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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환율주권론자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의 고언 

“국민소득 1만 달러 올리려고 국가경제 희생해서야 되겠나?” 

■ 강대국 간 통화전쟁이 촉발한 외환시장 왜곡에 국내 수출기업 발만 동동 ■ 정치논리에 순응하는 경제관료들이 환율정책을 펴면서 동일한 실패 반복해 ■ 현재의 외환보유고로는 국제결제은행(BIS)이 요구하는 수준 충족하기 어렵다 ■ 한국이 미국의 신뢰할 만한 일원이라는 확신 줘야 신축적인 환율정책 운용 가능 ■ 대통령을 정점으로 비상한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파국이 성큼 다가올 것

▎7월 6일 그리스발 악재로 원-달러 환율이 3.5원 오른 1126.5원을 기록했다. 지난 4개월여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 사진·중앙포토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수출로 가난을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 경제에서 수출이 추세적으로 감소하는 것은 중병을 선고받는 것과 같다. 일부 논객이 제조업 한계론을 내세우며 서비스업이 살 길이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지만 눈을 씻고 둘러보아도 기존 주요 수출품목인 자동차·반도체·전자기기·선박·석유화학제품·철강 등을 대체할 규모의 거대한 해외수요를 창출할 서비스업종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개발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언어장벽을 극복하고 기존에 형성된 다국적 네트워크에 침투하는 것이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의료서비스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으나 완벽한 품질관리로 ‘지인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나라’가 되려면 갈 길이 멀다.

일각에서는 언제까지 수출에 목매고 있을 거냐며 내수를 진작시켜 수출과 내수를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감성에 적당히 호소하면서 이해하기도 쉬워 언론의 단골메뉴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부존자원이 없고 인구규모가 작은 나라에서는 내수진작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2000년대 초반 신용카드대란은 몸에 맞지도 않는 내수진작 정책을 금융완화를 통해 추진한 데서 비롯됐다. 결국 가계부채가 늘고 채권시장이 마비되는 큰 혼란을 초래하여 성장잠재력을 갉아먹었다.

통일독일은 경제규모, 인구 등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대한민국보다 한 수 위의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출의존도가 높은 경제운용 패턴을 유지하고 있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일독일이 수출을 여전히 강조하는 이유는 부존자원이 없고 인구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아 국내 시장규모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60년대 초반에 서독을 방문해 에르하르트 수상으로부터 ‘수출입국(輸出立國, Export Drive)’ 전략을 권유받고 실천에 옮겼다. 그 당시 외국학자들과 국제기구에서는 ‘수입대체(輸入代替, Import Substitute)’ 전략을 권유했고 많은 개발도상국이 실천에 옮겼다가 모두 실패한 역사를 보면 대한민국으로서는 지극히 다행스런 일이었고 박 전 대통령의 혜안이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수입대체 전략이 실패한 이유는 협소한 국내시장을 상대로 하는 소규모 공장이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를 실현할 수 없어서 생산단가가 높을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높은 보호관세를 부과하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지만 부패지수가 높은 개발도상국에서 밀수를 막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수입대체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수출로 경제를 유지하려면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북미시장서 도요타 캠리보다 비싼 쏘나타의 비극


▎현대차 울산공장 수출 선적부두에서 선적을 기다리는 수출용 차량들. 경직된 환율 정책으로 인해 한국의 자동차 수출이 위기를 맞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수출경쟁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여러 가지다. 근본적인 요인은 기술이다. 남보다 앞선 기술이 있으면 제품 차별화를 통한 시장지배력이 있기 때문에 순항할 수 있다. 연구·개발(R&D)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다. 기술수준이 유사하면 원가경쟁력이 있어야 하는데 원가경쟁력을 결정하는 요인은 노동생산성과 환율이다. 노동시장 구조개혁이 논의되는 배경이고 환율정책을 불완전한 시장에만 맡겨놓기 어려운 사정도 여기서 비롯된다.

기술수준과 노동생산성은 정부정책에 의해 단기적으로 변화하기 어려운 장기 요인이지만 환율은 정부정책에 의해 단기적인 변화가 가능하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에 수출기업들이 당면한 고통을 호소하며 환율절하를 간청했을 때 정책당국은 대안으로 ‘생산성 10% 향상’을 내세웠다. 의술에 빗대면 독감에 걸려 당장 죽어가는 환자에게 항바이러스제를 처방하지 않고 한약을 달여 먹고 체력을 키우라고 처방한 것과 같았다.

2015년 한국 수출산업은 미증유의 위기를 맞고 있다. 현대 쏘나타의 북미시장 판매가격이 도요타 캠리보다 높은 상황은 한국경제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나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당국은 탄소배출량 규제와 같은 기업부담 요인에 관해 산업의 목소리보다 국제사회에서의 체면을 우선시하고 있고, 통화증발을 통한 강대국 간 통화전쟁으로 왜곡된 외환시장을 마주하고 앉아 시장원리 존중을 앞세우며 적극적인 행보를 하지 않고 있어 수출기업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환율정책에 있어 구조적으로 심각한 문제는 잘못된 정책 처방에 대한 반성 없이 주기적으로 같은 패턴의 실패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2008년 위기는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을 의식해 의도와 관계없이 시장참여자들에게 환율정책을 사실상 포기한 인상을 준 데서 비롯됐다. 한계선 상의 중소수출기업과 노동자의 일자리를 지키려는 환율정책을 대기업만 살찌우는 나쁜 정책으로 매도하는 해괴한 논리까지 나돌았었다. 그 결과 2004년도 말에 1천억 달러 수준이던 순해외 채권(총해외채권-총해외채무)이 2007년도 말에는 0 수준으로 떨어지고 경상수지도 적자로 돌아서면서 외부충격에 취약한 경제가 됐다. 환율이 지속적으로 절상되면서 달러 표시 외채를 들여 오는 것이 유리해 외채가 급증했고,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수출이 부진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IMF 위기상황 직전까지 몰렸다가 겨우 숨을 돌렸다.

1997년 위기에도 국민소득 1만 달러 달성의 청사진이 배경에 걸려 있었다.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환율이 절하되면 안 되므로 ‘생산성 10% 향상’이라는 아이디어를 대안으로 내걸고 외환시장 개입을 자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두 사례 모두 국내 정치가 경제의 숨통을 누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국민소득 1만 달러, 2만 달러 달성은 정권의 치적을 자리매김하기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이라 5년 단임정권의 핵심인사들이 유혹을 받기 쉽다. 무리해서 달성해 놓은 후 다음 정권에서 후유증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영광만 추구한 후 실패에 대한 책임을 다음 정권에 떠넘길 수 있다는 것도 치명적인 매력이다. 통상 환율정책 실패의 후유증이 경제위기로 현실화되는 데는 2~3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 이유는 제품 생산-유통 사이클에서 비롯된다. 환율이 절상되어도 당장에는 수출과 경상수지에 큰 영향이 없다. 지금 수출하는 제품은 수개월 또는 수년 전에 이미 주문을 받아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환율절상으로 채산성이 맞지 않아도 고객거래선을 유지하기 위해 출혈수출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정치논리에 발목 잡힌 환율정책과 관료들


▎아베 총리가 미 상하원 합동연설에 나서는 등 미일 관계가 호전되면서 인위적 엔화 절하에도 미국은 눈을 감아준다는 평가가 나왔다. / 사진·중앙포토
그러나 파국은 오게 되어 있다. 더 이상 자금회전이 되지 않게 돼 부도를 맞게 되거나 용케 버텨도 결국 기술이 낙후되어 시장에서 퇴출된다. 채산성이 악화되어 적자가 나면 새로운 기계를 도입할 자금을 축적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기계가 출현하는 시점에 소비자 선택에 의한 퇴출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삼색도(三色度) 인쇄기계를 써서 제품을 생산하다 오색도 인쇄기계가 나왔는데 새 기계를 살 돈이 없으면 더 이상 판로를 확보할 수 없다. 가격 이전에 주문 자체가 끊겨버리기 때문이다. 가끔 ‘환율절상에도 끄떡없는 수출 운운’하는 신문기사나 사설, 칼럼이 뜨면 왠지 서글퍼진다. 한국경제에 이리도 중요한 수출과 환율에 대한 자칭 전문가들의 이해수준이 상식 밖의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수준의 글이 가끔이긴 하지만 주요 언론에 여과 없이 실리는 것에도 허탈감을 느낀다.

산업과 환율의 관계에 대한 미세한 부분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경제관료들이 꿋꿋하게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는데 정치논리에 순응하여 환율정책을 수행하다 보니 동일한 실패가 반복되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한 2~3년의 시차는 후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데 좋은 핑계거리를 제공해주는 것이어서 정책수행에 있어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는 측면이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국민소득 목표를 제시하고 환율정책을 포기하여 이미 두 차례의 큰 위기를 겪고 나서도 외환 기준의 국민소득 3만 달러, 4만 달러 목표가 제시돼 환율정책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올라갈 때마다 통과의례처럼 외환위기를 겪어서는 안 된다. 정권을 창출한 소수 핵심인사의 자화자찬 축제를 위해 수많은 가정이 또다시 해체의 아픔을 겪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책수립을 하거나 기업현황을 취재하고자 여론조사를 할 때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기업들이 견딜 만하다고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상장기업의 경우에는 주가하락을 걱정하기 때문에 솔직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중소기업의 경우는 혹시나 돈줄이 막혀 바로 부도사태를 맞을까 두려워 실상에 대해 입을 다문다. 이러한 왜곡 또한 정책 수행에 있어 도덕적 해이가 개입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괜찮다는데 왜 꼭 그래야 돼?”

최근에 환율당국은 미국 재무부의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당혹해 하고 있다. 일본 중앙은행이 거의 무제한으로 엔화를 찍어내면서 엔화 절하를 인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우리 정책당국이 찔끔찔끔 조심스럽게 시장에 개입하는 것에는 꼬박꼬박 경고를 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미국 재무부 관리가 이상한 사람이거나, 일본을 편애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소위 아베노믹스의 뒤에는 ‘동북아 안보질서 재편’이라는 큰 그림이 걸려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미국은 중국의 군사대국화를 견제하고자 일본의 재무장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복지재정 지출 부담 때문에 국방예산을 늘릴 여력이 전무하고 오히려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재무장은 입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기에 일본 경제를 화끈하게 살릴 방책으로 아베노믹스를 허용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국 산업이 일본 산업의 장애물이 되어 일본 경제의 부활이 늦어지고 동북아 안보질서 재편의 시간계획에 차질을 빚는 것을 미국이 달가워할 리 없다. 그러다 보니 한국 산업의 손발을 어느 정도 묶어둘 필요성에 미국·일본의 암묵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중국의 환율정책에 대해서 유화 제스처를 쓰는 이유도 결국은 아베노믹스에 대한 국제적 반발을 둔화시키려는 시도일 수 있다. 유로화의 절하 배경도 엔화의 약세 국면에 대한 유럽 제조강국들의 반격의 일환이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국가의 제조업과 일본 제조업은 고도기술 품목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엔과 유로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통화라서 양적완화의 부작용이 작지만 우리 원화의 경우에는 무제한으로 찍어내면 부동산 가격 폭등과 같은 심각한 후유증을 겪기 때문에 정책수단 선택에 한계가 있다는 데 고뇌의 본질이 있다. 한국은행이 금리인하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미국·유럽·일본 등 강대국의 통화전쟁 와중에 한국호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경제 난국의 진앙(震央)이다.

국제정략에 영향받는 환율, 미국의 이중잣대


▎지난 5월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주재한 2015 국가재정전략회의. 최중경 전 장관은 환율정책의 성패에 따라 경제운용의 성과가 갈린다고 강조한다. / 사진·중앙포토
우리가 적절한 환율정책을 펴고 해외무대 진출을 확대하는데 있어 미국의 협조적 자세는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한다. 우리가 아랍에미리트에 판매한 원자력발전소도 한미 컨소시엄의 승리였다. 총체적 난국으로 들어서고 있는 한국 경제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교의 틀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중국에 의도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군의 주요 무기체계가 미국산이고 전시작전통제권(OPCON)이 미군에게 있는데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조중상호방위조약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경제논리를 내세워 사드(THAAD) 배치문제에 관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 보면 용납하기 어려운 일탈이다(공중급유기를 유럽의 에어버스로 선정한 것도 내놓고 얘기는 못해도 미국의 섭섭함이 클 것이다).

틈을 보이는 한미동맹을 다시 공고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미국이 갖고 있는 불안감을 해소시켜줄 필요가 있다. 동북아 안보, 나아가 세계 안보의 중요한 한 축을 일본에 맡기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을 적대시하는 한국이 거추장스런 존재로 비칠 수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태평양전쟁 종전 후 처음으로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한 것은 단순한 외교의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걸 싫어도 인정해야 한다. 미국의 의심을 해소해서 한국이 미국의 안보질서 체제 안의 신뢰할 만한 일원이라는 확신을 줘야 우리 산업의 애로와 신축적인 환율 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우리의 설명이 먹혀들 것이다. 미국은 오로지 미국의 이익을 고려하여 모든 대외정책을 일관성 있게 결정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미국 정부의 안보라인이 한국 편을 들면서 재무부 매파들을 견제해 극한상황을 피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비화이다. 지금 외환위기가 오면 미국 정부의 안보라인은 어떤 입장을 취할까?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2008년 위기는 한미 통화 스와프로 넘겼으니 결국 미국의 도움으로 넘긴 것이다. 대미 외교가 중요한 이유는 안보문제뿐만이 아니다. 소규모 개방경제(Small Open Economy)인 대한민국의 대외부문이 항시 외환위기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고 세계금융의 중심은 기축통화국인 미국이다. 안보이든 경제이든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미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지금 외환당국이 처한 상황은 역대 가장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비상한 노력이 요구되는 이유다. 외환당국은 미국의 카운터파트와 스킨십을 강화하는 노력과 함께 시장 개입의 빈도와 강도에 대한 전략을 재검토해야 한다. 처한 위기의 크기에 비례해 대책의 강도가 정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외환시장에 개입하면 뒷말이 남게 마련이다. 미국 재무부와의 긴장관계도 관리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회 국정감사 등을 통해 곤욕을 치르게 된다. 특히 외평기금에 손실이 발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되면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나 외평기금에 기업회계 원칙을 적용해 손실을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고, 달러를 원화로 평가한다는 것도 허망한 것이다. 외환위기가 와서 환율이 폭등하면 외평기금에 막대한 평가차익이 생기는데 외환위기를 부른 당사자들을 표창해야 하는가? 표창할 수 없다면 외평기금에 손실이 발생했다고 책임을 묻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위안화 허브 역할을 자처하면서 달러의 기축통화(Key Currency) 지위를 지키고자 하는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도 하책이다. 조용히 순리에 따르면 되는 것이지 소리내면서 할 이유가 없다. 위안화 허브가 기존의 금융허브 밖에서 형성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보다 면밀한 이론적 검토가 필요하고, 중국이 상하이와 홍콩을 제치고 서울에 힘을 실어줄 현실적 이유가 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환율당국은 이제 용감한 투사이자 현명한 협상전략가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한다. 한 가지 앙청(仰請)하고 싶은 것은 경제통 ‘국회의원들께서는 환율정책을 국회 토론 마당으로 끌어내지 마십사’ 하는 것이다. 국회에서 왈가왈부하기엔 너무나 전문적이고 민감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2004년도에 국회에서 환율정책을 문제 삼음으로써 외환당국의 손발을 묶은 것이 2008년 위기의 단초가 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때 일부 국회의원이 크게 문제삼았던 파생시장 개입을 통해 확보한 막대한 규모의 달러 매수 권한이 2008년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됐음을 밝혀둔다.

위안화 허브 역할 자임은 위험한 하책

환율정책이 정치에 귀속되지 않도록 정권 차원의 외환 기준 국민소득 목표를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하다. 정권 심장부에서 국민소득 목표에 집착하는 한 환율당국이 정책적 필요에 의해 환율을 절하하는 데 정치적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달러 표시 국민소득은 환율에 따라 변동되기 때문에 신뢰도가 낮다. 구매력지수(Purchasing Power Parity, PPP) 평가에 의한 국민소득이 널리 통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보아도 굳이 외환기준에 의한 국민소득 목표에 비중을 둘 이유가 없다. 사실 당장 원-달러 환율을 500원 수준으로 내리면 외환기준 국민소득은 크게 증가한다. 그렇지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국민의 실질 생활수준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해외여행 경비 감소, 수입물가 하락으로 잠깐 소비가 늘어났다가 바로 외환위기의 파국을 맞게 될 뿐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수출경쟁력을 결정하는 장기적 요인인 기술 수준과 노동생산성은 단기간 내에 개선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환율정책을 그대로 두고 만들어내는 단기 수출대책은 의미가 없다. 시간 낭비일 뿐이다. 특히 생산성을 증가시켜 대처하라는 정책은 1997년의 상황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함을 명심해야 한다. 수출기업에 대한 금융지원은 제한적으로나마 기업의 숨통을 터서 부도의 위험을 낮춰 주므로 적극 실시할 필요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환위험을 헤지하라는 주문도 탁상공론(卓上空論)이다. 지금은 환율의 변동성에 따른 위험이 문제가 아니라 환율의 수준이 문제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대외부문은 과거에 비해 튼튼하기 때문에 외환위기에 노출될 염려가 없다는 주장은 검토해볼 여지가 크다. 우선 2004년도 말부터 불과 3년 동안에 일어난 대외부문 악화 현상을 보아도 대외부문의 기본 속성이 민감하고 불안정함을 알 수 있다. 환율이 정상궤도를 이탈하면 대외부문의 건전성은 급속히 떨어진다. 동태분석(Dynamic Analysis)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해야지 현재의 단면만 보는 정태분석(Static Analysis)은 의미가 없다. 또한 앞으로 밀려올 파도의 높이가 예전 수준에 머무르리란 보장도 없다. 외환보유고도 결코 충분한 것이 아니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의 필요외환보유고 수준을 감안하면 외환보유고를 좀 더 확보해야 안심할 수 있다.

아베노믹스의 첫 번째 화살인 엔화 무제한 방출을 끝내고 풀린 돈을 되감을 준비를 해야 한다. 풀린 돈이 물가를 자극하게 되면 국채 이자율이 오르게 되고 이자 지급 증가로 재정부담이 커지게 된다. 이자 지급으로 재정부담이 커지면 아베노믹스의 숨은 목표인 ‘일본재무장을 위한 재원조달’에 차질을 빚게 된다. 또 국채 이자율이 높아지면 자산가격이 하락하여 경기가 하강할 것이다. 아베노믹스의 첫 번째 화살은 기축통화인 달러의 화폐주조효과(Seigniorage Effect)를 엔화도 누릴 수 있다는 전제 아래서나 유효하다. 그러나 엔화는 결코 달러가 될 수 없기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더 이상 지속되면 결국 일본 경제도 망가지고 아시아 경제, 나아가 세계 경제에 큰 부담을 줘서 모두를 불행하게 할 것이다. 이제 두 번째 화살과 세 번째 화살에 힘을 실어주고 첫 번째 화살은 퇴역시켜야 한다. G7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엔저현상에 우려를 표명하고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가 ‘엔이 더 이상 절하될 여지가 없다’는 취지로 화답한 것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느낌이나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립서비스로 그칠지 행동으로 옮겨질지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서둘러 거시정책과 외교 전략의 틀 바꿔야

소규모 개방경제에서 금리정책의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다. 금리에 손을 대면 재정거래과정(Arbitrage Process)을 통해 국제수준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한국 금리가 국제수준보다 높으면 외국자금이 국내로 유입되어 금리를 낮추게 되고 한국 금리가 낮으면 국내자금이 해외로 유출되거나 기존에 유입된 외국자금이 이탈하여 금리를 올리게 된다. 선진국으로 가면서 복지재정지출이 늘어 나게 되면 재정운용의 탄력성이 낮아진다. 다시 말하면 재정이 정책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게 된다. 이미 대한민국은 선진국도 경계하는 보편적 복지를 과감하게 도입하는 무리수를 두어 재정운용의 재량이 크게 줄어든 상태다.

따라서 소규모 개방경제인 대한민국 경제에서는 환율이 거의 유일한 거시경제의 정책변수다. 경제운용의 성과가 환율정책의 성패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역대 정부에서 정권재창출에 실패한 경우는 국민소득 목표를 앞세워 환율정책이 실패한 정권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만 달러 소득을 외치던 김영삼 정부가 그랬고 2만 달러 소득을 외치던 노무현 정부가 그랬다. 결국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는 미국에서만 통용되는 얘기가 아니다. 환율정책 실패의 대가는 크고 광범위하게 치러지는 것이다. 환율이 갖는 정책변수로서의 무게감을 제대로 느끼는 것은 거시경제정책 입안자의 기본소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기본소양이 부족한 사람들이 거시경제정책 수립과정에 필요 이상의 입김을 행사해왔다. 경제가 잘 돌아가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시장원리 운운하는데 국제 투기세력까지 참여하는 외환시장에서 한국경제가 적정수준의 성장을 하도록 알맞은 수준의 환율을 알아서 정해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환상이다. 무너지고 있는 한국경제를 되살리는 길은 환율 수준의 조정을 통해 수출경쟁력을 회복하는 것 이외에 백약이 무효이다.

정책당국은 현 상황이 기업이 비용절감을 통해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산업기반에 결정적 타격이 가해지기 전에 서둘러 거시정책의 판과 외교전략의 틀을 바꿔야 한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비상한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파국이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번에 파국을 맞으면 한국경제는 자생력을 잃고 해외자본에 종속되게 된다. 1997년 위기는 재정이 건전하여 우리의 힘으로 대부분의 구조조정이 이뤄졌지만 이제는 복지지출 증가로 재정여력이 없기에 외국자본에 의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중국·EU와 FTA까지 체결했으니 외국자본의 전횡을 막을 길도 없다. FTA로 경제영토가 늘어났다고 홍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덩치 큰 상대방들이 들으면 웃을 것이다. 상대적 약자인 우리가 그들의 먹이가 되고 종속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정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201508호 (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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