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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이슈] 신(新)사정정국, 재계가 떤다 

 

장원석 이코노미스트 기자
수출 부진, 기업실적 악화, 중국 증시 폭락의 삼중고에도 제목소리 못 내고 일제히 몸조심 … 청와대 심기 살펴 소송 취하하고, 오너가 대국민 사과 나서는 등 경영심리 극도로 얼어붙어

▎국내 30대 그룹 사장단이 7월 9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간담회를 갖고 “경제위기 극복에 앞장서자”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 1. 지난해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가전전시회(IFA)에선 작은 사건이 있었다. 삼성전자가 조성진 LG전자 사장 등이 매장에 전시된 자사 세탁기를 고의로 파손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현지 경찰까지 출동한 소동은 업계의 논란으로 확산됐고, LG전자가 고의로 파손한 것이 아니라며 수습하려 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삼성전자가 정식 수사를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도어 연결부(힌지)를 파손하는 장면을 폐쇄회로(CC)TV로 확인했다는 게 삼성전자의 주장이었다. 수사가 시작됐고, 겨우 세탁기 하나 때문에 LG전자는 압수 수색까지 당했다. 이미지가 구겨진 LG는 관련 삼성전자 임직원을 증거 위조,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맞고소했다.

이에 검찰은 지난 2월 조 사장 등 LG전자 임직원은 불구속 기소하고, LG전자의 맞고소에 대해선 무혐의로 결론을 내렸다. 이에 반발한 조 사장은 검찰에 제출된 당시 세탁기 파손 동영상을 유튜브에 전격 공개하며 여론전에 나섰다. 그러나 불과 한달 뒤인 3월 31일, 두 회사는 전격 화해를 발표했다. 양사는 “소모적인 분쟁을 중단하고 소비자를 위한 제품 품질과 서비스 향상에 주력하자는 양사 최고 경영층의 대승적 결단”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처벌 불원서를 제출했음에도 검찰이 공소를 유지하기로 해 검찰과 LG전자 간 2라운드가 남았지만 일단 두 회사는 표면적으로 다툼을 끝냈다.

# 2. 6월 2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언론사 카메라 앞에 섰다. 좀처럼 공식 석상에 나서지 않던 그다. 그런 이 부회장이 대국민사과를 했다.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2차 유행의 진앙지로 지목된 탓이다. 이 부회장은 “국민 여러분께 너무 큰 고통과 걱정을 끼쳐 드렸고, 머리 숙여 사죄한다”며 “특히 메르스로 인해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과 유족, 아직 치료 중인 환자분들, 예기치 않은 격리조치로 불편을 겪으신 분들께 죄송하다”고 말했다. 사태가 수습되는 대로 병원을 대대적으로 혁신하고, 감염 질환에 대처할 예방 활동과 백신·치료제 개발에 적극 나서겠다는 약속도 했다.

삼성 오너 일가가 공식적으로 국민에게 사과한 것은 2008년 4월 ‘삼성 특검’ 사태로 물의를 빚은 직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사과문을 발표한 이후 7년 만이다. 아버지처럼 이 부회장 역시 대국민 사과라는 정공법을 택했고, 진정성을 전달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이날 이후 삼성서울병원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는 차츰 사그라졌다. 다행히 메르스도 진정세에 접어들었다.

겉보기에 별로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두 사건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첫째 사건부터 살펴보자. 사건 발생 초기부터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갈 데까지 가보자’며 날을 세웠다. 가전 업계에서 치열한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두 회사의 진흙탕 싸움은 소재부터 그야말로 유치했다. 그러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면서 둘 모두 쉽게 그만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갑자기 화해를 발표했다. 이를 두고 한 언론사는 ‘양사의 합의엔 청와대의 중재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2월 24일 박근혜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의 오찬을 진행할 때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소송 취하의 필요성 등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에 따라 양측 고위 관계자 간 협의가 진행됐고, 극적 화해라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중재해 사태가 해결됐다면 일단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각을 약간만 틀어보면 청와대의 말 한마디에 기업이 자존심을 걸었던 분쟁까지 중단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조언이었든 엄포였든 그 얘길 듣고 싸움을 계속할 순 없진 않았겠느냐”며 “정권 말기였다면 과연 양사가 화해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메르스 사태 책임론’ 삼성 뒤의 청와대


▎선진국의 공세적 환율정책으로 수출에 애를 먹고 있는 현대차 공장 내부. 기업들은 정부에 애로 사항을 개진하는 데 몸을 사린다. / 사진·중앙포토
둘째 메르스 관련 사과에서는 일단 삼성의 발빠른 대처가 돋보였다. 국가적 재난을 불러온 삼성서울병원 측의 안일한 초기 대응은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었는데 만약 이 부회장이 직접 나서지 않았다면 쉽게 진화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국민사과라는 카드가 이 부회장에게 힘든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어쨌든 승부수는 꽤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삼성이 오너가 직접 나서서 사과하자 불똥이 다른 곳으로 튀었다. 메르스 사태의 책임을 삼성이 지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삼성이 잘못한 것 맞지만 정부는 뭐하고, 일개 병원이 책임을 지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사실 삼성 책임론의 출발점은 6월 11일 국회 메르스대책 특별위원회에 참석한 삼성서울병원 감염과장의 말 한마디였다. “국가가 뚫린 겁니다. 이것은.” ‘삼성이 아니고 국가가 뚫렸다는 말이냐’는 추가 질문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으니 변명할 여지가 없다. 민심에 불을 지른 이 말 한마디는 삼성서울병원이 아닌 삼성그룹 전체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국가가 뚫렸다’는 말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말이라면 리더가 백 번, 천 번 고개를 숙여도 할 말이 없지만 ‘삼성 혼자 뚫린 게 아니라 국가 전체가 뚫린 것’이란 의미였다면 결코 과한 주장이 아니다.

이렇게 화살이 삼성을 향하는 동안 운 좋게 정부는 시간을 벌었다. 정부는 애초 메르스를 가볍게 여겼다. 낙타 고기를 먹지 말라는 황당한 대책을 내놓은 게 명확한 증거다. 게다가 환자가 발생했는데도 정보 공개를 미뤄 사태를 확산시켰다. 200명에 가까운 국민이 이 병에 걸렸고, 그중 일부는 사망했다. 부실한 방역 체계에 의료 선진국이라던 나라는 졸지에 외국인 관광객마저 기피하는 후진국 취급을 받았다. 삼성이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최종 책임이 정부의 몫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은 메르스 사태가 마무리되면 박 대통령이 대국민사과 등 입장 표명을 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참담한 한국 경제, 호재가 안 보인다


하지만 6월 17일 국립보건연구원을 방문한 박 대통령이 송재훈 삼성서울병원장과 나눈 대화는 충분히 의구심을 살 만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투명한 공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철저한 방역을 당부했다. 그러자 송 원장은 “대통령님과 국민 여러분께 큰 심려를 끼쳐 드려 너무 죄송하다”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국민 여러분께’는 당연한데 ‘대통령님’이 왜 사과의 대상에 포함되는지 많은 국민이 궁금해했다. 긴 말 필요 없이 송 원장이 90도 고개를 숙여 박 대통령에게 인사하는 사진 한 장은 이 시기 정부와 기업의 위계가 어떤지를 확실하게 보여줬다. 송 원장이 청와대 직원도 아닌데 말이다.

이 두 장면은 청와대의 기에 눌린 우리 기업의 움츠린 현재를 잘 보여준다. 가뜩이나 최악의 실적 부진에 몸살을 앓고 있는데 투정조차 못할 상황이니 진보 진영에서도 ‘기업이 불쌍하다’는 얘기가 나올 만하다. 최근 한국 경제가 직면한 현실은 최악 중의 최악이다. 경제부처 장관들이 연일 ‘괜찮다’고 말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한국은행은 6월 9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3.1%(4월)에서 2.8%로 낮췄다. 1월엔 3.4%였다. 정부가 올해 3%대 성장률 달성을 위해 11조8천억원가량의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포함한 22조원 규모의 재정 확대를 발표했지만 중앙은행마저도 ‘3%가 어렵다’고 본 셈이다. 국책연구기관인 KDI와 해외 기관 중 비교적 전망이 정확한 국제통화기금(IMF)도 전망치를 각각 3.0%, 3.1%로 하향 조정했다.

당장의 악재보단 별 다른 호재가 없는 게 더 문제다. 일단 심각한 내수 부진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가뜩이나 부진했던 내수는 메르스 직격탄을 맞았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메르스 사태가 본격화된 6월에 소비 위축이 컸다”며 “메르스와 가뭄 영향으로 전 분기 대비 2분기 성장률은 당초 예상보다 훨씬 낮은 0.4% 내외”라고 진단했다.

그나마 한은의 전망은 낙관적이다. 사실 내수와 소비는 메르스 사태 이전인 5월부터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5월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제조업 출하량은 내수와 수출에서 모두 감소했지만 내수 감소폭이 -1.4%로 수출(-0.9%)보다 컸다. 3월에 -0.7%였다가 4월 1.1%로 반등에 성공했지만 5월 들어 다시 주저앉았다. 1분기 양호한 흐름을 이어갔던 서비스업 생산 역시 마이너스(-0.5%)로 전환했다. 도소매업(-1.3%), 숙박 및 음식점업(-1.1%) 등 내수와 밀접한 업종이 크게 위축됐다. 4월 반등했던 소매 판매는 정체(0%)됐고, 설비 투자는 1.3% 감소했다.

이 와중에 유럽에선 아테네발(發) 폭풍이 급습했다. 다시 부각된 그렉시트(Grexit,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 우려 때문이다. ‘설마’했는데 7월 5일 유럽채권단의 구제금융안 수용 여부를 묻는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는 시장의 기대와 달랐다. 전 세계 금융시장은 요동쳤고, 코스피·코스닥도 크게 출렁였다. 특히 코스닥은 7월 6일부터 나흘 동안 5.62%나 하락했다. 209조원까지 늘어났던 시가총액은 다시 100조원대로 내려앉았고, 7월 9일 장중 한때는 힘들게 쌓아올린 700선을 내놓기도 했다.

이 와중에 더 큰 태풍이 불어 닥쳤다. 중국 증시 급락이다. 상하이 지수는 6월 12일 이후 한 달도 안 돼 무려 33%가 빠졌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내놓은 대대적 증시 부양책 덕에 일단 진정되긴 했지만 미래를 장담할 순 없다. 중국 증시의 급락은 우리에게 그렉시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충격이다. 중국 정부가 실물 경제(기업 경쟁력)를 살리려 주가 부양에 힘썼는데 이게 실패하면 실물 경제가 받을 충격은 보나마나다. 기업 실적은 물론이고, 부동산 가격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대출을 잔뜩 받은 국민이 부동산을 내다팔기 시작하면 중국 경제의 경착륙과 성장 둔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나마 잘나가던 미국 경제도 최근 브레이크가 걸렸다.

세계 경제가 이 모양인데 수출이 잘 될 리 없다. 그나마 한국 경제를 지탱해온 수출이 올 들어 급격히 준다. 상반기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5.0% 감소한 2690억 달러였다.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 연속 수출액 증가율이 마이너스다. 반도체와 무선·통신기기 등이 버텨줬지만 전통적으로 효자 역할을 했던 자동차·철강·석유화학·가전 등 8개 업종이 크게 부진했다. 신흥국 수요 위축과 지난해부터 이어진 원화 강세, 전 세계적 공급 과잉 등이 원인이다. 하나같이 우리가 손 쓸 방도가 거의 없는 외부적 요인이다.

‘요청만 하고 기업 목소리 안 들어준다’ 불만 누적


▎7월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72차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부의 시책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수출 부진의 결과는 기업 실적에서 곧바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이 외부감사법 적용 법인 3065개를 대상으로 분석한 ‘1분기 기업경영분석’에 따르면 1분기 기업의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6% 증가에서 4.7% 감소로 전환됐다. 총자산증가율도 전년 동기 대비 1.9% 증가에서 1.1% 감소로 돌아섰다. 특히 대기업 매출액 증가율은 +1.7%에서 -5.5%로 크게 떨어졌고, 중소기업 역시 +1.5%에서 -0.6%으로 하락했다. 제조업(0.6%→-5.7%)과 비제조업(3.3%→-3.2%) 모두 성장성이 크게 나빠졌다. 그나마 수익성(매출액영업이익률)은 4.7%에서 5.1%로 소폭 개선됐다. 그러나 이는 무역수지의 불황형 흑자 양상과 같다. 전년과 비교해 국제 유가 등 수입 물가의 하락폭이 컸던 탓에 단기적으로 효과를 봤지만 기업의 정상적인 수익 구조 개선으로 보긴 어렵다. 사실상 쥐어짜낸 이익이란 얘기다.

너도나도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도와달라는 말조차 못 꺼내는 분위기니 기업들의 속이 타 들어갈 만하다.

사실 박근혜 정권 들어 정부와 재계는 손발이 척척 맞진 않았다. 한국 경제의 저성장기 진입 우려가 본격화된 중요한 시점이었으나 결과는 나빴다.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직접 재계 총수들을 불러 고용과 투자 확대에 나서달라고 요청했고, 각 기업도 어느 정도 보조를 맞췄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시간 선택제 일자리와 임금 인상 등 기업 입장에서 쉽게 받기 어려운 정책에도 최대한 협조했다”며 “정부 역시 경제민주화 정책 속도조절 등으로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그랬던 정부와 재계의 관계에 균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취임 이후다. 최 부총리는 난데없이 사내유보금 과세(기업소득 환류세제) 카드를 꺼냈다. 2013년 11월 야당에서 사내유보금에 과세를 하자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을 때 “(과세를 한다고) 투자를 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경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던 그다. 친기업·친시장주의자로 꼽히던 그의 일격에 재계는 크게 당황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예고 없이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부적절하다’는 뜻을 밝혔지만 소용없었다. 재계 관계자는 “제도의 시행 여부보다는 사전에 논의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며 “겉으론 파트너라고 말하면서 기업을 마치 지시 대상으로 여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 최태원 SK 회장 등 재벌 총수들이 연이어 실형을 선고 받았다. 재계에선 ‘남일 같지 않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반면 기업이 큰 기대를 걸었던 규제 개혁은 영 속도를 못 냈다. 외국인투자촉진법 정도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결과물이 없었다. ‘압박만 하고, 요청은 안 들어준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 만했다. 그러나 재계는 침묵했다. ‘언제든 SK나 CJ처럼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고, 실제로 청와대는 그럴 의지와 힘을 끊임없이 보여줬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실적 부진이 아닌 흔들리는 조직”이라며 “겉으로는 ‘기업이 살아야 한다’면서 뒤로는 매서운 사정 칼날을 휘두르니 기업이 움츠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레임덕 차단용’ 대기업 사정 본격화?


▎3월 13일 인천시 송도 포스코건설 본사를 압수수색한 검찰 직원들. 검찰은 7월 3일 서울 대치동 포스코 본사도 압수수색했다. / 사진·중앙포토
실제로 ‘설(舌)’로만 떠돌던 대기업 사정은 올 3월 포스코건설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구체화됐다. 동부그룹과 신세계가 리스트에 올랐고, ‘다음 후보는 ○○’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성완종 리스트와 메르스 사태가 연이어 터지면서 주춤했지만 검찰 출신인 황교안 국무총리의 취임과 맞물려 본격적인 사정 정국이 시작되리란 예상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황 총리 역시 취임과 함께 “반부패 개혁을 확실하게 추진하겠다”며 “비리와 적폐(積弊)를 도려내고 비리가 자생하는 구조를 과감하게 제거하겠다”고 밝혔다. 지지율이 30% 초반으로 떨어진 박근혜 정부가 국민 사이에 정서적 반감이 큰 대기업 수사를 통해 분위기를 반전하고, 조기 레임덕 차단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역대 정권에서 집권 3년차에 대규모 사정이 이뤄졌다는 점도 이 같은 예상에 힘을 보탠다. 이명박 정부는 2010년 한화그룹, 노무현 정부는 2005년 두산그룹을 상대로 대대적 수사를 벌인 바 있다.

이런 상황에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까지 찍어내는 박 대통령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눈으로 확인했으니 기업이 위축되는 건 당연하다. 정부는 6월 30일 2030년 온실가스 배출전망치(BAU)보다 37% 감축하는 것을 골자로 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확정했다. 당초 시나리오보다 훨씬 강화된 감축안이었다. 우리나라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제조업 비중이 높다. 당연히 산업계가 받을 충격이 크다. 이에 전경련 등 30개 경제단체와 발전·에너지업종 38개사는 공식성명을 내고 “추가적인 감축을 위한 제반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가운데 과도한 감축목표를 내놓은 것은 기업의 부담을 늘려 결국 국내 경제의 발목을 잡는 규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임에도 과한 비판은 자제하는 분위기다. 역대 어느 정권보다 수직적인 정부와 기업의 관계 속에 불만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기업의 속앓이다.

7월 9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8차 무역투자진흥회의 전후 상황도 비슷했다. 이날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6조원의 무역금융 지원금을 포함한 116조원 규모의 수출 경쟁력 강화 대책을 보고했다. 엄청난 대책처럼 보이지만 91조원은 민간 기업이 투자할 돈이다. 게다가 이미 투자하기로 확정한 돈까지 포함한 액수다. 내용도 대부분 재탕이다. 지난해 8월 내수 기업의 수출기업화 대책을 발표한 이후 1년 새 네 번이나 대책을 내놨으니 그럴 만하다. 그럼에도 이 전 세 번의 대책의 효과에서 대해선 명확한 답을 못 내놨다. 박일준 산업부 무역투자실장은 지난 4월 수출 대책의 성과를 묻는 질문에 “어느 정도 성과를 냈는지 개량적으로 파악하긴 힘들다”고 답했다.

이번에도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재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한 대기업 임원은 “무역금융 지원을 늘리기로 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진짜 중요한 환율 대책은 빠졌다”며 “당장 급한 건 놔두고 매번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니 답답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환율 리스크는 최근 수출 대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올 상반기 수출은 약 60만대로 지난해보다 3.8% 줄었다. 엔저를 등에 업은 일본 제조사의 수출이 증가세를 나타낸 것과 상반된다. 산업부는 수출 부진의 원인으로 ‘엔·유로화 약세에 따른 가격 경쟁력 약화’를 꼽고 있다. 그러나 내놓은 대책은 ‘피해기업 지원강화와 중소·중견 수출금융 및 마케팅 지원이 전부였다.

속마음과 달리 일단 재계는 정부의 방침에 힘을 실었다. 같은 날 삼성·현대차·SK·LG 등 주요 그룹 사장단 27명은 전경련 콘퍼런스센터에 모여 긴급 간담회를 가졌다. 주요 그룹 사장단이 모여 위기 극복을 주제로 한 목소리를 낸 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7년 만이다. 회의를 마친 사장단은 공동성명서를 통해 “대내외 변수에 흔들림 없이 예정된 투자를 진행하고, 수출 경쟁력 확보를 위해 새로운 시장 개척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전통시장 살리기, 국내 여행 가기 캠페인, 외국 관광객 유치 등 민생 경제 살리기에 필요한 조치를 적극 강구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기업은 그렇지 않다”

이를 두고 재계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나왔지만 성명서를 뜯어보면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못했다. 곳곳에서 말조심한 흔적이 보인다. 재벌 총수 특사 요청은 ‘장기간 수사나 경영자 부재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실질적으로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기업인들이 현장에서 다시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정도로 에둘러 표현했다.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도 ‘정부의 경제 정책만으로는 힘에 부칠 수도 있다는 점에 우려를 함께했다는 표현 정도로 마무리했다.

어쨌든 아직까진 서로 손을 맞잡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 아슬아슬한 공생이 앞으로도 지속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재계에 누적된 불만이 정권 후반기로 가면서 다양한 형태로 표출될 수 있다는 의미다. 한 대기업 임원은 “법인세 인상을 정부가 막아주고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현재 법인세 과세체계는 3단계 과표 구간으로 나눠 최저 10%에서 최고 22%의 세율을 적용한다. 야당 측은 이명박 정부에서 맞춘 법인세 최고세율을 다시 25% 수준으로 되돌리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는 ‘법인세율 인상은 투자·고용을 위축시켜 내수활성화 등 경제활성화에 역행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버티고 있지만 고질적인 세수 결손을 해결하지 못하는 가운데 근로자의 지갑만 턴다는 여론이 거세지면 정부나 새누리당의 입장도 달라질 수 있다. 지난해 걷은 199조3천억원(일반회계 기준)의 세수 중 소득세는 53조3천억원으로 전체의 26.7%를 차지했다. 전년대비 1조원가량 줄었지만 법인세(42조7천억원)와 부가가치세(약 57조1천억원)가 더 많이 줄어 비중은 오히려 늘었다. 소득세 수입은 2010년 법인세 수입을 추월한 데 이어 올해는 사상 처음으로 부가가치세 수입까지 앞지를 전망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가능성은 작지만 만약 법인세에 관한 정부의 입장마저 바뀌면 재계도 이 정권과 선을 그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어설프게 정부와 대립각을 세워봐야 기업으로선 좋을 게 없다.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대통령제 아래서 정권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도와주는 건 어려워도, 괴롭히는 건 쉽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정권에 등을 돌리면 정책이든 국책사업이든 제대로 안 된다. 더욱이 최근의 경제 상황에서는 재계의 도움이 절실하다. 요즘 정부가 공을 많이 들이는 사업 중에 창조경제혁신센터라는 게 있다. 전국 거점별로 창조경제 컨트롤타워를 만드는 작업이다. 박 대통령 역시 세종시만 제외하고 13번의 출범식에 모두 참석하며 힘을 실어줬다. 그런데 이 사업에 참여한 대기업 중 일부는 이미 출구전략까지 짜뒀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한 대기업 관계자의 지적은 의미심장했다.

“하라고 하니 하긴 한다. 그러나 이걸 진짜 제대로 하려면 이 정부 임기 내에 결과물은 안 나온다. 그게 벤처고, 투자 아닌가? 그러나 곧 성과 압박이 시작될 거고, 어차피 2년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을 다들 하고 있을 거다. 대기업들이 저마다 센터를 설립하면서 구색은 갖췄지만 어차피 큰 투자는 아니다. 부동산이든 인력이든 얼마든지 다르게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기업은 그렇지 않다.”

- 장원석 이코노미스트 기자

201508호 (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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