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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리포트] 9·11 테러 14년… 뉴욕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 

‘포스트-테러’의 트라우마는 참혹했다 

글·사진 김해완 뉴욕 거주 청년 철학도
‘안보 최우선’을 선언했지만, 중심과 주변부는 차별 심화… 9·11의 의미에 진정한 통찰이 아쉬워
원인 모를 공포와 경악을 자꾸만 상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괴롭다. 추모의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보였던 9·11의 상흔도 그렇다. 일차적인 감정의 반응이 통찰로 이어지지 못할 때, 그리하여 감정이 감정으로만 남을 때, 트라우마는 만성질환이 된다. 21세기 벽두의 참상 9·11의 치유를 위해선 ‘ 왜?’라고 되물어야 한다. 슬픈 기억을 직시해야 한다.


▎9·11 박물관의 전시물 중 하나로 희생자의 얼굴을 자수기법을 활용, 테러의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미국은 ‘NEVER FORGET’이라는 말을 여러 방면에서 홍보·실천하고 있다.
2001년 9월 11일. 중동의 극단주의 세력인 알 카에다(Al-Qaeda)가 비행기 두 대를 납치하여 뉴욕 월가의 세계무역센터를 들이받았다. 21세기가 막 비상하던 즈음, 세계 최강국의 상징 도시를 폭격해버린 테러 사건. 이날 약 3천 명의 사람이 사망했다.

작년 9·11 드라마는 공식적으로 매듭을 지었다. 우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났다. 미국은 3년 전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면서 전쟁의 명분을 이미 달성한 상태였다. 또,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내린 공터 ‘그라운드 제로’에는 9·11 기념관이 위풍당당하게 완공되었다. 상처 입은 월가는 이제 역사적 비극의 흔적를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으로 연일 분주하다.

바로 그해인 작년, 나는 뉴욕에 첫발을 디뎠다. 이 길에서 9·11과 조우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9·11의 충격은 2001년 당시 내 삶을 비껴갔던 데다가 그 후로도 미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계 정세에 대해서 특별히 공부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지 상태에서 처음 만난 뉴욕은 멀쩡해 보였다. 나는 촌스럽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 관광객 틈에 끼어서 월가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재즈, 쇼핑, 연애의 도시! 이 도시에서 테러의 검은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상자 한 명 한 명을 영원히 기리겠다는 아름다운 기념 분수대와 함께, 9·11은 그 추모의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보였다.

9·11, 기억의 범람


▎1. 월가 근처 브루클린 브릿지 입구다. 현재 월가는 9·11 비극의 흔적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양복을 입은 샐러리맨들과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로 연일 활기차게 북적거린다. / 2. 돌 위에 새겨진 것은 9·11 때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며, 그 건너편으로 보이는 것이 13년에 걸쳐 완공된 9·11 박물관의 모습이다. / 3. 새로이 완공된 세계무역센터. 맨해튼의 최남단에 서서 그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하루하루 늘어날수록, 나는 9·11이라는 이름에 반응하게 되었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처럼 14년 전의 그날을 점점 뚜렷이 기억하게 된다. 물론 이 기억은 내 것이 아니다. 그날 이후 뉴욕에 편재해 있는 익명의 기억이자, 집단의 기억이다. 뉴욕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부터 9·11에 대한 복수적인 기억들이 내 주위를 흘러다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선 뉴욕 사람에게 9·11은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는 거대한 드라마였다. 미국 전역을 연합시킨 애국의 날이자, 1만8천 명 뉴욕 시민이 슬픔에 빠진 애도의 날이며, 전 세계에 테러 시대가 선포되었던 비극의 날이다. 내가 깜짝 놀랐던 것은 이 모든 반응이 몹시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14년의 시간이 무색하도록 감정의 강도는 강렬했다. 이 앞에서 딴지를 거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가 차마 두려울 만큼.

또한 행정적인 절차에서도 9·11의 여파는 대단했다. 외국인이 비자를 발급받는 절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로워졌고, 모든 유학생이 구매해야 하는 ‘SEVIS 바코드’는 미국 내에서 내 동선을 한눈에 파악하게 해주는 암호가 된다. NYPD(New York Police Department: 뉴욕 경찰 경찰국)의 태도도 거칠어졌다. 내 친구의 형을 외모가 수배범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두 번씩이나 감금했고, 내 텅 빈 캐리어도 의심스럽다며 지하철에서 일방적으로 열어젖혔다. 놀랍게도 현재 뉴욕에서는 경찰의 이런 예고 없는 습격이 용인되는 분위기다.

뜨거운 기억과 살벌한 일상. 불과 물처럼 극명한 이 불균형의 중심에는 여전히 9·11 그날이 있다.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사건이 사건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 공간이 더 이상 전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건은 기억으로 남고, 기억은 현재에 개입한다. 뉴욕 사람이 9·11을 기억하는 방식과 뉴욕 공간이 변해가는 방식은 정확히 연결된다. 그렇다면 사건의 본질은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그치지 않고 ‘그 때문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도 찾아야 한다. 완결된 드라마가 보여주지 않는 후속편을 찾아야 한다.

지금부터 뉴욕을 흘러다니는 9·11의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한다. 망각, 공포, 애국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9·11을 대하는 주요 감정 유형을 먼저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이 감정들은, 국가가 9·11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는커녕 악화시키면서 수동적으로 발생하는 반응이다. 이른바 기억하기 싫어도 강요되는 기억인 셈이다. 반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이 바라보는 9·11 이야기도 있다. 바로 외국인의 기억이다.

망각, 재개발이라는 리셋(Reset)


▎하루 일과를 마감한 후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뉴요커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미국인’ 혹은 ‘뉴욕인’의 전형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은 없다. 이것이 바로 뉴욕의 특징이다.
9·11 사태에 대한 가장 허무한 반응은 망각이다. 사건이 안겨준 상처를 극복하고 마침내 떨쳐내는 그런 ‘능동적 망각’이 아니다. 9·11 자체가 애초부터 어떤 충격도, 영향도, 의문도 남기지 못한 채 까맣게 잊혀지는 것이다. 세계가 주목했던 9·11 사태가 누군가에겐 지난주 뉴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사건은, 그냥 소멸된다.

이런 무관심자는 곳곳에 존재한다. 9·11 관련 어떤 자료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또 막상 둘러보면 공기처럼 어디서나 쉽게 발견된다. 이들은 왜 이 정도로까지 세상 일에 무관심한 걸까? 답은 쉽다. 먹고 살기에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돈은 벌기 급급하고, 수면 시간은 부족하고, 남의 일에 감정을 쏟을 만한 에너지도 없다.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개츠비>에서 묘사한 뉴욕의 자동차 수리공 윌슨처럼. “그는 늘 지쳐 있었다.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문간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길 가는 사람이나 자동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들은 일상의 좁은 영역을 넘어서는 사회적 사건은 처음부터 나와 상관없는 세계라고 딱 선을 긋는다. 설령 9·11 테러가 한 번 더 터지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뉴스를 보며 좀 놀라워하다가도, 이윽고 잊어버릴 것이다.

망각은 사건에 대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이것도 현실을 대하는 하나의 뚜렷한 입장이다. 내 구역을 건들지 않는 이상 그 외의 어떤 일에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인 것이다. 9·11 이후, 이 태도가 월가에 등장했다. 바로 재개발이었다. 사람들이 사건을 숙고할 겨를도 없이 일상에 매달리는 까닭이 결국 돈 때문이었던 것처럼, 9·11의 폐허에서 불행의 그림자를 싹 걷어버린 것은 역시 자본이었다.

월가에 바로 근접해 있는 트라이베카는 고급 레스토랑과 맨션으로 탈바꿈했고, 새 건물을 건설하는 공사 현장은 ‘테러 현장 답사’를 유치하면서 관광객을 들이고 또 가벽을 온통 기업 광고판을 도배하는 등 신개념(?) 사업 장소로 변했다. 시장, 주지사, 사업가들은 모두 9·11의 피해를 로어 맨해튼이 경기 회복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다 함께 입을 모았다. 뉴욕 바깥에서는 일부러 9·11을 기억하며 숙연하게 묵념했지만, 정작 9·11의 현장은 뜨거운 재개발 열기에 밀려 추모의 분위기를 망각했다. 로어 맨해튼 일대는 부동산 시장이라는 너무나 익숙한 일상의 세계로 되돌아왔다.

재개발은 공간을 ‘리셋하는’ 버튼이다. 낡은 건물을 쓸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짓는 이 무지막지한 개발 방식은 한 장소가 오랜 시간 동안 축적한 기억을 파괴하고, 그곳의 역사를 알고 있는 거주자들을 쫓아낸다. 여기서 기억되는 것은 이윤을 얻어야 한다는 논리 하나뿐이다. 자본도 9·11 테러가 한 번 더 터지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새 건물을 하나 더 올리면 그만일 테니. 이와사부로 코소는 뉴욕 재개발과 민중의 역사를 담은 <뉴욕 열전>을 쓰면서 9·11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다. 로어 맨해튼을 테러의 피해에서 재건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이 도시를 이 군사 제국의 “‘힘과 부유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지만, 진실은 이 자본주의적 도시가 어떤 비극도 개발의 기회로 삼아왔다는 것이라고.

경찰국가로 재정비된 미국


▎1. 9·11 박물관 내부에는 그 당시 무너지고 남았던 건물의 파편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그날의 참혹했던 순간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 2. 쌍둥이 빌딩 중 남쪽 빌딩의 지하 벽면의 모습도 박물관에 보존됐다. 선진 문명과 세계지배의 거대한 상징이 초라하게 붕괴한 장면이다.
코소의 말이 맞다. 9·11 테러 이후, 침체되던 뉴욕의 경기는 오히려 되살아났다. 집값은 2008년 금융 위기마저 극복한 채 여전히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이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9·11 이후로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은 특정 직업군의 이야기는 또 망각된 지 오래다. 집값 폭등으로 월세 집에서 쫓겨날 처지가 될 때야 사람들은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기억해보려 할지 모른다.

두 번째 반응은 공포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에 있었던 사람들이 과연 어떤 충격 상태에 빠졌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테러 장면은 언어도단이었다. 경악의 순간이 지나간 후 그 빈 자리에 파도처럼 밀려온 것은 물론, 공포였다.

수많은 사람이 테러의 현장을 직접 겪지 않았는데도 심리적 불안을 호소했다. 한 뉴저지 시민은 뉴욕으로 통근하면서 공포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증언했고, 자식들에게 문자 답장이 바로 오지 않으면 호흡 곤란이 온다는 증언도 심심찮게 보였다. 이 불안함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9·11이 미국인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끼쳤는지 연구한 결과는 놀라울 만큼 부정적이었다. 불안 장애 가능성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50%나 증가했던 것이다.

공포를 극대화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무지다. 공포스러운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심한 공포가 되는 것이다. 9·11이 유발하는 공포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테러가 벌어진 그날, 두 눈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이 일이 ‘왜’ 벌어졌는지 몰랐다. 신뢰할 만한 정보는 전혀 발표되지 않았고 온갖 종류의 루머만 흉흉하게 떠돌았다. 곧이어 미 정부는 유가족과 함께 9·11의 진실을 조사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위원회마저 9·11 발발 원인을 물음표로 남겨두었다. “우리가 단지 미국이기 때문에 공격의 목표가 되었다”는 결론이 전부였다. 이 사건은 ‘미국을 증오하는 테러리스트’ 때문에 벌어졌지만, 테러리스트가 ‘왜’ 미국을 미워하는지는 당최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 후 미국은 경찰국가로 재정비되었다. 이것은 미국이 원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채 공포에 대응하는 방법이었다. 적을 알 수 없다면 덮어놓고 무조건 색출하리라! 부시 정부는 9·11 이후 새로운 정치 전략을 발표했다. 테러가 벌어진 사후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테러를 일으킬 가능성 있는 자들을 검문해서 테러를 예방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예방 패러다임으로 공포를 근절시킬 수는 없다. 얼마나 많은 테러리스트를 색출하든, 테러의 원인은 여전히 알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공포는 사라지기는커녕 새로운 형태로 재등장했다. 미 국방부는 잠재적 테러리스트라고 판단되는 시민들을 어떤 구체적 사유 없이도 ‘합법적으로’ 구금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는 여행자의 생각을 읽는 기계를 개발하자는 ‘생각 경찰’이라는 아이디어도 검토 중이라 한다. 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가? 필립 K. 딕의 유명한 SF 소설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미국인은 아직 행하지도 않은 미래의 범죄 때문에 구금될지도 모르는 세상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9·11에 대한 마지막 반응은 애국이다. 테러 직후, 미국인의 애국심은 갑자기 하늘을 찔렀다. 상처 입은 조국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고, 시민의 놀라운 희생정신을 보며 국가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날 뉴욕의 거리는 집집마다 걸어놓은 성조기로 뒤덮였다. 뉴욕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다지 익숙한 풍경은 아니었다. 그동안 뉴욕은 비 미국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반(反)미국적 분위기의 도시로 손꼽혔지만, 9·11 이후부터는 미국을 대표하여 희생된 성스러운 도시로 탈바꿈했다.

뜨거웠던 9·11의 애국심은 이제 한풀 꺾였다. 하지만 그때 탄생한 영웅의 이야기는 애국심이 필요할 때마다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날 미국의 영웅은 소방관이었다. 생존자들은 그날 뉴욕 소방 팀이 보여준 헌신과 용기가 참으로 고귀했다며 입을 모은다. 사람들이 살기 위해 건물에서 뛰어내릴 때 그들은 구조를 위해 건물로 뛰어올라갔다는 것이다. 이런 증언에 힘입어 소방관들은 급기야 미국의 상징으로까지 도약한다. 성실한 노동자, 듬직한 가장, 생명의 수호자, 자유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자. 그리고 미국이 이들을 ‘잃었다.’ 테러가 미국의 가치를 앗아간 것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상실의 결론으로 끝나고, 사람들은 이에 가슴 아파하며 그 상실의 자리를 애국심으로 채운다.

그런데 말이다. 미국은 정말 저 가치를 ‘잃어버린’ 것일까? 민주주의, 안전, 이상적인 가정, 평화,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 시스템 등은 2001년 9월 11일 이전 미국에 정말 존재했었던가? 이 질문으로 9·11 생존자의 증언이나 소방관의 진정성을 의심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개인이 국가적 상징이 되고 개인의 증언이 국가의 서사로 전환될 때는 항상 진정성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내밀한 수정 과정이 추가된다. 이 상실의 드라마는 교묘하게도, 미국이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가치가 원래 있었던 것인 양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 착각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특별하다는 믿음도 함께 깔려 있다.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나라이며, 민주주의는 곧 세계의 선(善)이다. 따라서 미국을 공격하는 것은 세계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즉, 애국심은 이 믿음을 깨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인 셈이다.

트라우마를 만들어내는 국가


▎맨해튼 남단의 항구에서 뉴욕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 이곳 바다의 내음은 맨해튼이 육지가 아니라 섬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뉴욕의 시작은 작은 항도였고, 몇백 년 동안 이 항구를 통해 수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미국이 9·11 이후로 정말 잃어버린 것이 있다. 소방관들의 건강이다. 소방관과 구조대원은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통에 9·11 이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후유증으로 크게 고통받았다. 다큐멘터리 <식코(SICKO)>를 보면 이들이 쿠바에 가서 진료를 받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참 역설적이다. 한때 미국의 테러리스트 국가로 이름을 올렸던 쿠바가 아니었던가.

9·11은 이런 기억과 감정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 기억의 편린이 보여주는 진실은 간단하다. 9·11의 그늘 아래 뉴욕이라는 도시가 역동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재개발은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고, NYPD의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 오만하며, 국가를 비판하는 시야는 더욱 어두워진다. 수많은 이민자에게 항구를 열어주며 개방성과 창조성으로 빛났던 뉴욕은 이제 점점 살기 팍팍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NYPD의 무례함에 깜짝 놀라도, 뉴욕 주민들은 이 2년 차 외국인에게 항상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준다. “9·11 이후로는 항상 그렇다.”

누구는 이것이 9·11이 남긴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한다. 테러가 남긴 상처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는 도시 공간이 방어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트라우마가 무슨 개념인지 간단히 살펴보자. 심리학에서 정의하는 트라우마는 단순한 방어 심리가 아니다. 한 개인이 외부에서 들이닥친 파국을 겪었을 때, 그 경험이 ‘기존 경험과 의미망을 형성할 수 있는’ 특정한 기억으로 남기를 거부하는 상태다. 삶에서 영영 의미화되지 않는 구멍, 소유할 수 없는 경험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이 통제불능 상태가 되어 악몽이나 플래시백 등 왜곡된 형태로 재현된다. 즉, 트라우마의 핵심은 의미의 부재, 해석의 불능이다. 제대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충격을 망각해버릴 수도 없는 역설인 것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뉴욕에 새겨진 트라우마는 9·11 사건만 탓할 수 없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가’라고 제대로 묻지도, 사건을 해석하지도 못한 뉴욕 공동체에도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뉴욕은 왜 의미화 과정에 실패했던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국가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사람들이 그날의 충격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상기하도록 끈질기게 노력했다. 개별적인 차원에서는 생존자가 트라우마를 치료하도록 권장하는 반면,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트라우마를 재생산했다.

9·11 기념관은 이 병든 기억의 실사판이다. 이 건물은 애초부터 쌍둥이 빌딩이 사라진 터와 그 폐허의 흔적을 보존하는 의도로 건설되었다. 박물관과 분수대는 쌍둥이 빌딩이 사라진 터에 아직 남아 있었던 벽을 그대로 살려 지어졌다. (특히 분수대의 바닥은 유리로 깔려 있어서 지하로 내려가면 위를 훤히 올려다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쌍둥이 빌딩이 사라진 허공을 계속 상기하라는 노골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분수대의 이름도 ‘부재의 기억: Reflecting Absence’이다.) 기념관 내부는 더욱 강박적이다. 모든 전시물은 9·11 당시의 파국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설치되었다. 끔찍한 순간을 묘사하는 데에는 온갖 기술이 총동원되는데, 이 모든 것을 야기한 ‘왜’라는 질문만은 부재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사람은 새로 지어진 WTC, 즉 월드 트레이드 센터(World Trade Center)가 월드 트라우마 센터(World Trauma Center)가 된 것이 아니냐고 비꼬기도 한다.

얼핏 보면 이해가 안 된다. 무슨 이득이 있기에 트라우마를 강요한단 말인가? 이는 사건의 의미를 영영 제대로 직시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것이 사건을 해석할 힘이 없는 개인의 무능력에 기인하든, 아니면 사건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기를 바라는 국가의 저의에 기인하든 말이다. 하지만 원인 모를 공포와 경악을 자꾸만 상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괴롭다. 그래서 이 트라우마적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가장 단순한 해석 방식을 택한다. 바로 감정이다. 공포·무관심·애국심·분노·기쁨 등등, 어떤 감정을 소비해버린 후 서둘러 이야기를 끝내버리는 것이다. 물론 무슨 사건과 부닥치든 일단 감정이 먼저 응하게 되어 있다. 감정은 몸이 이미 기억하고 있는 유형화된 반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차적인 반응이 통찰로 이어지지 못할 때, 그리하여 감정이 감정으로만 남을 때, 이것은 트라우마를 만성질병으로 만드는 독약이 된다. 일단은 이해 불가능한 사태에 익숙한 해답을 주지만, 그럼으로써 사건을 제대로 마주하고 그 의미를 찾아보려는 시도는 영영 지연되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정신적 마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뉴욕인에게, 더 나아가 미국인에게 9·11은 지울 수 없는 드라마다. 하지만 이 공식적인 드라마가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9·11에 대해 특정한 감정을 강제적으로 지속시킬 뿐이다. 애도하라! 두려워하라! 애국하라! 건물을 올려라! 그리고 9·11이 의미하는 바는 여전히 빈 칸으로 남는다.

이 빈 칸, 이 비가시적인 공간에 진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외국인들이다. 외국인이란 나처럼 여기 몇 년 머물렀다 떠나는 이방인일 수도 있고,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민자일 수도 있으며, 엄연한 시민권자지만 주변의 편견과 차별 때문에 고립된 채로 사는 사람일 수도 있다. 국가 안에서 국적을 유지하고 살면서도 일종의 ‘외국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외국인, 포스트-테러의 희생자


▎뉴욕의 상징 옐로캡 택시. 뉴욕에서 택시 기사는 대우받지 못하는 대표적인 직종 중 하나다. 9·11 이후 중동 출신 기사들은 손님을 받을 때뿐만 아니라 기름을 넣을 때도 공격받을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려야 한다.
9·11의 여파는 아랍인을 포함해 수많은 ‘외국인’을 만들어 냈다. 이 외국인은 9·11에 대해 주류와 또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9·11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미국은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를 설치해 미국 내 모든 이민자의 신원을 추적했다. 미국 내에서 추방당한 이민자는 2001년 한 해 20만 명이었고 10년 사이에 그 수는 두 배를 넘었으며, 공항에서는 신발을 벗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또, 수많은 ‘외국인’이 아무 이유 없이 구속되거나 심지어 행방불명되는 일도 벌어졌다. 뉴저지 주의 저지 시티에는 아랍 공동체가 있다. 9·11 이후, 이 지역의 몇몇 이슬람 시민이 경찰에 구속되어 50일 넘게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그런데도 법무부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옐로캡 택시 운전사들도 최전선에서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다. 운전사는 대부분 동남아나 중동 지역에서 이민 온 이슬람교도인데, 그들은 손님을 태울 때 종종 입에 담을 수 없는 위협과 모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들의 기억은 공식적인 9·11 드라마에 등장한 적이 없다. 기억되지 않는 것이다.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은 이런 부당한 대우가 아니다. 개개인의 특이성을 무시한 채 단순히 ‘외국인’으로 낙인 찍는 행위다. 가령, 같은 아랍인이라도 살아가는 기조나 사고 방식, 종교에 대한 해석은 각기 천차만별로 다르다. 중동에서 IS에 동참하는 아랍인과 뉴저지에서 택시 운전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아랍인의 삶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당연한 사실은 묵살된다. 9·11 이후 ‘트라우마’라는 구름에 가려버린 사람들의 시선에 이런 차이가 포착될 리 없다. 그저 ‘아랍인’이라는 일반화된 이름표 하나만 보일 뿐. 9·11 이후 미국은 안보를 최우선으로 선언했지만, 이 선언 뒤에는 큰 소리로 제기되지 않은 질문이 하나 있었다. ‘누가’ 안전해지고 또 ‘누가’ 안전을 위해 밀려나야 하는가? 이 구분선은 늘 그렇듯 인종·구역·계급의 경계선을 따라갔다. 중산층 백인 가정이 안전의 중심에 서고, 나머지는 그 주변부에 나란히 줄세워졌다. 흑인, 남미인, 아시아인, 아랍인, 저소득층, 홈리스…. 지금까지 별 문제되지 않았을 개개인의 피부색과 집안 환경이 트라우마가 된다.

뉴욕이 내게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바로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계 각지에서 건너온 이 다종다양한 사람 틈에 섞이면서, 나는 외국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국경을 떠나면 모두가 외국인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9·11을 맞닥뜨린 것도 바로 이 자리에서다. 뉴욕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 모두 똑같이 ‘뉴욕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누구에게는 유형화된 특정한 기억이 강요되고, 또 고통받고 있는 누군가의 기억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안 사람’과 ‘바깥 사람’의 경계이리라. 이 경계를 가로지르는 것이 트라우마를 벗어나는 핵심일 것이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은 환자가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해서 스스로 증언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사건에 대해 스스로 능동적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 순간 이해불능으로 남겨져 있던 경험은 전체 세상의 맥락 속에서 다시 이해가 되고, 비로소 내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렇다면 9·11을 기억할 때도 바로 이 방법이 필요한 게 아닐까? 의미의 생산을 위해서는 잘 제련된 질문이 필요하다. 질문은 경계를 깨뜨리는 무기다. 상식을 의심하게 하고, 익숙한 감정을 해방시키며, 내가 어떤 세계 속에 살고 있는지 고민하게 한다. 물론 이 질문은 정말 궁금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할 것이다.

문(問), 트라우마를 깨는 유일한 문(門)

수많은 뉴욕 사람이 9·11 이후 자기 삶에 감동적인 질문을 던졌다. 비행기가 무너뜨린 것은 혹시 현대 문명이 안전하다는 우리의 환상이 아니었을까? 국가는 과연 어디까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가? 그날 아침 쌍둥이 빌딩에서 일하고 있었을 샐러리맨의 삶은 과연 얼마나 행복했을까? 팔레스타인에서 폭격을 맞는 아이들도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테러범이 2001년 9월 11일 3천 명의 뉴욕 사람을 죽일 때, 미국은 그동안 미국 바깥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았을까? 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질문을 계속 품고 있다면, 그들은 9·11의 망령에 붙잡히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질문을 통해 맞이하게 된 삶의 변화가 곧 9·11이라는 사건의 의미를 채울 테니 말이다.

세계는 오늘도 슬픈 기억으로 가득하다. 트라우마의 세기라고 불리었던 폭력의 20세기가 끝났지만, 21세기 초에 터진 9·11 테러는 트라우마가 계속되리라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렇게 험난한 세상에서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요되는 기억에, 혹은 소리 없이 잊혀지는 이야기에 질문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설령 ‘바깥 사람’으로 취급될지도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도 슬픈 기억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김해완 - 고등학교 재학 중 학교를 나와 공부 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서 생활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가방끈은 짧지만 공부복은 많다. 2년 전에는 예상치 못하게 ‘세계의 수도’ 뉴욕 한복판에 떨어졌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배움을 누리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내는 중이다. 쓴 책으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그린비), <리좀, 나의 삶 나의 글>(북드라망), <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작은길, 출간 예정)이 있다.

201509호 (20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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