굽이 골목을 올라 가쁜 숨을 몰아 쉴 즈음 그가 머물고 있는 4층 건물이 눈에 띄었다. ‘체화당’이라는 입간판을 내민 카페 상호는 ‘어깨동무하고 선 산벚나무들이 바람과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처럼 사이 좋게 배움과 뜻을 나누자는 의미’로 그가 직접 지었다고 했다.

풀뿌리 민주주의 천착 50년 결실, ‘풀.민.C’


▎이화여대 후문 쪽에 위치한 카페 ‘체화당’은 ‘어깨동무하고 선 산벚나무들이 바람과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처럼 사이 좋게 배움과 뜻을 나누자’는 의미로 이신행 교수의 사저를 개조해 만들었다
이곳은 그의 지역공동체 정신이 응축된 곳이다. ‘풀.민.C’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공동체는 풀뿌리 사회지기 학교(풀), 신촌 민회(민), 카페 체화당(C)을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풀.민.C’는 올해로 10년째를 맞는다.

가장 먼저 ‘신촌민회’가 터를 잡았다. 1992년 ‘무학 신촌’이라는 이름으로 태동했다. 1992년은 지방선거가 처음 실시된 해이기도 하다. 이태영 신촌민회 사무국장(31)은 “이신행 선생의 평소 지론인 ‘회의를 통해 사회적 권위를 만든다’는 게 신촌민회 운동의 핵심이었고 지역운동의 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그간의 경위를 설명했다.

신촌민회는 활동이 뜸해져 중간에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2005년 세 번째 재창립을 기점으로 르네상스를 일구었다. 신촌민회에서는 다양한 지역 이슈를 ‘신촌논단’에서 토론한다. 이태영 사무국장은 “지역이 자립하는 데 필요한 주민 협의체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한다”고 말했다.

그 다음 카페 ‘체화당’이 2001년 이 교수의 사저를 개조, 자리에 들어선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 컴퓨터를 켜고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 찻잔을 사이에 두고 대화에 열중하는 사람 등 여느 카페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 교수는 시골의 마을회관과 같은 ‘모임 공간’으로서의 카페 기능에 주목했다고 한다. 주민들의 휴식을 취하고 공연을 보는 공간으로서의 카페, 주민들이 지역 현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공간으로서의 카페다. 사람들이 모이면 공론이 형성되고 지역사회의 문제를 풀어가는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이는 하나의 ‘카페 실험’에 가까웠다. 2000년 초반 대학가에는 ‘민들레 영토’가 막 들어서기 시작했을 뿐, ‘스타벅스’와 같은 커피 전문점도 드물었다. 2001년 문을 연 체화당은 카페와 공론장을 합친 대안문화 공간으로 기능했다.

‘풀뿌리 사회지기 학교’는 지역사회 일꾼을 길러내는 대안 대학을 표방한다. 굳이 제도권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이들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을 위해 세워졌다. 기존 대학 교육은 주어진 길을 달려가도록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배우는 이)은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는 우리 대학의 현실이다. 풀뿌리 사회지기 학교에서는 학생이 ‘교수’의 관점에서 스스로 발제한 뒤 토론을 통해 생각과 지식을 가다듬는 과정을 운영한다. 이 교수는 이를 ‘토론 공동체’라고 이름 붙였다.

이를 통해 폭넓은 소양과 전문적인 현장 기술을 익힌다. 학사과정은 총 2년 10개월이다. 2년은 교실에서 철학, 건축, 회화, 문학, 종교 학과별 수업을 진행하고 10개월은 현장에 나가 실습을 한다. 학생들은 서울의 골목길을 누비며 지역공동체를 탐방하고, 천연 염색하는 법을 배우거나 음악을 통해 외국인과 소통하면서 인류학과 정치학을 동원해 동네의 현안을 분석한다. 여름에는 전남 진도군 나배도 등에서 두 달간 숙식하며 인간·사회·역사·자연을 공부한다. 겨울에는 필리핀·베트남 등지로 가서 해외공동체를 지원하고 산 경험을 쌓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기여할 시민사회와 지역 커뮤니티가 만들어진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1935년 미국 공화당의 전당대회에서 처음 등장한 말이다. 시민운동·주민운동 등을 통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의 기초로서 지방자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교수가 한결같이 강조해온 말이 있다. “소수의 인물이 받치고 있는 세상은 마치 아래가 작고 위가 큰 건물처럼 아무리 크고 튼튼해 보인다 해도 금방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기대어 만든 세상은 약해 보일지라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이 교수의 이런 삶과 사고방식은 어려서부터 예정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가 공론의 장을 처음 접한 때는 고등학생 시절이다. 1942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명문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해 학내 YMCA 조직인 ‘청록 하이Y’를 이끌었다. 동기생 중에서 공부와 운동, 예능, 웅변 등 다방면에서 잘나가는 이들로 멤버가 구성됐다. 이 교수는 “다행스러운 건 그 모임에서 교육 문제를 토론하고, 상호 교감하며, 문제의식을 길렀다”고 돌이켰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그는 삶의 지향을 결정케 하는 인연을 만나게 된다. 그는 서울 종로에 자리한 YMCA에서 대학생 간사로서의 활동하는 한편, 강원룡 목사가 있던 경동교회에서도 청년 지도를 맡게 된다. YMCA에 몸담은 그가 농촌 참여활동을 기획한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한국판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 격인 ‘농활(농촌 활동)’이 그의 손을 거쳐 대학가에 퍼져나갔다.

농활(대학생농촌봉사활동) 설계, 지역현장의 가교가 되라!


▎1. 2000년 인천 덕적도 안산 앞바다에서 토론수업을 하고 있는 대학생들. / 2. 1980년대 초반, 대학생 200여 명은 현장토론을 위해 울릉도로 향했다. / 3. 2010년 대안학교 고등학생들과 이신행 교수. / 4. 신촌민회는 ‘신촌논단’을 통해 지역 이슈를 논의한다.
1920년대 전 세계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이 일어나며 시작된 농촌활동은 1930년대 들어서 일본의 식민지배로 잠시 주춤했다가 해방 이후 YMCA에서 ‘학생계몽대’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대학생들이 당시 인구의 다수를 점하던 농촌에 가서 민중의 삶을 체험하고 개선안을 고민하는 계기로서의 농활을 모색했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그는 1968년 YMCA ‘학생사회개발단’을 통해 지금의 농활을 기획했다. “부녀들은 부녀들대로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누에, 과수 등 농촌과 직결되는 과제들을 설정도 하고 사전준비를 더 철저히 해서 농촌 개혁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게 좋겠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농촌 활동에 대한 그의 열망은 곧 도시로 확대됐다. 빠른 현대화에 도시 빈민 문제가 대두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는 “산업화의 진전으로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은 낮은 임금에도 열악한 주거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면서 “도시 빈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고 보건와 영양을 챙겨주는 일도 중요한 과제였다”고 말했다. 배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 희망의 빛을 전달하는 삶은 대학생 시절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는 선진 학문을 익히고자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미국 뉴욕대학교(NYU)에서 흑인 시민운동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흑인 시민문화를 연구한 연유에 대해 묻자 “미국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삶을 떠받쳤을 한인들은 마찬가지로 차별과 멸시를 받던 흑인들과 정서적 유대감을 가졌을 것이다. 흑인 시민운동은 미국 내 한인의 문제이자 장차 한국 사회 시민운동의 미래이기도 했다”고 답했다.

1972년 유학을 떠날 당시만 해도 한국의 정치상황은 어수선했다. 다들 권위주의 정권과 싸우던 그 시절 그에게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라는 비아냥도 뒤따랐다. 뉴욕에 도착한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도처에 깔린 소외된 한인 청소년들이었다. 부모의 ‘아메리칸 드림’의 부속물로 미국 땅을 밟은 아이들은 주류 백인사회 자녀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되기 일쑤였다. 그는 이민사회 내 한국인 모임을 만들었고 흑인 시민운동을 연구했다. 또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인종적 차별, 사회적 차별이 어떤 매커니즘으로 고착화되는가를 눈여겨봤다.

8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1982년 모교인 연세대 강단에 선다. 대학 강단에서도 이 교수는 늘 고뇌하는 학자였다. 토론이 깨어있는 시민을 만들고 세상을 바꾼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노무현 대통령도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요즘은 일반화된 토론중심 수업도 그때는 생소했다. 그는 모든 수업을 토론으로 진행했다. 학생들로 하여금 말하고 답하고 결론을 내도록 유도했다. 일방통행식 수업에 익숙한 당시의 학생들은 이 교수의 ‘파격’에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

수업의 주제는 ‘문학에 나타난 정치’, ‘한국의 시민사회운동’ 등 한국 사회와 문학에 투영하는 정치를 탐구하는 방식이었다. 그걸 연극으로 표현하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고 한다. 연극과 대본을 준비하면서 토론해야 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2~3일씩 밤을 새기도 했다. 이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업은 ‘굉장한 연주회’이기도 했다. 악기가 동원되고 가사를 입힌 음악이 되기도 했다. 그는 “토론으로 상상력을 끌어올리고, 인간에 대한 온기로 감싸 안으면서 문제의 초점을 찾아내는 학생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현장토론 수업은 굉장한 연주회였다”


▎이신행 교수는 “한국사회의 풀뿌리 민주주의는 많은 준비가 돼 있다”며 “다음 지방선거는 한국정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 수업의 또 다른 큰 특징은 ‘현장성’ 강조였다. 보길도·한산도·덕적도·지리산 등 한국의 산하와 유적이 강의실로 활용됐다. 현지 강의 시설이 마땅찮을 경우에는 강변에 천막을 치고 100여 명이나 되는 학생들과 야외수업을 한 적도 있다.

그가 채택한 교재도 당시로는 아주 파격적이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김정환의 〈임진왜란〉같이 역사성 강한 교재가 등장한다. 교재가 지리산을 스토리의 한 자락에 깔고 있다면 학생들과 현장수업을 떠났다. 그 동네에 뿌리내린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이야기를 취재해서 왕시루봉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토론에 들어가는 식이다. 일정은 기본 2박3일, 3박4일로 짜인다. 학생들은 야간산행·생태체험 등으로 자연 속의 자유를 맛보기도 하고, 해당 주제를 연극과 노래극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토론의 주제가 ‘남북의 갈등’이라면 국군 토벌 때 간첩으로 남파됐다가 복역 후에 지리산마을에 정착한 주민의 일가친척의 증언도 수집했다. 책에 쓰여진 지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현장에서 확인해서 취사 선택하게 하는 게 그의 토론식 수업의 요체였다.

고민도 많았다. 산교육을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 성향에 따라 좌와 우로 갈리는 학생들의 토론에 대한 평가는 특히 조심스럽고 민감한 사안이기도 했다. 매번의 평가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위장병을 안고 살았다고 한다. “아내는 내 위장이 언제 나으려고 그런 수업을 계속 하냐고 다그쳤어요. 수업이 다가올수록 내 위장은 형편없이 초라해지더군요.”(웃음)

현장 토론수업의 또 다른 수확은 학생들의 끈끈한 연대였다. 학생들은 나이 들어서도 당시의 열정을 기억한다고 이 교수는 전했다. 뜻하지 않은 커플도 생겨났다. “이 수업 덕에 결혼한 커플이 수두룩합니다. 제가 아이들 이름도 지어주고 했어요.”(웃음)

이런 여정을 묶어 나온 책이 〈토론 없는 시대의 토론(1986)〉이다. 1980년대 연세대 학생들의 토론 수업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교수는 여기에서 제자 기형도 시인에 대한 추억도 말해줬다. “형도가 아마 중앙일보에서 일할 때였을 겁니다. 그 친구가 내 책 〈토론(討論) 없는 시대의 토론〉이라는 책에 대해서 쓰겠다고 기사를 썼는데 한자를 잘못 써서 〈시론(詩論) 없는 시론〉이 된 적이 있어요. 허허.” 기형도 시인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89년 타계했다. 이 교수는 인터뷰 도중 기형도 시인이 생각난다며 먼저 간 제자의 이름을 되뇌기도 했다.

이 교수는 오세철 교수 등과 함께 전국 최초로 교수평의회 조직을 만드는가 하면 대학 내 교수 토론체인 ‘연세 경청 예론’ 모임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들 조직은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며 학내 현안에 대한 교수 사회의 공론 형성에 기여한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는 현실정치에 적극 관여하려 한다. 현직교수 시절 현실정치와 극구 거리를 두려 했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룬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지방자치를 의미하는 것이니만큼 지방의회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변에 설파한다. 주민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지방의회를 주민들이 제대로 알고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통해 한국 정치의 근본을 바꾸지 않으면 부정부패, 정치 불신, 패거리 정치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우리 마을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 수단이 바로 지방의회이고요. 주민들이 불편해하고 아쉬워하는 민원도 이제 우리가 의회를 통해 해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지역 발전을 위해 창의적이고 건설적인 어젠다도 계속 개발해야 합니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풀.민.C’라는 지역공동체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영글게 하겠지만 그 과실은 법과 제도로 수확된다. 그는 “중앙정부에서 주는 답을 기다릴 게 아니라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해답을 찾아내자는 의미이지요. 지방자치와 분권, 참여를 통해 공동체에 이익을 구현하는 게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시민사회운동”이라고 말했다.

지방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같은 이유에서다. “한발자국만 떼면 할 수 있는 게 많습니다. 한국사회의 풀뿌리 민주주의도 많은 준비가 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겠지만 다음 선거부터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정치(외교)학과에서 풀뿌리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 지난 30년간 고작 10명 안팎으로 추정된다면 좀 심하지 않은가요? 국회의원 비서진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50~60명 정도겠지요. 이들이 이제 지방의회로 진출해 풀뿌리 민주주의의 견인차가 됐으면 해요. 아마 다음 지방선거는 한국정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로 기억될 겁니다.”

젊은이들은 현실정치 더 많이 뛰어들어야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느 지점에 와 있는 걸까?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이 교수는 아직도 초보적 단계라고 진단했다.

“주변부에 머물렀던 한국이 이제 어느 정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강국들의 결정에 매몰돼 버리고 스스로의 문제의식에 따라 국면을 주도하거나 관심을 유도하는 데는 미흡합니다. 경제도 자기 결정력이 약한 마당에 정치적 변동성이 강한 나라가 바로 한국인 것 같습니다.”

그럴수록 풀뿌리 민주주의와 지방선거 참여 운동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는 2선으로 물러설 작정인 듯하다. 풀뿌리 학교 공동이사장의 직함도 내려놓고 싶다고 했다. 이제 제자와 후배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할 때라는 생각에서다. 이 교수는 학교 생활과 그 이후의 진로에 대해 만족해한다.

“아마 저처럼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부합니다. 아름다운 청년들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음악과 연극을 보여준 게 고맙기만 하지요. 기형도 음악까지도 생생히 기억해요.”

이 교수를 일러 주변에서는 한결같고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라고 말한다. 농활, 토론식 수업, 풀뿌리 민주주의 구현을 통해 시민사회를 활성화하려는 그의 구상이 신촌 민회, 카페 체화당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그는 체화당 밖으로까지 배웅을 나오면서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언제 한번 몸이 좋아지면 지리산 왕시루봉을 함께 오르자면서 말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 무지의 세계에 한줄기 빛을 뿌려주는 것. 우리는 그것을 ‘계몽’이라 부른다. 신촌에서는 ‘풀뿌리 사회지기 학교’ 가 주민들의 배움터로 자리한다. 그의 삶에서 일제 강점기 농촌의 학생들과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지식인들의 도전을 다룬 소설 〈상록수〉의 채영신(박동혁)이 떠오른 이유다.

- 글 박지현 월간중앙 기자〈park.jihyun@joins.com〉 사진 오상민 기자〈oh.sangmin@joins.com〉

201506호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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