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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을 애도하며 

“당신은 민주화의 영웅입니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
군사독재 핵심 세력이던 하나회 해체하고, 군부에 대한 문민적 통제 확보… 12·12사태,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과 단죄는 성공적 과거사 청산 사례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이 11월 26일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엄수된 가운데 운구 행렬이 국회를 빠져나와 상도동 자택으로 향하고 있다.
김영삼 14대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한 시대를 국민과 함께 호흡한 지도자의 떠남을 온전히 맞이하기 위해 <월간중앙>은 그를 가장 잘 이해하는 측근에게 추도사를 요청했다. 대통령의 연설문, 담화문을 도맡아 작성했던 김정남 전 수석은 민주화 투쟁의 대장정과 문민정부 변화·개혁의 실체를 생생하게 되살려 전한다. <편집자주>

올해로 이 나라는 이민족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을 맞았습니다. 그것은 또한 분단 70년이기도 합니다. 현대 한국의 정치사에서 해방 이후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면 무엇보다 먼저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들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기념비적 사건을 꼽으라면 저는 단연코 1993년 2월 25일의 문민민주정부수립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일제 36년의 압제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부를 세운 것이 첫째라면 30여 년에 걸친 군사정치문화를 청산하고 이 땅에 우리 손으로 문민민주정부를 세운 것이야말로 그에 버금가는 일대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해방 후 이 나라와 국민이 이룩한 대한민국의 성취로 압축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 산업화에 설사 엄청난 공(功)이 있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국시와 헌법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 한 산업화의 연원이라 할 박정희와 김종필의 5·16군사쿠데타를 한국 현대정치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꼽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반면에 한국의 민주화는 분명 1993년 2월 25일의 문민정부수립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이보다 5년 앞선 노태우 정부나 5년 뒤의 국민의 정부를 애써 들먹이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1993년의 문민정부수립을 그 기점으로 삼는 것이 마땅한 줄 압니다. 노태우 정부가 1987년 체제의 첫 출발인 것은 맞지만, 군정의 연장이라는 성격을 벗어나기 어렵고, 국민의 정부 역시 자칭 유신본당과의 지역연합에 의한 것이었던 만큼 순수한 여야간 정권교체로 볼 수 없는 데다가, 문민정부 민주화의 연장선 위에서 태어난 정부라고 보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문민정부, 곧 14대 대통령 취임사는 이렇게 시작하지요.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민주주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을 맞이하기 위하여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94년 3월 당신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일본과 중국을 국빈방문할 때 저는 저를 수행원으로 데려가 줄 것을 자청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수행하여 일본과 중국이 우리나라와 당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3월 28일, 인민대회당에서 있었던 공식 환영행사에서 저는 중국의 당 간부와 각료들의 눈에서 한국, 한국인에 대한 존경과 찬탄과 부러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한국대통령과 그 수행원들에 대한 태도는 극진하고 깍듯했습니다.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의 국격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도, 한류가 비로소 민족 진운의 새 봄을 맞아 지층 위로 싹트기 시작한 것도 문민정부의 수립, 곧 한국의 민주화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당신은 그 문민정부를 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군정종식, 당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


▎11월 26일 영결식이 열린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비록 5년 단임의 대통령이지만, 이 나라 이 공동체의 운명을 책임지고 끌고 가야 할 대통령에게는 그 시기 그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YS 당신은 일찍부터 당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은 30여 년에 걸친 군사 독재와 그 정치문화를 청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 아직도 군사정치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군정종식’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5년 뒤에도 당신은 그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라는 것을 취임사에서 다시 한번 밝혔습니다. “부정한 수단으로 권력이 생길 때 국가의 정통성이 유린되고 법질서가 무너지게 됩니다. 목적을 위해서 절차가 무시되는 편법주의가 판을 치게 됩니다.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역대 대통령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DJ에게는 계층으로 찢기고 지역으로 갈라지고 이념으로 분열되어 갈갈이 흩어진 이 나라 국민을 화해와 통합으로 하나되게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항상 상대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왔던 만큼 화해와 통합에 그이만큼 적임자는 앞에도 뒤에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새천년 21세기에 들어와 첫 임기를 시작하는 대통령이니만큼 새로운 세계, 새로운 문명에 걸맞게 21세기 대한민국을 새롭게 건설하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시대의 소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들 두 분 대통령은 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DJ대통령은 국민을 하나되게 하기보다는 분열을 더 심화시켰고,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말대로 새 시대의 맏형이 되지 못하고 구시대의 막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완수했습니다. 당신은 취임 첫날부터 그 시대적 소명에 충실했습니다. 취임식을 끝내고 돌아온 낮 12시, 당신은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를 개방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던 인왕산을 시민에게 돌려줬습니다. 3월 4일에는 과거 군사정치문화의 상징물이라 할 청와대 주변의 안가(安家) 12채의 철거를 지시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안가는 뒷날 무궁화동산으로 조성되어 서울시에 기증되었습니다.

3월 8일 오전 7시30분, 당신은 권영해 국방부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조찬하는 자리에서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그 자리에서 인사에 착수, 김진영 육참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해임했습니다. 이어 김동진 연합사 부사령관과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을 청와대로 불러 간단한 후임 임명절차를 마친 뒤, 각기 부대로 돌아가 그 즉시 취임식을 갖도록 했습니다. 처음 얘기를 꺼낸 지 4시간 5분 만에 모든 절차를 끝낸 실로 전광석화와 같은 인사 조치였습니다.

5월 24일에는 이른바 5·24 숙군으로 불리는 군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인사의 핵심 내용은 12·12사태 관련 고위장성의 예편조치였습니다. 이날의 군 인사로 문민정부 출범 이후 육군 고위층에 자리 잡고 있던 하나회 회원 중 3성 장군 이상 전원과 소장급 일부가 군복을 벗었고, 소장급 이하도 모두 보직이 변경되었습니다. 이로써 당신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난 뒤 석 달 만에 군복을 벗은 장군만 18명이었고, 떨어진 별이 무려 50개에 가까웠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박정희 정권 이후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군사독재 체제의 핵심 군부세력이었던 하나회를 완전히 해체하고, 군부에 대한 문민적 통제를 완벽하게 회복하였습니다. 군정종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대한민국 군대가 ‘정권의 군대’에서 비로소 ‘국민의 군대’로 위대한 탈바꿈을 한 것입니다.

민주화를 향한 대도무문(大道無門)의 투쟁


▎1. 1979년 10월 의원직을 제명 당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여당을 규탄하고 있다. / 2. 1983년 5월 18일 정치활동 자유 등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간 김영삼 전 대통령.
1993년 7월의 이충석 합참본부장의 합참 회식 발언 사건이나 1994년 10월의 오현근 3사교장의 이임식 연설 사건 같은 간헐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이 땅에서 군사쿠데타의 망령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뒷날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탄생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신의 하나회 척결로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말이 이 무렵에 나왔었지요.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청와대 경호실의 경비 수요가 엄청나게 높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경호실은 꼬박꼬박 밤을 새우면서 일선을 비롯, 군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습니다. 당신께서도 군의 동향과 관련한 상황을 보고받느라 밤잠을 설쳐 아침 조깅 때 푸석푸석한 얼굴로 나올 때가 많아 저희들이 얼굴을 뵙기가 민망했지요. 그렇게 힘드신데도 당신은 끝까지 당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사명감을 가지고 이뤄내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런 일도 있었지요. 대장과 중장급 장성에게는 대통령이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고 보직 및 진급 신고를 받게 되어 있는데 달아줄 별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국방부 간부들이 가지고 있던 계급장을 가지고 와서 그 별로 우선 달아주었던 일 말입니다. 남미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달리 한국의 민주화가 빠른 시일 안에 안정되고, 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이 없도록 모든 장애물을 당신이 제거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참다운 지도자란 그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길이 막혀 있으면 그 길을 뚫어주고,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그것을 앞장서 치워내며, 발목을 잡는 그 무엇이 있으면 그것을 뿌리쳐주고, 길이 없으면 길을 내면서 가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나라 민주화의 역정에서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 라만차의 영웅(돈키호테)처럼 당신이 하는 일이 때로는 다른 사람의 눈에 무모하고 엉뚱해 보이기도 했지만, 당신은 혼자서 길을 내면서 갔고, 당신이 가는 길을 많은 사람이 함께하다 보니 그것이 곧 민주화의 길이 되었습니다. 1971년에 당신은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당신의 40대 기수론은 야당으로 하여금 사랑방정치에서 대중정치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늙고 침체에 빠진 야당정치에 새로운 활력과 충격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후보 경선에서 패배하자 그 결과에 깨끗이 승복,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김대중 후보를 지원한 것은 두고두고 한국 민주주의의 모범이 되었지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1993년 2월 25일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는 김영삼 대통령.
1974년 8월 당신은 반(反)유신투쟁이라는 선명한 기치를 내걸고 당권에 도전, 제1야당의 46세 최연소 당수가 되었습니다. 야당은 젊어지고 기치는 선명했으나 유신체제의 공작과 탄압으로 당수직은 한 회로 끝나게 되지요.

그러나 1979년 5월 30일, 당신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영삼만은 안 된다”는 유신체제의 공작을 뚫고 극적으로 당권을 다시 장악했습니다. 이때 당신은 ‘이제 민주주의는 개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새벽이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는 연설로 ‘닭의 모가지는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당신의 어록이 인구에 회자되게 만들었습니다. 이 말은 새벽은 잠자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아 나서는 사람만이 맞이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민주주의 새벽론의 짝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당권 탈환은 영광보다는 시련으로 이어졌습니다. 1979년 8월의 YH사태, 9월 총재직무정지 가처분, 그리고 10월 4일의 의원직 제명이 그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때 자신의 의원직이 제명된 국회를 걸어나오면서 “나를 아무리 의회에서 축출하거나 감옥에 가둔다 해도 민주회복을 향한 나의 소신까지 축출하거나 감옥에 가둘 수는 없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이라는 또 하나의 민주 어록을 남겼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의회주의자를 의회에서 제명하는 역설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신은 의연히 대도무문(大道無門)의 길을 걸었지요.

당신의 의원직 제명이 빌미가 되어 그해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고, 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10·26사태를 맞게 됩니다. 당신으로서는 YH사건, 야당총재에 대한 의원직 제명 그리고 부마사태와 10·26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것이 당신과 신민당이었던 만큼 이제 당신에게 기회가 오는가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2·12와 안개정국 그리고 5·17을 거쳐 전두환 군부정권이 들어섰습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한 5공 군부정권은 유신정권에 못지않은 군사독재 정권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하고 폭압을 휘둘렀습니다. 군부정권의 총칼 아래 온 세상이 침묵하고 있을 때 당신은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5개 항의 민주화 요구를 내걸고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였습니다. 1)구속 민주인사 전원 석방, 2)정치활동 규제 철폐, 3)추방당한 교수·학생·근로자의 복직과 복권, 4)언론의 자유 보장과 해직 언론인 복직, 5)헌법 개정과 국가보위 입법회의에서 제정한 악법의 철폐 등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천에서 있었던 황새의 죽음은 대서특필되면서도 당신의 생명을 건 단식투쟁은 뒤늦게야 겨우 ‘정치현안’이라는 암호로 보도되었을 뿐입니다. 당신의 단식투쟁 소식과 민주화 요구를 세상에 알린 것은 민주산악회 회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단식에 즈음하여’를 비롯한 단식 관련 문건을 필사·복사·등사하여 전국에 돌렸습니다. 당신의 단식투쟁으로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면서 윤보선 전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등 당신의 안부를 걱정하는 수많은 사람이 당신을 찾아와 당신의 단식 중단을 호소했고, 미국에 있던 김대중을 비롯해서 함석헌, 홍남순, 문익환 등 재야인사들이 동조단식 또는 지지운동에 나섰습니다.

당신의 단식투쟁은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우리의 민주화투쟁은 생명을 건 투쟁이어야 한다”(단식에 즈음하여)로 시작해서 6월 9일 “부끄럽게 살기 위하여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죽기보다는 서서 싸우다 죽기를 위하여 중단한다”(1983년 6월 9일 단식을 마치면서)로 일단 끝나지만 당신의 말대로 본격적인 민주화투쟁은 당신의 단식투쟁이 끝나면서 새롭게 시작됩니다. 당신의 단식투쟁은 민주정치세력의 결집을 가져왔습니다. 재야와 정치권과의 연대를 가져왔습니다. ‘민주화투쟁 선언’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당신의 단식투쟁 1주년에 맞추어 결성되었습니다.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결성과 활동은 이제까지의 민주화투쟁의 중심이 재야로부터 정치권으로 넘어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발판이 되어 선명야당인 신한민주당이 2·12총선을 앞두고 서둘러 창당되어 1985년의 2·12총선을 선거혁명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민우 총재를 정치 1번지라는 서울 종로에 출마시켜 선거혁명의 폭풍 한가운데 서게 하고 민주산악회를 동원, 그 열기를 전국에 확산한 것이 당신이었습니다. 이 일련의 과정을 기획·연출한 것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앞에는 언제나 당신이 섰습니다.

2·12총선이 있은 지 1주년이 되는 1986년 2월 12일, 신민당 중앙당사에서 있은 ‘2·12총선 1주년 기념식’에서 당신은 전격적으로 1천만 명 개헌서명운동을 제창하면서 당신이 제 1번으로 서명하여 개헌열풍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개헌추진지부 결성대회와 현판식을 대대적으로 가지면서 개헌 열기를 계속 진작시켰지요. 그것이 전두환의 4·13호헌조치에 맞선 대학교수들의 민주 개헌 시국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은둔과 도피의 대상이던 산을 민주화투쟁의 진지로 만든 것이나, 현판식을 전국 주요도시에서 민주화투쟁의 중요한 수단의 하나로 활용한 것도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이 낸 길이었습니다.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 제7주기 기념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고 6월항쟁의 막이 오르기 시작합니다. 6월 24일 당신은 전두환과의 담판에서 “민주화와 직선제의 수용만이 나라가 살고 당신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역설하지만, 전두환의 미온적 태도로 끝내 당신은 결렬을 선언했지요. 그것이 6월 26일의 국민평화대행진으로 나타났지요. 전국 34개 도시와 4개군 270여 곳에서 연인원 100만 명이 참가한 대행진으로 마침내 6·29선언을 받아냈습니다. 누가 뭐래도 6·29선언은 민주 국민에 대한 항복선언이요, 민주화의 일대 승리의 기록입니다.

3당 합당과 14대 대통령 당선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7월 한국을 방문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대도무문’이란 휘호를 써주고 있다.
1983년 5월 18일 당신의 단식으로부터 1987년 6월 29일에 이르는 시간은 한국민주화운동사에서는 물론 야당사에 있어서도 가장 빛나고 장엄한 기간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그리고 그 맨 앞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이 기간, 시대의 중심 과제를 꿰뚫는 직감으로 직선제, 1천만 명 서명운동이라는 시대의제를 설정하고 시대의 한복판 선두에 서서 자신의 전부를 던졌습니다. 당신은 과연 한국 민주화의 영웅이었습니다.

6월항쟁이 민주 국민의 장엄한 승리로 끝나자 이제 야권 단일화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당연히 당신으로의 야권단일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단식에서 6월항쟁의 승리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당신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기대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저도 당신이 대선후보가 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권단일화는 끝내 실패했지요. 야당은 두 쪽으로 갈라졌고, 영남과 호남으로의 지역 분열에 전체 민주화 진영도 두 패로 나뉘어졌습니다. 대선 결과는 예측한대로 노태우 당선으로 나타났습니다. 당신은 대선에서는 2위를 했으나 이어서 치러진 총선에서는 당신의 통일민주당이 제3당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아마 이 무렵부터 당신은 3당 합당을 구상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신이 3당 통합을 결심하기까지에는 DJ와의 야권후보 단일화는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춰 어쩌면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더 밑바닥에는 당신의 권력에의 의지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1990년 1월 22일의 3당 통합은 한국정당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대사건이었습니다. 집권당이 스스로 간판을 내리고 반독재 민주화투쟁으로 일관해 왔던 정통야당이 그 투쟁의 대상이었던 민정·공화 양당과 합당키로 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당신에게는 일생일대의 대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합당은 했지만 집권 핵심층은 당신을 고사시키기 위한 공작을 끊임없이 계속했지요. 저도 언젠가 안기부에서 작성한 ‘김영삼의 최근 특이동향’, ‘김영삼 관리방안’ 이라는 보고 문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당신은 그 어려움 속에서 단기필마로 그 모든 견제와 박해를 뚫고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유효투표의 46%인 997만7332표를 얻어 804만 1284(33.37%)표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193만6048표 차이로 따돌리고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지 38년, 40대 기수론을 제창한지 22년, 미래 대통령을 꿈꾸던 소년 김영삼이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당신의 제14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저 역시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갔습니다. 제 평생에 처음으로 맡은 공직인데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제 담당 분야를 챙기는 것은 물론 당신의 특별한 지시로 연설문이나 담화문을 쓰는 일도 때로는 맡았었지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당신의 변화와 개혁, 그 현장에 제가 함께했던 셈입니다. 당신의 뜻에 따라 4·19의거를 4·19혁명으로 격상시켰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문민정부가 있다고 밝히고 그에 따른 역사적 조치를 새롭게 했습니다. 광복 48주년 만에 박은식, 노백린, 김인전, 신규식, 안태국 선생 등 애국선열 5위의 유해를 봉환해 오면서는 문민정부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그 문민적 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신의 대통령 선거공약 이행 차원에서 GNP 대비 5%의 교육재정을 확보했으며 1500여 전교조 해직교사들을 복직시켰습니다. 수도권 한복판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용산에 통일한민족시대에 대비하고 5천 년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에 합당한 국립박물관 건설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 그분들의 생계는 우리가 보장할 테니 일본은 반인륜적 범죄의 진실을 밝히고 세계와 그분들 앞에 사죄하라고 요구하여 일본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였습니다.

대한민국 국시 어긴 범죄자들의 책임을 묻다


▎1996년 8월 12·12 및 5·18 사건 1심 선고가 열린 서울지법 대법정 피고석에 나란히 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실상 일본으로 유치가 거의 결정되었던 2002월드컵을 한일공동개최로 끌어내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일본과 동열에 서는 바탕을 마련하였습니다. 파주출판정보문화산업단지의 입지를 마련하는 등 그 기초를 닦았습니다. 민예총이나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사단법인으로 공식 등록, 이 나라 문화 운동의 중심에 서게 하였습니다. 모두가 당신이 뒤에서 든든히 뒷받침해줬기에 제 손으로 이뤄낼 수 있었던 일들입니다.

제 분야는 아닙니다만 1993년 여름 금융실명제 관련 담화를 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신의 육성으로 발표한 담화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제가 나온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12·12군사반란과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진상규명과 단죄는 반민특위의 좌절을 겪었던 대한민국에서 국시를 어긴 범죄자들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점에서 정부수립 이래 처음으로 역사적 심판에 의한 성공적인 과거사 청산의 사례로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민주화, 이러한 변화와 개혁은 오직 당신만이 이룩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당신의 임기말 IMF사태만 터지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분명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을 것입니다. 기아자동차가 국민기업이라고 떠벌리고 노동개혁과 금융개혁을 저지하여 IMF사태를 가져오게 한 사람들이 그 모든 책임을 당신과 문민정부에 떠넘겼습니다. 당신은 그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면서 나라를 거덜나게 한 대통령이라는 비난과 수모를 다 감수했습니다. 죄 없는 현철을 죄를 만들어 감옥에 보내야 하는 비운의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현철이 국정에 개입하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그 현철이 자숙하면서 오직 아버지 당신을 기리고 현창하는 일에만 전념한다면 언젠가 세상이 그를 부를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관을 덮고서야 일이 정해진다

당신은 돈에 관한 한 무욕의 정치인이었습니다. 정치자금은 다만 당신의 손을 거쳐가기만 했을 뿐,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포켓에 챙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당신이었기에 대통령 취임 3일 만에 당신과 직계가족의 재산을 공개했고, 당신의 임기 동안 정치자금을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YS 당신만은 임기 말까지 이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고 믿습니다. 공직자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 등 공직 사회와 우리사회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당신이 누구보다 깨끗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제게 개혁은 무엇으로 하는가 묻는다면, 저는 개혁은 오로지 깨끗한 도덕성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겠습니다.

두보(杜甫)의 시에 “관을 덮고서야 일이 정해진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죽어서야 비로소 그 사람의 업적이 결정된다는 뜻인 줄 압니다. 당신의 관을 덮고서야 이제야 사람들이 당신이 이 나라 민주화의 길을 내고 그 기틀을 만든 큰 산이여, 영웅이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당신의 관이 놓인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연인원 3만7400여 명이 찾아와 분향했고 지방자치단체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17만여 명의 시민이 다녀 갔다고 합니다.

당신은 인간적이고 또한 너무 소탈하셨습니다. 언젠가 이런 얘기를 들려주셨지요. 1992년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처 전 영국수상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대처수상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대처 수상이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후보간 TV토론을 하게 되어있느냐고 물어 당신은 법에는 없지만 토론에는 응할 생각이라고 속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대처 수상은 “지금 이기고 있는 것 아닙니까”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상당한 비율로 앞서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고 대답했지요. 대처 수상은 “그런데 왜 TV토론을 합니까?”하고 물으며 TV토론은 국민에게 현명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수세에 몰린 사람이 사태를 유리하게 끌고 가려고 하는 수단일 뿐인데 왜 하려 하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그 말을 듣고 TV토론을 하지 않았노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천의무봉의 소탈한 당신을 놓고는 차마 어느 누구도 욕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신과의 인연은 퇴임 후 더 깊어졌습니다. 해외에 나가거나 국내에서 행할 중요 행사의 연설 원고를 부탁하실 때 꼭 상도동으로 불러서 점심을 주시면서 말씀하셨지요. 전화로 말씀하셔도 될 일을 언제나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 나이 이순(耳順)이 넘어 글을 쓰기 벅찬 데다 감각은 무디고 총기는 흐려져 사양하는 말씀을 드렸더니 “나는 김 수석 글이 제일 좋아” 하시며 굳이 놓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저는 진심으로 젊고 시대감각이 있는 사람이 당신의 연설 원고를 써주기를 바랐습니다. 원고의 매수가 점점 줄어들었지요. 지난 한·러 수교 20주년에 즈음한 러시아 방문 때는 연설 원고가 5분 정도 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때 수행한 것이 당신과의 마지막 여행이었고, 당신의 원고를 쓴 것도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당신이 명예박사학위 받으러 다시 오겠다고 그들에게 한 약속은 결국 빈말이 되고 말았네요.

또한 당신은 남에게는 관대했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했지요. 그것이 당신 앞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든 까닭입니다. 날이 새면 마산에 계신 아버님께 문안전화를 드리는 것이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조깅을 빼놓지 않으신 것, 칼같이 시간을 엄수하는 것, 모임에 참석하면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꼿꼿이 앉아 경청하는 것, 소소하지만 당신께 꼭 본받고 따라야 할 당신의 아름다운 덕목이었습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저는 당신께 풀고 싶은 회포와 사연이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홀연히 가시매 그리움에 목이 멥니다.

-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

201601호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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