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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원전 주변 덮친 갑상선암의 공포 

방사선 영향 맞다. 하지만 원전 때문 아니다? 

원전 주변 갑상선암 환자 545명 국내 첫 공동소송… 관련 업계는 위험성 부정하지만 세계 각국은 ‘탈핵’ 추세 뚜렷

▎핵발전소에서 뿜어 나오는 방사능에 대한 우려가 갑상선암에 의해 공포로 진화하고 있다. 주민들이 제기한 공동소송은 원전산업의 미래를 가늠할 전초전이 될 전망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는 예부터 장수마을로 꼽혔다. 빛깔이 붉고 입자가 고운 황토흙이 풍부해 농사짓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맞닿은 구시포 갯벌에는 한때 바지락과 지금은 귀한 몸이 된 노랑조개가 많아 주민들의 수입원으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물과 흙이 좋으니 주민들은 대개 큰 병치레 없이 천수를 누렸다. 구순(九旬)을 넘기는 건 예사로 여겨질 정도였다.

흉흉한 기운이 돌기 시작한 건 지금부터 20여 년 전인 1990년대부터였다. 구시포 앞바다의 가막도에서 굴과 조개류가 폐사하는가 하면 망둥어, 숭어 등 연안에서 잡히는 어류에서 기형이 나타났다. 마을의 소와 개는 기형 새끼를 낳았다. 수십 마리의 송아지가 유산되거나 사산되는 일도 이어졌다. 70세 이전의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주민들 가운데 암환자가 꼬리를 물고 생겼다. 모두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고 짧은 기간에 갑자기 벌어진 일들이어서 주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특별히 환경이변이 생겨났던 것도 아니다. 변화라면 가까운 영광 바닷가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선 것뿐이었다. 주민들의 시선은 발전소로 모아졌다. 영광원전(현재 한빛원전)은 1986년 8월 1호기 가동을 시작으로 이듬해 2호기, 1995, 1996년 3·4호기를 잇따라 증설했다. 원전은 자룡리와 5㎞, 구시포 해안과는 불과 2㎞ 남짓 떨어져 있다. 원전의 열을 식히는 데 사용한 온배수는 자룡리 연안인 고리포와 구시포 갯벌로 밀려들었다. 주민들은 발전소를 의심했다. 각종 역학 조사가 진행됐지만 발전소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이 반복됐다.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 못해 한동안 조용했던 자룡마을이 최근 다시 술렁이고 있다. 원전 주변에 살면서 갑상선암에 걸렸다는 피해자들의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지난해 10월 부산지법 동부지원의 판결이 기폭제가 됐다. 부산 기장군 고리원자력발전소 인근 주민 이진섭(48) 씨 가족이 한국수력원자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다.

원전주변 갑상선암 피해 호소 500명 넘어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 계마리의 밭에 핵폐기물 반출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현수막 뒤로 한빛원전의 원자로 돔이 솟아 있다.
이씨와 아내 박모(48)씨는 고리원전 10㎞ 안팎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이씨는 2011년 직장암에 걸렸다. 이듬해 2월 아내 박씨도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아들 균도(22) 씨는 자폐성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이씨는 아내가 갑상선암에 걸리자 2억원의 위자료 지급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박씨의 갑상선암 발병과 원전의 방사능 노출과 관련이 있다며 15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원전에서 발생한 물질의 무해성에 대한 입증 책임을 가해자가 지도록한 것이다. 원전 방사능 피해 소송에서 가해자 입증 책임을 지도록 한 첫 판결이다.

전북 고창군 상하면 신자룡마을에서 만난 김주성(57) 씨는 “발전소가 생긴 뒤부터 마을에 거의 매년 암환자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신자룡마을에서 태어나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신자룡마을은 고리포 해변과 걸어서 5분 거리로 가깝다. 70여 명의 주민이 농사와 어로를 병행해 생계를 잇는다. 한빛원전은 고리포 해안의 갯벌을 사이에 두고 2㎞쯤 떨어져 있다. 김씨의 아내도 6년 전 갑상선저하증에 걸려 약물치료를 하고 있다. 김씨는 “작년에 60대 주민이 암으로 숨졌고 올해도 69세 주민 한 명이 역시 암으로 숨졌다. 현재 74세 할머니가 3년 전부터 암투병을 하고 있다”며 “암 외에 갑상선 질환을 앓고 있는 주민도 여럿 있다”고 전했다.

이진섭 씨 가족의 1심 판결이 나온 뒤 ‘핵 없는 세상을 위한 고창군민행동(이하 ‘군민행동’)’이 공동소송을 추진하려고 지난 2월부터 한빛원전 주변 갑상선암 피해자를 접수한 결과 주민 64명이 갑상선암에 걸렸다며 참여를 신청했다. 신청자 대부분은 발전소로부터 반경 10㎞ 이내에 있는 상하면과 해리면 주민들이었다. 상하면과 해리면의 인구(약 6500명) 대비 갑상선암 환자 비율은 0.98% 정도다. 이는 국내의 인구 10만 명당 갑상선암 환자(2012년 기준 여성 88.6명, 남성 17.3명) 평균치 중 발병률이 높은 여성을 기준으로 한 비율(0.088%)의 10배를 넘는 높은 수치다. 윤종호 군민행동 운영위원장은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능물질인 ‘요오드131’이 갑상선암의 주범”이라며 “원전 주변에서 수확한 식물과 어패류를 섭취한 주민들의 몸속에 방사능물질이 장기간 축적돼 암질환을 일으켰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동소송을 위한 갑상선암 환자 신청 접수는 전국 원전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부산 고리, 울주 신고리, 경주 월성, 울진 등에서 접수된 갑상선암 환자는 고창보다 훨씬 많다. 고창군 신청자 64명을 포함해 모두 545명이 이 소송에 참여했다. 소송 대리인은 이진섭 씨 가족의 소송을 맡았던 법률사무소 ‘민심’의 변영철 변호사가 맡았다. 이번 공동소송은 원전 주변 10㎞ 이내에서 5년 이상 거주하거나 일했던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 신청자의 63%는 바닷가에 거주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경북 울진읍 읍내리(42명), 부산 기장군 죽변리(41명), 울산 울주군 신암·나사리(34명),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15) 등에서 신청자가 많았다. 원전별로는 고리지역이 243명으로 가장 많았고, 울진 124명, 월성 83명 등이다.

신청자 중에는 일가족이 암에 걸린 경우가 많이 눈에 띈다. 경주환경운동연합에 따르면 경주지역의 갑상선암 피해자 89명 중 세 가족이 갑상선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받았다. 원전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는 김모 씨의 경우 자신과 딸이 갑상선암에 걸렸다. 원전 근처 마을에서 15년 동안 살아온 오모 씨는 아들과 딸이 모두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80대 할아버지인 성모 씨도 아들과 함께 갑상선암에 걸려 수술 후 치료를 받고 있다. 이상홍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과거에 원전 근처에 살았다가 지금은 다른 곳에 거주 중인 갑상선암 피해자들의 접수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갑상선암 공포, 과장이냐 은폐냐?


▎원전에서 방출된 저선량 방사능의 위험성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저선량 방사능도 인체에 해롭다는 주장이 많아지고 있다.
갑상선암은 방사능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갑상선은 성장호르몬인 타이록신(thyroxine)을 만들어내는데, 중요 성분이 바로 방사성물질인 요오드이다. 요오드가 몸에 들어오면 약 30%가 갑상선으로 모여들어 호르몬 생성을 돕는데 부족하면 갑상선 기능저하증이 생기고 지나치게 농축되면 갑상선비대증이나 암을 유발한다. 대한직업환경의학회는 이진섭 씨의 1심 소송 때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갑상선 암의 가장 중요한 위험요인은 치료적 방사선 노출과 환경재해로 인한 방사선 노출”이라며 “체르노빌 원전사고에서도 여성들에게서 갑상선암이 유의하게 증가했고, 방사선 노출과 갑상선암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됐다”고 밝혔다. 변영철 변호사는 “국내외 여러 연구 결과가 갑상선암과 방사능의 직접 연관성을 확인하고 있다”며 “원전 주변 주민들 중 특히 해안가 거주자들에게서 갑상선암 발생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것은 원전에서 공기나 물을 통해 배출된 방사능이 축적된 해산물을 장기간 섭취해 내부 피폭이 이뤄졌기 때문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원전 방사능과 갑상선암에 대한 관련성을 확증하는 연구 결과는 아직까지 없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연구 결과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4년에 걸쳐 진행된 원전 주변 주민에 대한 역학조사 보고서가 유일하다. 안윤옥 서울대 의대 교수를 책임자로 한 역학조사단은 연구원만 219명, 84억원의 연구비가 투입돼 원전 주변 지역 주민 1만1367명을 대상으로 암 발병 위험도를 평가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는 오히려 논란을 증폭시켰다. 원전 주변지역의 암 발생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높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원전 방사능과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고 애매하게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반핵진영의 전문가들은 “한수원에 면죄부를 준 억지 결론”이라고 비판했다.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방사선 관련 암 발생률과 상대적 위험도는 원전 주변 주민에게서 대조지역(근거리·원거리 거주자) 비교 대상자보다 높게 나타났다. 남자에게선 간암의 경우 주변지역 위험도가 1.4배로 대조지역(원거리 1.0 기준)보다 높게 나타났다. 여자는 유방암 1.5배, 갑상선암 2.5배로 조사됐다. 조사단은 이 같은 조사 결과를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분석하면서도 “주변지역에서 원전 방사선이 암 발병에 영향을 미쳤다면 남녀에게서 일관된 경향을 보여야 한다”며 “원전 방사선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염색체 이상에 대한 조사에서도 원전 종사자가 대조군보다 염색체 이상 빈도가 높게 나타났다. 암이나 유전적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하지만 방사능에 가장 가까이 노출되는 원전 종사자의 암 발생비율은 대조군보다 특별히 높게 나타나지 않았다. 조사단은 이를 방사능과 암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한수원도 이 조사 결과를 원전 방사능의 위험성을 부정하는 핵심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한수원 관계자는 “원전에서 방출되는 방사능이 위험한 수준이라면 원전 근로자들부터 몸에 이상이 생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피폭의 종류에 따라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방사능 피폭은 두 가지로 나뉜다. 피부가 방사능에 노출되는 ‘외부 피폭’과 공기나 물, 음식물 섭취를 통해 방사능이 체내에 쌓이는 ‘내부 피폭’이다. 외부피폭은 물이나 공기 중에 쉽게 씻기지만 내부 피폭은 체내에서 쌓여 방사성물질의 반감기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피폭이 이뤄진다. 쉽게 말해 독극물이 몸에 묻는 것과 체내로 들어가는 차이다.

한국전력연구원의 김희근 박사팀이 2010년에 발표한 기술논문에 따르면 원전 종사자가 원자로 운전이나 장비 보수 작업 과정에서 받는 피폭은 대부분 외부피폭이다. 반면 원전 주변 주민의 피폭은 방사성물질에 오염된 음식물 섭취를 통한 내부 피폭이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조사됐다. 원전에서 배출된 방사성물질이 해양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여기서 자란 식물이나 동물에 전이되기 때문이다. 이상홍 경주환경연 사무국장은 “원전 종사자의 경우 내부피폭이 적고 주기적인 건강검진과 순환근무 등 회사에 의해 체계적으로 관리를 받지만 주민들은 방사능에 오염된 흙과 바다에 둘러싸여 평생을 살고 있다”며 “이런 차이를 무시한 채 ‘원전 종사자의 암 발생이 적으니 주민들도 영향이 없다’고 말하는 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전성 강조하려 사실 왜곡해 불신 자초


한편으론 한수원이 논란과 불신을 자초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한수원이 원전 방사능의 위험성을 축소하려고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한 사례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방사능폐기물 유출량을 수년 동안 실제보다 낮춰 공개해온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국회 미래창조과학위원회 소속 정호준 의원(서울 중구·새정치민주연합)에 따르면 한수원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바다에 방류한 액체 방사능폐기물의 실제 양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양이 무려 10만5천 배나 차이를 보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수원이 이 기간 동안 방류한 액체 폐기물 양은 710.7조 베크렐이었지만 홈페이지에 공개한 양은 69억 베크렐에 불과했다. 기체 폐기물도 같은 기간 642.9조 베크렐이 배출됐지만 홈페이지에는 41조 베크렐만 배출한 것으로 표기해 15.7배 축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수원은 이에 대해 “삼중수소를 제외하고 올렸다”고 해명했다. 정 의원은 “배출핵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삼중 수소를 제외하고도 이를 알리는 문구를 넣지 않은 것은 배출량을 축소하려는 고의성이 짙다”고 지적했다.

원전 안전성을 평가할 때 원자력산업에 우호적인 연구 결과만을 채택해온 것도 객관성을 의심케 한다. 안윤옥 교수팀이 진행한 역학조사의 경우 연구비 상당액을 당시 원전을 관리했던 한전에서 부담했다. 내용상 원전 방사능의 영향을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 여럿 있었지만 결론에서 무시됐다. 보고서에서 밝힌 결론은 애초에 연구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안 교수 팀은 보고서 결론부에서 “원전 종사자 및 지역주민의 방사선 피해 주장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 제시로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평한 뒤 “반핵단체와 인근 주민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에 대해 과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기존에 건설된 원전의 원활한 가동뿐 아니라 원전의 추가 건설에도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고도 했다. 이 때문에 비판적 연구자들은 “애초부터 원전의 안전성을 입증하기 위해 데이터가 짜 맞춰 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한수원과 조사단 측은 반핵 진영과 일부 학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보고서를 검증하기로 했지만 3년째 기초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원전관련 연구단체들이 한수원 비호에 나서고 있다. 한국원자력학회와 대한방사선방어학회는 지난 5월 제주 컨벤션센터에서 개최한 춘계학술대회에서 원전 주변 주민의 갑상선암 발병과 원전 방사능의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원전 주변에 노출되는 방사선량이 다른 지역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학회 측은 원전 주변 여성 거주자의 갑상선암 발생 비율이 유독 높은 이유에 대해 ‘방사선 이외의 다른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들이 유력한 근거로 제시한 것도 안 교수 팀의 역학조사 보고서다.

원자력 관련 연구단체 중 국내 최대인 한국원자력학회는 한수원을 비롯한 원전 관련 공공기관과 민간기업들이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회장을 비롯해 부회장, 감사, 재무이사 등 주요 직책을 한수원과 원자력연구원, 원전관련 기업 임원들이 맡고 있다. 학회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한수원을 비롯해 56개 원전관련 기관·단체·기업의 특별회비로 충당한다. 한수원의 연회비만 3천만 원에 이른다.

‘탈핵’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는 원전 정책


▎미국 스리마일 원전 방사능 유출사고를 기점으로 세계의 원전 수는 서서히 하향세로 돌아섰다. 스리마일 섬의 원자로에서 방사능 증기가 나오고 있다.
한수원과 국내 원전관련 학회들은 저선량방사선의 장기 피폭은 위험성이 크지 않다는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지만 해외에선 반대 논리가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당초의 가장 권위적인 의견은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의 이론이다. 100mSv(밀리시버트) 이하의 저선량방사선은 건강에 끼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주장이다. 또 내부피폭과 외부피폭의 위험도를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한다. 대다수 원전 국가에서 ICRP의 각종 연구 결과를 인용해 방사선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국내에서도 안 교수팀의 보고서를 비롯해 각종 연구에서 ICRP가 만든 방사선 측정 모델을 적용하고 있다. ICRP는 원전산업계에 우호적인 최대 국제기구다.

여기에 맞서는 단체가 유럽방사능위험위원회(ECRR)이다. ECRR은 최신 연례보고서(ECRR 2010)에서 원전 주변 지역의 암 발생비율 증가가 원전의 방사능과 관련 있다고 밝혔다. ECRR은 또 일정량 이상의 방사능부터 영향을 끼친다는 ICRP의 방사능 피폭량 산출 모델을 부정하고 적은 양의 방사능도 인체에 영향을 끼친다고 반박했다. ECRR 보고서는 2003년부터 매년 작성돼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핵 관련 정책 수립에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국내에선 변영철 변호사 측이 소송 증거자료로 삼기 위해 현재 번역작업 중이다. ECRR 소속 크리스토퍼 버스비 박사는 오는 8월 21일 열리는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과학계의 이 같은 새로운 견해를 밝힐 예정이다. 변 변호사는 “한수원 측에서도 ECRR 보고서를 검토한 것으로 알지만 자신들의 주장과 상반되기 때문에 그동안 보고서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갑상선암의 공포는 원전 가까이 사는 주민들에 국한된 것일 수 있지만 2011년 후쿠시마 사고는 우리나라도 100%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일본 못지않게 적지 않은 원전을 보유하고 있고 노후화가 시작돼 사고 위험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5위의 원전 대국이다. 미국이 104개로 가장 많고 프랑스가 58개, 일본이 54개, 러시아가 32개, 이어 한국(28개) 순이다. 국토 면적을 고려한 원전 밀집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현재 건설 중인 원전 5기와 건설이 예정된 것을 포함하면 2024년까지 국내 원전 수는 42개로 늘어날 전망이다.

원전 증설 정책은 국제적 흐름과 정반대의 행보다. 핵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든 지 오래다. 1989년에 정점에 오른 뒤 26년째 원전 개수와 발전용량이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섬의 핵사고와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사고의 영향 때문이다. <한국 탈핵>의 저자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는 “한국처럼 지속적으로 원전을 짓는 나라가 있는데도 전 세계의 가동 원전 개수가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나라들이 원전을 줄여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원전 감소 추세는 특히 유럽에서 뚜렷하다. 유럽은 1988년에 177개에서 2013년 131개로 약 50개의 원전 가동을 중단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에는 각국의 탈핵 움직임이 더 빨라지고 있다. 2대 원전국 프랑스는 지난 5월 26일 핵 발전 비중 감축 내용을 담은 ‘녹색성장 에너지 전환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현재 75%인 핵 발전 비중을 2025년까지 50%로 낮추기로 했다. 일본은 사고 이후 거의 모든 원전 가동을 중지했다. 우리나라에 이어 원전 밀집도 2위인 벨기에도 운영 중인 원전을 순차적으로 정지시키는 단계적 탈핵을 결정했다. 이탈리아도 국민투표를 거쳐 원전 재가동을 취소했고, 독일은 17개 중 9개를 중지시키고 나머지 8개는 2022년까지 모두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도 기존의 원전 정책 기조를 유지하기로 한 나라는 한국과 미국, 캐나다뿐이다. 윤종호 핵 없는 군민행동 운영위원장은 “원전 방사능의 안전성이 100% 입증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정부의 핵 정책은 마땅히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국민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원전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건 태양광, 풍력 등 재생가능에너지들이다. 친환경발전의 모범국가로 꼽히는 독일은 재생가능에너지로 전체 전력의 27%를 생산하고 있다. 2050년까지 80%로 늘리기로 하고 관련 기술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재생가능에너지 비율은 3.6%에 불과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전을 짓고 있는 중국도 원전 비중은 2%이고 재생가능에너지가 18%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에선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신재생에너지발전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발전차액지원제도(신재생에너지원의 전력 생산단가와 기준가격의 차액을 정부가 보상하는 제도)를 시행해 전국에 소규모 태양광발전시설 설치를 늘리는데 기여했으나 2011년 말 폐지됐다.

‘저위험 고효율’로 향하는 세계 에너지산업


▎태양광을 비롯한 재생가능 에너지 발전산업은 원전과 반비례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폐도로나 건물 옥상, 쓸모 없는 유휴지 등을 활용한 소규모 태양광 발전소 모델(사진)은 국토활용밀도가 높은 우리나라에 적합하다.
원전은 ‘고효율 청정에너지’로, 재생가능 발전은 ‘저효율 고비용 에너지’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상식이다. 2011년 정부가 발표한 발전단가에 따르면 태양광은 ㎾h당 660원으로 가장 비싸고 원자력은 39.12원으로 가장 낮았다. 그러나 같은 해 현대경제연구원은 <원전의 드러나지 않는 비용> 보고서에서 “사고 발생 위험 비용, 원전해체 및 환경복구 비용, 사용후 핵연료 처분 비용이 제대로 산정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최근 결정된 고리 1호기 해체 비용은 6033억 원으로 추산된다. 기존의 발전단가에 포함되지 않은 비용이다. 또 미국의 존 블랙번 듀크대학 교수(경제학)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원자력, 태양광 발전단가 비교 연구에서 비교 시작점인 2000년도에는 핵발전 비용이 태양광발전보다 6분의 1로 저렴했지만 2010년부터 역전돼 2020년에는 거꾸로 태양광이 6분의 1 수준으로 저렴해진다고 분석했다.

최근 정부가 국내 첫 원전인 고리 1호기를 폐쇄하기로 결정한 것은 정부의 원전 정책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태양광발전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지원정책을 내놓으면서 2010년대 들어서 침체를 겪었던 국내 신재생에너지 발전산업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

원전이 줄어들고 재생에너지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세계적 추세다. 핵에너지가 문명의 자양분으로서 반세기 넘게 인류 발전에 기여한 바가 물론 적지 않다. 하지만 세계가 핵에너지를 포기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상식적인 이유다. 인간이 다루기엔 너무 위험하고 완벽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안전하고 고갈될 걱정이 없는 에너지원은 지천에 널려 있다. 햇빛, 바람, 물결, 지열이 바로 그것들이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201507호 (201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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