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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종교 이야기 (7)]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체험’이란? 

인간 무의식이 작용하는 심리적 현상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종교는 재미 유무를 떠나 세속에 없는 체험이 있는 무대라야 한다… 보람·뿌듯함·성취감 같은 것들 경험해야 지속적인 신앙생활 가능해

▎종교적 체험이 신앙 그 자체는 아니지만 종교 생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월악산국립공원 힐링투어 참가자들이 만수계곡에서 가부좌(跏趺坐) 자세로 명상에 잠겨 있다. / 사진·중앙포토
‘종교적 체험(religious experience)’이 곧 신앙 그 자체는 아니다. 일부분일 뿐이다. 종교 체험은 또 어떤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이 기적이나 황홀경, 무아지경 같은 것을 체험한다고 해서 그 체험이 예컨대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성제(四聖諦)·팔정도(八正道)가 맞다거나 신(神)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종교적 체험은 적어도 종교 생활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뭔가 좋은 것, 재미·보람·뿌듯함·성취감 같은 것을 체험해야 교회·성당·절에 계속 다닐 수 있다. 체험이 없으면 믿음을 얻기도 힘들다. 공부에 흥미가 없으면서 책보 싸 들고 학교에 억지로 왔다 갔다 하는 것과 비슷하게 된다. 체험 없이 억지로 ‘연명’하는 신앙이 오래갈 수 있을까? 체험 없는 신앙은 지속가능(sustainable)하지 않다.

21세기 신앙의 위기는 종교 체험의 위기다. 특히 청소년·젊은이들을 ‘유혹’하기 위해 종교 단체들은 재미있는 예식이나 행사·엔터테인먼트를 고안해내지만, 요즘 청소년·젊은이들은 종교 밖의 세속에서도 종교가 선사하는 재미를 능가하는 재미를 얼마든지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종교는 재미가 있건 없건 세속에는 없는 체험이 있는 무대라야 한다.

안 보이는 현실도 과학의 대상


▎윌리엄 제임스. / 사진·중앙포토
‘종교적 체험’이라는 말이 학계에서 전문용어로 자리 잡은 것은 미국의 심리학자·철학자 윌리엄 제임스(1842~1910)가 쓴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1902)이 출간된 이후다. 이 책은 제임스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대학에서 1901~1902년에 행한 20회에 걸친 기퍼드 강좌(Gifford Lectures)를 묶고 후기를 덧붙인 것이다. 종교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특히 심리학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설한 강연이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안 보이는 현실’이 있다. 종교가 운위(云謂)하는 ‘안 보이는 현실’도 과학의 대상이라는 것을 제임스가 역설한 것이다.

제임스에게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 그에게 종교적인 행복은 그냥 행복이다. 행복 앞에 ‘종교적(religious)’라는 형용사를 앞에 붙이기는 하더라도 말이다. 종교적인 기쁨은 기쁨이다. 종교 체험은 체험이다. 그는 종교 체험에서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지 않는다. 종교 체험은 그에게 ‘신(神)이 주는 선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무의식이 작용하는 심리적인 현상이다.


▎프로야구 LG의 박용택이 경기 시작 전 기도하듯 눈을 감은 채 더그아웃 앞 난간에 걸터앉아 있다. / 사진·중앙포토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발간되자마자 심리학·철학·종교학 분야에서 베스트셀러·스테디셀러를 넘어 고전이 됐다. 이 책을 읽고 ‘내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이런 증언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1917년에 창설된 모던라이브러리(Modern Library) 출판사는 1998년 이 책을 20세기에 영어로 출간된 논픽션 톱100권 중에서 2위로 선정했다. 1위는 <헨리 애덤스의 교육>(1905)이었다.

이 책의 시대적인 배경에는 ‘종교는 미신이기 때문에 조만간 사라지게 돼 있다’는 전망이 깔려 있다.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는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다윈주의자들은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 신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교 성경을 하나의 텍스트로 정밀 분석한 신학자·학자들은 성경에 전적인 신뢰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성경은 그저 역사책이거나 이야기책, 문학이었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이런 기류에 반격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종교를 옹호하는 책이다. 많은 현대인은 100퍼센트 증거나 확신이 없으면 종교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종교적인 동물’이라고 보는 제임스는 믿는 게 안 믿는 것보다 낫다고 본다.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 체험의 가장 좋은 열매는 역사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또 폭력과 같은 종교의 부정적인 측면에는 포커스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신앙인 중에는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 책에는 ‘특정 종교의 특정 기류(氣流)’를 거스르는 내용도 많이 담겼기 때문이다. 어떤 내용이길래 그럴까.

전후(前後)가 다른, 인생을 바꾸는 체험


▎최대한 편한 자세로 누워서 즐기는 음악명상은 법주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가운데 인기가 많다. / 사진·중앙포토
제임스에 따르면 종교 체험은 ‘객관적’이다. 사실(事實, fact)이다. 종교 체험에 주관성도 있겠지만 과학적 연구가 가능할 정도로 객관적이다. ‘나쁜 종교 체험’도 있을 수 있겠지만 종교 체험은 사람들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드는 긍정적인 체험이다.

제임스가 다루는 종교 체험들은 좀 극단적인 경우다. 전과 후(before and after)가 확연히 다른, 인생을 바꾸는 체험이다.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는 자멸적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체험이다. ‘종교적인 모임에서 찬불가·찬송가·성가를 불렀더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와 같은 체험은 이 책의 주된 대상이 아니다.


▎인도 캘커타의 갠지스강에서 열린 차트(Chhat)축제에서 힌두교도들이 바나나를 들고 태양 숭배의식을 행하고 있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 집중 탐구하는 것은 집단적이거나 제도적인 차원의 종교 체험이 아니라 개인적인 종교 체험이다. 따라서 이 책은 교회나 승가(僧伽,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불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집단) 같은 종교 모임을 다루지 않는다. 성직 제도나 신학, 교리, 의식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교회·성당·절 등 종교적 장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도 종교 체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다’라고 자부할 수 있도록 그 근거를 제시하는 책이다.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어떤 때는 숨이 콱콱 막히는 논쟁도 제임스에게 무의미하다. 제임스에게 종교란 “삶에 대한 인간의 총체적인 반응”이다. 신을 믿지 않는 종교도 종교다. 업보(業報)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질서의 존재를 믿는 것도 종교다. 제임스의 분류에서는 무신론마저도 종교가 될 수 있다. 그에게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이 아니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보다 풍성한 삶이다.

그는 개인 체험 중에서도 회심(回心, conversion)을 중시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회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① 마음을 돌이켜 먹음. ② <기독교> 과거의 생활을 뉘우쳐 고치고 신앙에 눈을 뜸. ③ <불교> 나쁜 데 빠져 있다가 착하고 바른길로 돌아온 마음. ≒돌이마음.”

회심의 결과로 사람은 성자(聖者)가 된다. 제임스는 개인 중에서도 보통사람보다는 성자, 즉 일종의 ‘종교 천재’를 다룬 것이다. 우리 사전을 찾아보면, 성자란 “모든 번뇌를 끊고 바른 이치를 깨달은 사람”(불교)이요 “거룩한 신도나 순교자를 이르는 말”(그리스도교)이다. 제임스의 성자들은 회심 이후에 성격이나 습관마저도 바뀐다. 완전한 해방감과 자유를 맛보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된다.

제임스는 종교를 초월해, 그리고 모든 종교 속에 “보편적인 성자다움(universal saintliness)”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가 생각하는 성자다움에는 금욕, 영적인 강인함, 순수성, 이타심, 자선 같은 게 포함된다.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성자들은 그들이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자이건 그리스도교인이건 불교인이건 사실상 구분이 안 된다.” 이처럼 제임스는 모든 종교의 공통분모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회심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일까, 아니면 ‘조금씩’ 찾아오는 것일까. 제임스에 따르면 각 개인의 심리적인 특성에 따라 다르다. 불교에 적용한다면 돈오(頓悟, 갑자기 깨달음)나 점오(漸悟, 점점 깊이 깨달음)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제임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자들의 ‘기행(奇行)’은 일반인·비신앙인에게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예컨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년 또는 1182년~1226년)는 애욕을 끊어내기 위해 장미밭에서 몸을 굴렀다고 한다. 비신앙인은 ‘그냥 결혼하면 될 것을 왜 그랬을까’라고 반응할 수도 있겠다.

제임스는 성자들을 우리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소개한다. 그가 그리는 성자는 회심하기 전에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제임스는 그들이 정신적 고통으로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그들은 자신의 ‘아픈 영혼(sick soul) 때문에 고뇌한다. 그들은 ‘두 번째 탄생(second birth)’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영혼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제임스는 종교에 그런 힐링의 힘이 있다고 본다.

“신들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존재”


▎미국의 한 교회에서 성도들이 성령 체험을 하고 있다.
제임스는 종교가 신경증(神經症)과 관련이 깊다고 주장한다. 예전에는 노이로제라고 부르던 신경증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심리적 원인에 의하여 정신 증상이나 신체 증상이 나타나는 병. 주로 두통·가슴 두근거림·불면 따위의 증상이 나타나며, 불안 신경증·히스테리·강박신경증·공포증·망상 반응 따위가 있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러한 증세가 있는 종교인이 있다고 해서 그 종교인이 속한 종교를 비판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결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남’이 필요한 사람들과는 달리 한 번 태어나는 것으로 충분한 사람들도 있다는 게 제임스의 관점이다. ‘한 번 탄생(once-born)’으로 족한 사람들은 낙천적이다. 정신적으로도 건강하다. 병적인 수준의 정신적인 고통도 없다. 결국 세상은 여러 면에서 공평한 것일까? 제임스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에는 두 번 태어나야 하는 사람들의 신앙심이 궁극적으로 더 깊고 더 진실하다.

제임스는 실용주의 철학자로 유명하다. 효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는 <실용주의>(1907)에서 어떤 이가 어떤 관념을 믿고 그 관념으로부터 효용을 얻는다면 그 관념은 제한적으로나마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의 실용주의는 종교 영역으로 확장된다. ‘종교적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다.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샤머니즘이건 이슬람이건 일본계 종교건 긍정적인 체험이 있는 종교는 다 좋다는 것이다.

‘신들(gods)’에 대해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따르는 신들은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신들이다. 신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들과 우리가 우리 서로에게 요구하는 바를 강화(reinforcement)한 것들이다.” 인간은 신들을 영원히 알 수도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최소한 신들을 ‘활용’할 수 있다고 제임스는 주장한다.

신비 체험도 이 책의 주요 대상이다. 제임스가 정리한 신비 체험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두 특성은 모순적이다. 첫째, 형언할 수 없다. 직접 체험할 수 있을 뿐이지 체험을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 둘째, 신비 체험은 동시에 지적인 상태다. 신비 체험은 지식의 세계와 무관한 게 아니다.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물론 책에 불교 사례도 포함되지만 주로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 중심적이라는 점이다.(다수 가톨릭 성인, 특히 16세기 스페인 신비주의자 사례도 등장한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체험은 ‘진짜’,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 전통의 체험은 ‘가짜’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일종의 ‘문화적 상대주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상대주의’나 ‘진리의 상대성’을 싫어하는 신앙인은 제임스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이나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잘못 이해한 진리는 최악의 거짓말 돼”


그렇다면 ‘사이비’ 종교도 체험만 있으면 되는 걸까? 제임스는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체험은 ‘부적합한(unfit)’, 건전하지 못한 종교를 소멸시킨다.

윌리엄 제임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근대 심리학을 창시한 철학자다.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말도 그가 만들었다. 제임스로 말미암아 유럽 철학계가 미국 철학계를 비로소 존중하기 시작했다. 하버드대에서 1872년부터 1907년까지 교수 생활을 하며 생리학·철학·심리학을 가르쳤다. 68세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엄격한 장로회 신자였던 제임스의 할아버지는 아일랜드에서 1789년 미국으로 이민 와 비즈니스로 거부가 됐다. 그래서 제임스의 아버지 헨리 제임스는 평생 일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 심취했는데 그에겐 ‘미국에서 말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독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생 헨리 제임스 2세는 유명 소설가이자 비평가였다.

제임스는 어려서부터 병약했다. 두통, 자살 충동, 공포증, 환각을 체험했다. 결정 장애(햄릿증후군)도 있었다. 제임스는 불평불만을 시시콜콜 어머니에게 털어놨기에 어머니는 아주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그가 앨리스 기번스라는 여성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고 1878년 결혼했다. 결혼 이후 신경쇠약증세가 사라졌다.(하지만 제임스는 상당한 바람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부는 4남1녀를 낳았다. 제임스는 역사적 철학자 중에서는 좀 예외적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민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가끔씩 ‘장기 가출’을 했다. 가출 기간에 아내와 주고받은 서신에는 끈끈한 가족애가 느껴진다.

제임스는 한때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은 아닌가’, ‘인생에는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고통받았다. ‘의미의 위기(crisis of meaning)’를 겪은 것이다. 제임스는 대체적으로 불가지론자(agnostic)로 분류된다. ‘뉴에이지’나 ‘포스트모던 운동’의 선구자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해준 책들 중에는 그리스도교 성경도 포함됐다.

제임스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 중에는 다음 구절이 포함된다. “어떤 진리를 들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잘못 이해하면 그 진리는 최악의 거짓말이 된다.” 생각거리를 던지는 말이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외교부 명예 정책자문위원. 단국대 인재 아카데미(초빙교수), 한경대 영어과(겸임교수), 서강대 국제대학원(연구교수)에서 강의했음.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스탠퍼드대 중남미 학 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201611호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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