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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인터뷰]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 

“보수세력이 양극화 외면하면 공동체 붕괴에 직면할 것” 

한기홍 월간중앙 기자 사진 전민규 기자
“박근혜 대통령 성공 기원 초심은 여전… 견마지로의 대가 바란 적 한 번도 없었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보수세력은 스스로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그 해법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의 생환 여부는 다가올 4월 총선의 가장 첨예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유승민의 승패가 박근혜 정부 후반기 국정 동력의 중요한 변수가 된 형국이다. 그는 ‘선거의 여왕’이자, 보수세력의 수장인 박 대통령과 힘겨운 일전을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보수혁신의 깃발을 들고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것이 그의 각오다. 출사표와 함께 정치 철학과 소신, 인간 유승민의 면모를 탐구했다. <편집자>

유승민(57)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요즘 가장 핫(Hot)한 정치인이다. 새누리당 정치인 가운데 단연 독보적이다. 원내대표 시절에는 그 자리 때문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면 이제는 인물 자체에 대해 주목도가 높다. 왜 그런가? 그가 내년 총선의 키워드인 동시에 보수 혁신론의 중심, 나아가 2017년 대선의 유력한 여권 후보 중 한 명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구조적 저성장의 시대가 장기화되고 있는 국면에서, 2017년 대선은 경제 이슈로 치러질 것이란 전망이 그에게 희망을 준다. 경제학 박사 유승민이 갖고 있는 경쟁력이 개화하리란 기대감이다.

‘독자적 사고’가 가능한 거의 유일한 여권 후보로 유 전 대표를 바라보는 사람도 많다. 고집과 맷집이 있고, 골똘히 생각한 흔적이 있는 자신만의 정치철학을 비장(秘藏)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과 글’로 대중과 정치적 반대진영을 설득할 수 있는 오바마식 통합정치를 동경하고 선망한다. 정치적 이미지는 ‘보수풍의 케네디’, 경제적 이미지는 ‘토니 블레어의 역동성’을 닮았다. 노동당 총리로 대처리즘에 영감을 받은 블레어와는 물론 정반대 방향이다. 그는 보수혁신의 관점에서 양극화 문제의 해결, 복지체제의 강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는 차기 또는 차차기 후보로 거론되는 원희룡 제주도지사나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정치적 견인자이기도 하다. 차세대가 이끌 대한민국 보수세력의 혁신과 변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드높다. 유승민은 차세대 보수 리더 3인 트라이앵글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인데, 이들이 향후 정치 공간에서 어떻게 협력하고 경쟁할지도 주목거리다.

“헌법 제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


▎지난 12월 8일 국회에서 열린 제 17회 ‘백봉신사상’ 시상식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으로부터 대상을 받고 있는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
그러나 유승민에게 차기 대선은 먼 훗날의 파티일 뿐, 그 초대장은 아직 인쇄조차 되지 않았다. 4월 총선에서 살아남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과제다. 대구 전역에 나돌고 있는 살생부는 그를 두렵게 한다. 유승민계 의원 전체의 물갈이가 기획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 중심의 총선을 통해 친박이 주도하는 국회를 만든다는 야심 찬 기획이다. 그가 과연 어떤 전략적 지혜를 동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2011년 홍준표 대표 체제 당시 최고위원직 사퇴를 주도했다. 이를 통해 그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를 불러오는 데에 핵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개정을 강하게 반대하면서 박 대통령과 서서히 멀어지게 됐다. 이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좋은 보좌를 받지 못해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박 대통령과 당시 최측근으로 활동하던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싸잡아 비판하면서 더욱 거리감이 생겼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외교가 어떤 길을 갈 것인가를 두고 대통령의 방미 과정에서 보인 혼선에 대해 ‘청와대 얼라들’이라고 하는 등 쓴소리를 내기도 했다. 친박 내 주류의 반발을 샀음은 물론이다.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면 경솔하고도 불필요한 자극 아니냐는 비판에도 직면했다. 2015년 2월 당내 비박(비 박근혜)계의 지원에 힘입어 원내대표로 선출됐지만, 박 대통령과의 거리감은 좀처럼 해소하지 못했다. 그는 국회법 개정 파동 당시 박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의 정치’로 불신임을 당했고, 결국 “헌법 제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는 말을 남긴 채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지난 7월 8일의 일이다.

그를 만난 12월 8일 오전, 유 의원은 ‘백봉신사상’ 대상을 받았다. 가장 신사적이고 성실한 태도로 의정활동을 했다고 평가된 국회의원에게 주는 상이다. 가볍게 흥분한 얼굴 표정엔 쾌활함과 자신감이 한껏 배어 있었다. 인터뷰는 국회 의원 회관 그의 집무실에서, 약 3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이미지에 대한 다양한 세평이 존재합니다. ‘독자적 사고’가 마음에 든다는 지지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여권 내 차세대 리더 중엔 거의 유일하다는 평가입니다.

“정치인은 늘 자기 입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은 물론 아니겠죠. 오랫동안의 고민 끝에 축적된 콘텐트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말과 글’에 모두 능한 오바마 스타일을 내심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치인에겐 말과 글이 중요합니다. 국민과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죠. 좋은 콘텐트에 진심을 담아 말과 글로 소통하는 것 자체가 정치인의 본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선 이후의 오바마 행보에 대해선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통합과 소통의 행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민감한 정책을 추진할 때마다 공화, 민주 양당을 설득하는 인내심이 대단했습니다. 진심을 담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집권 초보다 월등히 높아졌다고 봅니다.”

“국가 어젠다 식견이 정치인의 자질 결정”


▎지난 5월 14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오른쪽)와 유승민 원내대표(당시)가 국회에서 열린 한 정책토론회에 참석했다. 두 사람은 향후 여당의 차기 주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당 출신으로 대처리즘에서 영감을 얻었던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도 떠오릅니다. 물론 유 의원이 가는 길은 반대방향이지만 정신은 비슷합니다. 진보 진영의 정책에서도 옳은 것은 취해야 한다는 입장이죠. 이른바 보수혁신의 아이콘입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몸 담았던 1997∼98년에 IMF 경제위기가 터졌습니다. 국민의 고통이 극한으로 증폭됐던 시절입니다. 경제학자로서 참담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 간 학자들이 잘못된 예측과 처방을 거듭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설령 올바른 이론에 입각해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고 해도, 현실에 접목하고 실천하는 힘은 학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치 입문은 그런 문제의식에서 이뤄졌습니다. 우선 국민들 먹고 사는 문제를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런 꿈을 품고 정치를 시작했지요. 국민의 삶을 돌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보수혁신의 단초가 나온다고 봅니다.”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 매우 큰 포부입니다. 학자보다는 정치인, 정치인 중에는 대통령이 가장 큰 권력과 수단으로 그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대통령의 이미지와 풍모는 아니라는 세론이 있습니다. 곧고 단정한 서생의 이미지다, 의회 지도자에 더 적합한 스타일 아니냐, 이런 평가 말입니다.

“정치인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콘텐트입니다.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에 신경 써본 일이 없습니다. 비비크림 발라본 적 없고, 최근에는 얼굴의 점을 빼라고 주위에서 성화해도 아직 병원에 못 갔습니다. 빼긴 빼야 할 것 같습니다만.(웃음) 어쨌거나 그냥 생긴 대로 쭈욱 살아나갈 생각입니다. 정치인은 역시 정책으로 판단을 받습니다. 경제와 복지, 외교안보 분야에서 많은 전문가를 만나 조언을 듣고, 다양한 국내외 사례도 많이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형성된 국가 어젠다에 대한 식견이 정치인의 퀄리티(질)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외람되지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비교하자면 ‘넉살’과 ‘배짱’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런 평가에 동의할 순 없습니다.(웃음) 제가 평소 친구 사귀길 좋아하고 놀 때는 잘 노는 편입니다. 그러나 정책 이슈를 논할 때 넉살이나 배짱으로 되는 건 없습니다. 진지함으로 일관하게 되죠. 저의 그런 측면만을 본 사람은 소위 ‘넉살’이 부족하다고 볼 수는 있었겠습니다.”

이회창, 박근혜 두 사람의 대권행보를 도우면서 정치권에 진입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보수노선에 큰 가치를 부여한 이른바 ‘보수의 아이콘’이었습니다. 보수세력의 미래, 언제부터 고민했습니까?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저는 보수주의 경제학을 옹호했습니다. 자유시장 경제를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김대중·노무현 두 분 대통령의 포퓰리즘적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정치를 하면서 복지나 분배, 사회정의의 문제에 대해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학자 시절 주장했던 재벌 개혁이나 이런 건 하나도 안 변했는데, 복지나 분배 문제에 눈을 뜬 건 역시 정치를 하면서 서민들의 어려운 삶을 목격했기 때문일 겁니다. 국가정책의 손길이 닿지 않는 어려운 분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11년 언론 인터뷰에서 ‘좌클릭’했다는 질문이 나왔는데, 저는 그때 전향선언 비슷한 것을 하게 됩니다. ‘용감한 개혁’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보수세력, 보수정당이 걸어온 길은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한 정치가 되기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이런 절실한 문제의식이 뒷받침되었던 각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보수세력의 일원이 ‘용감한 개혁’을 들고 나왔을 때 많은 사람이 놀랐습니다. 개혁은 누구나 주장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것 아닌가, 이렇게 냉소한 사람도 물론 있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용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IMF 위기 이후 저성장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수세력이 뭘 했느냐는 점에 대해 제가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새로운 보수라는, 보수세력의 영토를 좀 넓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양극화 해소 그쪽 어딘가에 보수가 새롭게 개척해야 할 분야가 있다고 본 것이지요. 보수가 만약 양극화 해소에 적극 나선다면 진보 측과도 여러 의제에서 합의를 도출하기 쉬울 것이고요. 2011년부터 그런 생각을 쭉 해오다가 전당대회에 출마하면서 그런 생각과 논리를 확고히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공정한 경선이면 공천 확신”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난 11월 24일 경북대 자연과학대학에서 ‘대구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런 생각이 강해졌다면 당을 옮기면 되지 않겠나? 이렇게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법합니다.

“그 이후부터 5∼6년간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 새로운 보수 등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보수세력이 심각한 양극화를 외면하거나 방치하면 공동체의 붕괴가 올 겁니다. 보수의 이 같은 책무를 잘 알고 있기에 어떤 경우에라도 당을 나가지 않습니다. 저는 소위 TK출신이고, 대구·경북의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보수 정당에 들어간 지 16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새누리당이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 보수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겁니다. 보수는 분명히 바뀌어야 한다! 왜냐면 우리 앞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제가 이제 굉장히 강하게 갖게 됐습니다. 저는 새누리당을 바꾸고 보수를 바꾸고 TK를 바꾸고 그러면서 보수세력의 중심을 바꾸는 운동에 매진할 겁니다. 성장을 위해 당연히 노력하겠지만 분배나 복지에도 혼신을 다하는 보수세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 과업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불길한 전망이라 조심스럽습니다만 새누리당을 탈당하지 않는다는 선언은 총선 공천을 받지 못했을 경우에도 관철할 생각입니까?

“공천을 받지 못한다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공정한 경선이 이뤄질 거라 생각하고, 공정한 경선에서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 이후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총선에 대해서는 저는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해서 생각합니다.”

지난 11월 24일 경북대 특강에서 한 발언이 인상적입니다. “나는 TK의 적자”라고 선언했습니다. 마치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했던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는 발언처럼 비장함이 묻어났습니다. 대구·경북의 약자인 TK는 정치적 의미가 복잡합니다. 보수적이고 권력지향적이며 기득권적인 지역인 동시에, 혁신의 기운도 강한 곳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오랜 기간 권력에서 소외됐던 남인세력의 근거지였고, 해방 전후사에서는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좌익적 성향이 강했습니다. “나는 TK의 적자”라고 했을 때, 과연 TK는 어떤 지역을 지칭하는 겁니까?

“저는 태생이 TK입니다. 대구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자랐어요. 중학교, 고등학교도 모두 대구에서 나오고요. 외가·친가가 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영주·안동 지역입니다. 영주가 아버지의 고향이고 안동이 어머니의 고향입니다. 제가 TK사람으로서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네이션빌딩, 즉 ‘국가형성’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거기에 조선시대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에 맞선 영남사림 세력의 개혁적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 전통이 조선이 끝나고 난 후에도 일제시기를 거쳐 광복 직후에도 TK에 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개혁의 DNA같은 것이 TK지역과 사람에게 분명 남아 있습니다. 가까운 선후배 중에도 딸깍발이 같은 과거 남인 또는 영남사림의 전통이 몸에 밴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 TK의 전통이 앞으로 한국 정치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지역감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TK의 그 전통은 굉장히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지역이든 국가형성의 전통이 서린 곳에는 국가의 미래과제 해결을 지향하는 개혁의 기풍이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 이후 전두환·노태우, 그 다음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소위 ‘TK정권’이 존재했지만 앞으로 대구·경북인에게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가 부여된다고 봅니다.”

“대구·경북은 ‘꼴통 보수’ 아니다”


▎지난 7월 8일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의원총회의 사퇴 권고를 받고 퇴임 인사말을 하기 위해 회견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국가형성과 개혁이라는 두 가지 DNA가 TK지역에 각인돼 있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 두 전통을 미래 정치에 투사하겠다는 말로도 들립니다. 본인의 정치행로를 상기시키는 대목입니다. 보수 안에서의 개혁, 건국의 가치를 인정하는 틀 안에서 개혁에 나서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 체제 안에서 작은 혁명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지금 국가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첫째 저성장, 둘째는 양극화, 셋째는 아직 미성숙한 민주주의라고 봅니다. 이 과제를 해결하는 일에 앞장서고 싶고, TK도 앞장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단순한 외연확대가 아닙니다. 보수세력 스스로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그 해법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고향의 제 지역구 주민들에게 먼저 바꿔보자, 그런 호소를 하는 거죠. 그 호소가 아직 잘 먹혀들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는 외부에서 대구·경북을 좀 속된 표현으로 ‘꼴통 보수’로 보는 시선에 대해 분개하고 저항합니다. 대구·경북이 다 그렇지는 않다는 겁니다. 대구·경북에도 먹고 살기 어려운 국민이 있고, 어려운 국민의 민생을 걱정하는 정치인과 함께, 그런 시민의식 같은 게 저는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승민을 보수의 대표주자로 각인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정치적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정당에서는 그런 사람을 동지로 부르지요. 동지들의 세를 계속 규합해가면 언젠가 대구·경북인의 마음에도 변화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지지를 받느냐 못 받느냐보다 제가 추구하는 정치가 과연 올바른 길인가 아닌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길이 올바르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동지들은 세력이 되어 뭉칠 수 있다고 봅니다.”

비교적 젊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풍부한 차세대 정치인 그룹이 있습니다. 이들은 반대 진영의 정책 노선에도 개방적입니다. 새누리당엔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있습니다. 이들은 진보와 보수의 정책이 언젠가 비슷한 곳으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총선 이후 대선 공간에서 그들과 함께 새로운 정치를 도모할 수도 있다고 봅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남경필·원희룡 지사와는 지금까지 늘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2011년 전당 대회 때는 세 명이 나란히 최고의원이 됐고요. 전당대회 때 짧은 기간 경쟁도 했지만 그들은 제가 늘 사랑하는 후배들이며, 새누리당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권영진 대구시장, 김기현 울산시장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국회에도 정병국·정두언 의원을 포함해 여러 분이 있죠. 보수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교감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그런 분들과 같은 시대에 비슷한 가치를 공유하면서 정치를 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겁니다.”

1983년부터 87년까지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 유학해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로 미국 사회에 보수주의가 풍미하던 시절입니다. 유학시절 무엇을 배웠습니까?

“군대 제대하고 1981년 말 KDI에 들어갔더니 미국 박사들이 즐비했습니다. 자극을 받았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연구원(RA) 생활을 1년 반 만에 끝내고 유학을 결심했는데 학부 학점이 별로였습니다. 10군데 지원했는데 입학허가는 두세 군데에서만 왔어요. 그중 한 곳이 위스콘신이었죠. 위스콘신은 굉장히 리버럴한 전통이 강합니다. 베트남 반전운동도 제일 격렬하게 했고, 대학 학생회관에서의 주류 판매도 미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습니다. 특별한 학풍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제가 전공한 경제학은 통계 등 수리경제학이 대세였던 시절이라 수학과 통계학을 전공자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해야 했죠. 수리, 계량적인 논문 아니면 논문취급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위스콘신 시절엔 경제 학자로서의 가치관이나 철학을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주로 방법론을 배웠던 시기였지만 박사전공 분야인 ‘산업조직론’은 이후 연구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습니다. 이후 재벌정책, 공기업 민영화, 규제개혁, 산업정책 등을 연구했으니까요. KDI에 복귀해 밤새워 리포트 쓰고 연구하면서 살아 있는 경제학을 제대로 접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참 재미있는 게 지금 현 정권의 경제를 운영하는 주도세력 중에 위스콘신대 출신이 많다는 겁니다.

“그건 묘한 인연이 있어서 그래요. 저는 1998년 가을에 이회창 총재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99년에는 바깥에서 돕다가 2000년 2월 당시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으로 들어와 이 총재님을 공식적으로 보좌하게 됐죠. 그때 최경환 부총리, 이종훈 의원, 안종범 경제수석, 강석훈 의원, 이혜훈 전 의원 등이 한 팀이 되어 이회창 총재를 돕기 시작했죠. 이종훈 의원은 코넬대, 이혜훈 전 의원은 UCLA 출신이고 나머지가 위스콘신이었어요. 2002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분들이 2004년 무렵 다시 모여 박근혜 대표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같이 공부했으니까 가깝지만 그렇더라도 무슨 세력을 형성한 건 아닙니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의 특정대학 출신들이 한 동아리로 거론되는 건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별것도 아닌 인연이고, 우리끼리 생각도 많이 다릅니다.”

“위스콘신 출신, 하나로 거론되는 건 부담”


▎지난 9월 10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유승민 의원이 질의하고 있다. 뒤로 박근혜 대통령 초상화가 보인다.
지역구인 대구 동구을은 도농복합 지역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들 중심의 보수적인 생각이 지배적인 곳 아닌가요?

“아닙니다. 당초 평균연령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는데 지금은 혁신도시, 첨단 의료복합단지가 생기면서 젊은 세대가 대거 유입됐습니다. 주민의 75%가 60대 이하이므로 고령자가 그리 많지 않은 지역입니다. 매우 역동적인 곳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박 대통령과의 관계가 틀어진 탓에 지역구 관리에도 큰 문제가 생긴 것 아닙니까? ‘배신’이란 말은 보통사람에게 들어도 큰 상처로 남죠. 최고 권력자에게 그런 말을 들었으니 굉장한 스트레스일 겁니다. 박 대통령과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2000년 제가 여의도연구소장을 지낼 때 한나라당 부총재 선거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회창 총재가 부총재직을 여성에게 할애하겠다고 했는데 그것을 거절하고 부총재 경선에 뛰어드는 모습을 봤습니다. 상당히 용기 있는 분이란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분이 탈당을 하고 정당을 만들었다가 2002년 연말 대선직전에 복당을 하는 과정도 제가 다 지켜봤고요. 2005년에는 가깝게 모시면서 비서실장도 지냈죠. 정치적 동지로서 그분을 성심껏 도왔다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특히 2004년부터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까지 사력을 다해 그분을 도왔습니다. 치아가 여러 개 빠질 정도로 고생을 했으니까요. 지금 제 치아가 대부분이 임플란트입니다. 박 대통령을 도우며 오래 정치를 했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그분에게 개인적인 걸로 뭘 바래 본 게 없어요. 자리든 뭐든.”

그렇다면 왜 박 대통령은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할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2004년 2005년, 제가 비서실장 할 때 당대표 시절의 그분은 굉장히 민주적인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국가보안법 문제로 장외투쟁 할 때도 당내 의견을 토론을 통해 수렴하고, 결론이 나오면 행동하는 리더십을 보여줬죠. 특히 제가 비서실장 할 때는 굉장히 민주적인 지도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선인 시절 첫 인사에 대해 비판했던 건 사실입니다. 인사와 소통, 정책 등 세 가지를 성공한 대통령의 조건으로 들면서 인사를 비판했지만 사사로운 동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다 생각의 차이가 있으니까요.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민주적인 리더십 아니겠습니까? 글쎄 왜 소원해졌을까?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한 가지 사건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시간을 두고 몇 가지 사건이 중첩된 결과겠죠. 한 가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금도 저는 박 대통령께서 진정 성공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혹시 독대를 통해 고언을 한 적도 있습니까?

“2012년 대선 이후에는 독대가 없었습니다. 그 전에는 만나면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드 문제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사드 배치에 대해 박 대통령은 굉장히 신중하게 접근했죠. 중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유 의원께선 사드 배치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셨잖아요? 박 대통령을 난처하게 만든 건 아닙니까?

“국가안보 상의 중요한 의견 제시였고, 새누리당 국방위·외통위 소속 의원 중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분이 많았습니다. 전력화된 북한의 핵미사일이 날아올 때 우리가 어떤 방어책이 있느냐 그런 차원에서 제기된 문제였기 때문에 제 감정이 이입될 여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사드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손톱만큼도 정치적인 생각으로 접근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드의 전략적 가치를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다만 박 대통령이 사드 문제에 대해 약간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국방부장관도 그 문제에 대해 나름의 분석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국방부장관은 제가 대정부 질문을 할 때마다 사드 배치의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국방부장관과 대통령의 의견이 다를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비판 여론 있지만 격려도 만만치 않아”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월 10일 오전 청와대를 방문한 새누리당 지도부와의 접견에서 유승민 원내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그게 이상하긴 하죠. 하지만 지금 사드 문제를 파고들자는 건 아닙니다. ‘배신의 정치’, ‘진실한 정치인’ 등 박 대통령이 워낙 직설적인 표현으로 유 의원을 비판하니까 그 배경이 궁금해지는 거죠. 대구에서 박 대통령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합니다. 지역민에게 어떻게 설명할 생각입니까?

“선거를 앞둔 저한테 대구시민들의 판단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강하고 대통령의 성공을 바라는 염원도 강합니다. 동시에 대구시민들은 대구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일정한 판단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저에 대한 비판 여론도 있지만 용기를 내라고 격려해주시는 분도 많습니다. 호사가들은 다른 지역 출마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추호도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도망가는 정치는 하지 않습니다.”

여론조사 결과 등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여론조사에 관해선, 그것이 공정한 공천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걱정도 있습니다. 제일 문제가 심각한 게 ARS 유선전화입니다. 2014년 지방선거 때 이미 다 증명이 된 건데, 실제 투표결과와는 오차가 너무 큽니다. 사람이 직접 물어보면서 유무선을 섞는 게 제일 정확합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전문가들이 증명을 해낸 겁니다. 정확한 걸로 해야죠. 지난번 논의됐던 안심번호 제도가 정답입니다. 여론조사를 정확하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무슨 시시비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걸 빨리 통과시켜야 합니다.”

박 대통령이 집권 후 가장 잘한 것은 무엇입니까?

“북한에 대해 단호한 스탠스를 견지한 일입니다. 대화의 유혹에 빠져들면 원칙이 흔들리기가 쉬운 상대가 북한입니다. 박 대통령은 그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입장을 바꾸지 않더라도 북한과의 대화 루트는 계속 유지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5·24 조치를 해제하면서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적극 끌어내는 전략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의 카드인데 북한의 새로운 변화나 약속도 없이 우리가 일방적으로 풀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어느 순간에 더 큰 대승적인 목표를 위해서 5·24 조치를 과감하게 풀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국민이 다 이해하죠. 그러나 지금 그런 모멘텀이 형성됐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원칙을 견지한다 해도 물밑접촉은 유지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물밑접촉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죠. 박근혜 대통령의 평소 스타일로 봤을 때 물밑접촉은 안 한다고 하면 진짜 안 하는 겁니까?

“저는 안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통일부장관이나 외교부장관의 발언으로 판단해봐도 물밑접촉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해야 되거든요. 합의 없이 끝날 수도 있는데 그래도 해야죠. 남북간의 핫라인이랄까, 물밑접촉이 늘 살아 있어야 합니다.”

유 전 대표의 성향을 두고 ‘외교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 이런 스탠스가 대선 전략의 핵심이란 말도 있어요.

“김용갑 전 의원을 저는 존경합니다. 그분은 안보 문제에 있어서는 극단적일 만큼 보수적이죠. 저도 안보문제로 돌아가면 매우 보수적이고 원칙적인 자세를 견지합니다. 그런 태도가 저의 본령입니다. 대선 전략이라고 하면 섭섭하죠.”

“외교안보는 대선전략 아니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인터뷰에서 “보수와 새누리당이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정치 소신을 강하게 개진했다.
북한을 언제까지 대결상대로만 봐야 할까요? 결국 포용을 염두에 둔 정책 전환이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결을 강조하더라도 전략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군사적으로 저는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어떤 도발에도 우리가 우리 국민을 지키고 만에 하나 전쟁이 일어나도 꼭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북통일 이후에도 우리 주변은 강대국이 에워싸고 있어요. 누구든 한국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크게 다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북한은 개혁이 태동되었던 1978년 무렵의 중국만큼도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개혁개방을 유도하면서도 방어적 군사력은 충분히 갖고 있어야 해요.”

복지 문제를 강조하면서 언젠가는 결국 증세가 필요하단 점을 강조했습니다. 장기적으로 복지 재원마련을 위해서라도 남북 평화체제에 입각한 군축이 필요한 것 아닌가요?

“국방비 줄여서 복지하자는 주장에 저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국방비 중에 새는 돈이 있습니다. 방산 비리 같은 거죠. 그것은 철저하게 뿌리뽑아야 합니다.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고 중국·일본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는 방위력을 가지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국방비 줄여서 복지에 쓰자는 건 위험한 발상입니다.”

방산 비리는 심각하죠. 최근 한국형 전투기 개발사업(KF-X)과 관련해서 정두언 국회 국방위원장과 함께 비판적인 발언을 연일 쏟아냈습니다. 핵심기술 네 가지를 전수받지 못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미국에서 핵심기술 지원을 받아 국내 개발하려고 했던 것인데 이게 다 수포로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개발 예산이 18조원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이 들어갈 겁니다. 저는 2009년부터 KF-X는 100% 국내 개발하면 실패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우리 항공사업도 키워야 하니까 외국 선진업체의 투자와 기술을 받아서 빨리 키우자고 주장했습니다. 우리 공군과 관련기관이 국내 개발이 모두 가능하다며 추진을 시작했지만 저는 회의적으로 봅니다. 국회에서 예산이 통과될 때마다 국방위 소수 의견자였던 저는 핵심기술의 도입과 수출 승인과 관련된 문제들을 부대조건으로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지켜지지 않은 채로 지금까지 온 겁니다.”

“‘기술 안 주면 우리가 개발한다’는 건 무모한 주장”

결국 안 되는 것이 마치 되는 것처럼 흘러온 배경은 무엇일까요?

“관련된 사람들이 대통령에게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다고 보고했겠죠. 대통령은 그걸 믿은 거고요. 사전에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불러서 토론을 벌여 의견 청취하는 절차가 없었습니다. 최종 결정권자가 이걸 다 듣고 결정해도 되거든요. 그런데 핵심기술 4건 문제가 터지고도 국방부장관과 방산청장이 대통령에게 한 시간 보고하는 것으로 정리됐어요. 예전처럼 추진한다는 결론이 난 겁니다.”

현 단계에서 어떻게 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까?

“지금이라도 선진업체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2025년에 에이사 레이더를 장착한 전투기를 띄우겠다는 허황된 소리를 할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에이사 레이더 기술과 그것을 통합하는 소프트웨어를 사와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머지를 최대한 국산으로 만들어보라는 겁니다. 전투기 중 핵심 20∼30%는 외국에서 들여오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게 제 생각이죠. 이렇게 뭔가 순리적으로 가라는 건데, ‘기술을 안 주면 우리가 개발한다’는 무모한 주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국민세금 낭비로 드러나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최근 유명을 달리하신 부친 유수호 전 의원의 1973년 3월 27일 판사 재임용 탈락이 새삼 화제가 됐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직접 묻거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나요?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울산지역 개표 결과를 조작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부산지법 부장판사였던 아버지께서는 그해 8월 17일 조작을 주도한 당시 울산시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습니다. 같은해 10월 27일엔 시위를 주도했던 부산대 총학생회장의 구속적부심에서는 그에게 석방을 허가했습니다.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보신 거죠. 그 총학생회장이 나중에 노무현 정부에서 행자부장관을 지낸 김정길 씨입니다. 선친께서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 두 사건이 재임용 탈락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제가 경복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무렵이었는데 재임용 탈락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많이 우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제가 형제 중에선 용모나 성격 측면에서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어디서나 편하게 앉아 약주를 드셨던 소탈함을 보여줬던 아버지로 기억합니다. 제가 술 마실 때 그랬거든요. 판사 시절 시골 친척들 챙기시느라 집안 형편이 넉넉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변호사를 하신 후 형편이 나아졌죠. 그때 아버지께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베푸셨던 것 같아요. 이번 아버지 장례 때 부의금을 받지 않았는데, 경북대 사회 학과 동창회장이란 분으로부터 부의금 봉투와 편지를 받았어요. 옛날 경북대 사회학과 학생 한 명이 백혈병 치료받을 때 아버지께서 치료비를 보태주신 걸 잊지 못한다는 사연이었습니다.”

부친께선 법복을 벗고 재선 의원을 지냈는데, 아들의 정계 입문에는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IMF 외환위기 전에 정치 생각을 살짝 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말리셨습니다. 2000년 정계에 들어올 때는 주위 사람이 다 말리는 가운데 부모님은 찬성하셨어요.”

부친은 어떤 정치인이 되라고 조언했습니까?

“한마디입니다. 의협심을 가지라고 하셨지요. 절대 비굴하지 말라고.”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연속 집권으로 민주주의 성숙”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부친(故 유수호 전 의원)의 발인이 지난 11월 10일 대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역대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궁금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의 이미지가 있지만 대한민국 근대화의 가장 큰 족적을 남긴 분으로 존경합니다.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을 거쳐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세 분 대통령이 15년간 집권했죠. 이 15년 동안을 민주주의의 시대로 저는 봅니다. 노무현 대통령 같은 경우에는 특권과 반칙이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이 돋보입니다. 노 대통령은 지역균형발전에도 큰 공헌을 한 분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근대화·산업화 세력의 집권 이후 민주화에 공헌한 대통령을 연속 세 번이나 배출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중앙일보>에서 연재한 ‘김종필 증언록’에서 JP께서 잘 정리하셨지요. ‘민주주의는 빵을 먹고 자란다’는 것입니다. 경제발전을 이루고 중산층이 형성되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나타난 점, 그런 흐름을 다음 지도자들이 수용해서 민주화를 이룬 점을 균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역사가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더 나아가 산업화·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도 완성 시켜야 합니다. 저성장, 저출산, 고실업, 양극화 이런 문제를 치유하는 정권이 나왔어야 하는데 아직 그런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오래 기억에 남는 책 중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요즘은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해 아쉬움이 많습니다.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사상가 에드먼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이 먼저 떠오릅니다. 프랑스 혁명이 기존의 좋은 전통과 질서까지 파괴한 데 대한 버크의 비판입니다. 보수주의 정치의 교과서와 같은 책이지요. 조지훈 시인의 <지조론>도 후배들에게 권하는 책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그린 <대망>에 열광했었죠. 일본 역사소설 중엔 시바 료타로가 쓴 <세키가하라 전투>가 압권이었습니다. 전쟁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인데 꼼꼼히 읽어보면 정치소설 같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입니다. 우리나라 소설 중에는 이병주가 쓴 <지리산>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 밖에 이문열·이인화 씨의 소설들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노래방에 가면 무슨 노래를 부르나요?

“노래방은 요즘은 거의 못 갑니다만 김광석 노래를 좋아합니다. 대구 대봉동에 ‘김광석 거리’가 있죠. 제가 대봉동에서 태어났거든요. 초등학교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죠. 꼭 그래서라기보다 김광석의 노래를 참 좋아해요. ‘거리에서’ 와 같은 노래….”

출중한 실력에 비해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좋든 싫든 대중과 접촉면을 늘려야 하는 정치인의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총선 전이라 가능할 진 모르겠지만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 섭외가 들어오면 나갈 의향이 있습니까?

“제가 숫기가 없는 측면도 있고, 연예와 정치를 섞어놓은 듯한 그런 프로그램에 대한 거부감도 좀 있었습니다. 어느 자리든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라면 좋겠는데, 무언가 자신을 연출해야 하는 자리는 거북합니다. 그런 걸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그런 곳에서 불러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진실한 대화가 이뤄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야죠. 그곳에서 많은 국민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 사진 전민규 기자

201601호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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