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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20대 총선 낙선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 

“앙겔라 메르켈 바라보며 호남 대표하는 정치인 되겠다” 

글 한기홍 기자 glutton4@joongang.co.kr / 사진 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문재인 광주약속 이행 논란, 수권 능력 입증으로 돌파해야… 호남 민심 안에 더민주 중심 집권지지 여전히 존재

▎4·13 총선 더민주 후보로 광주 서을에 출마한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는 “광주 민심의 핵심은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라고 말했다.
20대 총선에서 낙선한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를 통해 패배의 소회와 향후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그는 고졸 출신 첫 삼성전자 여성 임원으로 더민주에 영입됐다. 그러나 정치거물 천정배 국민의당 공동대표의 벽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천정배-양향자 광주 서을 대결은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 비유됐다. 천 대표와의 대결에서 30% 이상 득표율을 기록하며 ‘전국적 지명도’를 얻는 데는 성공했다. 정치에 입문한 지 수개월밖에 안 되는 신인 입장에선 작지 않은 수확이라 할 수도 있다.

문재인 전 대표는 4·13총선을 앞두고 양 전 상무를 영입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다. 고민의 시간도 길었던 만큼 권유의 강도도 거셌다고 한다. 문 전 대표는 총선 직전 광주 유세에서 “양향자 후보는 제가 당 대표 마지막 무렵 영입한 광주의 딸”이라며 “온갖 차별,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세계적인 기업 삼성에서 상무까지 승진한 정말 뛰어난 여성”이란 평가로 그를 북돋았다.

삼성전자에선 남들보다 1년 빠른 ‘발탁 승진’

양 전 상무는 1985년 광주여상을 졸업한 후 삼성반도체에 입사했다. 메모리 설계실에서 연구원 보조로 일했다. “30명이었던 입사동기가 5년 후 한 명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도면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단순 업무였지만 그는 왜 그렇게 그려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바로 이런 집요한 탐구욕이 그를 동료와 구별했다. “네 까짓 게 알아서 뭐하느냐”는 타박에도 그는 억척스럽게 공부했다. 일본어를 공부할 때도 그랬다. 겁도 없이 사내 일본어 학습반에 들어갔다. 고졸인 네가 공부할 수 있겠느냐는 강사의 비아냥거림과 대졸들의 텃세를 견디며 공부했다.

주말에도 기숙사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결국 가장 먼저 일본어 자격증을 땄다. 일본어를 기막히게 하는 여사원이 있다는 소문이 났다. 연구원들이 일본 서적을 들고 찾아왔다. 자료를 밤새워 번역하면 반도체 설계에 대한 이해는 덤으로 따라왔다. 어느덧 반도체 설계 업무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삼성의 첫 번째 고졸 엔지니어가 됐고, 여자는 안 뽑는다는 사내 대학에 기어코 입학했다.

그는 입사한지 10년만에 삼성전자기술대학에서 반도체 공학 학사학위를 땄다. 입학할 때는 거의 말석이었지만 졸업할 때는 수석이었다. 그의 강한 의지와 학구열을 잘 보여주는 삽화다. 배움의 여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어+일어+중국어에 디지털정보학 부전공으로 KDU(한국디지털대학교, 현 고려사이버대학교)에서 인문학 학사, 그리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전자전기컴퓨터공학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메모리 설계 전문가로 성장한 그는 메모리 제품설계 자동화 추진을 통해 개발기간 단축에 기여했다. 마침내 ‘삼성의 별’이라는 임원을 달았다. 남들보다 1년이나 빠른 ‘발탁승진’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야당으로의 정권교체 염원이 내가 읽은 호남민심의 핵심”이라면서 “김종인-문재인 콤비가 DJP 연합 이후 최강의 집권조합”이란 자신의 대선관을 밝혔다. 문재인 전 대표가 공들여 영입한 중심인물이란 점에서 그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양향자 개인의 발언일 수도 있지만, 김종인 현 대표와 더 이상의 갈등 국면을 피하고 싶은 문 전 대표 진영의 희망이 반영된 발언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인터뷰는 5월 9일 중앙일보 본사에서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비례 당선은 내 인생의 궤적과 맞지 않아”

낙선했지만 표정은 밝다. 이제 담담하게 마음을 추스른 건가?


▎지난 1월 12일 더민주에 입당한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가 문재인 대표에게 입당원서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강정현
“누구보다도 지기 싫어하지만, 항상 패배를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아왔다. 선거 기간 압축적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파노라마처럼 그 순간들이 뇌리를 스친다.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나 패배한 것은 아프다. 엄청나게 아프다.”

천정배라는 거물을 만나 싸웠다. 처음부터 패배를 무릅쓴 것인가?

“아니다. 이길 수 있다고 보고 끝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천 대표는 내리막길이었고, 나는 한참 올라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골든 크로스가 이뤄질 것 같았다. 광주의 정치 프레임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미 형성된 선거구도는 너무도 견고했다.”

비례대표 1번 감이란 말도 있었다. 광주보다는 쉬운 수도권 출마의 길도 있었다. 혹시 문 전 대표가 광주 지역 출마를 간곡히 권유했던 것인가?

“아니다. 문 전 대표는 출마 지역이나 형식에 대해서는 일절 말씀이 없으셨다. 다만 더민주가 광주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나를 영입한다고 했을 때, 내가 광주 이외의 지역에 출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다. 왜냐면 내가 광주를 회피한다면 그것은 당이 광주를 포기한다는 메시지로 해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 출마는 저와 당이 이심전심으로 확인해 결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광주 여러 지역 중 굳이 ‘서을’을 택한 이유는?

“서을 지역구에서는 더민주에서 출마를 준비하는 분이 없었다. 적어도 제가 서을에 가면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준비했던 분들을 가슴 아프게 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가벼웠다. 서을은 광주의 심장이어서 상징적 의미도 크다. 광주정치에서 개혁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서을에서 시작되어야 어울리는 것이다.”

서을 선택은 결국 본인의 의지가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인가?

“많이 외로웠지만 결국 선택은 내가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여러 가지 선택의 옵션이 있긴 했나? 비례 1번감이란 말도 있었는데.

“비례도, 수도권도 갈 수 있었다. 제가 살았던 경기 동탄 지역에 출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례 1번도 불가능한 옵션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편안한 길을 가는 것은 당에도 도움 되지 않고, 제가 살아온 궤적과도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삼성전자 상무는 보통 자리가 아닌데, 박차고 나와 순식간에 정치인이 됐다.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텐데.

“더민주의 권유가 집요했다. 그러나 결국 결단은 나의 몫이었다. 권유받은 사실은 남편에게도 오랫동안 숨겼다. 더민주가 인재영입을 극도의 보안 속에 추진했기 때문에 그 누구하고도 상의할 수 없었다. 처음엔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삼성전자 상무가 된 후 삼성에서의 30년 비전을 세운 적이 있다. 권유를 받고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결단을 내리며 정치 입문 30년의 대계를 설계했다.”

정계 입문 결심을 남편에게 알렸을 때 첫 반응은 어땠나?

“‘큰일이다. 우리가 같이 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러면서 굉장히 심각하게 위기감을 표시했다.”

누구의 설득과 권유가 그토록 집요했나? 문재인 전 대표가 직접 권유한 것인가? 혹시 그와 인연이 있었나?

“문 전 대표와는 일면식도 없었다. 그의 뜻을 전한 메신저가 있었다.”

그 메신저가 누군가?

“최재성 의원이다. 최 의원 역시 생면부지였다. 그는 내 휴대폰 번호도 몰랐다. 나중에 물어보니 구글에서 ‘호남인재’ 키워드를 쳐서 내 이름을 찾았다고 했다. 첫 전화도 삼성전자 대표전화 교환원이 연결해줬다. 내게 전화하기 전까지 철저하고도 날카로운 검증과정을 거쳤다고 들었다. 특정인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방법이긴 했지만, 결국 나는 구글의 추천으로 영입된 인사인 셈이다.”(웃음)

문 전 대표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정계 입문을 권유하며 어떤 말을 들려줬나?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기업은 너무나 앞서가는데 정치는 아직 후진적이다, 정치인의 구성비를 보면 다양한 스펙트럼이 부족하다, 이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그리고 호남을 대표하는 인재를 영입하고 싶다고도 하셨다. 아무튼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가장 와 닿았던 게,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라는 그 분의 물음이었다. 삼성에서 임원이 딱 되고 나면 꿈을 이뤘다고 한다. 그럼 그 다음은 뭐냐를 늘 물어보게 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동체의 삶,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것도 가치가 충만한 일일 것이다. 문 전 대표가 그런 점을 상기시키며 나의 힘겨운 결단을 도와주셨다.”

“나는 결국 ‘구글 추천’ 영입인사인 셈”


▎4월 3일 양향자 후보가 광주 서구 운천저수지에서 나들이 나온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부탁하고 있다. / 사진·오종찬 프리랜서
고향이 전남 화순이다. 화순도 광주항쟁의 주요 투쟁 지역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화순에서 겪은 광주항쟁의 기억은?

“중학교 1학년 때다. 너릿재(화순에서 광주로 넘어가는 고개)만 넘으면 바로 광주니까 같이 겪은 것이나 다름없다. 당시 선생님들도 광주 분이 많았고, 광주 사는 친척도 많았다. 영어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남동생이 행방불명되었다고 수업도 못 하시고 서럽게 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너릿재가 군인들로 차단돼 광주에 갈 수도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여선생님의 한 없이 슬픈 그 모습이 내게 각인된 광주항쟁의 잊을 수 없는 이미지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중3때부터 홀어머니를 모시며 사실상 소녀 가장의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둘째 오빠가 행방불명돼 더 힘들었다. 광주여상에 진학한 후 어머니는 온갖 일을 하시며 생계를 유지했다. 구멍가게부터 과자공장 직원, 화순에서 쌀을 걷어 광주에 내다 파는 일도 하셨다. 내 인생의 모든 기준, 삶을 바라보는 관점들이 그 시절에 고착되었다. 가장 밑바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당시 어머니는 조부모를 모시고 있었는데 두 분 모두 치매가 왔다. 어머니에게 그보다 더한 고통을 없었을 것이다. 6년간 두 분의 병수발을 어머니 혼자 다 하셨다. 이번 선거 때 어머니도 유세장에 나오셨다. 낙선 인사 다닐 때 시민들 중에는 어머니 때문에 표를 던졌다고 했던 분이 많았다.”


▎1월 12일 입당식 때 소감을 발표하며 눈물을 닦고 있는 양향자 전 상무. 사진·강정현
더민주 입당식에서부터 눈물을 흘렸다. 유세 중에도 왜 그렇게 섧게 울었나?

“갑자기 많은 사람 앞에 서보니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라. 인생의 여러 고비가 주마등처럼 스쳤겠지. 내 실존의 표현이었지 가식은 아니었다.”

총선에서 광주(호남)의 민심은 더민주에 혹독했다. 선거 기간 중 광주 유권자의 마음을 어떻게 읽었나?

“다른 지역도 비슷하지만 특히 광주의 지역경제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 몇 년간 시민들의 삶 역시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정치권에 분노했고, 또 절망했다. 호남 유권자들에게 집권세력은 새누리가 아니라 더민주였다. ‘집권’ 더민주를 향해 아주 냉혹하고도 정의로운 심판을 내리신 것이다.”

그런 책임이 있는 광주와 호남 기성 정치인들이 고스란히 국민의당으로 옮겨 승리를 가져갔는데?

“그게 호남 유권자들의 딜레마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사람들, 과거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 표를 던졌다는 자괴감이 분명 존재한다. 국민의당이 절대 자만할 수 없는 이유고, 우리 더민주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다.”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반감, 소위 ‘반문정서’의 큰 흐름이 선거 패배를 부른 것은 아닌가?

“이번 선거 결과에 패배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진 않다. 왜냐하면 더민주 중심의 정권교체를 바라는 도도한 바닥정서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반감이 분명 없지 않지만 그런 정서가 고정된 것으로 보진 않는다. 선거 이후 민심의 흐름도 요동치고 있다. 호남에서는 더민주, 국민의당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힘을 합쳐 정권교체를 하라’는 여론의 흐름이 강하다. 그랬을 때 과연 누가 더 정권교체에 유능한 지도자인가 하는 물음이 나온다. 호남인의 정치적 판단력은 참 위대하다. 정치인들보다 앞서간다. 요컨대 호남 사람들은 정권을 교체할 유능한 정치세력을 원한다.”


호남 홀대론에 안주하고 싶지 않아

문재인 전 대표는 유세 중 광주를 방문해 “호남이 지지하지 않으면 정치 안 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참패 후 입장 표현이 모호했다. 호남 유권자들에게 다음 선거에서 무슨 논리로 지지를 호소할 수 있나?

“문 전 대표의 약속을 내가 뭐라 평할 순 없다. 그러나 시험에서 한 번 실패했다고 합격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 생각엔 해법은 한 가지다. 문 전 대표가 수권의 능력을 호남인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들도 너그럽게 양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총선에서 제1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남 패배 원인론이 불거졌다. 김종인 대표 책임론까지 제기돼 큰 파문이 일었다.

“호남 패배는 개인의 책임을 묻기보다 민심을 듣고 프레임을 다시 세우는 방향으로 극복해야 한다. 김종인 대표에게 호남 패배 책임을 묻는 것은 가당치 않다. 김 대표는 이번 총선에서 큰 능력을 보였다. 대선 때까지 당에서 역할을 하셔야 한다. 김종인-문재인 콤비는 DJP 연합 이후 가장 확실한 집권 가능성을 보여주는 최강의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호남 유권자들에게 소위 ‘반 문재인 정서’라는 건 무엇인가? 유세과정에서 어떻게 느꼈나? 유권자들 생각이 틀릴 수도 있지만 그런 정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보통 호남정서라는 것이 존재한다. 한(恨)의 정서, 억하심정 이런 게 남도의 정서일지 모른다. 뭔가 기대를 하고 지지를 보내고 열망을 하는 마음의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열망이 좌절되었을 때의 실망감은 크고 강렬하다. 그런 독특한 호남인의 정서가 있는 게 사실이다.”

지난 대선 때 호남 유권자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도 실패한 문재인에 대한 실망감도 있겠지만, 소위 ‘호남 홀대론’이란 말도 선거기간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느꼈나?

“제 인생을 빗대 설명하자면, 저에겐 ‘고호녀’란 말이 따라다녔다. ‘고졸-호남-여성’이란 뜻이다. 그런데 만일 제가 고호녀이기 때문에 영남기업인 삼성에서 차별대우 받았다고 한다면 그 말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 그걸 누가 인정해주겠는가? 결국 유능함과 무능함으로 수렴되는 문제일 뿐이다. 삼성에서 필요한 인재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 제가 고호녀라는 것이 어떤 고려의 대상도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정치인으로서 호남 홀대, 이런 틀에 갇혀있고 싶지는 않다. 그게 틀리다, 맞다 이런 논쟁에 있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그건 있으면 있었던 거고, 중요한 것은 그런 아픔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성숙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과거의 프레임에 안주하지 않겠다?

“당연하다. 안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프레임을 누구보다도 깊고 강렬하게 겪은 사람이 바로 이 양향자다. 다른 사람보다 할 이야기가 많지만 과연 그런들 무슨 도움이 되겠나? 그런 것은 이제 도약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한다.”

호남 홀대론도 그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인가?

“저는 그렇게 본다. 이 지역의 정치인들이 정치적으로 유능하고, 호남인들이 만족할만한 역할을 했다면 호남 홀대론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민주가 호남을 홀대한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능해서 호남인을 만족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다. 호남이 다른 지역보다 특히 정치인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점에는 주목해야 한다. 실상 지역 균형발전이란 관점에서 호남이 영남에 비해 낙후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호남은 여전히 역사·정치·경제적으로 많은 차별과 곤궁함을 겪고 있다. 그것을 조금 더 노력해서 극복해야 한다는 게 호남인의 열망인 거고, 총선에서 그런 열망의 메시지를 정치인들에게 전한 것이다.”

선거 결과가 놀라웠다. 더민주가 호남의 지원 없이 1당이 된 것이다. 총선에서 그랬다면 대선에서도 호남 지원 없이 집권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시각은 총선에서 드러난 호남 유권자들의 판단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더민주의 무능함을 정확히 지적한 호남 유권자의 심판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수권 정당의 진용을 제대로 갖추라는 명령이다. 대선에서 호남을 배제해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는 없다. 대선에서 호남민심은 언제나 야당 지지세력의 심장부로 기능했다. 차기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종인-문재인 콤비, 가장 강력한 집권 조합

가장 어려운 광주 서을에 출마해 낙선했기 때문에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부채의식은 이젠 청산된 것 아닐까? ‘문 전 대표의 사람’이란 인식에서 자유로워야 독립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할 텐데.

“언론에서 ‘친문’이니, ‘문재인 키드’니 하는 말을 많이 쓰더라. 왜 그렇게 사람을 가두는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다. 문 전 대표가 저를 영입하신 것에 대해서는 굉장한 고마움을 느낀다. 공동체의 삶에 소명의식을 느끼도록 해 줬으니까 그건 굉장한 개안이다. 그러나 문 전 대표와 제가 걸어온 길은 다르다. 저의 역할이 분명히 있는데 문 전 대표 밑으로 저의 정체성을 가두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 분도 원치 않으실 거다.”

삼성의 자동차 전장(전자 장비)산업 광주 유치는 낙선 후에도 계속 추진하나?

“물론이다. 광주 유권자들이 나를 위로하면서도 그 일만은 꼭 해달라고 했다. 안철수 대표가 총선 전 ‘5공식 발상’이라 비난했지만 지금은 내가 주장한 것을 자신들이 하겠다고 나서지 않나? 그러나 그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양향자다.”

광주가 전장산업 유치의 가장 적합한 도시라는 점을 삼성이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광주는 기업하기 가장 어려운 도시 중 하나다. 시민사회, 지자체, 기업의 이해관계와 관심사를 조율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3자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하고, 삼성도 제게 그런 기대감이 분명 있었다. 그런 역할을 해 줄 것으로 믿고 저의 광주 출마를 반겼던 측면도 있다. 자동차 전장산업은 이제 트렌드다. 자동차가 IT기기가 되는 세상이 도래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광주의 향후 먹거리도 미래 자동차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동차 100만대 생산라인 유치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지지부진이다. 그래서 얼마 전 윤장현 광주시장이 범시민 서명운동을 하더라. 저도 서명을 했지만, 서명을 한다고 1백만 대 자동차 공장을 유치할 수 있나? 제가 삼성에 있을 때부터 삼성은 전장 사업을 검토하고 있었고, 광주가 그 공장의 적지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 일을 내가 앞장서서 하겠다는 것이다.”

전장산업 유치는 광주 이외의 도시들도 군침을 삼킬 만하다. 광주가 어떤 측면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보나?

“광주에 기아, 현대 등 이미 완성차 공장이 있다는 게 가장 큰 강점이다. 그러나 완성차 공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LG이노텍이나 현대모비스 같은 관련 기업들이 다 같이 합의를 이뤄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광주에 그런 기업에 합의를 이뤄내는 등 혁신을 통해 미래산업을 구상하는 그런 정치인들이 있었던가? 사실은 이게 선택사항이 아니다. 광주 입장에서는 아주 절박한 문제다. 전장산업 유치의 전망이 있어야 1백만 대 자동차 생산 기지 문제도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미래 자동차에 대한 투자도 이뤄지고 GIST(광주과기대) 같은 지역 대학에 인재가 몰려들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전장산업을 중심으로 다 맞물려 있다.”


▎2015년 양향자 전 상무 부부 은혼식 때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딸 수민씨(24), 남편 최용배씨(53), 양 전 상무(49), 아들 준성씨(20). 사진제공·양향자
입당할 때 “나처럼 노력하면서 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깨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삼성에서도 비슷한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나?

“아이를 낳고 돌아온 직후 승진시험에서 떨어졌다. 다음 승진시험도 또 떨어뜨릴 것 같았다. 심사관들 앞에서 질문을 안 받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몇 날 며칠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서 외운 말들을 쏟아냈다. 아이 낳은 게 잘못이냐? 왜 승진에서 밀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왜 나한테 자꾸 언제 회사 그만 두냐, 남편 뭐하느냐고 묻느냐. 아이 때문에 못 받아주는 회사라면 더 이상 다닐 수 없다고 했다. 그 뒤로 나는 많은 여사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유망주가 되었던 것 같다. 틀을 바꾸는 일에 용기를 내었으니까.”

삼성 시절 가장 역점을 두었던 역할이 있었다면?

“사내에 문제가 생기면 합의를 이끄는 일이랄까…. 이쪽저쪽 의견을 모아 뭔가 결집된 의사를 도출하는 일을 잘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삼성전자는 라인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굉장히 많다. 그들이 어려움에 봉착할 때 달려가 강의도 하고 면담도 하고 간담회도 꾸리며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삼성을 대표해서 여성가족부 등 정부의 사업에 의견을 피력한 적도 많다. 조율하고 화합을 이루는 일,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청취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일에 능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30년 비전의 정치 시작할 터… 헌신하겠다”

삼성에서 더 오랫동안 몸담았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

“삼성은 세계적인 기업이다. 그 세계적인 기업 안에서의 역할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미래의 산업적 트렌드를 예측하는 일이 그중 하나다. 관계된 모든 임직원을 먹여 살린다는 점에서 삼성전자 안에서의 일도 하나의 정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일을 30년을 더 하고 싶었다. 상무가 되니 내가 뭔가 정책적인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굉장히 넓어졌다. 일이 훨씬 더 재미있어질 때 회사를 그만뒀다면, 그 궤도 수정의 의미를 정치의 세계에서 제대로 살려야 할 것 같다.”

30년 정치 비전을 세웠다고 했는데, 그 핵심이 뭔가?

“헌신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삼성에서 해온 방식이다. 반도체는 거짓을 모른다. 엔지니어의 분석적 현실 인식, IT경영인의 비전을 결합하겠다. 나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을 바라본다. 그래서 30년 비전의 정치를 시작하겠다.”

보궐선거 기회가 생길 것 같다. 광주 서을 이외의 지역에 출마할 의사가 있나?

“없다. 지역구민들이 등 떼밀며 나가라고 한다면 혹시 모르겠다. 그럴 리는 없을 것 같다. 선거 끝나고 지역민들에게 ‘회초리를 들려고 했는데 종아리 걷고 있는 사람은 양향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미안해, 어디로 가지 말고 기다려 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땐 눈물이 났다. 마음은 주고 싶은데, 한편으론 심판을 하고도 싶고, 그분들의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낙선 인사하러 갈 때마다 30분~1시간씩 설교를 들어야 했다. ‘차라리 비례나 수도권엘 가지 왜 이리로 왔느냐’고도 하셨다. 저에 대한 기대감을 그런 말로 표현하셨다. 정말 감사드린다. 지금은 전통의 야당 더민주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렬하다. 그런 결심이 확고한 제 자신이 자랑스럽다.”

- 글 한기홍 기자 glutton4@joongang.co.kr / 사진 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201606호 (20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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