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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화제] ‘국대 골키퍼의 대명사’ 김병지-이운재 20년 우정 

“라이벌이라고? 친구 같은 선후배 사이죠”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金, 24시즌 동안 706경기 뛰고 7월 19일 은퇴 선언… 후배들은 골키퍼 출신 감독 나서주길 기대
李, 15년간 수원 골문 지킨 K리그 전설… 2012년 유니폼 벗고 올림픽·월드컵대표팀 골키퍼 코치 자리 꿰차


▎김병지와 이운재는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골키퍼로 20년 라이벌 관계를 이어왔다. 지난 5월 9일 용인골드CC에서 진행된 2016 축구인 골프대회에서 함께 라운드를 한 이운재(왼쪽)와 김병지가 환하게 웃고 있다.
‘기록의 사나이’, ‘골 넣는 골키퍼’ 김병지(46)가 7월 19일 은퇴를 선언하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함께 뛰던 동료에게서 ‘삼촌’ 소리를 들을 만큼 선수로서 장수한 김병지는 프로축구 K리그에서 24시즌(1992~2015년) 동안 706 경기를 뛰었다. 당분간 깨지기 힘든 기록이 될 듯하다. 프로 축구 최다 무실점 경기(229경기), 최다 연속경기 무교체 출장(153경기) 등 그가 쌓아 올린 금자탑은 우뚝하다.

어디 그뿐인가. 김병지는 ‘꽁지머리’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현란한 헤어스타일과 튀는 플레이로 ‘가장 프로다운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은퇴선언 직후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그는 “미생(未生)으로 시작해 완생(完生)으로 마무리한 것 같다”며 현역 시절을 돌이켰다. 그는 신인시절 프로에 지명을 못 받고 용접공을 하면서 축구를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결국 K리그 최고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됐다. 김병지는 “항상 팬들을 의식하고 앞서가는 플레이를 했다고 자부한다”고 덧붙였다.

김병지의 ‘필생의 라이벌’을 꼽으라면 이운재(43)다.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국가대표 축구팀의 골문을 책임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축구 인생의 꼭짓점에서 서로 맞부딪치기도 했다. 상대를 넘어서기 위한 경쟁이다. 그 덕분에 팬들은 한국 축구의 빛나던 시기에 가장 뛰어난 골키퍼 둘을 추억하는 호사를 누렸다. 두 사람은 비슷한 듯 달랐고, 다른 듯하면서도 닮았다. 김병지가 프로무대에서 은퇴선언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이운재는 리우올림픽 남자축구 대표팀 골키퍼 코치로 브라질행 짐을 싸고 있었다.

공격형 골키퍼 vs 수비형 골키퍼


축구에서 골키퍼를 ‘공격형’, ‘수비형’으로 구분하는 것은 사실 어폐(語弊)가 있다. 그럼에도 김병지를 공격형 골키퍼, 이운재를 수비형 골키퍼로 불러도 크게 이상하지가 않다. 그만큼 두 사람의 플레이 스타일이 달랐기 때문이다.

김병지는 필드 플레이어 못지않게 발이 빠르고, 발재간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K리그 올스타전 청백 릴레이에서 김병지는 늘 마지막 주자로 뛰었을 정도다. 그는 역대 K리그 골키퍼로서 최다골(3골) 보유자이기도 하다. 2골은 페널티킥으로 넣었다. 울산 현대 시절이던 1998년 10월 24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K리그 플레이오프 추가시간에 그가 터뜨린 헤딩골은 축구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포항에서 뛰던 시절인 김병지는 2004년 챔피언결정전에서 수원의 이운재와 맞닥뜨린다. 챔프전 1·2차전을 모두 0-0으로 비긴 두 팀은 승부차기를 벌인다. 4-3으로 수원이 한 골 앞선 상황에서 하필 포항의 다섯 번째 키커가 김병지였다. 그 운명적인 만남에서 김병지의 킥을 이운재가 막아내면서 우승컵은 수원이 들어올렸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팬들에게도 잊지 못할 장면이다.

“왜 골키퍼가 승부차기를 했느냐”는 질문에 김병지는 “당시 최순호 감독님이 연습 때부터 ‘승부차기 5번 키커는 병지’라고 못박았다. 내가 경험도 많고 컨디션도 좋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쉬운 결과에 대해 “워낙 결정적인 장면에서 실축을 하는 바람에 많은 분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며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스토리들이 쌓였기에 팬들은 김병지를 더 좋아하지 않을까.

요즘에는 언론에서 ‘스위퍼 키퍼(스위퍼+골키퍼)’라는 용어가 곧잘 등장한다. 독일 대표팀 마누엘 노이어처럼 골키퍼가 최후방 수비수 역할까지 해내는 것을 말한다. 스위퍼 키퍼가 되려면 볼 컨트롤, 패스 능력, 스피드를 모두 갖춰야 한다. 김병지가 자부심을 가질 만한 대목이다. 그는 “난 20년 전부터 그런 플레이를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며 “그 덕분에 K리그에서 3골을 넣으며 골키퍼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반면, 이운재는 철저하게 안정적인 플레이를 고수한다. 이운재(182㎝)는 김병지(184㎝)보다 키가 작고, 점프도 낮고, 발도 빠르지 않다. 그 대신에 이운재는 듬직하고, 안정감이 있고, 판단이 빠르다. 다소 둔해 보이는 체격이지만 순발력도 뛰어나다. 그가 공중볼을 처리하기 위해 골문을 비우고 뛰쳐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이운재의 목소리는 매우 크고 우렁우렁하다. 그는 이 목소리로 수비수들에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린다. 이운재는 “슈퍼 세이브(실점 위기에서 멋지게 슈팅을 막아내는 것)를 많이 하는 선수가 뛰어난 골키퍼일까? 아니다. 그런 슈퍼세이브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진짜 좋은 골키퍼”라며 “그러려면 팀 수비수들과 호흡을 맞추며 위기 상황을 미리 차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려면 기다려라.” 이운재가 2005년 펴낸 자서전의 제목이다. 그는 끝없는 기다림으로 대한민국 최고 골키퍼가 됐다. 승부차기 때도 미리 움직이지 않고 키커의 움직임을 끝까지 지켜본 뒤 반응한다. 그렇게 2002 월드컵 8강전 스페인과의 승부차기에서 호아킨의 킥을 막아내 대한민국의 4강행을 이끌었던 것도 그런 장점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이운재는 후배들에게도 “골키퍼는 절대 영웅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김병지 “악의적 왜곡으로 둘째 아이 축구 그만둬”


▎1. 2015년 7월 26일 전남- 제주의 경기에서 700경기 출전 대기록을 세운 김병지가 특별 유니폼을 입고 골문을 지키고 있다. / 2. 2002년 6월 22일 광주에서 벌어진 월드컵 한국-스페인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결정적인 킥을 막아낸 이운재가 두 손을 불끈 쥐며 환호하고 있다.
이운재는 경희대 3학년 때인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독일전 후반전에 투입됐다. 전반 0-3으로 뒤진 한국은 후반 두 골을 터뜨리며 독일을 밀어붙였고, 이운재는 실점 없이 골문을 잘 지켰다. 이후 국가대표팀 주전 골키퍼 장갑은 이운재와 김병지가 주거니 받거니 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김병지는 네덜란드에 5골을 먹는 등 3경기에서 9실점 했지만 당시 32개국 골키퍼 중 가장 많은 슈팅을 막아냈다.

두 선수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2001년 1월 27일에 있었다. 홍콩 칼스버그컵 파라과이전에서 김병지는 킥을 하는 척하면서 슬금슬금 공을 몰고 나왔다. 하지만 하프라인 근처까지 와서 킥을 하려는 순간 상대편 선수에게 공을 뺏겼고, 실점을 할 뻔한 경기였다. 당시 대표팀을 이끈 히딩크 감독은 불같이 화를 냈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김병지는 벤치의 감독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결국 김병지는 하프타임에 교체됐고, 이후 A매치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2002 월드컵 폴란드와의 예선 1차전이 열리기 전날, 김병지는 자신이 주전으로 기용될 것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과 지인들을 초청했다. 그러나 다음날 선발 골키퍼는 이운재였다. 김병지는 2002 월드컵 8경기 동안 단 1분도 뛰지 못했다.

김병지는 당시를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분’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지혜롭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경험을 통해 고참 선수가 팀내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헌신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됐다. 내가 롱런할 수 있었던 건 당시의 쓰라린 경험 덕분이었다.”

김병지는 은퇴를 앞둔 지난해,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경험을 한다. 둘째 아들 김산(9)의 ‘학교폭력 사건’이다. 김병지의 세 아들은 모두 축구를 했다. 그중에서도 둘째는 TV 프로그램 ‘날아라 슛돌이’에 출연할 정도로 재능이 빼어났다. 지난해 10월 ‘김군이 내 아이를 할퀴어 2주 상처가 났다’며 피해자의 어머니라고 하는 여성의 글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이 내용이 방송과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일파만파로 퍼졌고, 김산은 ‘학우를 상습적으로 때리는 아이’, 김병지는 ‘유명인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아들의 폭행을 감추고 감싸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다. 김병지는 “두 아이가 다툰 건 맞지만 저쪽에서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했다”며 상대 학부모 이모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지난 4월 이씨는 벌금 200만원의 약식 처분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해 정식 재판을 청구한 상태다.

김병지는 “악의적인 왜곡과 비방으로 가정이 심각하게 파괴됐다. 산이는 그렇게 좋아하던 축구를 그만뒀다. 전에는 산이가 아빠와 같이 다니는 걸 자랑스러워 했는데 요즘은 눈치를 본다. 주변에서 ‘쟤가 걔야?’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고 안타까워했다.

축구를 하면서 욕 많이 먹기로는 이운재도 김병지 못지않다. 대표적인 게 ‘뱃살 논란’이다. 팬들은 이운재의 경기력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저 돼운재(돼지+이운재) 뱃살 좀 봐라. 얼마나 운동을 안 하면 저럴까”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이운재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어머니 체질을 닮아 물만 마셔도 살이 찐다. 체중 관리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노력하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운재, 아시안컵 3위 이끌고도 ‘음주파문’ 징계


▎2007년 8월 19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수원 삼성-FC 서울의 경기. 이운재가 허리를 다친 김병지에게 다가가 상태를 묻고 있다.
실제로 그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비쇼베츠 감독으로부터 “대표팀에 뽑을 테니 살을 빼라”는 명을 받는다. 그리고는 92㎏인 체중을 80㎏까지 줄였다. 그런데 감량 과정에서 영양 섭취를 줄이고 과도하게 운동을 하는 바람에 몸을 크게 상했다. 당시 폐결핵 3기 진단을 받은 그는 하마터면 선수 생활을 접을 뻔했다.

‘2007년 아시안컵 음주파문’도 이운재를 따라다니는 반갑잖은 꼬리표다.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안컵 대회 기간에 이운재·이동국·김상식·우성용 등 고참 선수들이 숙소를 이탈해 술집에서 유흥을 즐긴 것이 대회가 끝나고 나서 밝혀졌다. 한국이 우승을 놓치고 3위에 그친 대회라서 팬들의 비난이 들끓었다. 이들은 기자들과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고, 1년간 국가대표 자격 박탈, 사회봉사명령 등의 중징계를 받았다.

대회 기간에 술을 마신 게 잘한 건 아니지만 이운재로서는 억울할 만도 했다. 당시 대표팀에서 이운재의 활약이 가장 뛰어났고, 이운재 덕분에 그나마 3위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운재는 ‘숙적’ 이란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4-2 승리를 이끌었다. 이라크와의 준결승전도 승부차기까지 갔는데 우리 키커들이 잇따라 실축하는 바람에 3-4로 졌다. 일본과 겨룬 3·4위전에서도 이운재가 승부차기에서 결정적인 선방을 해 6-5로 이겼다.

김병지는 선수시절, 술·담배를 일절 하지 않았다. 체중도 78.5㎏을 유지했다. ‘먹은 만큼 운동해서 뺀다’는 게 김병지의 철칙이었다. 그는 “은퇴도 했고, 사회생활을 하려면 술도 한잔씩은 해야 할 것 같다. 집에 와인셀러를 갖춰놨는데 아직 시도를 못해봤다”고 말했다.

김병지와 이운재는 닮은 점도 꽤 많다. 190㎝를 넘는 장신 골키퍼들이 우글거리는 프로 세계에서 ‘크지 않은’ 골키퍼의 성공 모델을 제시한 점이 일치한다. 그들의 뒤를 따라 권순태(전북·184㎝), 신화용(포항·183㎝), 박준혁(성남·180㎝) 등이 프로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다.

김병지와 이운재가 마지막에 뛴 팀이 전남 드래곤즈라는 것도 우연의 일치치고는 흥미롭다. 울산-포항-서울-경남을 거친 김병지는 2013년부터 전남에서 세 시즌을 더 뛰었다. 그는 “포항에서 함께 선수 생활을 한 하석주 감독께서 편하게 운동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게임을 리드하는 공격적인 골키퍼’에 대한 철학이 일치해 즐겁게 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운재 전남에서 은퇴 후 김병지가 입단하기도


▎2004년 푸마 자선 축구경기에서 사랑팀 골키퍼 김병지가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 골을 성공시킨 뒤 희망팀 골키퍼 이운재와 악수하고 있다.
1996년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로 입단한 이운재는 2010년까지 15년간 수원의 골문을 지켰다. 그가 있는 동안 수원은 무려 22개의 국내외 대회 우승 트로피를 수집했다. 그러나 이운재도 세월의 파고를 이기지 못했다. 정성룡(31·190㎝)에게 밀려 수원을 떠난 뒤 2011~2012년 시즌은 전남에서 뛰었다. 이운재가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전남을 떠난 자리에 김병지가 찾아든 셈이다.

두 사람은 지도자로서도 경쟁하고 비교가 될 듯하다. 이운재는 청소년대표팀-올림픽팀을 거쳐 국가대표팀에서 골키퍼 코치를 맡는다. 리우올림픽이 끝나면 A대표팀에서 슈틸리케 감독을 보좌하게 된다. 당장 9월 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한·중전이 기다리고 있다.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1차전이다.

김병지의 은퇴 후 계획은 다채롭다. 가장 중점을 두는 건 후배 양성이다. 그는 지난 시즌을 마친 뒤 중·고교, 대학, 실업팀 등을 돌며 ‘단기 족집게 과외’를 했다. 가는 곳마다 짧은 시간 안에 골키퍼들을 확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듣는다. 대표적인 선수가 서울 보인고의 심민(18)이다. 심민은 전반기 고등리그 왕중왕전에서 세 차례 승부차기를 모두 승리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심민은 “승부차기에서 선방한 건 김병지 삼촌 덕분”이라고 했다.

후배 골키퍼들은 김병지가 ‘골키퍼 출신 감독’으로 길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1970년대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고(故) 함흥철 감독 이후 국내에는 골키퍼 출신 감독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김병지는 축구지도자 외에도 방송 활동, 재활센터, 에이전트 사업에도 관심이 많다. 이런 일들을 망라하는 회사 설립도 생각하고 있다.

김병지와 이운재는 지난 5월에 열린 축구인 골프대회에서 만났다. 이들은 같은 조에서 라운딩을 했다. 두 사람은 “우리를 자꾸 라이벌이라고 하시는데 사이가 참 좋다”며 웃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색깔이 전혀 다른 두 라이벌이 정상을 차지하기 위해 맹렬하게 싸웠던 시절을 추억할 것이다.

-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201609호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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