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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사우디아라비아의 탈(脫)석유 선언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l.com
GDP에서 비(非)원유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16%에서 50%로 견인… 경제는 개방, 외교는 강경 기조에 입각한 제2 왕위 계승자의 ‘비전 2030’

▎신재생에너지의 확산과 온실가스 규제로 석유 소비가 감소 추세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석유를 알라의 ‘축복’이라고 부른다. 국토의 90%가 사막인 사우디가 오늘날 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검은 황금’인 석유 덕분이었다. 압둘 아지즈 이븐 알 사우드 초대 국왕이 1932년 사우디 왕국을 선포했을 때 내세울 만한 것은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밖에 없었다.

그 시절 사우드 국왕은 미 캘리포니아 스탠더드 오일사와 손잡고 캘리포니아-아라비아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합작회사를 세우고 석유 개발에 나섰다. 이 회사는 1944년 아람코(Aramco; Arabian-American Oil Co)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아람코가 막대한 원유를 채굴함으로써 사우디는 거대한 석유제국이 됐다.

사우디의 원유 매장량은 세계 2위 규모로 2683억 배럴 정도로 추정된다. 전 세계 원유 매장량의 16% 정도를 차지한다. 수출 규모로는 세계 1위이다. 사우디는 원유를 수출해 엄청난 오일머니를 벌어왔다. 사우디 정부는 수십 년간 오일머니를 이용해 국민에게 무상교육, 무상의료, 전기와 수도 무상 공급, 에너지 보조금 지급뿐만 아니라 높은 연봉의 공공 일자리를 제공해왔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사우디의 국내총생산(GDP)은 6489억 달러(777조 2000억원)로 세계 20위, 1인당 GDP는 2만677달러로 세계 38위다. 특히 전체 인구 3000만여 명 중 1만5000여 명에 달하는 왕족은 대부분 억만장자다. 사우디 경제는 2010년부터 2014년까지 배럴당 100달러에 달하는 고유가 때문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순항해왔다.

하지만 미국의 셰일오일 생산이 크게 늘어나고 원유 최대 소비국인 중국이 경기 침체에 빠지면서 국제유가가 2014년 11월부터 급락하기 시작했고 배럴당 30달러대까지 떨어지자 사우디는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핵협상을 타결하며 국제무대로 돌아온 이란의 존재도 사우디를 위협한다. 이란의 원유매장량은 세계 4위, 석유수출국기구(OPEC) 13개 회원국들 중 3위다. 서방의 오랜 경제 제재에서 풀려난 이란은 사우디의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유생산량을 늘리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재정적자 압력에 1991년 이후 첫 해외채권 발행


▎사우디아라비아 국가 개조를 주도하는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부왕세자.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국제유가는 과거처럼 배럴당 100달러대로 올라가지 않고 40~50달러 선에 머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사우디는 저유가에 따른 재정난으로 2014년 말 이후 외환보유액이 1500억 달러나 감소했다. 저유가로 인해 지난해 재정적자는 GDP 대비 15%인 980억 달러에 달했다. 올해 재정적자는 GDP 대비 19%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 때문에 사우디는 100억 달러 규모의 5년 만기 해외채권을 발행할 계획이다. 사우디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채권을 발행한 것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1991년 이래 처음이다.

사우디는 앞으로 저유가 시대가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사우디가 이런 전망을 하게 된 것은 저유가 현상이 단순히 석유 수급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중·장기적으로 볼 때 태양열·수력·풍력·조력·지열 등 신재생에너지 가격이 계속 떨어지면서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게다가 사우디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 때문에 각국이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적극적으로 줄이면서 화석연료인 석유의 소비를 줄이고 있다는 점도 우려하고 있다. 또 석유는 무한정 생산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고갈될 수밖에 없다. 원유 생산이 최고점에 이른다는 이른바 ‘피크 오일’(peak oil) 시기는 각국 에너지 연구기관마다 추정 근거와 방식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2030∼2050년이 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추가적인 매장량 확보 없이 계속 생산만 한다면 현 소비 수준을 감안할 때 길어야 2050년까지 석유를 쓸 수 있다는 예측도 나왔다.

그 때문에 사우디로선 더 이상 석유에만 목을 맬 경우 국가가 생존하기 어렵다고 인식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해왔다. 석유는 모래 밖에 없던 사우디의 사막을 황금의 땅으로 바꿔놓았지만, 앞으로 석유가 생산되지 않는다면 사막은 쓸모없게 된다. 사우디의 입장에서 볼 때 석유 없는 미래에 대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우디가 고심 끝에 내놓은 방안이 ‘비전 2030’ 계획이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81)은 4월 25일 각료회의를 열고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부왕세자(31)가 주도해 추진할 ‘비전 2030’ 계획을 승인했다. 이 계획은 포스트 오일 시대를 대비한 국가 개조 청사진이다. 이 계획은 사우디의 탈(脫)석유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국영방송 <알 아라비야>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15년간 추진될 ‘비전 2030’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사우디는 석유에 중독돼 있어 위험하다”면서 “2020년부터는 사우디도 석유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석유 의존경제에서 벗어나 광공업·관광·금융·물류 등 비(非)석유 부문을 개발해 재정 수입원을 다각화하는 등 석유시대 이후를 대비해 대대적인 경제 개혁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비전 2030’은 활기찬 사회, 경제 번영, 야심 찬 국가 등 3가지를 목표로 할 것”이라며 “GDP에서 비(非)원유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현재 16%에서 50%로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가 기밀로 분류된 아람코 기업공개(IPO)의 메시지


▎유가하락으로 경제 위기설이 고개를 드는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
사우디는 3월 말 기준으로 하루 1019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한다. 사우디는 정부 수입의 75%, GDP의 45%를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이 구조를 뜯어고쳐 석유 없이도 지속되는 경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특히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육성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려고 국영 석유회사인 아람코의 주식 5%를 매각하는 기업공개(IPO)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세계 최대 원유 생산업체인 아람코의 최고위원회(일종의 이사회) 의장이다.

아람코의 기업 가치는 상장할 경우 2조5000억 달러(2900조원)로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된다. 현재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애플(6099억 달러)의 4배 이상이다. 세계 최대 육상 유전으로 알려진 가와르 유전과 세계 최대 해저 유전인 사파니야 유전을 보유하고 있다. 이 회사는 하루 10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있는데, 전 세계 원유 생산량의 12.5%를 차지한다.

지금까지 사우디 정부는 아람코의 경영실적, 자산 규모 등을 국가 기밀로 취급해왔다. 상장이 이뤄지면 매출액과 영업이익 등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도 아람코를 상장시키겠다는 것은 사우디 정부가 기업 공개를 통해 저유가가 장기화될 것에 대비한 실탄을 마련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아람코가 IPO를 통해 지분 5%를 팔 경우 최소 1250억 달러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사우디 정부는 이렇게 마련한 자금과 국유지·공단을 팔아 모은 최대 2조 달러(2300조 원)의 자금을 국부펀드인 퍼블릭 인베스트먼트 펀드(PIF, Public Investment Fund)에 투입할 계획이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이르면 내년, 늦어도 2018년까지 아람코를 상장해 일부 주식을 처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PIF는 사우디 정부가 2008년 주요 제조업과 산업 인프라 분야에 투자하기 위해 설립한 기금으로 현재 자산 규모는 3000억 달러(330조원)에 달한다. PIF는 설립 당시 재무부 소속이었지만 지난해 초 경제개발을 총괄하는 국왕 직속의 경제개발위원회(CED)로 소속을 옮겼다. 세계 최대 석유화학업체 중 하나인 SABIC를 비롯한 사우디 상장기업들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CED는 석유부, 재무부 등 22명의 장관으로 구성됐으며 사우디의 경제개발을 총괄한다. CED의 위원장은 무함마드 부왕세자이다.

대우인터내셔널과는 사우디 국민차 프로젝트 추진


▎이슬람권 최대 행사인 성지 순례 ‘하지’에 참여하고자 전 세계에서 몰려온 이슬람 교도들.
PIF는 앞으로 세계 최대의 펀드가 될 것이 분명하다. PIF는 향후 자산규모로 볼 때 애플과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 마이크로소프트, 버크셔 헤서웨이 등 세계 4대 상장사를 모두 살 수 있을 만한 ‘메가펀드’가 될 것이다. PIF는 앞으로 해외 투자를 현재의 5%에서 2020년까지 50%로 확대할 계획이다. PIF는 지난해 7월 한국의 포스코건설 지분 38%를 1조2000억원에 매입한 적이 있다.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의 국부펀드는 노르웨이 국부펀드(GPFG)로 자산규모는 8300억 달러(985조6000억원)이다. 국부펀드 조사업체 SWF인스티튜트에 따르면 전 세계 국부펀드의 자산 규모는 7조 달러로 전 세계 운용자산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PIF는 아람코가 아닌 외부 전문가들이 운용하게 된다.

PIF는 해외 투자에 적극 나서는 동시에 자국 내 제조업 분야 투자도 늘려나갈 계획이다. PIF는 IT·바이오 등 첨단산업과 안전자산인 달러화 등에 주로 투자할 것으로 알려진다. 또 외국 금융회사 등에 투자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운용하는 사우디의 다른 국부펀드들이 에너지산업을 비롯해 해운, 교통 등 최근 침체를 겪고 있는 자산에 편중된 문제점을 감안한 것이다.

사우디는 PIF를 비롯해 사우디금융청(SAMA) 국부펀드, 사우디 산업개발펀드(SIDF) 등 8개의 국부펀드를 운영한다. PIF는 또 포스코 계열사인 대우인터내셔널과 사우디 국민차 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다. 10억 달러 규모의 이 사업은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서 120㎞ 떨어진 곳에 2018년까지 연산 15만 대 규모의 자동차 조립공장을 건설하는 것이다. PIF는 이를 위해 국영 자동차회사인 SNAM을 설립했다. 대우 인터내셔널은 SNAM의 지분 15%(600억원)를 인수해 3대 주주로 참여할 계획이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자동차 설계, 부품 조달, 조립 등 완성차 생산을 위한 전 공정을 총괄하고, 포스코건설이 공장 건설을 맡을 예정이다. 사우디 국민은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지켜 가족이 아닌 이성과 밀폐된 공간에 같이 있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대중교통보다는 사생활이 보장되는 개인 차량 이용을 선호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한 가구에서 차량을 여러 대 보유하고 있고, 차량 수요 증가율은 매년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사우디 차량 수입 시장은 1000억 리얄(30조원) 이상으로 전체 수입 시장의 20%를 차지한다.

사우디에는 석유 외에도 매장 광물 많다!


▎지난 1월, 이란 시위대의 방화로 테헤란의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다.
PIF는 또 사우디의 도시 개발에도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할 것으로 보여 제2의 건설 붐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인 사례가 860억 달러(97조3000억원)를 투입해 대규모 산업 도시를 짓는 ‘킹 압둘라 이코노믹 시티’(KAEC) 프로젝트다. KAEC는 서부 홍해 연안에 173㎢ 크기 대규모 경제 산업도시로 2020년을 완공 목표로 한다. 사우디 정부는 이 도시 건설을 통해 일자리 100만 개를 창출하고 대규모 산업단지를 운영할 계획이다. 사우디 정부는 ‘비전 2030’ 계획에 따라 이 도시의 건설 청사진을 일부 재조정하고 있다.

아람코는 앞으로 석유회사에서 에너지산업 회사로 탈바꿈해 석유·화학과 건설 분야뿐만 아니라 태양열 등 다양한 신사업으로 투자 영역을 확대할 계획이다. 사우디 정부는 이를 위해 1090억 달러(123조3300억원) 규모의 태양 에너지 발전소 단지를 2032년까지 건립해 전체 전력 수요량의 30%에 해당하는 41GW를 생산할 계획이다. 아람코는 지난 3월부터 다란의 본사 건물 지붕에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했다. 아람코는 태양광을 전기로 전환하는 패널 144개를 통해 최고 35㎾의 전력을 생산, 본사 건물의 전력 사용량이 가장 많은 시간대에 전기 일부를 태양광 발전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아람코는 외국의 기술력 있는 제조업체들과 합작 기업 설립에도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아람코는 지난해 말 현대중공업과 합작조선소 건립을 포함한 엔진·정유·전기전자 등의 사업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아람코는 중국,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네시아 등의 정유 산업에도 계속 투자할 계획이다. 또 최근 미국 최대의 정유공장 소유권을 확보하는 등 미국 시장도 확대하기로 했다. 아람코의 정제 능력은 하루 540만 배럴이다. 아람코의 알 팔리 회장은 IT를 비롯해 헬스케어, 관광, 운송 분야 등에 투자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비전 2030’에는 민영화로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청사진이 담겼다. 0230년까지 GDP에서 민간이 차지하는 비중을 현재의 40%에서 65%까지 높이기로 했다. 또 국영기업 일부를 민영화해 비(非)석유 부문에서 얻는 정부 수입을 현행 1630억 리얄(50조원)에서 2030년까지 1조 리얄(300조원)로 6배 늘릴 계획이다. 실업률을 현행 11.6%에서 2030년까지 7%로 줄이고, 노동인구 내 여성 비율을 22%에서 30%, GDP 대비 중소기업 비율을 20%에서 35%로 높이기로 했다.

특히 석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사우디가 개발할 분야 중에선 광산업이 주목된다. 사우디 정부는 광산 개발 분야에 9만여 개의 일자리를 만들고 매년 70억 리얄(2조1400억원) 상당의 이윤을 창출하겠다고 밝혔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금과 은, 구리, 우라늄, 인산염, 이산화규소와 같은 광물이 묻혀 있지만 3~5%밖에 개발되지 않았다”면서 “우리는 앞으로 거대한 산업시장을 만들 수 있고 국가 재정을 충당할 수입을 가져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우디정부는 국내에서 자체 생산하는 무기 비율도 현재 2%에서 오는 2030년 50%까지 늘릴 계획이다. 사우디의 군비 지출은 전 세계 상위 3~4위 규모다. 2014년에 4위였다가 지난해 3위로 올랐다.

사우디 정부는 또 메카와 메디나를 순례하는 행사인 하지(Hajj)에 더 많은 무슬림이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수입을 창출할 계획이다. 현재 성지순례를 하고자 사우디를 방문하는 무슬림은 80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사우디정부는 2020년까지 1500만 명, 2030년에는 3000만 명의 성지 순례자를 유치할 계획이다. 하지는 무슬림의 5대 의무에 포함되며 모든 무슬림은 일생에 한 번 이상 하지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한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새롭게 단장한 제다 국제공항과 알 타이프 공항이 있어서 이미 기반 시설은 잘 갖춰졌다고 생각한다”면서 “많은 순례자가 머물 수 있도록 숙박 시설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외국인에게 폐쇄적이었던 제도도 대폭 정비한다. 사우디는 장기 체류 외국인 근로자에게 5년 내에 그린카드(Green card, 외국인 영구 거류증)를 발급해주기로 했다. 그동안 이슬람 질서 보존을 내세워 외국인 입·출국과 거주를 엄격히 통제해왔던 것에 비하면 파격적인 조치다. 사우디의 민간 기업들은 주로 건설·부동산·전기·통신 분야에 집중돼 있다. 이들 산업 중 80%의 노동력이 외국인 근로자들로 구성돼 있다. 민간 기업들을 활성화하기 위해 외국인 근로자들의 체류를 완화하는 조치를 내린 것이다.

아랍 패권 다투는 이란과는 유가 인하 경쟁도 불사

사우디 정부의 야심찬 ‘비전 2030’ 계획에는 보조금 삭감이나 추가 과세 등 국민의 고통을 수반하는 개혁 방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칫하면 국민들의 반감을 살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사우디 정부는 지난해 전기와 수도 및 연료에 대한 보조금을 대폭 줄이고 휘발유, 경유, 등유 가격을 인상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상당한 불만을 표출해왔다. 살만 국왕은 지난 4월 국민들의 비판 대상이 됐던 압둘라 알 후사이언 수도·전력부 장관을 해임하기도 했다. 알 후사이언 장관은 “수도 요금이 많으면 각자 우물을 파는 허가를 받으면 된다”고 말해 국민들의 원성을 샀었다.

사우디 정부는 또 여성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운전을 허용하는 등 권리를 확대하는 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보수적인 종교계와 대립하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우디 왕가는 지난 18세기 이래 수니파 근본주의 와하비즘 창시자인 이븐 압둘 와하브가(家)와 공생 관계를 맺어왔다. 사우디 왕가는 국가를 통치해왔고, 와하브가는 교육과 사법 및 종교를 관장해왔다. 사우디에 시대착오적인 이슬람의 율법과 관습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여성들에겐 경제활동이 거의 허용되지 않아 여성 차별적 사회 구조가 유지돼왔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여성들의 운전할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종교계의 반발을 의식해 이번 개혁 조치에선 한 발 물러났다. 대신 사우디 정부는 종교경찰 업무를 전담하는 ‘권선징악청’ 조직법을 개정해 종교경찰의 역할을 축소시켰다. 사우디 종교경찰은 그동안 옷차림, 식생활 등 국민의 일상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개정된 권선징악청 조직법에선 종교경찰 업무를 ‘국민이 권선징악을 행하도록 정중하고 친절하게 유도해야 하며, 경찰·마약단속국의 업무를 보조한다’고 못박았다. 또 ‘인신 체포 및 구금과 추적, 신분증 요구, 심문 등은 경찰과 마약단속국의 업무 영역으로 종교경찰은 오직 위반신고 권한만 있다’고 규정했다.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인 사우디는 또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과의 관계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양국은 지난 1월 사우디가 자국의 시아파 종교지도자를 처형한 것을 계기로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사우디가 반(反)왕정시위의 배후인 시아파 셰이크 님르 바크르 알님르를 사형에 처하자 분노한 이란 시위대가 테헤란 주재 사우디 대사관에 불을 질렀다.

양국은 또 예멘과 시리아 내전 사태로 날카롭게 대립해왔다. 이란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예멘 수도 사나에 이르는 이른바 ‘시아파 벨트’를 구축하려는 의도를 보여 왔다. 이란의 야심은 중동 지역에 ‘시아파 제국’을 만들어 옛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란은 예멘의 시아파인 후티 반군을 지원해왔고 시리아의 뱌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도 후원해왔다.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의 명운 건 승부수

사우디는 이에 맞서 예멘의 정부군과 시리아의 반군을 지원해왔다. 때문에 시리아와 예멘의 내전은 사우디와 이란간의 대리전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사우디는 서방이 핵 협상 타결로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를 해제하자 더욱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사우디는 이란이 앞으로 중동 지역에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키워 자국에 도전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란은 1979년 시아파 성직자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끈 혁명으로 왕정에서 ‘이슬람 공화국’으로 변신했다. 이후 이란은 다른 이슬람 왕정 국가들도 공화국이 돼야 한다면서 은근히 혁명을 부추겨왔다. 사우디는 자국의 시아파가 대규모 시위를 통해 왕정 체제를 흔들 가능성을 우려해왔다. 사우디 전체 인구의 10%는 친(親)이란 성향의 시아파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그동안 이란을 강하게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강경파다. 세계 최연소 국방장관인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지난해 3월 예멘의 후티 반군 공습을 결정하는 등 군사 행동에 앞장서왔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지난 4월 17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주요 산유국 회의에서 “이란이 동참하지 않으면 산유량 동결 합의는 없다”면서 자국 대표단의 철수를 지시하기도 했다. 당시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사우디는 마음만 먹는다면 산유량을 6개월 내에 하루 1250만 배럴까지 늘릴 수 있다”면서 사우디의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기 위해 이란과 가격 인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 thing)’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우디에서 최고 권력 실세이자 왕위 계승 2순위자다. 살만 국왕은 지난해 1월 즉위하자마자 셋째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여섯째)인 무함마드 부왕세자를 국방장관 겸 왕실법원장으로 임명했다. 살만 국왕은 리야드 주지사이던 2009년부터 무함마드 부왕세자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곁에 두면서 일을 배우도록 했다. 살만 국왕은 지난해 4월 자신의 이복동생인 무크린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왕세제를 느닷없이 폐위시키고, 조카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내무장관을 왕세자 자리에 앉혔고, 무함마드를 부왕세자로 책봉했다. 사우디는 초대 국왕이 1953년 사망한 이후 지금까지 형제 승계를 해왔다.

살만 국왕을 끝으로 형제 승계가 끝나고 이제는 초대 국왕의 손자 세대가 차기 국왕이 된다. 특히 사촌형인 무함마드 왕세자는 56세로 아들이 없기 때문에 무함마드 부왕세자가 앞으로 왕세자가 되고 왕위까지 계승할 것으로 보인다. 킹 사우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왕족들과는 달리 부인을 한 명만 둔 신세대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독서광이었던 아버지가 자신에게 일주일에 책 한 권씩을 꼭 읽으라고 권했다면서 손자병법과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아이폰과 애플 컴퓨터의 애용자인 무함마드 왕세자는 젊은 감각으로 하루 16시간 국정에 집중한다고 한다. 사우디는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70%는 30대 미만의 젊은 층이다. 이들을 앞으로 먹여 살리는 것은 더 이상 석유가 아니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자신과 같은 또래인 국민을 위해 석유가 없어도 생존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만들고자 과감하게 개혁 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다. 사우디의 미래를 위한 무함마드 부왕세자의 승부수가 성공할지 주목된다.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l.com

201606호 (20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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