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특별 인터뷰]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의 3박4일 방북(訪北) 체류기 

“평양이 변하고 있는 건 분명, 일종의 자신감 느껴졌다” 

최경호 월간중앙 차장 정리 김보현 인턴기자, 사진 홍승모 객원기자
8월 초 4일간 이희호 여사와 평양 방문, 남북화해 물꼬 트길 기대… “이 여사, 김정은 만났더라면 6·15 공동선언으로 되돌아가자고 촉구했을 것”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은 “비록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남북 당국과 주민들에게 남북 화해·협력의 메시지, 6·15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상기시켜준 방북이었다”고 방북 의의를 설명했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일행이 8월 5~8일 평양에 다녀왔다. 방북단은 수행단장인 김성재 전 문화관광부 장관을 비롯해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명예대표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장충식 단국대 이사장,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 등 19명으로 구성됐다. 방북단은 3박4일 동안 평양산원·애육원·아동병원·묘향산 등을 방문했다. 이희호 이사장을 수행한 최경환 공보실장이 평양정권의 변화상을 말한다.

최경환(56)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은 처음부터 ‘DJ(김대중 전 대통령)맨’은 아니었다. 최 실장은 자신을 “운동권 출신”이라고 소개한다. 성균관대 79학번인 그는 두 차례 투옥 경험이 있다. 첫 번째는 1981년에 있었던 ‘학림사건(1981년 신군부세력이 학생운동단체 등을 반국가 단체로 몰아 처벌한 사건)’이었고, 두 번째는 1986년 민주화 운동청년연합(민청련) 사건이었다.

그는 ‘노동운동의 대부’인 방용석 의원의 보좌관을 지낸 뒤 국민의정부 시절에 청와대 공보비서실 행정관으로 임명되면서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DJ의 퇴임 후에도 동교동 사저에서 김 전 대통령 부부를 보필한 최 실장은 2009년 8월 18일 DJ의 임종을 지킨 ‘마지막 비서관’이었다. <월간중앙>은 9월 8일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그를 만나 방북 뒷얘기와 후일담을 들어보았다.

“중국식이라뇨? 우리식입니다”


▎평양 옥류아동병원을 방문해 입원 중인 어린이를 격려하고 있는 이희호 이사장.
평양의 분위기는 어땠나?

“개성에는 여러 차례 다녀왔지만 평양은 처음이라 많이 궁금했다. 일행 중에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그리고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시 이희호 이사장의 조문 방북 때 평양을 다녀온 분들이 있었다. 장충식 단국대 이사장은 최근까지 매년 평양에 다녀온 분이다. 그분들은 이구동성으로 ‘평양시민들이 활기차고 밝아졌다’고 했다. 거리에 예상외로 차가 많았다. 택시와 2층 버스도 인상적이었다. 평양 대동강변에는 고층건물과 주상복합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다. 우리를 수행하는 북측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이하 아태위)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거리의 시민들도 휴대전화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북한에 휴대전화 200만~300만 대가 보급돼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카메라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과거 같았으면 찍지 말라고 제지했거나 자제를 요청했을 텐데 이번에는 전혀 제재가 없었다. 떠날 때 사진을 검열하거나 삭제하겠다고 하지도 않았다.”

의외다. 평양의 방침이 그렇게 달라진 이유가 뭐라고 보나?

“모든 일정을 마친 뒤에 묘향산 향산호텔에서 북측 인사들과 포켓볼을 치면서 맥주를 한잔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도 평양의 변화된 모습이 화제에 올랐다. 북측의 한 관계자가 설명했다. ‘이미 기업들은 자율경영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기업과 개인은 나라에 일정한 액수를 갖다 바치고 나머지는 처분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생산자와 대중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3년간 가져온 변화입니다.’ 그 인사에게 ‘중국식 개혁을 하는 거군요?’라고 하자 그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중국식이라뇨? 우리식입니다!’ 개성에서 실무접촉 때 만난 한 고위인사도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지난 3년 동안 얼마나 변화했는지 남측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변화할지 잘 알아야 합니다.’ 평양은 변화를 선택한 게 분명해 보였다. 일종의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숙청이다, 공포정치다, 대북 경제제재다’ 해서 평양이 긴장되고 위축돼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북한은 2011년 12월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 지난 3년간 경제발전에 상당한 노력을 쏟아온 것으로 파악된다. 김일성·김정일 정권에 비해 권력기반이 취약했던 김정은 정권은 경제분야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 주민생활을 향상시키는 것이 절실했다는 분석이다. 이를 위해 김정은 정권은 시장 경제요소 도입을 과감하게 확대하고 외국자본 유치를 통해 경제특구도 대거 설치하는 등 파격 행보를 이어왔다. 그럼에도 김정은 정권의 경제정책이 아직은 실험단계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북한판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로 간주하기에는 넘어야 할 장애물도 많다는 것이다.

방북 하루 전 목함지뢰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도 처음에는 북한의 매설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하다가 사건 발생 엿새 뒤에야 공식 발표했다. 방북 기간 중에 이 사건과 관련한 북한 당국의 표정이 궁금하다.

“방북 기간 중 우리는 목함지뢰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8월 8일 김포공항에 도착해 정부인사로부터 ‘곧 발표할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것이 지뢰문제인지는 몰랐다. 자세한 내용은 정부가 발표하고 나서야 알았다. 방북 기간 중 북측의 어떤 인사도 그와 관련된 내용을 말해주거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 이사장 일행의 방북 하루 전인 8월 4일 경기 파주시 1사단 소속 경계초소(GP) 수색대원들이 수색 도중 아군 GP를 잇는 철책의 통문 근처에 매설된 지뢰를 밟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뢰 폭발로 수색대원 8명 중 2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국방부 조사단은 사건 발생 엿새 뒤인 8월 10일 ‘폭발 지뢰의 파편이 북한이 보유한 목함지뢰와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도적 지원보다 대규모 개발사업에 관심

북한에서는 어떤 곳을 둘러보았나?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 모습은 어땠나?

“평양에서는 백화원영빈관에 머물렀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묵었던 북한의 최고 국빈관이다. 이희호 이사장에 대한 북측의 환대는 그만큼 극진하고 정중했다. 우리는 평양산원·옥류아동병원·육아원·애육원·양로원 등의 시설을 방문했다. 관계자들의 안내를 받았기 때문에 주민들과 접촉할 기회는 없었다.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가는 길은 6차선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지만 포장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묘향산에서는 국제친선전람관을 관람했다. 국제친선전람관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외국에서 받은 선물이 전시돼 있는 곳이다. 산에 동굴을 파서 만든 20~30평(약 66~99㎡) 규모의 전시관이 250여 개나 있다고 했다. 묘향산 계곡에서는 물놀이를 하거나 석쇠에 고기를 구워먹는 주민들이 보였다.”

북한 당국자들은 남측에 어떤 지원을 기대하던가?

“방북 전 개성에서 6~7차례 실무접촉을 갖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명시적으로 우리 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적은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그들의 속내는 읽을 수 있었다. 북측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정부나 민간의 인도적 지원사업을 매우 불편해한다. 북측 인사들은 ‘호의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우리들은 위대한 지도자 덕분에 부족한 게 없이 살고 있는데 무슨 인도적 사업 운운하느냐’고 말하는 식이다. 인도적 사업에 자신들을 깔보는,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북측이 바라는 것은 오히려 규모 있는 개발사업이다. 유무상통(有無相通), 즉 남북이 서로 있는 것을 주고 없는 것을 받는 사업을 민간·중앙정부·지방정부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중앙정부 차원에서 철도·도로·전력 등 인프라 구축사업도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성공단 사업도 당초에는 2천만 평 개발사업으로 김정일 위원장이 용단을 내린 건데 지금은 시범단지 100만 평에 중소기업들만 진출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당초 계획대로 큰 투자들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점을 아쉬워했다.”

우리 정부는 이희호 이사장의 방북에 대해 ‘개인자격’을 강조했는데 그 이유는 뭐라고 보나?

“이 이사장의 방북은 박근혜 대통령의 양해와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 초청으로 이뤄졌다. 또 이 이사장은 6·15 남북정상회담의 상징적 인물이다. 남북의 지도자가 이 이사장을 통해 ‘간접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본다. 실무 접촉 과정에서 통일부는 대화채널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이 이사장의 방북이 이뤄지는 것을 크게 반겼고, 이를 계기로 남북관계에 새 돌파구가 마련되기를 바랐다. 방북 준비과정에서 우리(김대중평화센터 측)에게도 그런 기대를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희호 이사장의 방북은 개인자격이다. 전할 메시지가 없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느냐’고 묻고 싶다. 남북관계는 민족문제다. 여야와 전·현직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미국을 보자. 공화당 정부 시절에도 카터·클린턴 등 민주당 출신 전 대통령들이 외교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 모두 국익을 위한 것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주역인 박지원 특사(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 등이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함께 가지 못한 것도 안타깝다. 특히 이 이사장이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하는 시간에 통일부가 북측에 당국간 회담을 제안했는데 우리는 이 사실을 방북 이틀 후 북측 인사들을 통해서 알게 됐다. 북측은 ‘북과 남, 세계가 이희호 여사의 방북을 주목하고 있는데 개인자격이라고 하더니, 당국대화를 제안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따지듯 물었다. 또 북측은 ‘이희호 여사를 초청한 우리의 최고존엄, 최고 지도자의 입장은 뭐가 되느냐’며 불쾌해 했다. 결과적으로 남측의 대화 제의는 방북단이 평양에서 북측과 대화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정부가 이 이사장의 방북 시기에 맞춰 대화를 제안한 것을 두고 해석이 분분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이 이사장의 방북을 ‘개인자격’으로 묶어둠으로써 남북관계 개선 역할을 과거 정부 인사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이에 대해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8·15 이전에 이산가족 상봉을 비롯해 남북간 현안을 풀어야 될 필요성이 많았고, 경원선 기공식 바로 직후에 보내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판단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경원선 기공식은 8월 5일 오전에 진행됐다.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해·협력, 대화·교류


▎방북단은 “시민들이 이전에 비해 활기차고 밝아졌다”고 평양 분위기를 전했다. 대동강변에 들어선 고층건물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결국 이 이사장과 김정은 위원장의 면담은 불발됐다. 북한 당국자의 입장은 뭐였나?

“김정은 위원장은 맹경일 아태위 부위원장을 통해 ‘이희호 여사의 평양방문을 환영한다. 고결한 분이니 편히 쉬시도록 잘 모시라’는 말을 전해줬다. 북측은 이 이사장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북측의 판단과 사정도 있었겠지만 면담이 성사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93세의 고령인 이 이사장은 폭염을 뚫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7~8년 동안 끊겨버린 남북관계에 오작교를 놓기 위해 어려운 걸음을 했다. 그런데 견우와 직녀는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이사장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이 이사장은 정치적 임무를 갖고 평양에 가신 것이 아니다. 다만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맺은 6·15 공동선언으로 돌아가 남북이 협력하고 교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어하셨다. 이산가족 상봉, 당국회담 개최, 금강산관광 재개 등이 이뤄지기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광복 70주년 맞았는데 후세들에게는 분단의 아픔을 넘겨주지 말자는 말씀을 하려고 하셨다.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지 못했지만 남북 당국과 주민들에게 남북 화해·협력의 메시지, 6·15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상기시켜준 방북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얼마 전 남북고위급접촉 이후 8·25 합의가 이뤄지는 등 남북간에 새로운 화해모드가 조성되고 있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8·25 합의는 반가운 일이다. 최대 성과는 남북간 최고 당국자간 대화통로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김관진-최룡해, 홍용표-김양건 라인은 매우 중요하다. 이들은 최고 지도자들의 의중을 아는 최고 당국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대화통로를 잘 살려나가야 한다. 앞으로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관광 재개도 잘 풀어가야 한다. 대북전단 살포문제, 10월 10일 전후 북한의 로켓발사, 5·24 조치 해제문제 등에서도 남북 당국의 대범한 접근이 필요하다.”

북한을 빼놓고 중국과 통일을 논의하는 것은 남북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통일대박론을 강조했다. 하지만 지금 통일보다 중요한 것은 화해·협력, 대화·교류를 통한 남북관계 개선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8·25 합의를 원칙론의 승리, 북한이 굴복한 것으로 해석하려는 우리 정부의 태도다. 그런 태도는 북한의 반발을 불러올 뿐이다. 또 ‘중국과 통일문제를 협의하겠다’는 등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도 조심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9월 4일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기내(機內) 기자간담회에서 “북핵문제 등을 다 해결하는 궁극적이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평화통일”이라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중국과 같이 협력해나가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최 실장은 오랫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필했고, 지금은 이희호 여사를 모시고 있다.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다.

“김 전 대통령 서거 후 한편으로는 이희호 여사를 보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향(광주)에서 정치현장에 뛰어들었다. 기회가 된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과 정책을 정치현장에서 펼쳐볼 생각이다. 고향의 발전을 위해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고 있다.”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 정리 김보현 인턴기자, 사진 홍승모 객원기자

201510호 (2015.09.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