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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기] 남·녀 주한 미국대사와의 ‘격세지감’ 인터뷰 

미국의 진면목은 어디쯤에 있을까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인터뷰를 끊고 참견하는 대사관 직원 VS 커피를 직접 주문해준 대사... 미국의 과거와 현재, 지나친 자신감과 겸양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 같아

▎한국에서 태어난 아들 세준과 함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 사진·전민규
“아, 저기 전화기 쪽으로는 사진 촬영하면 안 돼요.” 2011년 4월 어느 날 서울 세종로 주한미국대사관 집무실에서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와 인터뷰 중이던 기자는 옆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대사를 향해 연신 셔터를 누르던 사진기자의 카메라가 특정 지점으로 향하자 배석한 미 대사관 직원이 제지하며 한 말이다. 보안과 관련이 있는지 사무실 내 몇몇 집기는 촬영을 삼가해달라는 주문이 더해졌다.

벽안의 스티븐스 대사는 인터뷰 내내 질문에 빈틈이 없고 진지한 답변을 주고자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1975년 스물두 살 때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스티븐스 대사는 한국 이름(심은경)을 지었을 정도로 한국과는 각별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날 인터뷰는 대사의 부드러움과 배석한 대사관 직원의 딱딱함이 기묘한 대비를 이뤘던 걸로 기억에 남아 있다. 인터뷰 시간도 엄격히 통제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래 인터뷰란 게 몰입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해놓은 약속 시간을 넘기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요인의 한 사람인 미국 대사와의 인터뷰 기회는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다. 스티븐슨 대사가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재임 중에 일어난 인상적인 사건을 설명하는 도중 앞서 언급한 그 직원은 다음과 같이 말을 끊고 들어오기도 했다. “조금 빨리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기자는 듣는 순간 귀를 의심해야 했다. 또 인터뷰 말미에는 “한두 개 정도 질문을 더해주시죠”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그 대사관 직원은 기자를 향해 시계를 들어 보이면 인터뷰 마무리를 재촉했다. 미국대사관의 기억은 그래서 경직되고 불편하다는 쪽으로 남았는지도 모른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는 5월 초 미국 소재 한·미경제연구소(KEI) 자문위원장으로 선임됐다. / 사진·중앙포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대사관 건물 현관을 나서려는 순간 예기치 않은 보안검사가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대사관에서는 사진기자에게서 카메라를 건네 받아 인터뷰 과정에서 촬영한 영상을 일일이 확인했다. 무심코 찍힌 영상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경계한 까닭이겠지만 방문객 입장에서는 엄격하다 못해 별나다는 인상마저 갖게 됐다. 집무실을 인터뷰 장소로 개방해놓고서 취재 영상을 검열하는 건 또 무슨 경우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관에 도착해 집무실로 오가는 길에는 미 대사관 직원이 항상 대동했기에 스냅사진이라도 한 장 찍을 형편이 못 된다는 건 대사관 측이 더 잘 알 터였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16년 5월 다시 미국 대사를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다. 이번엔 대사관가 아닌 정동 덕수궁 옆 미 대사관저에서 마크 리퍼트 미국 대사를 만났다. 인터뷰 전날 미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대사가 젊은 기자에게 인터뷰 기회를 주고 싶어한다는 요청이었다. 통상 주한 외국 대사 인터뷰에는 선임기자와 신입 기자가 2인 1조로 들어간다. 선임기자가 인터뷰를 이끌어가고 신입 기자는 문답을 기록하고 추가 질문을 건네는 역할을 한다. 5년 전에도 미국 대사 인터뷰를 진행한 선임기자보다는 이제 막 언론계에 발을 내디딘 기자 초년병에게 경험을 쌓도록 해주고 싶다는 게 리퍼트 대사의 희망사항이었다. 언론사 입장은 또 다르다. 일국의 대사를 인터뷰하는 자리에 경험이 일천한 신입 기자를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리한 질문을 던져 본질을 짚어내는 일도 선임일수록 능숙한 법이다. 재고 요청에도 미 대사관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우방국 언론의 취재 관행에 무심했던 5년 전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당신들이 인터뷰하기 편한 장소에 앉겠다”

기자는 동행하는 후배 기자와 사진기자에게 옛 경험을 떠올리며 몇 가지를 미리 일러주었다. 대사관저 입구에서 신분증을 제출하고 아주 깐깐한 차량 검색을 받을 것이며, 무뚝뚝한 직원들이 쌀쌀맞게 굴더라도 맘 상하지 말고 자기 일에만 충실하라는 주문이었다. 사진기자에게 보안상의 이유로 촬영 과정에서 제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귀띔했다.

서울 중구 정동 일명 ‘하비브 하우스’로 불리는 미 대사관저의 철문이 열리는 순간, 기자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신분증 제시도, 복잡한 차량 검색도 없었다. 관저 경비는 소속을 묻고는 차량 하부를 검색경으로 살펴보고선 곧장 주차 공간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취재진이 대사가 올 때까지 경내에서 머무는 동안 누군가가 거동을 살피거나 감시받는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대사관저 접견실에서 취재진을 맞은 리퍼트 대사는 “하이. 내가 좋아하는 OO대학 졸업해서 더 반가워요”라고 손을 내밀었다. 기자의 신상 정보를 미리 숙지하고 맞춤형 인사를 건넨 것이다. 대사는 유창한 한국어로 “커피 드시겠어요”라며 직접 주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곤 인터뷰 테이블로 돌아왔다. 또 “당신들이 인터뷰하기 편한 장소에 앉겠다”며 취재진이 자리를 정할 때까지 옆에 서서 기다리는 등 전혀 격식을 차리지 않는 털털한 면모를 보였다.

1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대사관과 달리 일반인에게 공개되기도 한 관저여서 그런지 질문도, 사진촬영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대사 역시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열정적으로 개진했다. 특히 한국동맹의 가치, 주한 미국대사로서의 소명감을 얘기할 때는 눈빛이 더욱 반짝이는 듯했다. 인터뷰 시간도 약속된 45분을 지나 추가 시간을 할애하는 등 예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자리에 배석했던 미대사관 대변인은 다음 날 ‘인터뷰 중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해당 자료를 직접 찾아드리겠다’고 먼저 연락을 취해왔다. 미 정부 자료와 언론 자료를 꼼꼼히 챙겨 장문의 메일을 보내왔다.)

더 이색적인 장면은 인터뷰가 끝나고부터 이어졌다. 메인 컷으로 활용할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그는 대뜸 이렇게 받았다. “나 혼자? 세준이 같이 (찍어도) 돼?”라며 한국어로 재차 물었다. 세준(제임스 윌리엄 세준 리퍼트)은 리퍼트 대사가 재임기간 중 한국에서 낳은 아들이다. 대사의 SNS에 자주 등장해 국내 네티즌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사진기자로서는 더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마침 세준이 방에서 뛰어나오더니 리퍼트 대사의 품에 안겼다. 급기야 대사가 애지중지하는 바셋하운드 종의 애견 ‘그릭스비’도 한 자리에 뛰어들었다.

접견실은 순식간에 사랑방으로 변했다. 버둥대는 세준의 칭얼거림, 틈만 나면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릭스비’를 잡으러 뛰는 집사, 쉴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와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사진기자의 외침까지 뒤섞였다. 사진촬영마저 끝나자 대사를 비롯해 대사관 직원들이 하비브 하우스 현관 앞까지 나와 배웅했다.

고도의 보안과 기밀을 요하는 미 대사관, 공공외교(Public diplomacy)의 장으로도 활용되는 하비브 하우스.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곳에서 5년의 시간차를 두고 이뤄진 인터뷰는 묘하게 중첩되고 상반됐다. 분명 배려의 자세는 돋보였지만 그게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입장에서 하는 배려는 아닐런지. 미국의 과거와 현재, 자신감과 겸양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 같았다. 미국의 진면목은 어느 지점에 있는 걸까?

-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201606호 (20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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