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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리포트] 아베 총리 ‘외줄타기’ 외교의 막후 

중국 전승절 참석 둘러싼 ‘강경’ 외무성과 ‘온건’ 총리실의, 갈등·대립 심각했다!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외무성 강경파, “전승절 방중 반대” “종군 위안부 문제 타협 반대” 주문… 정치적 고비 때마다 총리관저의 ‘지지율 외교’에 기대기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 퇴진과 집단자위권 법안 폐기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 8월 30일 도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이 집회에는 12만 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이 원고를 집필 중인 9월 10일 현재, 일본에서 안보법제 관련법은 아직 성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베 신조 정권은 같은 16일쯤 (참의원 표결을 통해) 법안의 성립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 때문에 원고는 ‘아베 법안’이 가결된 것을 전제로 서술하기로 한다.

도대체 왜 아베 정권은 ‘위헌’ 리스크까지 감수해가면서 안보법안의 성립에 매달리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일본의 동맹국인 미국의 사정과 일본의 사정이라고 하는 ‘두 개의 사정’이 존재한다. 우선 한국과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의 동향부터 보자. 모든 것은 2011년 8월, 미국의 연방 의회에서 가결·성립된 예산관리법에서부터 시작됐다.

오바마 정부는 이 법률에 의거해서 지금까지 ‘성지’로 여겨지던 국방비를 이후 10년간 4870억 달러 이상 감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는 향후 10년 동안, 매년 평균 8% 가까이 감축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예산관리법 제정을 계기로 오바마 대통령은 다음 해인 2012년 1월 5일 ‘전 세계에 있어서의 미국 리더십의 견지―21세기 국방전략의 우선사항’을 발표했다. 요컨대 국방비가 크게 삭감되는 가운데, 향후 10년간 미국이 어떻게 세계의 패권을 유지할 것인가를 밝힌 ‘국방전략의 지침’이었다. 여기서 미국은 동아시아의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교묘한 설명을 했다.

“이번 국방전략 지침의 핵심은 ‘리밸런스(Rebalance)’에 있다. 21세기의 처음 10년간은 전임 부시 정권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며 주로 중동에 미군의 주전력을 배치했다. 그런데 오바마 정권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있다. 그리고 철수시킨 주전력을 동아시아로 이동시킨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에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위협이 늘어나고, 김정일이 사망한 북한은 점점 위험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의 전력 밸런스를 바꾸는 ‘리밸런스’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동맹국들은 이후 10년간 미군의 동아시아 지역 집중 배치로 인해 지금 이상의 지역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때의 국방전략 지침이 지향한 것은 ‘오프쇼어·밸런싱(Offshore Balancing)’이라는 개념이었다. 1991년 구소련 붕괴 후 20년간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전 세계의 치안유지를 도모하는 ‘세계의 경찰’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런데 그것이 무거운 부담이 되어왔기 때문에 예산관리법을 통과시켜 국방비를 대폭 줄이기로 했다. 거기에서 도출된 것이 바로 ‘오프쇼어·밸런싱’ 개념이었다.

오프쇼어·밸런싱이란 간단히 말하면, 전 세계에 배치되어 있는 미군을 서서히 철수시키고 그 대신 미국의 동맹국, 혹은 우호국에 각각의 지역방위를 담당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해 미군이 있었을 때와 동일하게 적대국의 위협을 막아낸다는 개념이다.

동아시아의 상황을 대입하면, 한국과 일본에 배치된 미군을 서서히 철수시키고, 그 대신에 한국에는 적대국인 북한의 위협을 방위하게 한다. 한편 일본은 역시 적대국인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가상 적국’은 북한에서 중국으로 시프트


▎미군의 일본 나가사키 원폭 투하 70주년인 지난 8월 9일 아베 일본 총리가 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열린 위령식에 참석해 헌화하고 있다.
한국은 1953년의 휴전 이래, 북한의 위협을 최대한 고려하는 국방체제를 지켜오고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선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헌법 제9조에서 ‘전쟁 포기와 무력의 포기’를 강조하고 있는 일본이었다. 일본이 헌법을 개정하든지, 혹은 헌법해석을 확대해서 ‘전쟁과 무력’을 용인하게 되지 않으면, 동아시아에서의 오프쇼어·밸런싱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완성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오바마 정권은 2012년 말에 탄생한 아베 정권에 대하여, 빠른 시일 내에 헌법개정, 혹은 헌법해석의 변경을 꾀할 것을 음으로 양으로 요구해온 것이었다.

다음으로 일본의 사정에 대해 설명해 보자. 2011년 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것과, 2012년 11월에 대일 강경파 시진핑이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한 것으로 인해 일본의 ‘가상 적국’은 북한에서 중국으로 시프트했다. 더구나 2012년 9월 11일 일본이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댜오)를 국유화하자 시진핑 정권은 센카쿠 열도의 탈취를 중국 해군의 주요 목표 중 하나로 내세웠다. 그 때문에 일본은 현재 실효지배하고 있는 센카쿠 열도를 가까운 미래에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러한 중국의 반응에 대해 아베 정권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사항이 있었다. 하나는 자위대를 증강하여 일본이 독자적으로 센카쿠 열도를 방위하는 것이다. 이 경우의 메리트는 현행의 법률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적이 공격해 오면 반격하는 개별적 자위권은 유엔헌장(United Nations charter)에서 모든 가맹국의 인정을 받고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경우에 정말로 일본 자위대가 중국의 인민해방군을 이길 수 있겠는가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인민해방군 병력은 자위대의 약 10배에 달하며, 핵무기와 원자력잠수함, 거기에 항공모함까지 보유하고 있다. 만일 센카쿠 열도를 빼앗겼을 경우 그 다음은 오키나와를 빼앗기게 되는 리스크도 있었다.

또 하나의 선택사항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일미동맹을 강화하고, 지금까지 이상으로 미군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의 장점은 세계 최강의 미군이 상대라면 아무리 아시아에서 위력을 떨치는 중국군이라 할지라도, 쉽게 센카쿠 열도에 손을 대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 반대로 결점은 일본은 단지 센카쿠 방위를 위한 일미동맹 강화가 목표지만, 미국은 ‘전 세계에서의 일미군의 일체화’를 요구해 온다고 하는 것이었다. 특히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각국이 영토분쟁을 하고 있는 남지나해에 자위대를 파견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즉 과거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이 한국군의 파견을 요청한 것 같은 사태가 일본에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남지나해는 일본이 미국 대신 방어해달라”는 태도가 이미 은연중 드러나고 있었다.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동맹국인 미군이 공격당할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자위대를 파견한다”는 집단적 자위권의 적용이 불가피해진다. 그리고 집단적 자위권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헌법을 개정하든지, 안보법제를 재구축하여 ‘헌법의 초법규적 확대 해석’을 시도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센카쿠 열도는 미군이 방위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9월 3일 오전 중국 베이징 톈안먼광장에서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해 군 병력을 사열하고 있다.
아베 정권이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즉 ‘전 세계에서 미군과의 일체화’라는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2014년 4월 21일에서 23일까지 오바마 대통령이 국빈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아베 총리와 오바마 대통령은 은밀하게 ‘거래’를 성립시켰다. 즉 아베 총리는 2015년 여름까지 안보법제를 성립시켜 집단적 자위권을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전 세계에서 일미군 일체화가 진행되도록 한다. 그 대신 오바마 대통령은 “센카쿠 열도는 미군이 방위한다”라고 선언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은 4월 22일 일미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그러한 취지의 발언을 통해 아베 정권과 일본 국민을 안심시켰다. 바꾸어 말하면 그 시점에서 이미 2015년 여름까지 안보법안의 성립이 결정됐던 것이다. 아베 정권은 예정보다 1개월 길어졌지만 어떻게든 9월 안에 성립을 이루어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헌법의 초법규적 해석’에 의한 안보법안의 억지강행은 당연히 야당과 여론의 맹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안보법안이 중의원에서 심의에 들어간 5월 이후, 매주 금요일 국회 앞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데모대가 ‘전쟁 법안반대!’를 외쳤다.

또한 중국을 가상 적국으로 규정한 안보법안의 성립은 아베 정권의 최대 후원자인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에서도 반발이 심했다. 중국은 일본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며 일본 무역의 약20%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 내에는 일본에서 약 2만 개나 되는 업체가 진출해 1천만 명이나 되는 중국인을 현지 고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올해 7월 16일에 아베 정권이 중의원에서 안보 관련 법안을 강행 채결(採決: 의장이 의안의 채택 가부를 물어 결정함)한 직후, 아베 정권의 지지율은 일시에 33%까지 하락했다. 2012년 12월 제2차 아베 정권이 발족한 이후 최저의 지지율이었다.

일본 정가에는 ‘3할 6개월’이라는 말이 있다. 정권의 지지율이 30% 밑으로 내려가면 그 정권은 6개월 내에 붕괴된다는 경험칙이다. ‘앞으로 3%만 떨어지면 30%를 밑돈다’는 것에 대한 아베 총리의 초조함이 ‘지지율 외교’를 도모하게 만들었다.

‘지지율 외교’라는 말은 정가나 관가에서만 사용되는 특수한 조어다. 요컨대 목전의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서 앞뒤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치적 쌓기 외교’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외무성은 이 ‘지지율 외교’를 “장기적으로 일본의 국익을 손상한다”는 입장에서 몹시 싫어하고 있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정권이 붕괴되어버리면 국익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안보법안으로 급락하고 있는 지지율을 외교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는 아베 총리는 이렇게 해서 ‘지지율 외교’를 전개해나간 것이다.

외무성이 ‘지지율 외교’에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베 총리는 집무실이 있는 총리관저가 주축이 되어 외교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관저외교’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관저외교는 아베 정권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2001년 가을부터 2002년 여름에 걸쳐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의 관저외교가 최근의 가장 유명한 일화다. 당시 수상관저에서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의 지휘 아래 북한과 비밀교섭을 진행했다.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외무장관에게도 비밀에 부쳐가며 추진한 이 때의 관저외교는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 방북’이라는 성과를 불러왔다. 당시 관방 부장관으로서 ‘고이즈미 관저외교’를 지켜봤던 아베 총리가 “이제는 나도 해보자”며 나서게 된 것이다. 관저외교의 대상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지만, 그중 주된 대상은 중국, 한국, 그리고 북한과의 외교교섭이다. 아래에서 순서대로 짚어보자.

“누가 시진핑의 입을 막을 수 있나?”


▎2012년 8월 15일 중국과 일본이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센카쿠 열도에서 홍콩 시위대가 중국 국기와 대만국기를 꽂고 있다.
먼저 중국에 대한 관저외교는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반둥 회의) 60주년 기념대회에 맞춰졌다. 이 대회는 4월 22일 행해진 두 번째 일중정상회담의 계기가 되었다. 이때 시진핑 주석은 아베 총리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9월 3일에 베이징에서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을 예정하고 있다. 이 이벤트의 목적은 일본을 적대시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본 침략을 가슴에 새기면서 앞으로의 아시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베 총리께서도 참석해주시길 바라고 있다.” 아베 총리는 예정에 없었던 시진핑 주석의 이 같은 발언에 당황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만약 제가 그 식전에 참가한다고 하면, 일중의 화해를 상징하는 듯한 이벤트로 만들어달라.

이 일중정상회담 이후 일본 외무성은 중국 외교부에 대하여 “정상회담에서 돌연, 예정에 없었던 발언이 나온 일은 황당한 일”이라고 항의했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 외교관은 이렇게 대꾸했다. “시진핑 주석의 발언을 차단하는 것은 13억 중국인 누구도 불가능하다.”

아무튼 이 시진핑 발언에 대하여 일본 외무성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아베 총리에게 전달했다. “1945년에 일본군은 미군에 진 것이지, 중국 인민군과는 제대로 전쟁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1989년 민주화를 원하는 학생들을 학살한 안먼광장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한다는 것은 일당 독재국가만이 생각할 수 있는 만행입니다. 그런 곳에 민주국가인 일본의 최고권력자가 방문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중국 측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베 총리의 참석을 원한다면, 9월 3일을 기점으로 중국 정부는 앞으로 영원히 일본에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겠다고 시 주석이 선언하게 해달라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 아베 총리는 외무성 간부에게 “그럼 그 선에서 진행시켜달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중국측은 “그러한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이 아베 총리의 방중 이야기는 일단 중단됐다. 그런데 7월에 와서 사태가 급변했다. 안보법안을 둘러싼 야당의 맹공과 2020년 도쿄올림픽의 주경기장이 되는 신국립경기장의 건설비가 예정의 두 배가량 부풀려진 문제로, 아베 정권의 지지율이 급락했다. 그런 가운데 아베 총리는 앞서 언급한 관저외교를 다시 시작했다.

아베 총리는 7월 16일 관저 내의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국가안전보장 국장(전 외무성 차관)을 베이징에 파견했다. 야치 국장은 중국 측 카운터파트인 양제츠(楊潔篪) 외교담당 국무위원(전 외무장관)과 총 5시간 반에 걸쳐서 9월의 아베 총리 방중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에는 이미 일중 간의 공수 위치가 바뀌어 있었으며 중국 측이 아베 총리의 방중을 위한 ‘3가지 조건’을 들이댔다. 즉 첫째는 지난해 11월에 야치와 양제츠 사이에서 합의한 ‘4개의 합의 항목’의 준수다. 이것은 중국 측에 있어서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중일 간의 분쟁이 되고 있다”는 점을 쌍방이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실효지배하고 있는 일본은 지난해 11월까지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줄곧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둘째는 아베 총리가 8월 중순 발표할 예정인 ‘전후 70년 아베 담화’를 ‘무라야마 담화’와 같은 수준과 내용으로 조율하는 것이었다. ‘무라야마 담화’는 전후 50주년을 맞는 1995년 8월 15일 당시의 무라야마 토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발표한 담화로, 과거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한 데 대한 사죄와 반성을 명확히 진술했다.

마지막, 셋째 조건은 아베 총리가 이후 두 번 다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겠다고 중국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야치 국장은, “세 가지 조건은 그다지 높은 허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개인적 견해를 피력하고 귀국한 것이었다.

아베의 방중 둘러싼 외무성과 총리실의 갈등


▎아베 전쟁법안 추진 규탄, 과거사 사죄 촉구 대학생 시국성명 발표 기자회견이 7월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가운데 평화나비네트워크 소속 대학생들이 항의 피켓을 들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맹렬히 반발했다. 7월 22일에는 즉각적인 ‘보복조치’로서, 중국 측이 독자적으로 건설 중인 동지나해의 가스전 16곳의 증거사진을 외무성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일부러 영어와 중국어 해설까지 달았다.

2008년 5월, ‘지일파 지도자’로 알려진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방일, 당시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와 일중 정상회담을 통해 일중 간의 오랜 쟁점이 되어 있던 동지나해의 가스전을 공동개발하는 것에 합의했다. 그 후 6월에는 중일의 외교당국자 간 논의를 통해 어느 장소를 어떤 방법으로 공동 개발할 것인가에 대해 큰 테두리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시진핑 정권은 당시의 합의를 무시하고 은밀히 16군데나 독자적으로 멋대로 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의 공개 효과는 컸다. 많은 일본인에게 충격을 줬고 “역시 중국은 무섭다”라는 점을 다시 한번 인식시켰다. 그리고 일본 외무성은 아베 총리에게 “만약 9월 3일 총리가 방중하게 되면 이 가스전에 대하여 2008년 합의에 근거해서 공동 개발하겠다는 양보를 중국 측으로부터 이끌어내야 한다”라고 제언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외무성은, 시진핑 정권이 용이하게 양보할 리 없다고 판단한 아베 총리의 마음을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아베의 방중’을 어떻게든 실현시키려고 하는 수상관저도 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8월 14일 발표한 ‘전후 70년 아베 담화’의 초안은 아베 총리가 바라는 ‘미래지향적 관점’에 따른 것으로 한국과 중국을 분개시키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수상관저의 그림자 주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마이 타카야(今井尙哉) 수석비서관이 중심이 되어 ‘한국과 중국이 어떻게든 반발하지 않는 내용’으로 다시 썼다. 곧 ‘침략·식민지지배·사죄·반성’으로 이뤄진 ‘4점 세트’를 모두 집어넣은 것이다. 사실은 이때 아베 총리와 천황과의 사이에서 ‘내전’이 있었다.(108쪽 기사 참조)

8월에 아베 총리의 뇌리에 있었던 것은, 오로지 9월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안보법안을 성립시키는 것과 법안 강행 채결에 의한 지지율 저하를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총리관저는 아베 총리에게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총리의 방중으로 ‘안보법안은 중국을 향한 전쟁 법안이다’라고 주장하는 야당에 ‘나는 일중 우호에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당을 아무 말도 못하게 하면, 안보법안을 성립시키고 지지율 상승으로도 연결되고, 일거양득입니다.” 이에 반해 외무성은 정반대를 주장했다.

“텐진의 믿을 수 없는 폭발 사고를 보십시오. 이처럼 뒤숭숭한 상황에서 총리가 베이징의 군사 퍼레이드에 참가하면 지금까지 지지했던 보수층이 ‘매국총리를 지지할 수 없다’라며 돌아서게 됩니다. 야당도 ‘매국외교’라는 공격을 퍼부을 것이며 안보법안 성립 자체가 위태로워집니다. 즉, 아베 총리의 방중은 백해무익합니다.”

아베 총리가 선택한 것은 이마이 비서관을 필두로 하는 총리관저의 의견이었다. 단 관저는, 아베 총리가 9월 3일의 군사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것은 정말로 여론에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메르켈 방식’을 구현하기 위해 중국 측과 교섭했다.

메르켈 방식이란 올해 5월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러시아를 상대로 취한 방식이다. 러시아 역시 지난 5월 9일 모스크바에서 대독전쟁 승리 70주년 군사 퍼레이드를 거행했다. 이때에 독일의 메르켈 총리도 초대했다. 메르켈 총리에게 있어서 과거의 적국이었던 러시아의 전승 군사 퍼레이드에 출석하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지만, 러시아와의 외교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했다.

시진핑, 아베 ‘메르켈 방식’에 반대하다


▎마이크 위에 앉은 한일 양국의 새 이미지. 매년 일본 정부와 각료들의 부적절한 과거사 발언이 이어지고 있지만 한일관계의 미래를 직시하는 냉정하고 담담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5월 9일의 군사 퍼레이드는 불참하고, 다음 날인 10일에 조용히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이었다. 이를 차용해 아베 총리도 9월 3일의 군사 퍼레이드를 피해서 다음 날인 4일에 방중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메르켈 방식’에 난색을 표한 것은 군사 퍼레이드의 주최자인 시진핑 주석 본인이었다.

“나는 아베 총리를 9월 3일의 군사 퍼레이드에 초대한 것이다. 그때 오지 않겠다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아베 총리의 ‘방중의 꿈’은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외무성과 총리관저의 올여름 ‘외교전’은 한국과의 외교를 둘러싸고도 벌어졌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각각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아베 총리를 설득했다.

외무성: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것에는 찬성합니다만, 박대통령이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종군 위안부 문제는 일체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1965년의 일한기본조약으로 과거 식민지지배 시대의 문제가 모두 해결 완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50주년인 1995년 한국측의 요청에 따라서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을 설립, 총리의 편지까지 첨부해서 종군 위안부 1인당 200만 엔을 건네주려고 했는데 한국 측이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한 번 더 이에 대한 보상을 논의하게 되면, 중국에서 엄청난 수의 ‘전(元) 위안부’를 자칭하는 여성들이 입후보하는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고, 이것이 앞으로 일중 관계의 난제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수상관저: “한국과의 외교는 같은 민주국가이자, 같은 미국의 동맹국과의 외교이며, 중국만큼 복잡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해결 불가능한 영토 문제가 아니라 70년 전에 있었던 해결 가능한 위안부 문제입니다. 만약 박 대통령과의 첫 단독정상회담을 실현시키는 것에 의해, 아베 정권의 지지율이 올라갈 수 있다면 이 기회를 충분히 활용해야 합니다.”

<월간중앙> 8월호에 상세하게 밝힌 것과 같이 6월 22일 일한 국교정상화 50주년에, 아베 총리는 외무성 강경파를 따돌리고 관저외교의 방향을 선택했다. 즉 아베 총리가 도쿄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박근혜 대통령도 서울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출석하는 ‘한일 우호’ 파포먼스를 연출한 것이었다.

외무성과 수상관저의 외교전은, 대북한 외교를 두고도 벌어진다. 그것은 일본 외교의 최대 과제로서 전용 담당 각료까지 두고 있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에 관한 다툼이다.

납치 문제에 관해서는 2014년 1월 이후, 외무성이 주도하는 형식으로 진행시켜왔다. 그 성과는 북한 측이 같은 해 7월 4일 ‘일본인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모양새로 결실을 맺었다. 이 위원회는 일본인의 유골, 잔류 일본인과 일본인 처, 납치 피해자, 기타 실종자로 나누어 북한에 생존하는 일본인 전반을 조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외무성이 득점을 올린 것은 거기까지로, 이후 대북한 외교는 고착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지난봄부터 ‘납치 피해자가족모임’을 중심으로 “만약 조사위원회가 시작된 지만 1년이 지나가도 납치 문제에 진전이 없으면 아베 정권에 반기를 들겠다”는 움직임이 높아졌다.

실제로 일본 외무성은 북한 외무성과 중국에서 몇 번이나 물밑교섭을 추진했다. 그러나 납치 문제를 최우선으로 삼고 싶은 일본 측과, 해결이 용이한 유골 및 잔류 일본인·일본인 처 문제부터 해결하고 싶어 하는 북한 측이 입구에서부터 부딪치며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올해 4월 다시 외무성과 수상관저가 부딪쳤다.

외무성: “납치 피해자가족모임 및 일본 국민이 바라고 있는 것은 먼저 한 명이라도 좋으니 생존해 있는 납치 피해자를 귀국시키는 것이며, 납치 피해자의 귀국 없이는 대 북한 외교의 진전은 없습니다.”

수상관저: “물론 납치 피해자의 귀국이 베스트 시나리오지만, 무엇보다 우려해야 하는 것은 대 북한 외교가 진전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납치 피해자가족 모임과 국민이 실망을 느껴서 아베 정권의 지지율이 저하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납치 문제에 관한 모종의 ‘이벤트’를 연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베 정권은, 납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구나’라고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10월 말 한중일 정상회담에 기대감 증폭

이때도 아베 총리가 선택한 것은 후자인 관저의 의견이었다. 당장의 목표를 ‘김은경 일가의 방일’로 하고, 이마이 수석비서관이 5월 14일에서 16일까지 몽골의 울란바토르로 날아갔다. 김은경은 1977년 납치되어 ‘납치 문제의 상징’이라 불리는 요코타 메구미 씨의 외동딸로서 현재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

몽골의 엘벡도르지 정권은, 아베 정권에 대하여 납치 문제의 해결에 구체적인 협력의사를 표명한 유일한 정권이었다. 실제로 엘벡도르지 정권은 2014년 3월 울란바토르 영빈관에서 평양에서 온 김씨 일가(본인과 남편, 한 살배기 딸)와, 일본에서 날라 온 요코타 메구미 씨의 부모를 만나게 해준 ‘실적’이 있었다. 필자는 올해 4월 엘벡도르지 대통령의 최측근이라고 불리는 부레부스렌 외무장관을 인터뷰했다. 그때 부레부스렌 장관은 자신만만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2013년 이후, 이미 열 번이나 평양을 오가며 북일 간의 가교역할을 맡았다. 아베 총리의 자택에도 초대되어 북한에 생존해 있는 납치 피해자가 있다고 말을 전했다. 구체적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머지 않아 희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일본 외무성은, 이 ‘몽골 루트’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2013년 10월에 엘벡도르지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지만 김정은 제1서기가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았다. 엘백도르지 대통령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연했을 때 “어떠한 폭정도 영원할 수 없다. 위대한 독재자는 이른 저녁에 실각한다”며, 김정은 정권의 붕괴를 내비치는 발언을 연발해서 북한 측의 강한 발발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이 ‘몽골 루트’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과거 한 조선 노동당원을 인터뷰했을 때 몽골 루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인구가 우리나라의 10%밖에 안 되는 사막의 작은 나라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자국의 문제는 자국에서 해결한다.”

실제로 김은경 씨 문제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방일시키고 싶어 하는 일본 측과, 요코타 메구미 씨의 부모를 평양으로 부르고 싶어하는 북한 측이 평행선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고 들었다. 북일 관계는 여전히 험난하지만 멀리 한줄기 서광도 보인다. 그것은 현재 김정은 정권이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중국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에서는,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의 옆줄에 서 있었던 것에 비해, 북한 대표인 최룡해는 뒷줄 오른쪽 구석으로 쫓겨나 있었다.

즉 시진핑 정권은 “한반도 문제는 북한이 아니라 한국과 결정한다”는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이후에 다시 일본을 의지해 올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10월 10일 ‘조선 노동당 창건 70주년’이라는 큰 이벤트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김정은 정권으로서도 어떠한 형태로든 외교 실적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10월 31일쯤으로 예상되는 서울에서의 한중일 3국 정상회담도 기대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중국 측 대표가 강경파인 시진핑 주석이 아니라 경제 중시파의 리커창(李克强) 총리이기 때문이다. 리커창 총리는 ‘지일파지도자’로 알려진 후진타오 전 주석의 최측근 제자로 일본에 대한 반발심이 거의 없다. 3년이나 우여곡절을 겪어왔지만 다시 한중일이 협력하는 동아시아가 될 수 있을지, 3국 정상회담의 귀추가 대단히 궁금하다.

-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201510호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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