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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해외 사례연구] 일본은 ‘근대화 문화유산’ 어떻게 관리하나 

“위대했던 근대를 선양, 활용하라” 

‘현대’보다 ‘근대’(메이지 이후 1945년 이전)에 더 큰 민족적 자존감 느끼는 일본인… 전국에 575건의 근대 문화유산 지정하고 관련 스토리 발굴 등 콘텐트 구축 완성

▎일본 요코하마는 일본 근대화의 여명을 알린 공간으로 상징성이 크다. 최근 ‘미나토미라이21’ 프로젝트를 통해 낙후된 항만 도시에서 역사성 있는 시설과 현대적 건물이 공존하는 도시로 변모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사용했던 제로센기는 당대 최고의 전투기였다. 전쟁 초기에 미국 전투기를 압도했던 기동성과 항속거리를 자랑했다. 제로센 설계를 발주할 당시, 일본은 전쟁 총력체제로 사회를 재구조화했다. 제로센 개발은 민간회사가 만들어 군에 수주하는 평범한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1938년 해군의 새로운 함상전투기 요구서를 검토하기 위해 민관합동연구회가 열렸다. 해군 수뇌부, 중일 전쟁에 참전했던 전투기 조종사, 미쓰비시 연구자, 경쟁사인 나카지마 연구원 등 수 십명이 동원돼 개발했다. 가히 ‘국력의 총화’라 할 만했다. 이 전투기의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는 제로센을 만드는 과정을 ‘불가능에의 도전’이라 회상했다.

“전후(戰後) 대기업은 소니와 혼다밖에 없다”

일본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선진국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근대화 과정은 그만큼 강렬했고, 또 신속했다. 일본 정부가 1945년 이전 근대화 문화유산에 높은 평점을 주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자신감 때문이다. 일본은 이미 17세기 에도시대 때부터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은(銀) 광산 개발이 이어지며 국부의 절대 규모가 당시 조선을 크게 앞질렀다. 1800년 기준으로 인구가 이미 3천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유럽 3대 국가인 프랑스(2750만 명)·독일(2500만 명)·영국(1870만 명)보다 시장과 노동력 규모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조선(1400만 명 추정)과도 꽤 큰 격차가 있었다.

일본 근대화의 종잣돈이 청일전쟁 승리로 청나라에서 받은 배상금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별로 없다. 당시 일본은 1년 예산의 4배인 2억 냥(3억2천만 엔)을 받았다. 이 돈으로 관영 야와타(八幡)제철소를 짓고, 방적(紡績)시설을 확대하며 ‘일본판 산업혁명’을 이끌어냈다. 축적된 자본으로 금본위제를 도입, 일본은행을 창설했다. 금융시스템이 완성되면서 엔화의 국제적 신인도도 올라갔고, 이에 따라 현재까지 준(準) 기축통화로서의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의 기업 전통도 그만큼 혁혁하다. “전후(戰後) 대기업은 소니와 혼다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래된 기업이 많다. 섬유나 소비재, 유통은 에도시대로 창업자가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제철·자동차·조선·기계·화학 등 중공업 분야는 2차대전을 기점으로 토대가 굳어졌다. 1930년대 이후 군수물자 생산에 국가적인 역량을 집중한 덕분이다.

1936년 만주사변 당시 일본군 군수트럭은 미국 포드사 제품이었다. GM·포드·크라이슬러의 ‘빅3’ 회사가 일본 자동차 산업을 지배했다. 하지만 군국 일본은 이후 자국 자동차산업 육성에 나섰다. 미국 업체에 관세를 대폭 부과하고 자동차 업종을 정부 허가제로 바꾸면서 도요타와 닛산에 각종 세제 우대를 해주며 지원했다. 마쓰시타 전기, 일본제철도 군수업으로 기반을 키운 업체들이다. 일본은 ‘현대’(1945년 이후)보다 어쩌면 ‘근대’(메이지 이후 1945년 이전)에 더 큰 민족적 자존감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이 근대화 문화유산에 대한 애착이 유난히도 강한 배경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2007년 지역경제 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33개의 근대화산업유산군과 575개의 개별 근대화산업유산을 선정, 발표했다. 근대화산업유산 보존과 관리가 관광 등 지역 경제 부양의 실용적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기간도 막부 말기·메이지(明治) 유신시대부터 2차대전 종전 전까지로 한정했다. 일본의 근대화 기점이 우리보다 100년쯤 빨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결코 짧지 않은 기간으로 생각된다.

근대산업유산의 대표적 상징은 요코하마항


공장시설이나 탄광시설 등의 건조물, 시설, 획기적인 상품, 상품의 제조에 사용된 기기나 교육 매뉴얼 등은 일본 산업근대화에 공헌한 유산으로의 가치를 지지고 있다. 경제산업성은 산업유산을 지역경제 활성화에 유효하게 활용한다는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2007년 4월 ‘산업유산활용위원회’를 설치하고, 일본 각지에 현존하고 있는 산업유산을 공모했다.

위원회는 공모에 응한 약 190건 400군데의 물건을 비롯한 각 지역의 산업유산에 대해 그 실태와 보전·활용 상황을 조사했다. 그리고 산업유산의 가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근대화산업유산 스토리’를 취재해 기록에 남겼다. 이 같은 노력의 성과로 2007년 11월 30일 33건의 ‘근대화산업유산군’(표 참조)과 이에 관련된 ‘근대화산업유산 스토리’가 공표됐다. 근대화산업유산군을 구성하는 575건 각각의 유산에 대하여는 인정증과 플레이트가 증정됐다. 경제산업성에서는 근대화산업유산 인정 후의 시책으로 홍보 활동, 보존 방법과 활용 방법의 구체화, 33건 이외의 새로운 근대화산업유산군의 발굴 등을 추진하고 있다.

‘산업유산활용위원회’는 ‘근대화산업유산군’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조직된 전문가·지식인 집단이다. 이들은 각지에 존재하는 여러 산업유산을 더 깊이 있게 탐구하기 위해 지역별 전문가로 구성된 ‘지식인연구회’를 설립했다. 연구회는 스토리의 구축 방안 등에 대해 활발히 논의하며 산업유산·공장견학 등의 활용 가이드북을 제작하기도 했다.

일본은 문부과학성 산하 문화청에서 문화유산 보호제도에 의거한 ‘근대화 유산’을 별도로 분류해 지정하고 있다. 막부 말기부터 2차대전 시기에 건설된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한 산업·교통·토목 등의 유산을 발굴해 선정한다. 따라서 경제산업성의 근대화산업유산은 문화재 보호제도에 의거한 분류는 아니다. 근대화산업유산은 보존을 강조하는 문화재와는 달리 관광·탐방·교육 등 활용 측면에 방점이 찍혀 있다.

지난 7월 5일 일본 정부는 미쓰비시 조선소를 포함해 규수(九州)와 야마구치(山口) 지역 중심 근대화산업시설 23곳을 하나로 묶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등재된 산업유산 23곳 중 총 7개소는 큰 논란을 불렀던 군함도 등 태평양전쟁 중 조선인이 대규모로 강제 동원돼 노동에 혹사된 곳이다. 우리 정부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들 7개소에는 약 5만7천900명에 달하는 조선인 노무자가 강제 동원되고, 그중 94명이 동원 중에 사망하고 5명은 동원 중 행방불명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이들 7개소를 포함한 23개 산업유산을 ‘메이지시대(1868~1912)’로 한정해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산업성을 중심으로 2007년부터 준비한 33개의 근대화산업유산 선정작업이 그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무역입국의 원점으로 간주되는 요코하마항은 일본 근대 산업유산의 대표적 상징이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4척의 배를 우라가항에 정박하며 개항을 강하게 요구했고, 1854년 막부는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1858년 미국과 ‘미일수교 통상조약’ 체결을 계기로 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차례로 수교조약을 체결했다. 1859년 요코하마항·나가사키항·하코다테항을 개항하고, 200년 이상에 걸친 쇄국체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중 요코하마는 미일수교 통상조약 체결이 이뤄진 곳이며, 특히 에도(江戶, 도쿄)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점에서 중요시됐다.

당시의 요코하마는 국제무역에 적합한 항만시설이 전무했던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개항에 맞추어 현재의 오오산 다리의 끝 부근에 두 개의 부두가 건설됐지만, 대형선박은 정박이 불가능했다. 정부는 메이지 중기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몇 차례에 걸친 항만시설 건설에 나서야 했다. 1889∼1896년에 걸쳐 오오산 다리 부두와 동쪽·북쪽의 방파제를, 1899∼1917년에 걸쳐 신미나토 부두를 정비했다. 또 민간 기업 ‘요코하마 도크’는 선박 수리를 주 목적으로 한 별도의 도크도 건설했다.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정비하면서 요코하마항은 일본 최고의 국제무역항으로 발전했다. ‘일본의 현관’이란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정비된 항만시설 가운데 신미나토 부두의 ‘아카렌가(붉은벽돌)’ 창고와 옛 임항선, 두 개의 도크 등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당시 항구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요코하마 항의 발전은 일본의 근대산업 발전과 직접 연결되며, 일본 ‘무역 입국’의 원점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 유산군에 포함되는 개별유산은 가나가와 현립 역사박물관을 비롯해 총 22개로 구성돼 있다.

관광산업 태동의 상징은 근대식 호텔


▎나가사키현 하시마 해저 탄광.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23곳 중 하나로 일제 강점기 때 6만 명에 가까운 한국인이 강제 징용됐던 산업 시설이다.
근대 일본 초창기 관광산업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산업유산군의 스토리도 잘 분류, 정리돼 있다. 일본의 국제관광은 가나가와의 요코하마항, 나가사키항(長崎 큐슈지방), 하코다테항(函館, 홋카이도)의 개항으로 시작됐다. 각국과 수교와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외국인이 개항장 근교에 거주하고, 일본인도 40㎞ 범위 내의 지역을 여행할 수 있게 됐다.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1874년 약 2천 명에 도달했다.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도쿄·요코하마·고베 등 외국인 거주지에 서양식 호텔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전국 각지에 부설된 철도도 관광산업의 중요한 근대화 유산이다. 1890년의 우쓰노미야∼닛코 간의 철도 개통, 1893년 요코카와∼가루이자와의 아프트식 철도(Abt system railroad) 개통, 1888년 고우츠키∼유모토 사이의 마차철도 개통, 1919년 유모토∼고라 간의 하코네 등산철도의 개통에 당시 일본인은 열광했다.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에 의해 새로운 레크리에이션이나 스포츠도 속속 소개됐다. 1887년 무렵부터 해수욕·골프·스키·스케이트·근대 등산 등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국내여행도 종래의 관광 유람 목적과 다르게, 피서나 레크리에이션 목적의 여행이 보급됐다. 본격적인 리조트 호텔도 이때 출현했다. 1903년에 롯코산에는 일본 최초의 골프코스인 ‘고베 골프 클럽’이 탄생했고, 1913년 일본 최초의 퍼블릭 코스인 ‘운젠 골프장’이, 1916년에는 닛코 ‘가나야 호텔’에 스케이트 링크가 완공됐다.

근대 일본의 관광산업 발전을 상징하는 대표적 유산 중엔 창업 당시 건물이 현존하는 근대호텔 군이 있다. 닛코의 ‘가나야 호텔’이나 하코네의 ‘후지야 호텔’, 롯코의 ‘로코산 호텔’ 등이 대표적이다. 그 대부분은 외국인 거주지 혹은 근교의 리조트에 건설된 것이다. 국영 영빈관 역할을 담당했던 ‘나라 호텔’, 홋카이도 개척사업 성공의 상징 삿포로 ‘도요히라관’, 군항에서 무역항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건설된 ‘오미나토 호텔’도 유서가 깊다. ‘데이코쿠 호텔’과 ‘고시엔 호텔’ 등도 시대를 풍미했던 명소다. 이러한 건축물은 설계 사상이나 디자인 속에 창업 당시의 시대 배경이 녹아 있다. 또한 일본 근대건축의 변천을 단숨에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유산군은 닛코의 가나야 호텔을 비롯, 총 33개의 개별 유산으로 구성돼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홋카이도를 근대농업, 식품 가공업의 중심지로 설정하고 그곳의 근대화 문화유산을 집중 조명했다. 일본열도 최북단에 위치한 섬 홋카이도는 원래 아이누라고 하는 토착민이 집단 거주하던 지역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정부가 북방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홋카이도 개척을 담당하는 ‘개척사’라는 관청을 뒀다. 본토인을 대량 홋카이도에 이주시키고 정착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다. 춥고 광활한 홋카이도의 기후나 토지의 특성 상 본토와 같은 쌀 경작이 불가능했다. 보리 경작이나 축산업 등에 주력한 결과 오늘날 우유와 치즈 같은 유제품, 삿포로 맥주 등의 명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 근대농업과 식품가공에 대한 발전을 근대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다.

근대 훗카이도 경제의 상징은 식품가공업


▎홋카이도의 라벤다 농장. 서늘한 기후와 광대한 토지,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농산물에 착안해 식품가공산업이 매우 발달했다.
개척사는 1876년 농업기술 보급과 농업인재 육성을 위해 삿포로 농업학교(현 홋카이도대학 농학부)를 개교했다. 이 학교에 외국인 학자를 초청해 목장경영이나 버터·치즈·햄 등의 제조를 지도하도록 했다. 이 사업으로 육성된 인재가 이후 훗카이도 개척을 주도했다. 홋카이도 각지에 밭농사와 낙농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드넓은 밭이나 목장에 사일로(창고)가 세워져 있는 홋카이도 특유의 경관이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민간기업도 홋카이도의 냉량한 기후와 광대한 토지,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농산물에 착안해 식품가공업에 도전했다. 기타미 주변의 박하재배와 향료업, 벼농사 보급을 배경으로 한 오타루 지방의 양조업, 홋카이도 유제품 판매조합, 요이치 지방의 위스키 양조업 등을 들 수 있다. 기타미 주변의 박하재배는 1934년 미국 수출을 시작하면서 급격히 발전했다. 전성기인 1939년께에는 경작면적 약 2만 헥타르, 세계시장 점유율 70%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박하재배는 이 시기 홋카이도 경제를 지탱하는 대표 산업이 됐다.

오타루 지방의 대표적인 일본주 ‘기타노 호마레’는 간장 제조업을 하던 노구치 요시지로가 1901년부터 빚기 시작했다. 그 후 순조롭게 생산량이 확대됐고, 오늘날도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일본주로 평가받고 있다.

요이치 지방의 ‘대일본과즙’은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다케츠루 마사다카가 1934년 창업한 기업이다. 다케츠루는 기후풍토가 스코틀랜드와 비슷한 요이치 지방을 증류지로 선택하여 1936년부터 위스키 제조를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처음과 똑같은 제조법으로 양질의 위스키를 만들어내고 있다. 근대 이후 홋카이도에는 본토와는 크게 다른 기후풍토에 적합한 새로운 농업·식품가공 기술이 도입됐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홋카이도 경제를 지탱하는 기간산업으로 발전했다. 이 산업유산군에는 삿포로 맥주박물관을 비롯해 총 33개의 개별유산이 포함돼 있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201510호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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