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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연구] 글로벌 기업의 후계승계는 달라도 너무 달라! 

한국은 핏줄 먼저, 외국은 능력 우선 

장원석 이코노미스트 기자
日 스즈키社 장남 30년 경영수업 받고서야 사장 자리 올라… 국내 대기업은 평균 40대 중반에 경영권 넘겨받아

▎세계 부자 순위 3위 워렌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일찌감치 자녀에게 승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정했다.
전 세계 글로벌 기업의 성장사는 대개 비슷하다. 특정 분야에서 독주 체제를 갖춘 뒤 좀 컸다 싶으면 문어발식으로 확장하고, 덩치를 키워 규모의 경제를 도모한다. 계열사를 늘려 내부 거래를 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것도 비슷하다. 특히 제조업체 중엔 이렇게 성장한 기업이 많다. 우리나라 대기업 역시 정부의 보호 속에 이런 방식으로 성장했다. 특이한 건 우리나라의 경우 대기업이 재벌 체제를 갖췄다는 점이다. 워낙 희소한 일이다 보니 재벌이란 용어의 영어 표현은 우리말을 그대로 옮긴 ‘chaebol’이다. 오너 일가가 그리 많지 않은 지분을 가지고 계열사 전체를 지배하고, 가족들이 직접 경영까지 하는 구조다.

재벌의 문제점에 대해선 잠시 접어두자. 창업자 입장에선 애써 키운 회사니 남 주긴 아까울 터다. 재산을 물려주듯 기업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다. 선대의 재산과 기업의 승계를 두고 가족간 분쟁이 일어나는 것 역시 만국공통이다.

명품 브랜드 ‘구찌(Gucci)’가 대표적이다. 창업자인 구찌오 구찌가 192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가죽 전문매장을 열었는데 그가 만든 가방은 상류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승승장구하던 구찌는 1953년 구찌오의 사망 이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 아들 알도와 로돌프가 지분을 50%씩 나눌 때까지만 해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3세 승계 과정에서 사건이 터졌다. 알도의 아들 파울로와 로돌프의 아들 마우리치오가 경영권 분쟁을 시작했고, 분란에 휩싸인 회사는 얼마 못 가 재정난에 직면했다. 형사 사건(살인)으로 번진 가족간 혈투에 회사는 회생 기회마저 잃어버린 채 표류했고, 결국 1993년 중동 투자회사에 매각됐다. 지금도 구찌는 세계 최고 수준의 명품 브랜드로 각광을 받지만 더 이상 창업자 가문의 향기는 이 회사에 남아있지 않다.

경영권까지 통째로 승계하는 한국 대기업


▎롯데그룹 경영권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수세에 몰렸던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8월 7일 오후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고 있다.
구찌와 비슷한 목불인견의 상황이 얼마 전 한국에서도 벌어졌다. 롯데그룹 두 형제가 벌인 경영권 분쟁이다. 7월 27일 신격호 총괄회장은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신동빈 회장을 비롯한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 6명을 구두로 해임했다. 그러자 일본 롯데홀딩스는 신 회장 주도로 긴급이사회를 열어 신 총괄회장을 전격 해임했다. 이후 보름 동안 두 사람은 볼썽사나운 여론전을 펼치며 경영권에 사활을 걸었다. 형제간에 다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 과정에서 국민이 몰랐던 재계 5위 재벌 가문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불투명한 그룹 지배구조와 사유화된 계열사 사이에 주주 가치란 없었다. 한쪽은 어눌한 한국말, 한쪽은 아예 일본말만 하는 모습에 난데없는 국적 논란까지 벌어졌다.

신 회장이 8월 17일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확실한 승기를 잡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신 회장이 두 번이나 나서 고개를 숙이고,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롯데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여전히 냉랭하다. 신 회장으로서는 지분 구조를 개혁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예정에 없던 수조 원의 돈을 써야 한다. 부담스러운 작업이 될 게 자명하다. 돈도 돈이지만 꼬일 대로 꼬인 지분을 정리하려면 각종 송사에 시달려야 할 테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비용은 더욱 늘어난다. 유통 강자인 롯데는 가뜩이나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국내 시장은 포화상태고, 중국 등 해외 사업도 거의 성과를 못 내고 있다. 경영 실적이 마뜩잖은 상황에서 난데 없는 골육상쟁으로 리스크만 키운 꼴이 됐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면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창업한 현대그룹은 2000년 소위 ‘왕자의 난’ 이전까지 재계 1위였다. 그러나 승계 과정에서 그룹이 여러 조각으로 쪼개졌다. 장남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여서 그룹 경영권이 누구에게로 향할지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었다. 당시 차남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5남인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의 서명과 육성 녹음을 차례로 공개하며 혈투를 거듭했다. 최종적으로 정 명예회장의 선택은 정몽헌 회장이었다. 그러자 정몽구 회장은 크게 반발하며 자동차 계열사를 챙겨 그룹에서 떨어져 나왔다. 언뜻 정몽헌 회장이 이긴 듯했지만 현대전자와 현대건설 등 주력 계열사 20개를 거느리던 그는 자금난에 봉착해 어려움을 겪다 2003년 대북송금 및 비자금사건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별탈 없이 계열 분리가 이뤄진 것처럼 보였던 삼성그룹 역시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자산 승계를 놓고 2012년 장남인 고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과 3남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간에 소송전이 벌어졌다. 이맹희 회장은 부친의 차명주식을 이건희 회장이 다른 형제들 몰래 자신의 명의로 변경했으니 이를 나눠달라고 주장했다. 소송가액이 4조원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큰 소송이었으나 법원은 이맹희 회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가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면서 분쟁은 종결됐다.

승계 과정에서 벌어지는 분란은 엄밀히 말해 소유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고, 실질적 주인은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대주주다. 상장을 하든 안 하든 이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다. 여기까진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다. 전 세계 모든 기업에서 대주주의 권한은 막강하다. 대주주는 경영을 직접하든 자신의 이해와 가장 잘 맞는 사람에게 맡기든 경영권을 좌지우지할 권한을 가진다. 사실 기업의 진짜 힘은 소유권이 아닌 경영권에서 나온다. 경영에 간섭할 수 없는 소액주주는 그래서 힘이 없다. ‘누가 소유했느냐’의 여부보다 더 중요한 건 ‘누가 경영을 하느냐’라는 의미다. 기업이 많은 공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기업 역시 재산이다. 그러므로 특정 가문이 기업을 소유하고, 그 소유권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 자체를 문제 삼긴 어렵다. 소액은 되고 거액은 안 된다는 논리도 앞뒤가 안 맞다.

그러나 특정 가문이 대주주의 권리를 승계하는 것과 그 가문이 직접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독특한 특성이 드러난다. 한국 대기업은 철저히 자녀에게 소유권과 경영권을 동시에 물려준다. 기업을 경영할 후계자가 아주 당연하게 ‘핏줄’로 결정된다는 의미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국내 30대 그룹의 업력은 평균 63년이다. 한 세대가 20~30년을 경영한다고 보면 지금은 3~4세가 승계를 하는 시점이다. 9월 초 <이코노미스트>가 국내 30대 그룹의 승계현황을 전수조사했더니 총수가 있는 23곳 중 현대중공업을 제외한 22곳에서 3~4세로의 지분 승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 역시 아직 본격적 지분 승계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대주주인 정몽준 대한 축구협회 명예회장의 아들 정기선 상무가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지분을 넘겨줄 가능성이 크다.

가족경영이지만 후계자 선정 엄격한 글로벌 기업


▎*지분은 2015년 4월 기준. 자산승계율은 5월 기준, 30대 그룹 중 총수 없는 곳은 제외 / *자산승계율=대기업 총수 일가가 보유한 전체 주식자산 중 자녀에게 이전된 주식자산 비율 ※자료:공정거래위원회, CEO스코어
올해 5월 말 기준으로 30대 그룹의 자산 승계율은 평균 40.2%였다. 자산 승계율은 경영권을 가진 오너 일가가 보유한 그룹 주식 자산 대비 자녀 세대가 소유한 주식 자산 비율을 말한다. 2013년 말보다 5.6%포인트 증가했다. 삼성·GS·신세계 등 7곳은 지분과 경영권 승계가 사실상 마무리 단계다. 지분 승계는 덜 진행됐지만 3~4세가 경영에 참여하거나,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곳이 12곳이었다. SK·롯데·CJ 등 4곳은 자녀가 아직 어려 3세 승계를 논하긴 어려운 시점이지만 자녀의 승계 여부는 사실상 확정적이다. 단 한 곳도 예외 없이 오너 일가 내에서 승계가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승계 준비 과정까지도 비슷하다. 대기업 3~4세(특히 남성)라면 전공이 뭐든 하나같이 미국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딴다. 돌아와 과장쯤으로 입사한 뒤 초고속 승진을 거쳐 임원이 되고, 40대 중반쯤 경영권을 쥔다. 그 사이 아버지는 자녀가 그룹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지배구조 개선 작업을 해둔다. 지분만이라면 모르지만 창업자 후손이 대대손손 경영권까지 물려받는 건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일이다. 우리나라 대기업이 아무리 경영을 잘하더라도 세습 논란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다.

물론 가족경영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오히려 해외엔 가족경영으로 수 대째 역사와 전통을 살리며 성장한 기업이 꽤 있다. 유럽은 특히 가족경영이 활발하다. 이탈리아가 대표적이다. 이탈리아는 전체 기업의 72%가 가족기업이다. 물론 작은 기업이나 소규모 사업일수록 가족 기업 비중이 크지만 매출 5천만 유로 이상인 중·대기업도 58%가 가족기업이다. 아그넬리 가문이 5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엑소르는 자동차회사인 피아트그룹의 지주회사다. <포춘>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 순위에서 19위에 오른 이탈리아 최대 기업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사외이사로 등재된 기업이기도 하다. 현재 엑소르는 아그넬리 가문의 3세인 존 엘칸 회장이 이끈다.

독일 역시 가족경영이 활발하다. 세계적 필기구 브랜드 파버카스텔이 대표적이다. 1761년 문을 열어 250년이 넘은 장수기업으로 동그란 연필이 굴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6각 연필을 처음 고안한 회사로 유명하다. 결혼으로 맺어진 두 가문이 경영하는데 안톤 볼프강 그라폰 회장이 1978년부터 지금까지 회사를 이끌고 있다. 그 아들이 현재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독일 중견기업에서도 가족경영이 흔하게 관측된다. 전문가용 카메라 렌즈와 필터로 유명한 슈나이더 크로이츠나흐는 소유주인 만다만 가문이 2대째 경영에 참여하고, 지금은 3세가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그러나 자식 세대가 경영권을 물려받더라도 대부분의 해외 기업은 우리나라와 달리 엄격한 트레이닝 과정을 거친다. 일단 넘겨주고 경영 능력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오랜 기간 경영수업을 받으며 검증을 통과해야 경영권을 차지할 수 있다. 능력이 없는데도 자식이란 이유로 자동 승계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의미다. 대표적인 게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이다. 발렌베리 그룹은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고, 14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형 회사다. 그 위상은 한국의 삼성 이상이다. 1856년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창업해 160년 동안 5대째 세습 경영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발렌베리가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꼽히는 건 통 큰 사회공헌과 함께 투명한 세습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발렌베리 그룹의 후계자가 되는 길은 멀고 험하다. 그룹의 후계자는 친족간 경쟁을 통해 선발한다(적합한 후보가 없을 땐 외부에서 선택 가능). 일단 그 후보에 이름이라도 올리려면 부모의 도움 없이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쳐야 한다. 해외에서 사업 경험을 쌓아야 하는 건 물론이다. 여기에만 최소 10~20년이 걸린다. 견제와 균형을 위해 두 명의 후계자를 선발해 한 명은 지주회사를 맡고, 한 명은 은행을 경영한다. 지금도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과 야콥 발렌베리 회장의 투톱 체제다. 현재 6세대 승계 작업이 진행 중인데 아직 후계자는 결정되지 않았다.

경차로 유명한 일본 자동차업체 스즈키도 비슷하다. 스즈키는 창업 가문인 장인의 사업을 물려받은 스즈키 오사무 회장이 무려 37년 동안 회사를 이끌었다. 그러다 지난 6월 사장 교체를 발표했다. 오사무 회장이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오사무 회장의 장남인 스즈키 토시히로 부사장이 사장에 올랐다. 그러나 토시히로 사장이 이 자리까지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회사 업무를 하긴 했지만 본인 스스로도 사장이 될 것이란 확신을 못했다. 오사무 회장은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2000년 본인이 70세가 됐을 때 전문경영인 토다 마사오 전 사장에게 직을 물려줬지만 그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세계 100대 기업 중 가족기업은 6곳뿐


▎1. 6월 30일 스즈키 사장 교체 관련 기자회견에서 스즈키 오사무 회장(오른쪽)이 발언하고 있다. 바통을 이어받은 아들 스즈키 토시히로 사장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약 30년간 경영수업을 받았다. / 2. 스웨덴 대표 기업 발렌베리 그룹의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 발렌베리 가문은 5대째 세습 경영 체제를 유지하지만 후계자 선정 절차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 다음 시나리오는 사위인 오노 히로타카 전무에게 물려주는 것이었다. 그는 소형차 ‘스위프트’와 ‘SX4’ 개발을 주도해 스즈키가 자동차 본고장인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오사무 회장도 그의 경영 능력을 높이 평가해 오노 전무의 승계가 유력해 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 2007년 췌장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실상 대안은 스즈키 사장뿐이었다. 그럼에도 오사무 회장은 곧바로 스즈키 사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았다. 아직 부족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결국 8년 뒤 예정대로 승계됐지만 스즈키 사장은 무려 30년 가까이 경영수업을 받고 나서야 사장에 올라설 수 있었다.

도요타 역시 1937년 창업한 이후 11명이 사장직을 거쳤는데 창업자 가문이 6명, 전문경영인이 5명이다. 오너 일가라도 입사 후 평균 31년 동안 경험을 쌓은 뒤에야 사장 자리에 올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도요타가 위기에 처하자 현 회장인 도요타 아키호가 다시 경영권을 잡았는데 결과는 아주 좋았다. 2012년 도요타는 세계 1위 자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지금 잘한다고 앞으로도 오너 일가가 계속 경영을 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글로벌 기업이나 해외 기업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는 게 일반적이다. <포춘>이 발표한 글로벌 500대 기업 순위에서 100위 이내에 포함된 기업 중 가족기업은 월마트·폭스바겐 등 단 6개뿐이다. 글로벌 회계법인 EY(언스트앤영) 소속 ‘EY 글로벌 우수 가족기업 센터’와 스위스 생갈대 ‘가족기업 센터’가 최근 발표한 세계 500대 가족기업 순위와 비교한 수치다. 이 조사는 경영권을 가진 가문이 지분 32% 이상(비상장사는 50%)을 보유한 경우만 가족기업으로 분류한다. 대주주 보유 지분이 낮은 삼성이나 도요타 등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다.

1962년 미국 아칸소주에서 문을 연 월마트의 창업주는 샘 월튼이다. 지금도 월튼 일가가 지분의 50.9%를 소유하고 있다. 경영도 직접 한다. 1988년 전문경영인인 데이비드 글래스가 CEO에 오른 적이 있지만 월튼 가문의 영향력은 그대로였다. 장남인 롭 월튼이 199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장에 올랐고, 올 6월엔 그의 사위인 그레그 페너가 새 회장에 취임했다. 독립적 인물을 회장으로 뽑으라는 노조의 압박이 거셌지만 이변은 없었다. 2008년 이사회에 진입한 페너 회장은 그해 롭 월튼의 딸과 결혼했고, 지난해 부회장이 된 후 1년 만에 그룹 수장 자리에 올라섰다.

미국 부자들의 선택은 승계 대신 기부


세계 500대 가족기업 순위 상위 10위 내에 폭스바겐·엑소르·포드·BMW 등 글로벌 자동차 회사가 4개나 포함된 게 특이한 점인데 자동차와 같이 자본집약적 산업은 가족경영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 조사에서 가족기업으로 분류됐지만 BMW는 최대주주인 콴트 가문이 직접 경영에 나서지는 않는다. 1970년 전문경영인 에버하르트 폰 퀸하임이 회장에 오른 뒤 지금까지 전문경영인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말에도 생산부문 총괄사장이던 하랄트 크루거가 회장직에 올랐다. 콴트 가문과는 무관한 인물이다. 그러나 새 경영자를 선출할 땐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오랫동안 가능성을 평가하면서 옥석을 가리는데 다른 임무를 번갈아 주면서 경영 능력을 꼼꼼히 따진다.

범위를 좀 더 넓혀 삼성과 도요타를 포함시켜도 창업 가문이 직접 경영까지 하는 경우는 <포춘> 글로벌 100대 기업 중 10여 곳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글로벌 기업에서 전문경영인 체제가 정착돼 있다는 의미다. 소유와 경영이 철저히 분리된 기업으로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애플 등이 있다. 두 회사 모두 역사가 짧지만 창업자는 일선에 물러났거나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리더는 전문경영인으로 채웠다. MS 창업자 빌 게이츠는 일찌감치 그룹의 승계 방식을 결정했다. 차원이 완전히 달랐다. 그는 2000년 아내인 멜린다 게이츠와 함께 재단을 설립했다. ‘빌&멜린다게이츠재단’은 현존하는 민간 자선단체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그리고 이 재단을 통해 전 재산을 기부해나가고 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재산의 95%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경영에서도 일찌감치 손을 땠다. 스티브 발머에게 회장직을 물려줬고, 지난해 말엔 사티아 나델라가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빌 게이츠에겐 세 자녀가 있지만 모두 MS와 무관한 일을 한다. 그가 자녀에게 물려주기로 한 유산은 각각 1천만 달러(약 120억원) 씩이다. 그의 전 재산이 792억 달러(약 90조원)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껌값’이다.

‘공식은 없다’ 유일한 원칙은 ‘핏줄보다 능력’


▎1. 미국 특유의 기부문화는 최근 전 세계로 확산되는 추세다. 중국 최고 부호로 꼽히는 마윈 알리바바 회장은 지난해 약 3조원을 기부했다. / 2. 자신의 전 재산인 320억 달러(약 36조원)를 기부하겠다고 밝힌 사우디아라비아 알왈리드 빈 탈랄 왕자. 그는 세계 부호 순위 34위다.
워렌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역시 빌 게이츠과 같은 선택을 했다. 버핏은 전 재산의 99%를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세계 3위 부자인 그의 전 재산은 727억 달러(약 81조원) 정도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일단 370억 달러 상당의 주식을 5개 자선단체에 순차적으로 기부하기로 했다. 그에게도 세 자녀가 있지만 사업과는 거리가 멀다. 유산 역시 아주 최소한만 상속할 계획이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워낙 버핏의 영향력이 큰 회사라 후계자에 대한 궁금증이 크다. 아지트 자인 버크셔 재보험사업부 대표와 그렉 아벨 에너지사업부 대표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확실한 건 그의 자녀는 아니라는 점이다.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애플은 아내와 자녀들이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경영은 일찌감치 후계자로 지목된 팀 쿡이 맡고 있다. 팀 쿡 역시 기부 행렬에 동참했는데 그는 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열 살인 조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만 학비를 대준 뒤, 죽기 전 모든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재산은 약 1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이러한 미국 특유의 기부 문화는 최근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 최고 부호로 꼽히는 마윈 알리바바 회장은 지난해 약 3조원을 기부했다. 전 재산의 10분의 1을 단 1년 사이 기부했다. 아들이 경영학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가 가업을 승계할 것인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세계 부호 순위 34위에 오른 사우디아라비아 알왈리드 빈 탈랄 왕자도 자신의 전 재산인 320억 달러(약 36조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정리해보면 글로벌 기업에서도 승계 공식 같은 건 없다. 자식에게 지분을 물려주는 것까지는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후세대가 직접 경영까지 맡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정도다. 핏줄보다 능력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유럽의 장수기업을 취재한 적이 있는데 장수기업 하면 오랫동안 한 가문이 경영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주인이 수 차례 바뀌면서 명맥을 이어온 곳이 훨씬 더 많다. 가족경영이 흔한 유럽에선 오히려 ‘내 자식이 사업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덜하다. 일차적으로 자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혹 여의치 않은 경우라면 사업을 통째로 다른 가문에 이양하는 일도 많다.

프랑스 파리 북쪽에 있는 르 고엑스(LE GOUEIX)는 전동 드릴이나 배관 등 에너지 관련 설비를 유통하는 회사로 1862년 문을 연 장수기업이다. 직원 수는 50명에 불과하지만 4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강소기업이다. 프랑소아 꽁땅 회장이 처가의 사업을 물려받아 5대째 경영하고 있지만 가족경영은 아마 그가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크다. 3명의 자녀가 있지만 물려받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역시 주변에 괜찮은 경영자에게 바통을 넘겨줄 생각이다. 그의 한마디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새겨둘 필요가 있다.

“경영자가 유지하고 지켜가야 할 건 부(지분)가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축적된 기업의 가치(기술력)라고 생각한다. 주인이 바뀌어도 이건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이 회사가 내 것이지만 길게 보면 나도 이 회사의 중간관리자쯤 될 것이다. 경제 생태계 안에서 기업은 사람처럼 태어나고, 죽는다. 누구의 것이랄 게 없다. 내 자식이 회사의 다음 주인이 돼서 나쁠 건 없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누가 주인이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 장원석 이코노미스트 기자

201510호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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