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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인물] ‘먹방 원조’ 한영실 숙명여대 전 총장의 국민건강론 

“소외된 이들이 함께 즐길 먹방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글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 사진 김춘식 기자 kim.choonsik@joongang.co.kr
“음식이 병을 고치고 예방하는 시대 올 것”이라는 어머니의 충고로 식품영양학 공부
“평균수명 82세 넘었지만 유병기간 제외하면 65세… 국민건강 캠페인 꾸준히 펼쳐갈 것”


▎‘먹방’이 시청자들의 인기를 끌기 훨씬 이전인 2000년대 초에 한영실 전 총장은 요즘의 스타 셰프들을 능가할 만큼 ‘먹방 스타’로 인기를 누렸다.
바야흐로 ‘먹방’(먹는 방송) 시대다. TV 채널을 몇 번만 돌려보면 윤기가 좔좔 흐르는 먹음직한 음식들이 어김없이 화면을 장식한다. 방송사마다 잇따라 내놓는 먹방 대표작과 함께 현란한 요리 솜씨를 자랑하는 셰프들이 대중의 인기를 끄는 시대다. 스타 셰프의 인기는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10여 년 전에도 이들의 인기를 능가할 만한 ‘먹방스타’가 있었다. 한영실(59) 전 숙명여대 총장(식품영양학과 교수)이 그 주인공이다. KBS 2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프로그램 <비타민>의 최장수 코너인 ‘위대한 밥상’에 출연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한영실 전 총장은 요즘도 ‘위대한 밥상’에 출연할 때만큼이나, 에너지가 충만하다. 종방이 된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지만 지난 세월이 무색할 만큼 외모와 입담은 여전하다. 당시 ‘위대한 밥상’에 3년여 동안(2004년 2월~2007년 5월 총 154회) 출연하면서 ‘비타민 교수’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그다. 한때 분당 시청률이 최고 35%를 기록할 만큼 인기를 끌었는데, 그날 방송된 식품 아이템이 다음날 매장에서 동이 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단다. 함께 출연한 연예인들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룹 신화와 GOD, 가수 심수봉·이승철·김건모, 탤런트 황신혜·장근석 등이다.

건강한 음식도 맛있을 수 있다!


▎2005년 9월 KBS2의 예능프로 <비타민>의 ‘위대한 밥상’에 출연한 한 전 총장. 그는 당시 큰 인기를 누리면서 ‘비타민 교수’로 불렸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먹방 원조’가 보는 요즘의 ‘먹방’은 어떨까? “사실 좀 답답해요”라는 대답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요리는 쇼나 기술이 아니잖아요. 음식을 장만하는 과정은 늘 경건해야 해요.” 한 전 총장이 그리는 먹방은 ‘착한 먹방’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방송에선 유명한 셰프들이 요리를 해주지만 사실 셰프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잖아요.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과 어르신들을 찾아가서 우리네 논밭에서 구한 재료로 그분들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는 그런 프로그램은 없나요.”

그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는 남다르다. 한 전 총장은 제자들에게도 음식에 대한 마음의 자세를 가르친다. 한번은 연구실 제자들과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가 이런 일이 있었다. 각자 1인분을 시켰는데 접시를 비운 사람이 아무도 없더란다. 그걸 보고 한 전 총장이 제자들에게 한마디했다. “이 쌀 한 톨, 야채나 과일 하나를 만들어내려고 농부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지 생각해봤니? 앞으로 음식을 남길 것 같으면 사람 수보다 덜 주문하자.” 그는 “약간 부족한 듯 먹는 게 건강에도 더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 전 총장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각별한 듯하다. 그가 간직한 음식과 관련한 철학은 대부분이 어머니의 토양에서 자라난 것인지도 모른다. 고교시절 문예지 담당이었던 문학소녀인 딸에게 식품영양학과를 진학하도록 권유한 사람이 어머니였다.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내 시대에는 의사가 병을 고치는 시대지만 네가 엄마 나이가 될 때는 음식이 병을 고치고 병을 예방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어머니는 유전적으로 키가 작은 한씨 집안에 시집와서 오로지 ‘잘 먹이는 일’로 다섯 남매를 평균 신장보다 훨씬 크고 튼튼하게 키워냈다.

대학 입학 후로도 전공 공부에 관심이 없어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던 딸에게 어머니는 뜻밖의 제안으로 마음을 돌려놓았단다. “네가 못해서 포기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달라. 전 과목 A학점을 받으면 재수를 시켜주겠다.” 한 전 총장은 “이 말을 듣고 나서 재수를 꿈꾸며 죽어라 공부했더니 그렇게 싫던 식품영양학에 재미가 붙더라”고 말했다. 결국 재수를 포기하고 식품영양학을 평생 직업으로 삼게 된 이유다. “어릴 땐 가수도 하고 싶고, 연극배우도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열 번 다시 태어난대도 모두 식품영양을 가르치는 선생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음식에 대한 그의 철학을 말하자면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다. 한 전 총장은 “건강한 음식도 충분히 맛있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행동과 마찬가지로 먹는 일은 ‘습관’이에요. 덜 달고, 덜 짜고, 덜 자극적인 음식에 길들여지면 설탕이나 소금 등을 적게 넣어도 충분히 맛있게 느껴집니다.” 유별나게 느껴질 정도인 건강한 음식에 대한 관심과 애착은 한 전 총장의 집안 내력이기도 하다. “한의사였던 외할아버지는 늘 검은콩이나 거친 잡곡밥을 드셨어요. 김도 전혀 양념하지 않고 구워서만 드셨죠.” 그의 조부모는 평균수명이 60세도 안 되던 시절에 백수(白壽)를 다 누렸다. 현재 80대 중반을 넘어선 부모님도 남들이 신체 나이를 60대로 볼 만큼 건강하다고 한다.

한 전 총장이 평소 경계해야 할 식품으로 꼽는 건 ‘3白’(흰설탕, 흰소금, 흰밀가루) 식품이다.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인의 하루 평균 당류 섭취량은 60.4g. 이는 하루 평균 에너지 섭취량의 12.8%에 달하는 양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권고하는 총열량 중 당 섭취 비율 5%보다 갑절 이상이 높다. 한 전 총장은 “정제된 설탕은 영양소 없이 열량만 내는 ‘엠티 칼로리 푸드(empty calorie foods)’”라며 “건강한 지방, 단백질, 비타민 등이 풍부한 식품은 포만감을 들게 하고 소화 대사를 높여 체중 감량에 도움이 되는 반면, 엠티 칼로리 푸드는 뱃살을 늘게 하는 주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파이토 케미컬’ 전도사 자임… ‘총각무라면’ 개발


▎2009년 4월, 주한 미국 대사관저에서 열린 비보이 초청 공연에 참석한 한 전 총장이 스티븐슨 대사의 손에 이끌려 무대에 올라 함께 춤을 춘 뒤 사진을 찍고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 바쁜 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식사 때마다 열량을 따져가며 ‘건강식단’을 챙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간단한 외식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고 갈수록 스트레스는 늘어난다. 한 전 총장은 요즘 먹방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 지점에서 찾았다. “우선 사회 패러다임이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하는 쪽으로 달라졌고 식품 소비에서도 ‘감성소비’가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아요. 먹는 일에도 재미를 추구하면서 셰프들과 다양한 볼거리와 스토리를 가진 먹방이 그런 욕구를 채워주는 거죠. 특히 과거에 비해 삶은 풍족해졌지만 많은 사람이 소외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잖아요. 음식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행복한 방법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고 음식을 통해 잠시나마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욕구를 해소하는 거죠.”

한 전 총장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철 따라 유행하는 각종 다이어트 방법에 대해서도 일침을 놨다. 탄수화물을 줄이고 육류나 달걀 등 단백질과 지방은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는 ‘황제 다이어트’, 위 속 노폐물과 독소를 배출해 체중감량과 노폐물 배설에 효과가 있다는 ‘레몬 디톡스 다이어트’, 밀가루를 이용하지 않는 ‘글루텐 프리 다이어트’ 등 수많은 다이어트법이 인기를 끌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는 “다이어트엔 왕도가 없다”며 “칼로리 체크를 통한 식사량 조절과 운동을 병행하는 교과서적인 방법이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특정 식품을 제한하거나 더 먹는 다이어트법들은 일정부분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 효과만큼이나 많은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한 전 총장은 야채와 과일에 포함돼 있는 파이토 케미컬(phy to chemical)과 가까워지라고 주문한다. “파리 한 마리도 파리채를 여기저기로 피하는데 식물들은 피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파이토 케미컬이라는 물질로 다양한 색깔을 발현해 스스로를 보호합니다. 당근의 노란색, 토마토의 빨간색, 시금치의 초록색, 블루베리의 보라색 같은 색이 여기에 해당하죠. 이 파이토 케미컬이 항산화 항암 기능을 가진 제7의 영양소로 주목받습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등 많은 국가에서 ‘하루에 다섯 가지 컬러식품 먹기’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이유입니다.”


▎2010년 여대 최초로 숙명여대에 ROTC를 유치한 한 전 총장이 학군단 1기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이런 고민의 산물이 바로 한 전 총장이 지난 8월 한 대형 할인점 이마트와 산학협동 프로젝트로 개발해 시장에 내놓은 HMR(가정간편식) 식품 ‘총각무라면’이다. ‘사먹지만 집에서 엄마가 만드는 것과 같이 안전하고 영양가 높은 제품’이 콘셉트로, 면을 기름에 튀기지 않고 바람에 말려 일반 라면에 비해 칼로리와 지방을 각각 100kcal와 10g 이상 낮춘 신개념의 라면이다. 또 액상으로 만든 스프에는 총각무를 60% 이상 넣어 나트륨 함량을 크게 낮췄다. 한 전 총장은 이 제품을 출시하면서 대형할인점 측에 “돈 벌 생각하지 말라. 바쁜 사람들이 건강하고 좋은 음식을 간편하게 먹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만 생각해달라”고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한다.

한 전 총장은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간다. 시골 어르신부터 일반 주부, 대기업 CEO까지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강연을 다닌다. 상공회의소나 기업협회 등에서 개최하는 CEO포럼이나 기업에서 진행하는 직원연수 프로그램, 서울대 등 주요 대학의 전문가 과정에도 달려간다. 이마트의 전국 20여 개 문화센터와 공동으로 ‘엄마와 어린이를 위한 식생활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해오고 있다. 그의 입에서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라는 토로가 나올 만하다.

“정치인요? 아니, 국민건강 전도사가 꿈”


▎2014년 저서 <엄마의 부엌, 나의 부엌>의 출간을 위해 한 전 총장이 자택에서 요리 촬영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사회적인 지명도가 높아지자 한때 정치권에서도 그에게 러브콜을 했다. 한 전 총장은 2012년 총선에선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을 지냈고 같은 해 지방선거에선 공동선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엔 대통령 직속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여성분과위원장으로 임명돼 활동했다. 29세에 대학교수에 임용된 후 쌓아온 화려한 스펙과 만만치 않은 인맥 덕분이다. 전 주한 미국대사였던 캐슬린 스티븐스와 골프선수 최경주, 발레리나 강수진 등 유명인과 촬영한 기념사진이 그의 연구실 책장에 놓여 있다.

그만큼 현실정치에도 관심이 많은 것일까? 한 전 총장은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는 정치 참여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치권에서 이름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정치권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요. 나를 가까이서 보고 나를 가장 잘 아는 두 남자, 아버지와 남편이 저에게 해준 충고가 있거든요. ‘화투 치지 말고, 정치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속을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라 손에 가진 패와, 마음속의 생각이 얼굴에 다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대학교수로서 시련도 있었다. 2012년 3월 총장 재임 시절 학교기부금 처리 문제로 숙명학원 재단 이사회와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총장 해임안이 의결된 것이다. 결국 법정에서 해임 무효 결정이 났지만 한 전 총장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그때를 돌이켰다. 그 와중에 무기력증에 불면증까지 겹쳐 몸무게가 5㎏이나 줄었다. 식품영양학 교수로서 수 없이 들었던 “이럴 때 뭘 먹어야 하나요?”란 질문을 스스로 묻고 답하며 음식들을 챙겨먹었다고 한다. “기운을 차리고 보니 한때는 그렇게 내 속을 끓이던 일들이 우습게 여겨지더라고요.” 가톨릭 신자인 한 전 총장은 “죽어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던 사람들이 용서가 됐다. 나를 괴롭힌 분들에게도 ‘용서’를 넘어 ‘감사’로 보답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전 총장에게 남은 꿈은 여전히 ‘국민건강 전도사’다. 그는 “정치인이 되기보다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내가 속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내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며 “식품영양 교육을 통해 국민건강 개선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말끝에 힘이 실렸다. “지난해 우리 정부의 총예산이 376조원인데 국민이 지출한 의료비는 무려 108조원이나 되었어요. 교육예산(53조), 국방비(37조6000억원), 연구개발비(18조8000억원)에 비해서 엄청난 규모죠. 국민 평균수명은 82세가 넘었지만 유병기간을 제외한 기대수명은 65세에 불과한 게 현실이에요. 우리 국민은 죽기 전까지 20년 가까이를 아픈 몸으로 산다는 거죠. ‘세살 버릇 여든까지’인 것처럼 ‘세 살 건강 여든까지’예요. 어린이를 위한 안전하고 좋은 식품을 개발하고 영양교육을 통해 스스로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국민건강 캠페인을 계속 전개해 갈 겁니다.”

- 글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 사진 김춘식 기자 kim.choonsik@joongang.co.kr

201611호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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